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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자하크(3)]


해가 기울고 있었다.
잠든 티르 때문에 천천히 움직인 터라 그다지 많이 이동하지 못했다. 하 투란으로 접어들려면 꼬박 이틀을 더 가야 한다. 그리고 그 전까지 저 귀찮은 패거리들을 떼어내야 주인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밥을 먹으면서도 시끄러운 슈라 일행을 힐끗 살피다 하라는 이내 하 투란에 있는 주인을 떠올렸다.
‘아십니까, 그분의 기다림은 꽤 오래 되었답니다. 매일매일,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작은 왕자. 왕좌를 다투는 일 따위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만큼.’
기뻐할 주인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웃기는커녕 미소조차 짓는 일이 드믄 주인이 유일하게 미소를 보이는 때가 바로 작은 왕자의 이야기를 할 때였다. 진정으로 행복하다는 듯 가끔 짓는 그 미소는 황홀하도록 아름다웠다.
‘곧 만나게 될 것입니다. 곧! 그리고 당신께서는 역사상 가장 강한 우리들의 왕이 되시겠지요.’
순수한 기쁨의 미소가 하라의 입가를 맴돌다 사라졌다. 그때였다. 오아시스 전역을 감싸고 있던 그의 감각이 이상한 움직임을 느끼고 바쁜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사악 사악…….
거대한 무언가가 배로 모래를 미는 소리. 사막 쪽에서 오아시스를 향해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슈라 일행도 느꼈는지 부산스럽던 움직임을 딱 멈추고 사막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키힝 키힝…….
근처 나무에 묶어두었던 카멜루스들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이상하다. 이 사막에 저렇게 거대한 생물이 살고 있었던가?’
물이 없는 사막이었다. 선인장마저도 드물어 작은 것들이 간신히 목을 축이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감각 안으로 들어온 것은 웬만한 카멜루스들보다 덩치가 더 크다. 그렇게 큰 것이 어떻게 이 메마른 사막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드드드득!
모래를 지나 단단한 땅으로 접어들었다. 놈은 땅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놈이 지나고 있는 곳의 나무가 크게 휘청이며 흔들리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온다!’
하라는 벌떡 일어나 티르의 앞을 막아섰다. 그런 그를 믿는 건지 슈라 일행은 다시 주저앉아 먹던 밥을 마저 먹기 시작한다.
“이, 이렇게 그냥 있어도 되는 걸까요, 전하?”
“괜찮다, 자일로스. 저놈이 알아서 하겠지. 설마 우리에게까지 기회가 오겠나? 밥 먹는데 먼지나 날리지 말았으면 좋겠구만.”
태평하게 떠드는 슈라 일행에게 하라는 이제 살인 충동마저 느끼고 있었다. 하 투란으로 접어들기 전에 없애는 것이 여러모로 낫지 않을까?
콰작! 우지끈!
고민하는 사이 근처에 있던 나무 하나가 기우뚱하니 넘어간다. 뿌리째 들려 넘어간 자리에서 커다란 흙더미가 불쑥 솟아올랐다.
-끼이잉.
높고 길게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 흙더미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자 사방으로 흙이 튀면서 산더미처럼 솟아올랐던 흙더미의 크기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날아오는 흙덩어리들을 간신히 피한 하라가 다시 놈을 찾았다. 삐죽 솟아나온, 정수리 부근의 하얀 뿔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곧 흑단처럼 까만 털과 빨간 눈동자를 가진 커다란 짐승 하나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쌕쌕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보였다.
“검은 흙도깨비?”
“얼래? 저놈이 왜 여기서 나타나?”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검은 흙도깨비를 보며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흙도깨비는 양분이 풍부한 곳에서 자라는 식물들의 뿌리를 먹으면서 사는 동물이다. 물론 가끔 사냥을 하기도 하지만 그건 번식기 때나 있는 일인데다 그때 암컷들은 이동을 하지 않는다.
물론 번식기 때의 흙도깨비들은 암수를 막론하고 대단히 사나워져 크기를 떠난 모든 동물들을 사냥대상으로 삼지만 다행히도 지금은…….
“어이, 요즘이 저놈들 번식기였던가?”
“아마도.”
“자일로스, 이라즈…….”
“예, 전하.”
“……튀어!”
놈은 번식기를 맞은 흙도깨비였다. 덩치로 보아 암컷이 분명하다. 어쩌면 새끼를 배고 있을 지도 모르는.
-크르르르.
“번식기를 맞은 암컷이 왜 싸돌아다니고 지랄이야! 어어, 오지 마.”
“물러나라, 짐승!”
