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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아뇨, 처음 들어보는데요. 유명한 곳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관심 없으면 모르는 게 당연한 정도? 그래도 재계서열 50위권 기업이니 대기업 말석은 된다고나 할까요?”
“그 정도였나…….”
금수저라는 것은 알았지만 대기업 자제라는 건 역시 느낌이 다르다.
“갑자기 형제가 죄다 안하무인인 게 이해되기 시작하는데요?”
“네. 그래서 그 형제가 솔저를 고용했다는 거,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며칠 전의 그 암살자는, 용돈을 남들의 수백 배로 받는다고 해도 그건 어렵다고 봐요. 여기가 무슨 중동 산유국도 아니고. 아무리 금수저라도 용돈으로 슈퍼카를 뽑는다는 건 비현실적이지 않습니까?”
수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뢰비가 그렇게 비싸요? 랭크가… 한 B 정도? 아주 높은 것 같지는 않았는데.”
“각성자는 몸값이 비쌉니다. 또 살인 청부이기도 하고 타깃 역시 같은 각성자였으니까요.”
“암살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놈이 누군지는 밝혀졌나요?”
“이름 권용일. 나이는 34세. 현재 아는 건 여기까지밖에 없어요. 아직 의식을 못 찾은 상태라.”
“머리에 구멍이 뚫리고도 살아 있다니, 각성자가 좋긴 좋네요.”
“그렇죠. 그런데 의사 말로는 의식이 돌아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합니다. 게다가 언노운이라 뭘 더 캘 수가 없어요.”
수호는 의문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언노운?”
“우리 쪽 용어입니다. 협회에서 파악 못 하는 미등록 각성자라는 거죠.”
“그게 문제가 되나요?”
“되죠. 일단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고. 또 문제는 언노운이면서 B랭크라는 건데, 그런 조건이 쉽게 나올 수가 없어요.”
“왜죠?”
“처음부터 랭크가 높았으면 주위에 드러나서 언노운이 안 됐을 것이고, 야금야금 랭크를 올려온 거라면, 던전 이용을 못 하는데 그게 가능하지가 않죠. 프리랜서일 리는 없고 조직이 관여됐다고 봐야 하는데…….”
“조직이요?”
“예. 아마 중간에 길드가 껴 있을 겁니다. 길드에서 브로커 역할을 해줬든지, 아니면 아예 길드 소속이든지. 앞서 말했듯이 이런 스케일은 용돈 수준으로는 절대 불가능해요. 가족이, 아니면 지인이 도와줬다고 봐야죠.”
“그 말은……?”
“앞으로 더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라 무슨 짓을 더 저지를지 모르죠.”
다음엔 어떤 기행을 보여줄지, 한 번 생각해 봤다.
“B랭크로는 안되니까 A랭크를 섭외해서 또 암살을 시도하지 않을까요?”
“설마요. 그리고 그렇게 한다 해도 저희가 막을 겁니다. 우리는 한배를 탔으니까요. 그렇죠?”
“네, 으음.”
수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공짜로 받는 호의란 없고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SSIS가 할 일이 없고 시간이 남아돌아서 가족들을 보호해 주는 건 당연히 아닐 것이다.
수호는 이미 그날 이후 그들의 프로젝트에 합류하기로 말을 다 끝내놓았다.
하지만 아직 확정을 짓고 사인까지는 안 한 상태.
김삼환이 눈치를 보며 서류를 꺼냈다.
“그럼… 서명하실까요?”
“해야죠. 물론 하는데, 제가 말씀드렸던 거는요?”
“아, 그거요.”
김삼환의 목소리가 급 작아졌다.
“왜, 무슨 문제라도……?”
SSIS에서는 대놓고 큰 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당장 눈앞에 번진 불을 끄기 위해 SOS를 치긴 했지만, 이쪽에서도 그에 합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게 당연히 맞는 거였다.
“문제라, 좀 있긴 합니다.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씀드리긴 했는데,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또 있거든요. 마정석을 내주는 건 후자에 속하는 부분이라.”
“그냥 달라는 건 아니었는데요.”
“예, 압니다. 저희가 던전을 제공할 수는 있어요. 특재부에서 관리하는 던전도 있고 하니까. 하지만 마정석을 드랍하는 중간보스나 보스는 다 임자가 있다는 게 문제죠. 번호표 뽑고 기다리는 각성자가 한 트럭이라.”
“뭔가 우회할 수단 같은 건 없나요?”
