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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천마성주 혈마제 서문환.
그는 천하제일인인 동시에 천하제일세의 주인이었다.
고금을 통틀어 이 두 가지를 모두 성취한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천마성은 그 이상의 업적, 무림일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벌써 3년 전의 일이다.
천마성은 손쉬운 마무리만을 남겨둔 채, 돌연 진격을 멈추었다.
덕분에 와해 직전의 무림맹은 기사회생.
겨우 한숨을 돌리고 재정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어째서 천마성이 무림제패를 이루지 않는 것인지…….
추측은 무성했지만 아무것도 확실한 건 없었다.
심지어는 천마성을 대표하는 열두 명의 초고수, 십이마왕조차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진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혈마제 뿐이었다.
* * *
“기가 막히는군.”
파앗!
서문환이 움직였다.
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 주먹을 뻗자 이를 본 적귀가 소리쳤다.
“마룡탄이다! 전부 피해!”
구형으로 압축된 흑적색 강기가 포탄처럼 쏘아져 나갔다.
십이마왕들은 겁에 질린 채 피하기에만 급급했다.
드넓은 천마성의 대전.
이 공격으로 대전은 쑥대밭이 되었고, 혼마왕과 권마왕이 즉사했다.
이들은 정파의 십대고수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절대자들이었다.
또한 오직 혈마제의 명령에만 따르는 충신 중의 충신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서문환에게 학살당하고 있었다.
그래도 적귀는 겁내지 않았다.
원래 이것이 마제의 경지다.
십이마왕조차 혼비백산하게 만드는.
이걸 모르고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독마왕과 검마왕마저 죽고 다른 마왕들도 차례로 죽어 나가자 그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그리고…….
콰직!
서문환은 마지막 마왕을 밟아 죽였다.
이제 남은 건 적귀뿐이었다.
“적귀야, 어쩌냐? 계획대로 안 돼서.”
“이, 이건 말도 안 돼.”
적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몸 또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산공독으로 내공을 흩어놓고 천라절독을 무형지독으로 만들어 중독까지 시켰는데, 어떻게 이리 될 수가…….”
“뭔가 했더니 천라절독이었군.”
서문환은 무표정했다.
믿었던 수하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적귀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다른 놈들이야 원래부터 그런 놈들이었다고 치자. 근데 적어도 너는 나한테 이러면 안 됐잖아. 왜냐? 왜 날 배신한 거지?”
“무, 물론 마제께서는 제 평생의 은인이십니다. 마제께서 은혜를 베푸셨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걸 어찌 잊겠습니까. 하지만 대의가…….”
“대의? 그게 뭔데?”
“모든 마도인의 꿈, 마도천하! 그것만을 보고 30년을 달려왔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천마성 전체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마제께서 이제는 그걸 가로막는 존재가 되어버렸으니… 대체 왜! 결단을 내리시지 않았던 겁니까?”
천마성이 3년을 가만히 있었던 이유.
혈마제의 주화입마, 부하들의 배신 등 다양한 설이 나돌았지만 진실은 복잡하지 않았다.
단지 마제가 움직이지 말라고 했던 것뿐.
서문환은 입을 열어 그 까닭을 말했다.
“그냥 하기 싫어서.”
“예?”
적귀는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그렇잖아. 무림을 발 아래 두면 나한테 뭐가 남지? 평생의 목표를 이룬 뒤의 삶. 그때가 되면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렇지만 대의가…….”
“그것도 그렇고, 솔직히 말하면 난 피를 보는 게 지겨워졌다. 내가 그동안 몇 명이나 죽였지? 내 손에 직접 피를 묻힌 것만 해도 수백? 아니 수천이지. 그 정도인데 무림제패를 위해 죽은 사람은… 수십만이 넘지 않을까?”
적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게 혈마제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극마에 이르면 탈마로 이어진다더니, 마제께서는 확실히 변하셨군요. 단지 그런 이유로 대의를 저버리다니.”
“자꾸 대의, 대의 하는데.”
서문환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하나만 물어보자. 십이마왕을 규합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지? 1년? 2년?”
“주, 주동자는 혼마왕이었습니다. 제가 아니라…….”
