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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자하크(3)]


“우웅. 잘 잤다.”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며 티르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모처럼 잘 자서 그런지 온몸이 개운한 것이 기운이 팔팔 넘치고 있었다. 꿈자리가 조금 뒤숭숭한 것이 문제였지만 워낙 건강한 정신세계의 소유자인 그에게 그런 것쯤은 별로 대수롭지도 않았다.
“으갸갸갸갸. 으음. 근데…… 이건 뭐지?”
옆구리가 간질간질한 것이 이상해 내려다보니 손바닥만 한 무언가가 품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꼼지락?
“헛! 뭐, 뭐야?”
정체불명의 까만 덩어리들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티르는 크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덩어리들이(?) ‘냐아, 냐아‘ 소리를 내며 그를 향해 꿈틀꿈틀 움직인다. 왜, 왜 이쪽으로 움직이는 거지?
“사, 사, 살아있는 거야?”
티르는 잠시 패닉에 빠졌다. 살아있는 까만 덩어리들이 갑자기 그의 품에서 나왔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조심스러운 의문.
‘설마 내가 낳은 건 아니겠지?’
납작한 배를 한번 보고 꼬물거리며 따라오는 덩어리들을 한번 보고. 그리고 살짝 충격을 받아 현기증을 느끼다가 그는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하라와 슈라 일행이 근처에 누워 자고 있었다.
“하라! 슈라! 일어나아……. 일어나 봐아! 여기, 여기 이상한 덩어리들이 생겼어.”
“으음, 티르메네스님? 깨어나셨군요.”
“얼래? 꼬맹이, 눈 떴구나.”
곤히 잠들어 있던 일행들이 부스럭거리며 눈을 뜨더니 뭔가 놀랍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티르는 방금 전 자신이 발견한 문제의 덩어리들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일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봐봐. 저기 꼬물거리는 것들이 보여?”
“엉? 저게 왜?”
“왜? 왜라니? 없던 것들이 갑자기 생겨났잖아. 그것도 내 품에서 ‘짠‘ 하고 나타났다니까.”
“엥? 푸, 푸하하하! ‘짠‘ 하고 나타나?”
놀란 티가 역력한 얼굴로 덩어리들을 가리키는 티르를 보며 슈라가 배를 잡고 크게 웃어젖혔다. 다른 사람들도 놀라기는커녕 뭐 그런 걸 가지고 호들갑이냐고 말하고 싶은 표정들이다.
“뭐야, 왜 안 놀라는 거야? 나는 놀라자빠질 뻔 했는데.”
“아아, 흙도깨비 새끼들보다는 네가 드디어 잠에서 깼다는 사실이 더 놀라운 것 같은데?”
“흙도깨비 새끼? 그게 뭔데?”
낯선 이름에 정신이 홀려 뒷말은 아예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 말이 가지는 의미심장함을 눈치 채기엔 덩어리들을 향한 그의 호기심이 너무 컸던 것이다.
“별 것 아닙니다. 그저 흙을 좋아하는 커다란 강아지라고 생각하면 되니까요.”
“커다란? 그럼 저게 자란단 말이야?”
시큰둥한 하라의 말에 티르는 눈을 크게 컸다. 덩어리들이 자란단다. 아니 새끼라니까 자라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하라의 입에서 ‘크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는 건 대체 얼마나 크다는 의미인지 쉽게 상상이 되질 않았다.
“아마 우리가 타고 온 카멜루스 정도?”
“에엑! 저 쪼매난 것이 그렇게나 큰다고? 아, 저거 설마 육식동물인가?”
“정확히는 잡식성이다. 흙에서 자라는 거라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지. 물론 배고플 땐 사냥도 한다. 저 녀석은 수컷이고 이쪽이 암컷이다. 어때, 귀엽지?”
새끼 한 마리를 들어 코앞으로 들이밀며 슈라가 익살맞게 물었다. 귀, 귀엽나? 놀라 미처 자세히 살펴볼 정신이 없었던 티르는 그제야 눈앞에서 꼬물거리는 덩어리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정수리에 코딱지만 하게 돋아나 있는 하얀 뿔만 아니라면 딱 갓 태어난 까만 강아지나 다름없었다. 자르르 윤기 흐르는 털이 지나치게 까맣고 동그랗게 뜨고 있는 눈동자가 석류열매처럼 빨갛다는 점만 빼면.
“흐응. 귀엽네. 근데 어미는?”
“……죽었다.”
“왜?”
“불의의 사고.”