득득 땅을 긁다 힘차게 도약해 달려드는 흙도깨비를 피해 슈라 일행은 우르르 물러섰다. 그러나 하라는 단 한 발짝도 물러날 수가 없었다. 아직도 곤히 잠들어 있는 티르가 바로 등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멈추지 않으면 베겠다!”
“어어, 이봐! 함부로 칼질하지 마. 그놈은 새끼를 배고 있을 거란 말이다. 자고로 새끼를 가진 어미는 죽이는 법이 아니야.”
“흥!”
알게 뭔가. 당장이라도 작은 왕자가 짓밟힐 지경인데 그딴 것이 중요하게 여겨질 성 싶은 건가? 흙도깨비는 이성을 잃을 만큼 굶주려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아마 작은 왕자는 뼛조각 하나도 제대로 못 추릴 만큼 말끔하게 잡아먹히고 말리라.
붉은 눈동자 가득 활활 타오르는 엄청난 식욕을 느끼며 하라는 조용히 힘을 개방했다. 미물일망정 감히 귀한 존재를 노리다니.
“어리석음도 죄란다, 짐승.”
“멈추라니까! 자일로스, 카멜루스들을 풀어줘라! 그러면 놈은 방향을 바꿔 카멜루스들을 따라갈 거다.”
“하지만 전하…….”
“빨리!”
슈라가 버럭 고함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한발 늦어 흙도깨비는 벌써 하라의 코앞에 도착해 있었고 곧 그가 움직였다. 땅을 박찬 흙도깨비가 뿌연 먼지를 뿌리며 몸을 날렸다.
-끄아아앙!
“가라!”
하라의 손끝에서 돋아난 날카로운 무언가가 그림처럼 머리 위로 뛰어오른 흙도깨비의 목덜미를 스쳤다. 스칵! 후두둑! 진한 핏물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놈은 허공에 뜬 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쿵! 둔한 소음을 동반하며 이미 죽은 흙도깨비가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촤악!
떨어져 내리는 순간 두 동강난 몸이 하라의 발치에 길게 늘어졌다. 티르가 누워있는 곳과 딱 한 걸음 떨어진 곳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막아낸 셈이다.
“너어!”
“시끄럽습니다. 아까운 생명 운운하려거든 닥치고 달아나던 길이나 마저 달아나십시오.”
“끄응. 제길! 뻣뻣한 놈 같으니라고. 누굴 바보로 알아? 어쩔 수 없었다는 건 나도 알아.”
“알면 됐습니다.”
냉랭하게 쏘아붙인 후 하라는 티르를 안아들어 다른 자리로 옮겼다. 그 사이 묵묵히 지켜보던 이라즈가 죽은 흙도깨비의 시체로 다가가더니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부욱! 망설임 없이 죽은 놈의 배를 갈랐다.
“뭐하는 짓…… 어?”
-냐아…… 냐아…… 끼이이…….
“새끼는 아직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두 마리는 살았습니다.”
“어, 그렇군. 살아있었구나.”
흙도깨비의 뱃속엔 세 마리의 새끼가 들어 있었다. 두 마리는 건강하게 살아있었지만 나머지 한 마리는 죽었다. 양수 주머니를 터뜨려 새끼를 꺼낸 이라즈는 튜닉 자락으로 대강 핏기를 닦아준 다음 꼬물거리는 놈들에게 카멜루스의 젖을 먹였다.
굳은살이 박인 크고 투박한 손이 어찌나 섬세하게 움직이는지 슈라도 자일로스도 한동안 말을 잊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그의 손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살짝 감동을 받은 슈라가 문득 말했다.
“어째 네가 엄마 같다, 이라즈.”
“익숙한 것뿐입니다. 제 동생들이 몇이나 되는지는 전하께서 잘 아시잖습니까?”
“하긴. 그러고 보니 넌 산 도둑 같은 남동생만 넷이었지? 위로는 형이 둘이나 더 있고.”
“산키니 가문의 칠형제는 유명하잖습니까, 전하. 하나같이 용맹하고 충성스런 전사로 이름이 높지요.”
“성질들도 더럽고.”
“물론 성질들도 하나같이 더럽…… 크허험.”
“그래서 이라즈가 여자 보기를 황금같이 하게 된 거다, 자일로스. 사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세상에 여자라는 존재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거든. 이건 비밀인데, 저놈은 나중에 결혼해 딸만 낳겠다고 모두 앞에서 선언했었다.”
당연히 딸만 낳을 거다. 덩치만 큰 사내 녀석들 따위 뭐 이쁘다고 줄줄이 낳아 기르겠는가. 이라즈는 가차 없이 사실을 인정했다. 산키니 가는 유명한 무사 가문이었다. 모친은 막내를 낳은 것을 끝으로 일찍 돌아가셨고 집안엔 온통 아버지가 거느린 무사들만 득실거렸다.
