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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떠올리기는 싫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이라면 잊어서는 안 된다. 그녀의 기억에 따르면 아인즈를 제외한 남자들은 식을 올리기 직전에 그가 던진 미끼를 물어 찾아왔다고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인즈의 말을 듣고도 망설이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지. 익숙해진 다음에는 성녀가 아닌 창녀 취급을 했지만.

“의원을 부를까요? 몸이 아픈데 무리해서 행사에 참여하시는 건 안 좋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지 않은 상황이라 이런 건가?’

기억하고 있던 남자보다 조금 체구가 작지만 평균보다는 훨씬 더 큰 덩치. 페이트는 8명의 남자 중에서 가장 덩치가 좋았고 무서울 만큼이나 근육으로 이루어진 남자였다. 아마 이대로 3년 정도가 지나면 틀림없이 꿈에서 본 모습이 되리라. 하지만 진심으로 아르모니아를 걱정하는 듯한 얼굴은 아직 소년다운 기색이 남아 있다. 기억 속의 그는 질리지도 않는지 거의 매일 같이 제파스 가문의 별채로 찾아와 그녀를 안았고 아인즈가 보는 앞에서 사랑한다는 고백을 수도 없이 지껄였는데.

‘집착도 심했고, 나중에는 다른 남자 몇 명이랑 싸우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써먹을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아르모니아는 페이트의 소매를 잡고 최대한 아련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직도 모르시겠나요?”

혹시라도 입가가 일그러질까 봐 일부러 반대쪽 손으로는 입을 가렸다.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이면 좋겠는데.

“왜 제가 당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일부러 여기까지 바래다 달라고 부탁한 건지.”

이 남자는 처음 그녀를 안을 때 열렬한 고백을 지껄이며 자기가 품고 있던 마음을 폭로했다.

“당신은 모르시겠죠? 제 이름조차 모를 테니 알 리가 없겠죠. 처음 보았을 때부터 당신을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내게 축복의 말을 건넨 그 순간부터 내 마음에는 당신만 가득해서, 죄인 것을 알면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망상 속에서 당신을 안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돼.”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이 남자는 틀림없이 반응을 보인다. 만약 그런 마음이 없었다 하더라도 도망칠 리가 없지. 성녀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디 있으려고. 그리고 아르모니아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소매를 붙잡힌 남자는 그야말로 홍당무처럼 귀 끝까지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변해 혼란에 빠졌으니까.

“서, 성녀님! 그, 저기,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저는 그게, 주위에서 단순하고 감정적이란 말을 많이 듣는 놈이라. 그러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제가 멋대로 이상한 상상을 해 버릴 겁니다.”

“그럼 똑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인즈와 결혼하지 않으면 그런 미래는 일어나지 않겠지. 자신을 제외한 7명의 남자에게 신부를 넘겨주는 미친 짓을 하는 남자와 다시 결혼할 생각은 없다. 물론 기억 속에서 징그럽게 달라붙던 남자에게 기대는 것 역시 불쾌하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될 문제.

‘우선 상황을 살피다가 제파스 가문에 가는 것만 피하면 돼. 이놈은 나중에 처리하면 되니까.’

누구보다 가장 그녀에게 집착하고 매달렸던 남자이니 만약 이 남자와 연인이 된 척을 하면 다른 남자에게 넘길 생각은 못 할 테니까. 좀 더 나은 방법이 있을 수도 있지만 우선은 꼬셔 두는 게 좋을 터. 성급한 행동이긴 하나 말도 안 되는 현상을 겪은 아르모니아는 아직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도 되지 않았고 끔찍한 미래에서 도망쳐야만 한다는 생각이 급해 고민할 시간도 챙기지 않은 채 행동에 나섰다. 그래서 아르모니아는 최선을 다해 수줍은 척 연기하며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내뱉었다.

“저는 당신을 연모하고 있습니다.”

성녀라 불리는 존재가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수줍어하며 연극 같은 대사를 내뱉자 페이트는 그의 머리카락과 똑같을 정도로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제가 왜 평소 얼굴도 자주 볼 수 없는 귀족 가문 자제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다른 사람의 이름은 몰라요. 당신이니까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아르모니아는 과거에 그가 들려준 이야기를 비슷하게 바꾸어 거짓말을 시작했다.