“당신이 죽였구나, 슈라?”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
“우리 중에서 당신 성격이 젤 더럽잖아. 당연한 걸 묻고 그래. 보나마나 뭣 모르고 이빨 한번 살짝 드러낸 걸 가지고 마수 취급하며 다짜고짜 칼질부터 했을 걸?”
“……!”
두말할 것도 없이 단박에 결정을 내리더니 티르는 스산한 시선으로 그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를 한번 스윽 훑어 내렸다. 그리곤 그의 손에서 냉큼 흙도깨비 새끼를 빼앗아 들고 홱 돌아선다. ‘나쁜 놈‘이라는 뜻이 역력한 시선을 노골적으로 보내면서.
“나 아니야!”
슈라는 너무 억울했다. 그래서 원망을 담아 말짱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는 하라를 진하게 노려보아 주었던 것이다.
“흥!”
“아, 글쎄 내가 아니라니까!”
“아니시겠지. 에효, 이 어린 것들이 어미도 없이 이제 어떻게 살아가려나. 딱하기도 하지.”
“아악! 미치겠네.”
“보기보다 눈이 날카로운 꼬마군요.”
“이라즈!”
“뭐,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슈라가 억울함에 사무쳐 몸부림을 치는 사이 티르는 흙도깨비 새끼들을 품에 안고 어슴프레하게 밝아오고 있는 사막을 바라보았다. 또 모래. 온통 모래, 모래, 모래. 다 같은 모래인데 어째 잠들 때 보았던 거기가 아닌 것 같다.
“괜찮으신 겁니까?”
“응? 그게 무슨 말이지, 하라? 괜찮지 않으면?”
“꽤 오래 주무…… 아무것도 아닙니다.”
“싱겁긴. 그나저나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야? 이틀? 사흘?”
“반나절만 더 가면 됩니다.”
“에? 정말? 사막을 건너는데 꼬박 보름이 걸린다더니…… 우린 겨우 열흘밖에 안 걸렸어. 이상하네. 우리가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였었나?”
사실은 그보다 더 걸렸다. 다만 그가 오래 잠들어 있었던 것뿐이다. 하라는 그 사실을 알려줄까 말까 고민하다 그냥 묻어버렸다. 그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일을 알려줘 봤자 쓸데없이 고민만 더 하게 될 것 같아서다.
“아, 배고파. 배고파 죽을 것 같다. 왜 이렇게 배가 고프지?”
며칠 내내 밤마다 사라진 것으로도 모자라 방금 전까지 사흘을 내리 꼬박 잠만 잤으니 배가 고플 법도 했다. 굶어죽기 전에 깨어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정도다. 하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아침을 준비하겠습니다.”
카멜루스의 젖으로 만든 부드러운 마실 것을 준비하는 것이 좋을 듯 했다. 하라가 먹을 만한 것을 준비하기 위해 가버리자 혼자 남은 티르는 멍하니 사막을 바라보다 곧 흙도깨비 새끼들을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엄마 없는 하늘아래 너희들만 달랑 남아버렸지만 까짓 이 풍진 세상마저 너희들을 버리지는 않을 거다. 꿋꿋하게 살아가렴. 그런 의미에서 이름을 지어주마.”
떠오르는 해를 보며 티르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그러다 곧 제법 괜찮은 이름을 생각해내고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좋아. 사내 녀석은 슈라 주니어, 계집애는 하라 주니어다. 아, 이름이 그렇다고 해서 성격까지 닮을 필요는 없어. 알았지? 어이, 또다시 보람찬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음하하하!”
상큼한 웃음소리가 휑한 사막의 모래 위를 맴돌고 있었다.
다니무스는 둘레둘레 주변을 돌아보다 냉큼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현상금이 걸린 막시무스 대신 로무네스 일당이 들락거린다는 용병시장을 찾은 참이다.
사실 다니무스는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상대는 용병이다. 노예사냥은 물론이고 가끔 전쟁터에도 나가는 진짜 싸움꾼들.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어 세상의 더러운 면에 빠삭한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다짜고짜 달라붙어 이야기 좀 하자고 졸라봐야 콧등으로도 듣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서 막시무스와 머리를 맞대고 한 가지 궁리한 방법이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별 잡음 없이 로무네스를 막시무스에게로 데려갈 수 있으리라.
“뭐냐, 꼬마?”
“네?”
허름한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삐딱한 자세로 입구의 벽에 기대서 있던 새파란 청년 하나가 그를 불러 세웠다.
“저, 저 말인가요?”