게다가 고만고만한 아들 형제만 일곱.
그렇다보니 어려서부터 집안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밥 한 끼를 먹으려 해도 치열하게 싸워야 가장 맛 나는 것을 얻을 수 있었고 조금 더 먹을 수 있었다. 뿐인가? 놀이는 당연히 진검을 들고 싸우는 병정놀이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생일 선물은 무사들이 사 나르는 군마나 새로운 무기 혹은 갑옷 따위였다.
그러다 조금 컸다 싶었을 때 그는 형제들과 나란히 사내놈들만 득실거리는 사관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그땐 정말로 세상엔 자신들과 같은 사내들만 있는 줄 알았다.
“레이디들의 존재를 안 순간 저는 드디어 인생의 빛을 발견한 겁니다. 처음으로 살아있길 잘했다고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크윽. 감동스럽다, 이라즈. 나한테 여동생만 하나 있었어도 너한테 줬을 텐데…….”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무슨 뜻이냐?”
“그저 제 취향을 고려해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전 이쁘고 ‘성격도‘ 좋은 여자가 좋습니다.”
“……!”
‘성격도‘를 유난히 강조하며 이라즈는 그를 통해 슈라가 무언가 깨닫는 바가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진심으로. 그러나 돌아온 슈라의 대답은 그런 그의 기대를 단박에 폭삭 깨놓고 말았다.
“너도 장가가기 대단히 어렵겠다, 이라즈. 쯧쯧. 어쩌다 눈이 저렇게 높아졌을까 그래.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동안 좀 덜 예쁜 레이디들과 노는 건데. 아무래도 내 죄인가 싶어 마음이 조금 아프구나.”
“쿨럭!”
누가 그를 말릴 수 있을까. 역시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이라즈였다.
오아시스에도 어느덧 밤이 내렸다.
작은 포식자들이 어미 흙도깨비의 시신을 탐욕스럽게 처리하는 동안 하라는 꿈쩍 않고 앉아 티르를 지키고 있었다. 이틀째 계속 잠들어 있긴 했지만 그대로 또다시 사라지지 않으리란 법이 없어 그는 밤마다 긴장 상태로 티르를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티르를 노리고 있는 슈라 일행도 자연스럽게 늦게까지 잠들지 않고 이쪽을 살피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오늘은 생뚱맞은 사막의 오아시스를 발견한데다 사막에 있어서는 안 되는 흙도깨비까지 본 터라 모두들 신경이 더 곤두서 있었다.
‘대체 왜 잠들게 된 것일까? 정말로 이 오아시스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라는 발밑의 흙을 차며 생각했다. 모래가 아닌 흙. 그것이 어딘가에서 옮겨진 것이라면 갑작스럽게 흙도깨비가 등장한 일도 설명할 수 있다. 흙속에 잠들어 있던 놈이 흙과 함께 통째로 옮겨졌다면 이상한 일도 아닐 테니까.
‘흙이라……. 설령 이 오아시스가 작은 왕자의 작품이라고 해도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물이 생겼고 흙이 옮겨졌다. 어떤 것이 진짜 그의 힘인지 알 수 없다.’
엘룬의 혈통을 이은 자들은 대부분 물을 다루는 힘을 타고난다고 했다. 아무리 능력이 없어도 사막에서 물을 찾는 일 정도는 쉽게 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인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작은 왕자가 가진 힘도 물을 다루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가 단지 엘룬의 왕실 혈통만 이었다면 진즉부터 그렇게 단정 지었으리라.
‘그러나 작은 왕자는 주인과 쌍둥이다. 주인이 순수한 어둠의 힘을 타고난 이상 그도 왕의 다른 힘을 이어받았을지 모르는 일.’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 아직은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 없었지만 그의 예감이 다른 무언가가 더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작은 왕자에게 아주 작은 힘이라도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주인과 그는 곧 목숨을 걸고 왕좌를 다투어야 할 테니까. 그것은 의무였다.
‘설령 그리 된다 해도 나는 일족의 하나로서 당신의 힘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위대한 전투를 지켜볼 것입니다. 우리는 보다 더 강한 왕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잠든 티르의 얼굴 위로 하 투란에 있는 주인의 얼굴을 겹쳐보며 하라는 내심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의 힘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야 말겠다고.
하라가 다짐을 굳히고 있을 때 티르는 다시 꿈을 꾸고 있었다.
마차를 타고 넓은 초원을 달리다가 붉은 비를 맞는 꿈은 언제나 그렇듯 ‘도망가‘라고 외치는 처절한 외침을 끝으로 흐릿해졌다. 평소라면 그 즈음 잠에서 깨어났을 텐데 오늘은 달랐다.