김삼환이 고개를 저었다.
“마정석 구하기가 그렇게 쉬웠으면 우리 요원들은 벌써 다 S급 됐죠. 솔직히 말해서, 그건 저희 능력 밖입니다.”
“흐음.”
“각성자에게 마정석이란 보약과도 같은 거긴 하죠. 하지만 밥 먹듯 먹을 수 없으니까 보약 아니겠어요? 천천히 레벨 올리다 보면 앞으로 기회가 생길 겁니다.”
김삼환이 달래듯 말했지만 수호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지금은 레벨업이 중요한 게 아니라서요. 마정석이 꼭 필요한데, 아예 구할 방법이 없는 건가요?”
“예, 아마도…….”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으려던 김삼환.
그런데 뭔가 떠올랐는지 문득 생각에 잠겼다.
“어… 아예 없는 건 아닌가?”
“어떤……?”
“음, 이 얘기는 나중에 하죠. 확답은 못 드리지만 최대한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사인부터 좀.”
수호는 잠시 고민한 뒤, 결국 서명을 했다.
어쨌든 지금은 고집부릴 때가 아니었다.
“옳은 결정 하셨습니다.”
김삼환이 서류를 받아들며 미소를 지었다.
“어떠십니까? SSIS와 함께하게 된 소감이?”
“이게 맞는 건가 싶은 생각이 살짝 들긴 하는데요.”
“후회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저희도 미래를 보고 추진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진수호 학생에게 좋은 게 우리에게도 좋은 거니까 협력과 지원, 아끼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야 좋겠지만.’
김삼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호는 문 앞까지 그를 따라갔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일단은 완쾌할 때까지 쉬고 계시고.”
“다 나았는데요.”
“역시 각성자는 다르네요. 전 아직도 이런데.”
김삼환이 깁스한 팔을 들어 보였다.
“그럼 이제 퇴원해도 되나요?”
“아, 그건… 당분간은 병원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 당분간이 언제까지인지도 물어볼 걸 그랬다.
하염없이 시간만 죽이는 경험은 정학을 당한 동안 이미 충분할 정도로 겪어 봤다.
‘내공이나 모으자.’
슬슬 에너지가 돌아왔을 만한 시간이었다.
마정석을 흡수한 후 그의 단전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보유 에너지가 약간만 늘어났을 뿐이라, 전부 내력으로 변환하는 데에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음?’
운기조식을 마치고 눈을 떴다.
현재 그는 기감이 예민해져 오감을 넘어선 육감이 활성화된 상태였다.
주위 사물의 움직임과 기척은 눈을 감고도 파악할 수 있을 정도.
뜬금없이 수호가 허공에다 대고 말을 건넸다.
“거기서 뭐 하는 거예요. 그만 나오죠?”
“칫! 또 들켰네.”
병상 맞은편 벽.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할로우가 툭 튀어나왔다.
마치 의태(擬態)하고 있던 생물이 보호색을 풀기라도 한 것처럼.
인기척도, 아무런 징후도 없는 흡사 유령과도 같은 등장이었다.
할로우는 병상 앞으로 와서 허리에 손을 올리고 수호에게 따져 물었다.
“너 대체 뭐야! 뭔데 매번 알아차리는 거냐고!”
“제 촉이 보통 촉이 아니라서요. 근데 그거 들킨 게 그렇게 화낼 일이에요?”
“아니, 말이 안 되잖아! 난 이 능력으로 먹고산단 말이야. 라이선스도 없는 애한테 잡히면 내가 뭐가 돼?”
그렇게 말하면 수호가 뭐가 되는 건지. 할로우도 이걸 느꼈는지 말을 덧붙였다.
“널 무시해서가 아니라 정체성에 혼란이 오잖아. 지금까지 걸린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이제는 한두 번도 아니잖아요? 익숙해질 때도 됐지 뭘 그래요. 다른 사람들한테만 안 잡히면 되는 거지.”
“흐음. 뭔가 있어, 분명.”
그녀는 수호를 이리저리 뜯어봤다.
하지만 그냥 환자복 입은 고등학생일 뿐, 특별한 건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 보니까 다리 꼬고 눈 감고 있던데, 그건 뭐지? 요가 같은 거야?”
“예… 뭐, 워낙 할 게 없어서요.”
“설마 요가가 그 비법?”
할로우가 손바닥을 탁 쳤다.
그녀가 신발을 벗고 병상 위로 올라왔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수호는 기겁하며 침대 끝으로 엉덩이를 뺐다.