“독마왕이 네 오른팔이라는 건 모두가 아는 얘기지. 천라절독을 무형지독으로 만들기까지는 3년 이상이 걸린다. 그 말인즉, 내가 칩거하기 전부터 이날을 준비했다는 건데.”
여기까지 이르자 적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그가 본색을 드러냈다.
“그래! 나도 지존이 돼 보고 싶었다. 나 적마왕이야! 천마성의 이인자 적마왕이라고! 그런데 언제까지고 적귀, 적귀. 지긋지긋한 당신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일을 꾸몄다. 뭐 어쩔 건데!”
적귀가 발악하듯 달려들었다.
“추하다, 적귀야.”
서문환이 대충 손을 내젓자 적귀의 몸에서 머리가 분리되어 떨어져 나갔다.
“그간의 정이 있으니 편히는 보내주마.”
서문환은 적귀를 지나쳐 가서 정면에 위치한 옥좌에 앉았다.
“우욱!”
그가 검은 피를 토해냈다.
“슬슬 천라절독의 기운이 올라오는군.”
3년 전이었다면 이 혼합독에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적귀에게 불운이었던 건, 그동안 서문환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는 거였다.
산공독이 내공을 얼마간 흩었어도, 십이마왕을 상대한 후 천라절독을 몰아내는 게 가능할 정도로 발전이 있었다.
서문환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해독할 수 있는데도,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가만히 있었다.
어느덧 생사의 갈림길까지 왔다.
이젠 정말 조처를 하지 않으면 죽게 된다.
초점 잃은 눈이 난장판이 된 대전을 훑었다.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십이마왕의 시체들이 보였다.
마지막 순간, 내공을 끌어올린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갑자기 모든 게 귀찮아졌다.
내공을 거두자 독기가 전신을 잠식했다.
서문환은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느꼈다.
‘내 한평생, 이룰 만큼 이루었다. 후회할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건 있었다.
‘혈마제의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살았더라도 죽음 앞에서 이토록 공허했을까?’
만약 또 한 번의 생이 주어진다면 그때는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고 싶다.
‘죽음 위에 군림하던 삶은 질리도록 겪어 봤다. 그렇다면 삶 그 자체를 위해 살아보는 건 어떨까?’
그렇게 일생을 보낸 뒤, 죽음을 마주했을 때 어떤 느낌을 받을지…….
하지만 지금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쪽은 그가 선택한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것이 당대의 천하제일인, 혈마제의 최후였다.
* * *
축축한 느낌.
얼굴이 젖은 게 느껴졌다.
얄궂게도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뭐지 이건?’
서문환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분명 난 죽었는데?’
하지만 이 차가운 감촉은 이게 현실임을 뼛속까지 일깨워주고 있었다.
서문환은 눈을 떴다.
놀랍게도 자신은 흙탕물에 처박혀 있었다.
몸을 뒤집어 하늘을 보니 우중충한 잿빛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천라절독에 죽지 않았단 말인가?”
현재까지는 이 설명이 가장 합당했다.
하지만 비 오는 날에 왜 바깥에서 쓰러진 채로 깨어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황당하군.’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봤는데 이곳은 그가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어느 학교의 운동장.
당연히 서문환이 절대로 알 수 없는 장소였다.
그때, 수신이 불안정한 TV처럼 시야가 지직거리기 시작하더니 글귀 한 줄이 눈앞에 떠올랐다.
[동기화에 실패하였습니다.]
“뭐, 뭐야 대체?”
그와 함께, 어떤 영상 같은 게 서문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처음 보는 소년이 달려들어 자길 쓰러뜨리고, 그 위에 올라타 사정없이 주먹을 휘두른다.
그만하라고 소리쳐 보지만 소년은 들은 체도 않는다.
아니, 이걸로도 성에 안 차는지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가서 운동장에 집어 던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건가?’
대강 연결은 되는데 말은 안 된다. 마제가 어린애에게 맞다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어이없어하는 순간, 이를 시작으로 엄청난 양의 기억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크아아악!”
머리가 터질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일단은 여길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동기화에 실패하였습니다.]