“12살 때, 가을의 세례식 때 당신을 처음 보았어요. 비슷한 나이의 남자아이를 보고 시선을 빼앗긴 건 처음이었습니다. 어린아이의 귀여운 감정이 그대로 남아, 다음 세례식에 또 볼 수 있지 않을까? 혹시라도 연회에 참석하지는 않을까? 이름과 얼굴만 알고 다른 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이렇게 마음에 품어도 될까?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에만 품고 있었어요.”

자기가 생각해도 참 대충 지어냈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을 유혹한다고 해도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성녀의 말씀인데 의심이 가당키나 한가? 아르모니아는 앉아 있던 침대에서 일어나 일부러 페이트의 몸을 와락 끌어안고 외쳤다. 일부러 가슴의 감촉을 잘 느낄 수 있도록 꽉 끌어안고 몸을 문지르려 했다.

“하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아픈 척을 했어요. 당신이 날 걱정해 주고 다가와 준 게 너무 기뻐서 충동적으로 데리고 오고 말았어요. 부탁이니 이런 절 경멸하지 말아 주세요. 성녀인 자가 부끄러운 감정을 품고 평범한 여자처럼 사랑을 고백하다니.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그래도 저는!”

아르모니아는 웃기기도 하고 뭔가 울컥하는 분노가 솟아오르는 거 같아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재빨리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우는 척 서럽게 몸을 낮추고 과거의 그가 끝도 없이 요구했던 대사를 입에 올렸다.

“당신을 사랑해요.”

왜 이렇게까지 불필요한 연기를 했을까? 갑작스러운 이상 현상과 미래를 알고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성급하게 행동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는 척 고개를 숙인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남자의 흥분으로 가득 찬 얼굴을 본 순간 그녀는 정말 꿈속에서 보았던 페이트의 모습이 지금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갑작스러운 혼란에 빠져 허둥대는 건 이 남자 역시 다를 바가 없어, 페이트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용기 있게 마음을 고백했다.

“저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기억 속의 그 얼굴과 똑같다. 당신을 사랑한다며 거칠게 그녀를 안던 그 모습. 지금과 같은 순수함보다는 욕망으로 얼룩져 있던 얼굴. 그 표정과 사랑을 고백하던 목소리가 얼마나 끔찍했던지. 전혀 다른 분위기인데도 아르모니아는 그 끔찍했던 행위가 떠올랐다.



“아르모니아 님! 사랑합니다! 당신이 아인즈의 아내여도 좋으니 저를 사랑해 주세요. 저는 영원히 당신만을 품에 담고 살아갈 겁니다. 다른 여자와 결혼하지도 않을 거고 안지도 않겠습니다. 당신을 품을 수 있다면 그런 건 어찌되든 좋아!”

성기를 찔러 넣자 바로 사정해 버릴 정도로 흥분을 참을 수 없었던 사람. 당신이 처음이라면서 다시 발기한 음경을 천천히 삽입하며 황홀함에 정신을 놓았던 남자.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며 사정하고, 또 사정하고. 마치 진짜 그녀와 결혼한 신랑처럼 사랑을 고백하고 정신없이 키스를 퍼붓던 남자. 그 남자가 지금 좀 더 어린 모습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저도 성녀님을, 12살의 그 순간, 가을의 세례식에서 처음 본 순간부터 계속!”

이런 우연이, 이런 기적이 있을 수 있다니. 그런 마음으로 너무 기뻐서 감히 성녀의 몸을 끌어안아 침대 위로 쓰러뜨린 남자. 성녀의 아름다운 은발이 침대 위로 흩어짐과 동시에 페이트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꿈에서와 달리 그저 입술만 겹친 아이다운 표현. 길지 않게 끝난 그 키스 뒤에 두 사람은 잠시 아련하고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더니 빈틈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아르모니아.”

감동과 함께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가 두 눈을 감고 성녀의 어깨에 고개를 떨구고 있자 아르모니아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표정이 보이지 않는 구도에서 피식 웃었다.