“나도 한 번 해보려고.”
할로우는 수호가 했던 것처럼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잠시 뒤.
수호가 딱한 듯 그녀를 바라봤다.
“별 차이 없죠?”
“그, 그러네.”
할로우는 얼굴을 붉히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갑자기 둘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수호는 싸해진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은신한 거 알아채나 테스트하러 온 건 아닐 테고. 왜 오셨어요?”
“아, 그렇지. 이거, 과장님이 전해달라고 하셨거든?”
그녀는 들고 온 쇼핑백을 내밀었다.
뭐가 들었나 확인해 보니 웬 코스프레 의상 같은 게 있었다.
수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걸 왜 나한테?”
할로우가 준 코스튬은 스판 재질의 검은색 슈트였다.
꺼내서 펼쳐 들어 봤는데 퀄리티가 상당했다.
수제 코스튬 같은 수준이 아니라 전문 업체에서 제작한 듯한?
등 부분에는 옷과는 다른 톤의 검은 망토가 마치 날개처럼 달려 있었다.
“레이븐 코스튬이네요.”
수호는 이게 뭔지 보는 즉시 알아차렸다.
진수호는 레이븐의 열렬한 추종자였으니.
사실 그 정도가 아니었어도 대한민국 사람이 그를 모르면 그냥 간첩이라고 봐야 했다.
레이븐은 국내 유일의 SSS급 랭커다.
오랫동안 최전선에서 마물들과 싸워온 1세대 각성자 중의 한 명.
인류가 처한 이 미지의 재난으로부터 수많은 사람을 구해낸, 한국을 대표하는 수호자였다.
그런 그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그가 항상 착용하고 다니는 칠흑의 마갑.
아마 던전 아이템 중에서 이보다 유명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가 워낙 인기 수호자라 이를 의상화한 코스튬이나 패션 아이템은 길거리만 지나다녀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할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한 번 입어볼래?”
“아니, 그러니까 왜 이런 걸 주냐는 건데요.”
“슈트라고 파는 게 다 그거밖에 없더라고. 그래도 제일 비싼 걸로 산 거야. 아, 그 얘기가 아니구나?”
“그렇죠.”
“마정석 필요하다면서? 일단 입어봐.”
이거 하고 그게 무슨 상관인진 모르겠지만 수호는 시키는 대로 했다.
“꺅, 뭐야!”
환자복을 훌훌 벗어 던지자 할로우가 소리를 지르며 자기 눈을 가렸다.
“갈아입으라면서요?”
“내 말은, 걸쳐 보라는 거였지.”
그런데 손가락 사이로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가 보인다.
수호는 어이없어하면서 슈트로 갈아입었다.
“너 보기보단 근육질이구나?”
“그냥 대놓고 봐요.”
“내가 왜? 너 같은 어린애한텐 관심 없거든?”
“으음.”
할로우의 나이를 알기 때문에 뭐라고는 못하지만 그녀가 이런 말을 하니까 정말 괴상했다.
어떻게 봐도 역시 할로우는 조숙한 중학생 정도로밖에는 안 보인다.
다 입고 난 뒤, 그녀에게 물었다.
“어때요?”
“딱 맞네.”
“이제 뭘 하자는 건지 말해주는 게 어때요? 레이븐 코스프레를 한다고 해서 마정석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을 거 같은데. 무슨 이유가 있긴 한 거죠?”
“당연히 있지. 그리고 코스프레보다 훨씬 실감 나는 거야. 직접 몸으로 뛰고 굴러도 보고, 뭐 그런?”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래, 이게 맞겠다. 이름하여 일일 수호자 체험!”
할로우는 와와하며 박수를 쳤다.
하지만 수호의 반응은 미적지근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더 모르겠는데……. 그건 또 무슨 말인데요?”
“일단 나가자. 가면서 설명해 줄게.”
“갑자기요?”
“응, 지금 출발해야 해.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거든?”
할로우는 말하면서 옷장을 뒤지고 있었다.
그녀는 목욕가운을 찾아내서 수호에게 휙 던졌다.
“나가는 동안 잠깐 가리고 있어.”
“그냥 갈아입고 가죠? 가운 입고 돌아다녀도 똑같이 이상하게 볼 거 같은데.”
“번거롭게 뭘 그래. 어차피 또 갈아입어야 하는데.”
“대체 이걸 입고 뭘 하겠다는 건데요?”
“가 보면 알아.”