알 수 없는 글귀는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 * *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서문환은 빌딩 옥상에서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마성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의 고층 빌딩들이 펼쳐져 있다.
그야말로 마천루.
신화에나 등장할 법한 건물들이 시야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꿈은 아니다.
여긴 가상의 공간이 아니라 실재하는 세계였다.
처음 서문환은 자기가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난 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기가 살던 중원이 아닌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극동의 작은 나라, 그것도 한참 이후의 시대로 이동해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지.’
서문환은 자기 몸을 내려다봤다.
아직 덜 여문 미성년의 몸이다.
완벽에 가깝던 무인의 신체는 온데간데없었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나는 다른 사람의 몸으로 들어왔다.’
긴말 필요 없이 이 설명이면 모든 게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이 몸의 원 주인은 어떻게 된 거지?’
한참이나 생각해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
여전히 찜찜하고 혼란스럽긴 했지만 이제는 달라진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였다.
서문환은 눈을 감았다.
무림인 혈마제 서문환이 아닌, 대한민국의 진수호.
그의 기억이 머릿속 한편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무려 17년이나 되는 방대한 기억이었다.
이를 다 수습하려면 꽤나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그렇게 3일이 지났다.
서문환은 서울 시내를 방황하고 다녔다.
걸인처럼 정처 없이 돌아다녔고 밤에는 노숙자처럼 한데서 잤다.
공중화장실 안.
거울을 본 서문환은 얼굴을 찌푸렸다.
웬 거지꼴을 한 놈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먼저 씻어야겠군.”
서문환은 겨우 사람 행색을 되찾았다.
그는 자기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생각했다.
‘일단 진수호의 기억은 거의 다 흡수했다. 이제 어떻게 할까…….’
이 기억이 없었더라면 이 생소한 세계에서 영락없는 이방인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을 텐데, 덕분에 적응하는 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이대로 훌훌 털고 떠나버린다 해도 얼마든지 지금 시대를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
선택의 기로다.
더러운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서문환은 결심을 굳혔다.
* * *
높은 담.
그 위를 철조망이 덮고 있었다.
진수호가 다니던 학교는 외관만 보면 교도소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경비가 삼엄했다.
밖에서 봐서는 안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고, 통로는 오직 정문 한 곳뿐이다.
‘역시 보통 학교는 아니군.’
서문환은 정문 앞에 섰다.
그는 진수호의 삶을 살기로 했다.
죽음 앞에서 서문환은 혈마제의 삶이 아닌 다른 삶,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생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리고 죽음 이후, 거짓말처럼 새로운 삶이 주어졌다.
여기서 다시 내키는 대로 살아간다면 그건 결국 서문환의 인생 제2막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진수호는… 진수호의 기억은 그가 서문환과는 정반대의 사람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평범한 가정, 평범한 환경, 크게 굴곡 없는 인생.
‘뭐, 아주 평범하기만 한 건 아니지만.’
정말 다른 삶을 살고자 한다면 진수호가 되는 것보다 간단한 건 없었다.
‘이제부터 난 진수호다.’
서문환, 아니 수호는 그렇게 자기최면을 걸었다.
정문으로 들어가자 보안요원이 학생증을 요구했다.
지갑에서 학생증을 꺼내 건네자 보안요원은 수호의 얼굴과 사진을 대조해 봤다.
“잠깐, 수호? 실종됐다는 수호가 혹시 너 아니니?”
“실종이요?”
“3일 전에 갑자기 없어진 뒤로 지금까지 못 찾고 있다던데. 그래, 진수호. 성도 같네. 너 맞지?”
“맞을… 걸요?”
“그, 그래? 그렇다면 이럴 때가 아니지.”
보안요원은 얼른 수화기를 집어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건장한 체격의 남자 한 명이 급히 뛰어왔다.
수호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박형철. D 클래스 담임. 다혈질에 조급한 성격. 딱히 좋은 기억은 없음.’
바로바로 정보가 떠오르는 걸 보면 진수호의 기억이 꽤나 자리를 잡은 듯했다.
“진수호, 너!”
박형철은 수호를 보자마자 소리부터 질렀다.
“이 자식, 어디에 짱박혀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야!”