‘역시 단순하다니까.’

반응을 보아하니 아직은 함부로 성녀를 범한다는 계획을 세우기 전이 틀림없다. 오히려 순수해 보이기까지 한 표정은 그런 생각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고 있겠지.

‘다른 놈들은 어떨까?’

떠올리기만 해도 불쾌하지만 일어날 일이라면 피할 수 없다. 기억할 가치도 없었던 이름을 기억한 것과 현실에서는 들은 적도 없는 옛날이야기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그 꿈이 진짜 미래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이미 이 남자를 만나 알고 있던 미래를 바꾸어 버렸으니 되돌아갈 수는 없는 법. 두 사람은 한참이나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가 침대 위에 누워 가만히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꿈을 꾸는 거 같습니다. 당신이 저와 같은 마음으로, 지금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고 있다는 게.”

“꿈이면 안 돼요. 꿈이면 제가 정말 실망할 테니까.”

아르모니아는 그녀가 정말 잘하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천천히 페이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는 이런 단순한 행동에도 기쁨을 참지 못하고 새빨갛게 붉어진 얼굴로 웃어 버렸다. 덩치가 남다르긴 해도 아직 소년다운 순수함이 남아 있는 게 약간의 차이점일까? 그러나 그것은 배려해 줄 사항이 아니다.

“사실 저 말고 주위에도 당신을 흠모하는 녀석이 널렸으니까요. 3년 뒤에 새 성녀님이 나타나면 제파스 가문으로 보내진다는 소문도 있고.”

“네?”

아르모니아는 그 가문의 이름을 듣자마자 깜짝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제파스 가문이라뇨?”

“아직 정해진 건 아니고 떠도는 소문입니다. 비스타리아 내에서 꽤 영향력 있는 가문이기도 하지만 왕족 출신인 공주가 시집을 간 곳이기도 해서. 저랑 같은 나이의 친구가 하나 있는데 왕께서 당신을 그 녀석이랑 이어 줄 생각이라는 소문이 얼마 전부터 주위에 퍼졌거든요. 어쩌면 정말로 그렇게 될 수도 있죠.”

‘썩을.’

아르모니아는 멍해진 얼굴로 남몰래 욕을 중얼거렸다. 그녀가 왕에게 통보를 받은 건 성녀직에서 물러나던 때. 하지만 아마 그보다 훨씬 일찍 정해진 사실이었으리라. 대충 1~2년 정도 전에 얘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벌써 말이 오가고 있었다니.

“싫어요.”

아르모니아는 진심과 가식이 반반 섞인 표정으로 절절하게 페이트의 품을 파고들며 안겼다.

“이제야 당신에게 마음을 전했는데. 당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았는데 다른 남자에게 보내진다니.”

“괜찮습니다. 그냥 소문이니까요.”

소문이 아닐 테니 그렇지. 페이트는 그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기뻐 다른 걱정은 생각도 않고 아르모니아를 끌어안은 채 그의 소망을 입에 담았다.

“3년 뒤에 당신이 인간으로 돌아오면, 그때 제가 당신을 신부로 맞이할 겁니다.”

‘가능하려나?’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아르모니아는 가능성을 따져 봤다. 이 남자에게 그런 행동이 가능할까? 제파스 가문과 싸울 힘이 있었다면 그는 진작에 그녀를 두고 아인즈와 싸웠을 텐데.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낸 후에 아르모니아는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며 페이트를 돌려보냈고 그가 방을 나서기 전에 굳은살이 느껴지는 남자의 한쪽 손을 자신의 가슴에 꼭 끌어안고 다음을 기약했다.

“세례식은 가족이나 친척이 없으면 참석할 수 없죠. 연회에는 항상 참석하실 수 있나요?”

어서 또 당신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며 속삭이자 천사처럼 새하얗고 아름다운 모습은 애처로움이 부각된다. 그리고 그 모습을 눈에 담은 페이트 역시 아쉬움을 숨기지 않고 다음을 기약했다.

“이번 세례식은 친척 아이를 핑계로 올 수 있었지만, 연회는 가능하면 참석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버님은 슬슬 자잘한 자리는 저를 대신 보내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