“아뇨, 처음 들어보는데요. 유명한 곳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관심 없으면 모르는 게 당연한 정도? 그래도 재계서열 50위권 기업이니 대기업 말석은 된다고나 할까요?”
“그 정도였나…….”
금수저라는 것은 알았지만 대기업 자제라는 건 역시 느낌이 다르다.
“갑자기 형제가 죄다 안하무인인 게 이해되기 시작하는데요?”
“네. 그래서 그 형제가 솔저를 고용했다는 거,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며칠 전의 그 암살자는, 용돈을 남들의 수백 배로 받는다고 해도 그건 어렵다고 봐요. 여기가 무슨 중동 산유국도 아니고. 아무리 금수저라도 용돈으로 슈퍼카를 뽑는다는 건 비현실적이지 않습니까?”
수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뢰비가 그렇게 비싸요? 랭크가… 한 B 정도? 아주 높은 것 같지는 않았는데.”
“각성자는 몸값이 비쌉니다. 또 살인 청부이기도 하고 타깃 역시 같은 각성자였으니까요.”
“암살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놈이 누군지는 밝혀졌나요?”
“이름 권용일. 나이는 34세. 현재 아는 건 여기까지밖에 없어요. 아직 의식을 못 찾은 상태라.”
“머리에 구멍이 뚫리고도 살아 있다니, 각성자가 좋긴 좋네요.”
“그렇죠. 그런데 의사 말로는 의식이 돌아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합니다. 게다가 언노운이라 뭘 더 캘 수가 없어요.”
수호는 의문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언노운?”
“우리 쪽 용어입니다. 협회에서 파악 못 하는 미등록 각성자라는 거죠.”
“그게 문제가 되나요?”
“되죠. 일단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고. 또 문제는 언노운이면서 B랭크라는 건데, 그런 조건이 쉽게 나올 수가 없어요.”
“왜죠?”
“처음부터 랭크가 높았으면 주위에 드러나서 언노운이 안 됐을 것이고, 야금야금 랭크를 올려온 거라면, 던전 이용을 못 하는데 그게 가능하지가 않죠. 프리랜서일 리는 없고 조직이 관여됐다고 봐야 하는데…….”
“조직이요?”
“예. 아마 중간에 길드가 껴 있을 겁니다. 길드에서 브로커 역할을 해줬든지, 아니면 아예 길드 소속이든지. 앞서 말했듯이 이런 스케일은 용돈 수준으로는 절대 불가능해요. 가족이, 아니면 지인이 도와줬다고 봐야죠.”
“그 말은……?”
“앞으로 더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라 무슨 짓을 더 저지를지 모르죠.”
다음엔 어떤 기행을 보여줄지, 한 번 생각해 봤다.
“B랭크로는 안되니까 A랭크를 섭외해서 또 암살을 시도하지 않을까요?”
“설마요. 그리고 그렇게 한다 해도 저희가 막을 겁니다. 우리는 한배를 탔으니까요. 그렇죠?”
“네, 으음.”
수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공짜로 받는 호의란 없고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SSIS가 할 일이 없고 시간이 남아돌아서 가족들을 보호해 주는 건 당연히 아닐 것이다.
수호는 이미 그날 이후 그들의 프로젝트에 합류하기로 말을 다 끝내놓았다.
하지만 아직 확정을 짓고 사인까지는 안 한 상태.
김삼환이 눈치를 보며 서류를 꺼냈다.
“그럼… 서명하실까요?”
“해야죠. 물론 하는데, 제가 말씀드렸던 거는요?”
“아, 그거요.”
김삼환의 목소리가 급 작아졌다.
“왜, 무슨 문제라도……?”
SSIS에서는 대놓고 큰 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당장 눈앞에 번진 불을 끄기 위해 SOS를 치긴 했지만, 이쪽에서도 그에 합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게 당연히 맞는 거였다.
“문제라, 좀 있긴 합니다.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씀드리긴 했는데,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또 있거든요. 마정석을 내주는 건 후자에 속하는 부분이라.”
“그냥 달라는 건 아니었는데요.”
“예, 압니다. 저희가 던전을 제공할 수는 있어요. 특재부에서 관리하는 던전도 있고 하니까. 하지만 마정석을 드랍하는 중간보스나 보스는 다 임자가 있다는 게 문제죠. 번호표 뽑고 기다리는 각성자가 한 트럭이라.”
“뭔가 우회할 수단 같은 건 없나요?”