천마성주 혈마제 서문환.
그는 천하제일인인 동시에 천하제일세의 주인이었다.
고금을 통틀어 이 두 가지를 모두 성취한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천마성은 그 이상의 업적, 무림일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벌써 3년 전의 일이다.
천마성은 손쉬운 마무리만을 남겨둔 채, 돌연 진격을 멈추었다.
덕분에 와해 직전의 무림맹은 기사회생.
겨우 한숨을 돌리고 재정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어째서 천마성이 무림제패를 이루지 않는 것인지…….
추측은 무성했지만 아무것도 확실한 건 없었다.
심지어는 천마성을 대표하는 열두 명의 초고수, 십이마왕조차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진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혈마제 뿐이었다.
* * *
“기가 막히는군.”
파앗!
서문환이 움직였다.
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 주먹을 뻗자 이를 본 적귀가 소리쳤다.
“마룡탄이다! 전부 피해!”
구형으로 압축된 흑적색 강기가 포탄처럼 쏘아져 나갔다.
십이마왕들은 겁에 질린 채 피하기에만 급급했다.
드넓은 천마성의 대전.
이 공격으로 대전은 쑥대밭이 되었고, 혼마왕과 권마왕이 즉사했다.
이들은 정파의 십대고수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절대자들이었다.
또한 오직 혈마제의 명령에만 따르는 충신 중의 충신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서문환에게 학살당하고 있었다.
그래도 적귀는 겁내지 않았다.
원래 이것이 마제의 경지다.
십이마왕조차 혼비백산하게 만드는.
이걸 모르고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독마왕과 검마왕마저 죽고 다른 마왕들도 차례로 죽어 나가자 그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그리고…….
콰직!
서문환은 마지막 마왕을 밟아 죽였다.
이제 남은 건 적귀뿐이었다.
“적귀야, 어쩌냐? 계획대로 안 돼서.”
“이, 이건 말도 안 돼.”
적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몸 또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산공독으로 내공을 흩어놓고 천라절독을 무형지독으로 만들어 중독까지 시켰는데, 어떻게 이리 될 수가…….”
“뭔가 했더니 천라절독이었군.”
서문환은 무표정했다.
믿었던 수하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적귀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다른 놈들이야 원래부터 그런 놈들이었다고 치자. 근데 적어도 너는 나한테 이러면 안 됐잖아. 왜냐? 왜 날 배신한 거지?”
“무, 물론 마제께서는 제 평생의 은인이십니다. 마제께서 은혜를 베푸셨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걸 어찌 잊겠습니까. 하지만 대의가…….”
“대의? 그게 뭔데?”
“모든 마도인의 꿈, 마도천하! 그것만을 보고 30년을 달려왔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천마성 전체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마제께서 이제는 그걸 가로막는 존재가 되어버렸으니… 대체 왜! 결단을 내리시지 않았던 겁니까?”
천마성이 3년을 가만히 있었던 이유.
혈마제의 주화입마, 부하들의 배신 등 다양한 설이 나돌았지만 진실은 복잡하지 않았다.
단지 마제가 움직이지 말라고 했던 것뿐.
서문환은 입을 열어 그 까닭을 말했다.
“그냥 하기 싫어서.”
“예?”
적귀는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그렇잖아. 무림을 발 아래 두면 나한테 뭐가 남지? 평생의 목표를 이룬 뒤의 삶. 그때가 되면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렇지만 대의가…….”
“그것도 그렇고, 솔직히 말하면 난 피를 보는 게 지겨워졌다. 내가 그동안 몇 명이나 죽였지? 내 손에 직접 피를 묻힌 것만 해도 수백? 아니 수천이지. 그 정도인데 무림제패를 위해 죽은 사람은… 수십만이 넘지 않을까?”
적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게 혈마제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극마에 이르면 탈마로 이어진다더니, 마제께서는 확실히 변하셨군요. 단지 그런 이유로 대의를 저버리다니.”
“자꾸 대의, 대의 하는데.”
서문환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하나만 물어보자. 십이마왕을 규합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지? 1년? 2년?”
“주, 주동자는 혼마왕이었습니다. 제가 아니라…….”