“그래, 너. 여기 꼬마라곤 너밖에 없잖아. 어린 녀석이 여긴 무슨 일로 왔냐? 엉?”
“그, 그게…… 크흠, 의뢰할 일이 있어 용병을 구하려고 왔습니다.”
“의뢰?”
애써 어깨를 펴고 목에 힘을 잔뜩 준 다음 조금 오만한 얼굴로 말하자 청년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에 용기를 얻은 다니무스는 느긋한 어조로 덧붙였다.
“이곳에서는 로무네스 일당이 유명하다지요? 그들에게 의뢰할 일이 있으니 불러주십시오.”
“무슨 일을 의뢰하겠다는 거지?”
“하! 그건 당사자들과 이야기할 문제입니다. 당신이 로무네스가 아닌 이상 끼어들 이유는 없지요. 콜록. 의뢰 내용은 로무네스 본인과 이야기 할 겁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니 잔말 말고 당장 그를 불러오시죠.”
다니무스는 티르의 행동을 흉내 내고 있었다.
짜증이 났을 때 티르는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반쯤 내리깔면서 목소리를 살짝 높인다. 그리고 화가 났을 땐 반대로 목소리가 낮아진다. 그 모습이 어찌나 오만하고 스산한지 웬만한 사람은 그 앞에서 기를 펴지 못했었다.
“크흠. 그, 그럼 잠깐 기다리고 있던지…….”
다니무스의 말에 당황한 청년이 재빨리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다니무스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와, 진짜 효과 있네. 티르 녀석 괜히 그러는 게 아니었구나?”
그 동안 티르에 비해 스스로 강단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이런 상황이 제법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기회가 될 때마다 종종 연습을 해봐야겠다고 다짐하는 그였다. 혹시 아는가? 연습을 통해 새사람(?)으로 거듭날지?
건물 입구에 서서 잠시 기다리자 곧 청년이 다시 나타났다.
그도 조금 낯이 익은, 로무네스 일당 중 하나와 함께였는데 어쩐 일인지 다니무스가 노린 로무네스 본인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이러면 안 되는데……. 로무네스 본인이 아니면 곤란하다. 막시무스와 친분이 있는데다 아칸의 친구인 사람은 로무네스 본인뿐이니까.’
다니무스는 살짝 당황했다. 로무네스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한 탓에 잠깐이지만 어찌해야 할지 방법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그는 곧 티르를 생각하며 불끈 주먹을 쥐었다.
그래, 티르는 노예가 되어 목숨이 위험할 지도 모르는 길을 갔는데 이런 게 뭐 어렵다고 질질 거리랴. 별거 아니다, 다니무스. 그냥 모험을 한다고 생각하자. 이것은 나의 모험이다. 티르가 돌아왔을 때 부끄럽지 않게 훌륭하게 이겨내는 거다. 까짓, 이번 기회에 누구처럼 성질 좀 망가뜨려보지 뭐.
“크흠. 로무네스가 아니군.”
“아, 대장은 잠깐 자리를…….”
“장난하나? 나도 엄연히 의뢰인인데 이 따위로 굴다니. 로무네스가 요즘 먹고 살만 한가보지?”
“아, 아니 무슨 말을……. 끄응. 그런 게 아니라 대장은 잠깐 자리를 비워야 해서 나올 수가 없다는 거다.”
“그래서?”
“그, 그래서 나한테 의뢰 내용을 말해주면…….”
“그때 가서야 로무네스를 데려 오겠다? 그 동안 나는 손가락 빨면서 기다리고 있고? 미친 거 아냐?”
티르나 할 법한 말을 찍 쏴주고 다니무스는 간도 크게 그들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벌써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다. 대담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덜덜 떨고 있는 속사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는 나름대로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인 것이다.
이런 간 큰 짓을 티르는 그동안 어떻게 그렇게 눈 하나 깜짝 않고 해치우면서 살 수 있었던 것인지 새삼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설마 타고난 건가? 유난히 큰 간덩이를 가지고 태어났다거나 한 것이 아닐지…….
‘아버지, 조금 더 애쓰지 그러셨어요. 저도 티르처럼 간이 좀 컸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었답니다.’
다니무스는 아무 죄 없는 아버지 데메네스를 잠시 원망해 보았다.
“크흠. 그냥 기다리라는 건 아닌데…….”
“분명히 중요한 의뢰라고 말했었던 것 같은데? 로무네스는 더 이상 일을 할 생각이 없는 건가?”
“뭣? 건방진……. 끄응. 그런 건 아니다. 으음, 잠깐만 기다려봐라.”