김삼환이 고개를 저었다.
“마정석 구하기가 그렇게 쉬웠으면 우리 요원들은 벌써 다 S급 됐죠. 솔직히 말해서, 그건 저희 능력 밖입니다.”
“흐음.”
“각성자에게 마정석이란 보약과도 같은 거긴 하죠. 하지만 밥 먹듯 먹을 수 없으니까 보약 아니겠어요? 천천히 레벨 올리다 보면 앞으로 기회가 생길 겁니다.”
김삼환이 달래듯 말했지만 수호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지금은 레벨업이 중요한 게 아니라서요. 마정석이 꼭 필요한데, 아예 구할 방법이 없는 건가요?”
“예, 아마도…….”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으려던 김삼환.
그런데 뭔가 떠올랐는지 문득 생각에 잠겼다.
“어… 아예 없는 건 아닌가?”
“어떤……?”
“음, 이 얘기는 나중에 하죠. 확답은 못 드리지만 최대한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사인부터 좀.”
수호는 잠시 고민한 뒤, 결국 서명을 했다.
어쨌든 지금은 고집부릴 때가 아니었다.
“옳은 결정 하셨습니다.”
김삼환이 서류를 받아들며 미소를 지었다.
“어떠십니까? SSIS와 함께하게 된 소감이?”
“이게 맞는 건가 싶은 생각이 살짝 들긴 하는데요.”
“후회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저희도 미래를 보고 추진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진수호 학생에게 좋은 게 우리에게도 좋은 거니까 협력과 지원, 아끼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야 좋겠지만.’
김삼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호는 문 앞까지 그를 따라갔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일단은 완쾌할 때까지 쉬고 계시고.”
“다 나았는데요.”
“역시 각성자는 다르네요. 전 아직도 이런데.”
김삼환이 깁스한 팔을 들어 보였다.
“그럼 이제 퇴원해도 되나요?”
“아, 그건… 당분간은 병원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 당분간이 언제까지인지도 물어볼 걸 그랬다.
하염없이 시간만 죽이는 경험은 정학을 당한 동안 이미 충분할 정도로 겪어 봤다.
‘내공이나 모으자.’
슬슬 에너지가 돌아왔을 만한 시간이었다.
마정석을 흡수한 후 그의 단전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보유 에너지가 약간만 늘어났을 뿐이라, 전부 내력으로 변환하는 데에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음?’
운기조식을 마치고 눈을 떴다.
현재 그는 기감이 예민해져 오감을 넘어선 육감이 활성화된 상태였다.
주위 사물의 움직임과 기척은 눈을 감고도 파악할 수 있을 정도.
뜬금없이 수호가 허공에다 대고 말을 건넸다.
“거기서 뭐 하는 거예요. 그만 나오죠?”
“칫! 또 들켰네.”
병상 맞은편 벽.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할로우가 툭 튀어나왔다.
마치 의태(擬態)하고 있던 생물이 보호색을 풀기라도 한 것처럼.
인기척도, 아무런 징후도 없는 흡사 유령과도 같은 등장이었다.
할로우는 병상 앞으로 와서 허리에 손을 올리고 수호에게 따져 물었다.
“너 대체 뭐야! 뭔데 매번 알아차리는 거냐고!”
“제 촉이 보통 촉이 아니라서요. 근데 그거 들킨 게 그렇게 화낼 일이에요?”
“아니, 말이 안 되잖아! 난 이 능력으로 먹고산단 말이야. 라이선스도 없는 애한테 잡히면 내가 뭐가 돼?”
그렇게 말하면 수호가 뭐가 되는 건지. 할로우도 이걸 느꼈는지 말을 덧붙였다.
“널 무시해서가 아니라 정체성에 혼란이 오잖아. 지금까지 걸린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이제는 한두 번도 아니잖아요? 익숙해질 때도 됐지 뭘 그래요. 다른 사람들한테만 안 잡히면 되는 거지.”
“흐음. 뭔가 있어, 분명.”
그녀는 수호를 이리저리 뜯어봤다.
하지만 그냥 환자복 입은 고등학생일 뿐, 특별한 건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 보니까 다리 꼬고 눈 감고 있던데, 그건 뭐지? 요가 같은 거야?”
“예… 뭐, 워낙 할 게 없어서요.”
“설마 요가가 그 비법?”
할로우가 손바닥을 탁 쳤다.
그녀가 신발을 벗고 병상 위로 올라왔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수호는 기겁하며 침대 끝으로 엉덩이를 뺐다.