“독마왕이 네 오른팔이라는 건 모두가 아는 얘기지. 천라절독을 무형지독으로 만들기까지는 3년 이상이 걸린다. 그 말인즉, 내가 칩거하기 전부터 이날을 준비했다는 건데.”
여기까지 이르자 적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그가 본색을 드러냈다.
“그래! 나도 지존이 돼 보고 싶었다. 나 적마왕이야! 천마성의 이인자 적마왕이라고! 그런데 언제까지고 적귀, 적귀. 지긋지긋한 당신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일을 꾸몄다. 뭐 어쩔 건데!”
적귀가 발악하듯 달려들었다.
“추하다, 적귀야.”
서문환이 대충 손을 내젓자 적귀의 몸에서 머리가 분리되어 떨어져 나갔다.
“그간의 정이 있으니 편히는 보내주마.”
서문환은 적귀를 지나쳐 가서 정면에 위치한 옥좌에 앉았다.
“우욱!”
그가 검은 피를 토해냈다.
“슬슬 천라절독의 기운이 올라오는군.”
3년 전이었다면 이 혼합독에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적귀에게 불운이었던 건, 그동안 서문환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는 거였다.
산공독이 내공을 얼마간 흩었어도, 십이마왕을 상대한 후 천라절독을 몰아내는 게 가능할 정도로 발전이 있었다.
서문환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해독할 수 있는데도,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가만히 있었다.
어느덧 생사의 갈림길까지 왔다.
이젠 정말 조처를 하지 않으면 죽게 된다.
초점 잃은 눈이 난장판이 된 대전을 훑었다.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십이마왕의 시체들이 보였다.
마지막 순간, 내공을 끌어올린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갑자기 모든 게 귀찮아졌다.
내공을 거두자 독기가 전신을 잠식했다.
서문환은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느꼈다.
‘내 한평생, 이룰 만큼 이루었다. 후회할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건 있었다.
‘혈마제의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살았더라도 죽음 앞에서 이토록 공허했을까?’
만약 또 한 번의 생이 주어진다면 그때는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고 싶다.
‘죽음 위에 군림하던 삶은 질리도록 겪어 봤다. 그렇다면 삶 그 자체를 위해 살아보는 건 어떨까?’
그렇게 일생을 보낸 뒤, 죽음을 마주했을 때 어떤 느낌을 받을지…….
하지만 지금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쪽은 그가 선택한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것이 당대의 천하제일인, 혈마제의 최후였다.
* * *
축축한 느낌.
얼굴이 젖은 게 느껴졌다.
얄궂게도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뭐지 이건?’
서문환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분명 난 죽었는데?’
하지만 이 차가운 감촉은 이게 현실임을 뼛속까지 일깨워주고 있었다.
서문환은 눈을 떴다.
놀랍게도 자신은 흙탕물에 처박혀 있었다.
몸을 뒤집어 하늘을 보니 우중충한 잿빛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천라절독에 죽지 않았단 말인가?”
현재까지는 이 설명이 가장 합당했다.
하지만 비 오는 날에 왜 바깥에서 쓰러진 채로 깨어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황당하군.’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봤는데 이곳은 그가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어느 학교의 운동장.
당연히 서문환이 절대로 알 수 없는 장소였다.
그때, 수신이 불안정한 TV처럼 시야가 지직거리기 시작하더니 글귀 한 줄이 눈앞에 떠올랐다.
[동기화에 실패하였습니다.]
“뭐, 뭐야 대체?”
그와 함께, 어떤 영상 같은 게 서문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처음 보는 소년이 달려들어 자길 쓰러뜨리고, 그 위에 올라타 사정없이 주먹을 휘두른다.
그만하라고 소리쳐 보지만 소년은 들은 체도 않는다.
아니, 이걸로도 성에 안 차는지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가서 운동장에 집어 던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건가?’
대강 연결은 되는데 말은 안 된다. 마제가 어린애에게 맞다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어이없어하는 순간, 이를 시작으로 엄청난 양의 기억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크아아악!”
머리가 터질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일단은 여길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동기화에 실패하였습니다.]