“흥!”
“아, 그런데 어느 가문에서 온 거지?”
“알 것 없다. 나는 로무네스에게만 말할 생각이니까.”
로무네스에게만 말해야 한다. 일단은 의뢰 핑계를 대긴 했지만 진짜 용건이 있는 것은 그가 아니라 막시무스였으므로.
“쳇, 거 되게 까다롭게 구네.”
로무네스 일당 중 하나가 허탈한 얼굴로 사라지자 입구에 서있던 청년이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딴에는 어린 녀석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그 바람에 다니무스는 속으로 찔끔 놀라며 더 바짝 긴장하게 되었다.
여기서 틈을 보이면 배에 칼질이라도 당할 것만 같았다.
그건 확실히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티르라면 ‘사내니까 흉터 하나쯤 있는 게 더 멋져 보이잖아!’라고 지껄이겠지만 천만의 말씀이요 만만의 콩떡이다.
‘아픈 건 딱 질색이야. 쌈질도 싫고 칼은 더 싫어. 그냥 책이나 보는 게 좋다니까. 신이여, 제발 제가 성실한 서기관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상한 방향으로 꺾어지는 삐딱선만은 절대로 타고 싶지 않답니다.’
다니무스는 진심으로 애원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투덜거리며 사라졌던 사내가 짧은 수염을 기른 장년인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다행히 다니무스는 그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언젠가 티르와 함께 갔었던, 판크라티온 경기장에서 보았던 그 로무네스였다.
“자네가 나를 보자고 했다지?”
짧은 갈색 수염이 자잘한 턱을 쓰다듬으며 그가 물었다.
“의뢰할 것이 있다고 들었다.”
“그렇습니다.”
“으음. 내 외출을 미뤄야 할 만큼 중요한 의뢰라고?”
“대단히.”
“허! 대단히? ……따라오게.”
굳은 얼굴로 또박또박 대답하는 폼이 놀라웠는지 로무네스는 두말 않고 그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로무네스를 따라나서며 다니무스는 이제 막 자신만의 전쟁이 시작되려함을 깨닫고 있었다.
“슈라, 손!”
-냐아!
“아니, 그게 아니잖아. 이 새끼야, 손을 내놓으랬지 누가 핥아 달래? 바보가 되려는 거야?”
“쿨럭!”
“한 눈 팔지 말고 이번엔 작은 하라가 하는 것 좀 잘 봐봐. 하라, 손!”
-냥!
“아이고, 우리 이쁜 하라. ……봤지?”
-끼이…….
“크흠.”
‘우연히‘ 같은 이름을 갖게 된, 두 마리의 흙도깨비 새끼들을 바라보는 슈라와 하라, 두 사람 사이에 언제부턴가 차마 말로는 못할 난감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처음, 티르가 심사숙고 끝에 그 덩어리들의 이름을 지었다고 발표했을 때는 별 감정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설마하니 그것들의 이름이 슈라와 하라였을 줄은 그들로서도 전혀 몰랐었으니까. 그런데 슬슬 이름이 불리기 시작하자 없던 감정들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듯 하더니 결국 반나절 만에 희비가 엇갈리기 시작했다.
“아니 왜 하필 이름을 그딴 식으로 지은 거냐고! 내 새끼도 아닌데 왜 그놈이 슈라 주니어가 되어야 하냔 말이다. 엉?”
“이름 가지고 쪼잔하게 굴지 마. 애들 엄마를 죽인 주제에 미안하지도 않은 거야?”
“아, 글쎄 내가 아니라니까!”
“어쨌거나 그 이름이 좋아. 잘 어울리거든. 그리고 사실은…… 이 녀석이 그 이름으로 지어달라고 부탁했어.”
“부탁씩이나? 너, 설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쳇, 안 속네.”
티르는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혀를 찼다. 일부러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도 안 먹히다니. 보기보다 눈치도(?) 빠른 인간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름은 이미 지어버렸고 흙도깨비 새끼들은 그 이름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버린 것을.
“이봐, 주인. 하 투란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멀었어?”
“거의 다 왔습니다. 저 언덕만 넘으면 관문이 보일 겁니다.”
“호오, 드디어!”
지평선 즈음에 낮은 언덕이 하나 있었다.
지겹도록 이어지는 황금빛 모래를 벗어나 단단한 땅을 밟은 지 이제 겨우 서너 시간째. 비록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모래만 밟다 마침내 곱게 쌓인 흐릿한 빛깔의 흙을 밟으면서 느낀 감동을 잊기엔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아, 온 몸 구석구석에서 모래가 버석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야. 씻고 싶어 미칠 거 같아. 하 투란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물을 찾아 뛰어들어야지.”