“나도 한 번 해보려고.”
할로우는 수호가 했던 것처럼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잠시 뒤.
수호가 딱한 듯 그녀를 바라봤다.
“별 차이 없죠?”
“그, 그러네.”
할로우는 얼굴을 붉히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갑자기 둘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수호는 싸해진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은신한 거 알아채나 테스트하러 온 건 아닐 테고. 왜 오셨어요?”
“아, 그렇지. 이거, 과장님이 전해달라고 하셨거든?”
그녀는 들고 온 쇼핑백을 내밀었다.
뭐가 들었나 확인해 보니 웬 코스프레 의상 같은 게 있었다.
수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걸 왜 나한테?”
할로우가 준 코스튬은 스판 재질의 검은색 슈트였다.
꺼내서 펼쳐 들어 봤는데 퀄리티가 상당했다.
수제 코스튬 같은 수준이 아니라 전문 업체에서 제작한 듯한?
등 부분에는 옷과는 다른 톤의 검은 망토가 마치 날개처럼 달려 있었다.
“레이븐 코스튬이네요.”
수호는 이게 뭔지 보는 즉시 알아차렸다.
진수호는 레이븐의 열렬한 추종자였으니.
사실 그 정도가 아니었어도 대한민국 사람이 그를 모르면 그냥 간첩이라고 봐야 했다.
레이븐은 국내 유일의 SSS급 랭커다.
오랫동안 최전선에서 마물들과 싸워온 1세대 각성자 중의 한 명.
인류가 처한 이 미지의 재난으로부터 수많은 사람을 구해낸, 한국을 대표하는 수호자였다.
그런 그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그가 항상 착용하고 다니는 칠흑의 마갑.
아마 던전 아이템 중에서 이보다 유명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가 워낙 인기 수호자라 이를 의상화한 코스튬이나 패션 아이템은 길거리만 지나다녀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할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한 번 입어볼래?”
“아니, 그러니까 왜 이런 걸 주냐는 건데요.”
“슈트라고 파는 게 다 그거밖에 없더라고. 그래도 제일 비싼 걸로 산 거야. 아, 그 얘기가 아니구나?”
“그렇죠.”
“마정석 필요하다면서? 일단 입어봐.”
이거 하고 그게 무슨 상관인진 모르겠지만 수호는 시키는 대로 했다.
“꺅, 뭐야!”
환자복을 훌훌 벗어 던지자 할로우가 소리를 지르며 자기 눈을 가렸다.
“갈아입으라면서요?”
“내 말은, 걸쳐 보라는 거였지.”
그런데 손가락 사이로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가 보인다.
수호는 어이없어하면서 슈트로 갈아입었다.
“너 보기보단 근육질이구나?”
“그냥 대놓고 봐요.”
“내가 왜? 너 같은 어린애한텐 관심 없거든?”
“으음.”
할로우의 나이를 알기 때문에 뭐라고는 못하지만 그녀가 이런 말을 하니까 정말 괴상했다.
어떻게 봐도 역시 할로우는 조숙한 중학생 정도로밖에는 안 보인다.
다 입고 난 뒤, 그녀에게 물었다.
“어때요?”
“딱 맞네.”
“이제 뭘 하자는 건지 말해주는 게 어때요? 레이븐 코스프레를 한다고 해서 마정석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을 거 같은데. 무슨 이유가 있긴 한 거죠?”
“당연히 있지. 그리고 코스프레보다 훨씬 실감 나는 거야. 직접 몸으로 뛰고 굴러도 보고, 뭐 그런?”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래, 이게 맞겠다. 이름하여 일일 수호자 체험!”
할로우는 와와하며 박수를 쳤다.
하지만 수호의 반응은 미적지근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더 모르겠는데……. 그건 또 무슨 말인데요?”
“일단 나가자. 가면서 설명해 줄게.”
“갑자기요?”
“응, 지금 출발해야 해.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거든?”
할로우는 말하면서 옷장을 뒤지고 있었다.
그녀는 목욕가운을 찾아내서 수호에게 휙 던졌다.
“나가는 동안 잠깐 가리고 있어.”
“그냥 갈아입고 가죠? 가운 입고 돌아다녀도 똑같이 이상하게 볼 거 같은데.”
“번거롭게 뭘 그래. 어차피 또 갈아입어야 하는데.”
“대체 이걸 입고 뭘 하겠다는 건데요?”
“가 보면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