알 수 없는 글귀는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 * *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서문환은 빌딩 옥상에서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마성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의 고층 빌딩들이 펼쳐져 있다.
그야말로 마천루.
신화에나 등장할 법한 건물들이 시야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꿈은 아니다.
여긴 가상의 공간이 아니라 실재하는 세계였다.
처음 서문환은 자기가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난 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기가 살던 중원이 아닌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극동의 작은 나라, 그것도 한참 이후의 시대로 이동해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지.’
서문환은 자기 몸을 내려다봤다.
아직 덜 여문 미성년의 몸이다.
완벽에 가깝던 무인의 신체는 온데간데없었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나는 다른 사람의 몸으로 들어왔다.’
긴말 필요 없이 이 설명이면 모든 게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이 몸의 원 주인은 어떻게 된 거지?’
한참이나 생각해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
여전히 찜찜하고 혼란스럽긴 했지만 이제는 달라진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였다.
서문환은 눈을 감았다.
무림인 혈마제 서문환이 아닌, 대한민국의 진수호.
그의 기억이 머릿속 한편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무려 17년이나 되는 방대한 기억이었다.
이를 다 수습하려면 꽤나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그렇게 3일이 지났다.
서문환은 서울 시내를 방황하고 다녔다.
걸인처럼 정처 없이 돌아다녔고 밤에는 노숙자처럼 한데서 잤다.
공중화장실 안.
거울을 본 서문환은 얼굴을 찌푸렸다.
웬 거지꼴을 한 놈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먼저 씻어야겠군.”
서문환은 겨우 사람 행색을 되찾았다.
그는 자기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생각했다.
‘일단 진수호의 기억은 거의 다 흡수했다. 이제 어떻게 할까…….’
이 기억이 없었더라면 이 생소한 세계에서 영락없는 이방인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을 텐데, 덕분에 적응하는 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이대로 훌훌 털고 떠나버린다 해도 얼마든지 지금 시대를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
선택의 기로다.
더러운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서문환은 결심을 굳혔다.
* * *
높은 담.
그 위를 철조망이 덮고 있었다.
진수호가 다니던 학교는 외관만 보면 교도소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경비가 삼엄했다.
밖에서 봐서는 안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고, 통로는 오직 정문 한 곳뿐이다.
‘역시 보통 학교는 아니군.’
서문환은 정문 앞에 섰다.
그는 진수호의 삶을 살기로 했다.
죽음 앞에서 서문환은 혈마제의 삶이 아닌 다른 삶,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생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리고 죽음 이후, 거짓말처럼 새로운 삶이 주어졌다.
여기서 다시 내키는 대로 살아간다면 그건 결국 서문환의 인생 제2막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진수호는… 진수호의 기억은 그가 서문환과는 정반대의 사람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평범한 가정, 평범한 환경, 크게 굴곡 없는 인생.
‘뭐, 아주 평범하기만 한 건 아니지만.’
정말 다른 삶을 살고자 한다면 진수호가 되는 것보다 간단한 건 없었다.
‘이제부터 난 진수호다.’
서문환, 아니 수호는 그렇게 자기최면을 걸었다.
정문으로 들어가자 보안요원이 학생증을 요구했다.
지갑에서 학생증을 꺼내 건네자 보안요원은 수호의 얼굴과 사진을 대조해 봤다.
“잠깐, 수호? 실종됐다는 수호가 혹시 너 아니니?”
“실종이요?”
“3일 전에 갑자기 없어진 뒤로 지금까지 못 찾고 있다던데. 그래, 진수호. 성도 같네. 너 맞지?”
“맞을… 걸요?”
“그, 그래? 그렇다면 이럴 때가 아니지.”
보안요원은 얼른 수화기를 집어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건장한 체격의 남자 한 명이 급히 뛰어왔다.
수호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박형철. D 클래스 담임. 다혈질에 조급한 성격. 딱히 좋은 기억은 없음.’
바로바로 정보가 떠오르는 걸 보면 진수호의 기억이 꽤나 자리를 잡은 듯했다.
“진수호, 너!”
박형철은 수호를 보자마자 소리부터 질렀다.
“이 자식, 어디에 짱박혀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