“동감!”
“지화자!”
“얼쑤!”
똑같이 사막을 지나왔는데 바라는 것이 다를 리가 있나.
그들은 하나같이 물에 목말랐고 목욕을 갈망하고 있었으며 나아가 음식다운 음식을 원하고 있었다. 가볍게 씹을 수 있는 부드러운 음식.
“카멜루스의 젖은 질렸어. 딱딱한 빵도 끔찍하고 육포는 혐오스러울 지경이야. 대체 왜 우리 중 누구도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 줄 모르는 거지?”
“그거야…… 전하께서 음식을 못 만드시는 것과 같은 이유가 아닐까요?”
“젠장! 다음부터는 요리사도 하나 데리고 다녀야겠다.”
생각해 보니 다들 칼질이나 하는 무사들이었다. 슈라 일행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가장 어린 티르까지도 칼질은 배웠어도 빵을 굽는 법을 배운 적은 없는 것이다.
덕분에 그들은 사막을 건너는 내내 미리 준비해간 육포 나부랭이나 카멜루스의 젖 혹은 말린 과일 따위만 먹어야했다. 사실, 누군가가 요리를 할 줄 알았어도 그 솜씨를 발휘할 일은 없었을 거다. 모래만 있는 그 사막에서는 말린 낙타 똥이라도 없는 한 달리 불을 피울 방법이 없으니까.
그래서 모처럼 생겨난 오아시스에 머물면서도 그들은 아예 불을 피울 생각도 안 했었다. 마르지 않아 불도 붙지 않을 나뭇가지를 꺾는 것이나 마르지 않은 낙타 똥에 불을 붙이겠다고 덤비는 것이나 어리석기는 매 한가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빨리 가자!”
티르는 잔뜩 신이 나 환호성까지 내지르며 카멜루스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런 그의 뒤를 하라가 바짝 따라붙었고 언제나 그렇듯 거머리 같은 슈라 일행이 냉큼 뒤를 따랐다.
-하 투란.
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달려가는 그들 무리를 자하크는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티르를 보고 있다고 해야 옳다. 그의 시선을 잡아끄는 존재는 샤나메를 품고 있는 그 아이가 유일했으므로.
-무엇이 있나.
메마른 흙 위에 세워진 작은 왕국의 이름을 되 뇌이다 그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낯선 곳은 아니다. 그러나 익숙하지도 않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단지 그뿐.
자하크는 고개를 들어 점점 멀어지는 아이의 그림자를 좇았다.
굳이 따라가지 않아도 샤나메가 있는 이상 그의 움직임을 놓칠 일은 없다. 멀든 가깝든 그것의 존재는 늘 생생하게 와 닿고 있었고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샤나메의 힘을 그 자신에게로 귀속시킬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럽게 고민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이유는…… 역시 걱정되기 때문.
-곁에서 지켜야 할까.
아이는 소중한 존재였다. 왜냐하면 씨앗이 완전히 부화할 때까지 지켜보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샤나메가 그를 선택한 이유도 알고 싶다. 그것을 알아내면 잃어버린 기억이 돌아오거나 적어도 기억을 잃어야 했던 이유를 알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화할 때까지는 지켜야지.
아이는 아직 약하고 지켜줄 만한 보호자도 갖지 못했다(?). 그러니 따라갈 수밖에 없다. 더 가까운 곳에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 이건 절대로 핑계 같은 것이 아니다.
한참을 생각하다 자하크는 말을 몰아 티르 일행이 남기고 간 자국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푸석푸석하게 마른 흙이 뿌옇게 날아올랐다 가라앉는다.
티르의 바람처럼 뛰어들만한 물을 발견하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이 땅엔 물이 없다. 메마른 흙과 건조한 하늘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천천히 움직인 덕분에 그는 한참만에야 하 투란으로 들어가는 관문 앞에 설 수 있었다.
색이 엷은, 흙을 다져 만든 높은 성벽의 문이 반쪽만 열려 있다. 그 사이로 보이는 풍경에 문득 눈이 시리다. 둥글고 푸른 지붕들과 하얀 벽. 곳곳에 붙어있는 색색의 타일들. 그리고 신들이 있다는, 천공을 향해 입을 벌린 마스지드(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는 곳).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과거가 없다는 건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다는 것. 처음부터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진실.
-이곳에 신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