-짜르르릉…… 짤랑!
꿈의 끝에서 아련하게 울리는 맑은 쇳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그림자가 나타난다. 길고 날카로우며 아름다운 그 무기의 이름을 티르는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창(槍)! 너는 창이야.’
확신을 가지고 외치자 뿌옇던 그림자가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밝아졌다. 지상으로 막 내리꽂히는 번개를 잘라낸 듯한 모양의 새파란 날이 일곱 개. 분노하는 신의 대리인을 상징하는, 섬세한 드래곤이 조각된 긴 손잡이. 손잡이의 끝엔 각 대륙을 상징하는 아홉 개의 금륜과 풍요를 기원하는, 금으로 만든 아름다운 포도송이가 매달려있다.
그 화려하면서도 전율할 만큼 강한 기운을 내뿜는 무기가 유혹하듯 그를 향해 맑은 소리를 뿌리고 있었다. 손을 내밀어 나를 잡아, 나를 잡아, 나를 잡아…… 세상을 가져라, 세상을 가져라!
마음 깊은 곳을 향해 쩌렁쩌렁 외쳐대는 소리를 들은 듯 했다.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기만 하면 원하는 것을 주겠노라며 누군가가 은밀하게 유혹하고 있었다. 달콤한 독, 매력적인 위험.
그 앞에서 티르는 굴복하고 싶었다. 기꺼이 손을 내밀어 그 힘을 얻고 싶다. 그러면 탄탄을 해치우는 것쯤은 일도 아니겠지? 바라를 구하고 막시무스를 구해내는 것쯤은 가장 쉬운 일중 하나가 될 것이다.
원하고 있다!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강렬한 욕망 속에서 티르는 결국 손을 내밀었다. 빛을 뿌리는 창을 향해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어 마침내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밀려든 거센 힘의 파장이 우르릉 소리를 내며 그의 몸을 매섭게 꿰뚫고 사라진다.
-차랑!
“컥!”
갑자기 시야가 확 밝아졌다. 꾸, 꿈이었나?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티르는 황급히 손을 눈앞으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크고 단단한 누군가의 손이 같이 딸려왔다.
“자하크?”
손가락 끝까지 검은 천으로 휘휘 감은 모양새를 보고 티르는 단박에 그 이름을 기억해냈다. 아니나 다를까, 묵묵히 앉아 손을 내주고 있던 자하크가 가만히 그를 돌아본다.
-꿈을 꾸는 것처럼 보였다.
“하아, 맞아. 후우, 죽는 줄 알았어. 꿈 치고는 너무 생생했거든. 그런데 언제 왔지, 자하크?”
-……방금.
“아아, 그랬구나. 그런데 나 왜 이렇게 피곤한지 모르겠어. 자꾸만 잠이 와. 하암~“
-자라. 지켜주겠다.
“정말?”
반쯤 눈을 감으면서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티르는 안심하고 다시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자하크?”
-……말해라.
“얘기 좀 해봐.”
-어떤?
“아무 얘기나. 예를 들면…… 기억에 남는…… 모험…… 같은 거. 으음…….”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감고 죽음 같은 잠속으로 스며들면서 티르는 잠시 무슨 말인가를 낮게 웅얼거렸다. 그러나 곧 그마저도 잦아들면서 사위는 다시 본래의 고요함을 되찾았다.
-기억에 남는?
자하크는 무심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기억이라…… 기억? 한참을 생각하다 그는 맨 처음의 순간을 떠올렸다.
-눈을 떴을 때, 나는 혼자였다.
검은 하늘. 하늘을 향해 쪼개진 날카로운 바위 산. 그리고 그. 오직 그 혼자뿐이었다.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나는 혼자였고 그리고 잠시 후 샤나메를 느꼈다.
왜 그 자리에 있었는지, 왜 혼자인지, 왜 존재하고 있는지…….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 자신의 것인 듯한 짧은 이름 하나가 기억하는 것의 전부. 갑자기 솟아난 사람처럼 과거의 기억 한 조각 갖지 못한 채 그는 혼자 남아 절망하고 있었다.
-구원의 빛처럼 샤나메를 느꼈다. 오직 그것만을 느낀다는 것은 그것이 내게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는 뜻일 거다. 중요한 것이라면…….
가져야 한다. 그것을 가져 계속, 계속 살아있는 이유를 알 수 있다면 가져야 할 것이다.
자하크의 황금빛 시선이 잠든 티르의 얼굴위로 내려앉았다. 샤나메는 그 안에 잠들어 있다. 그는 누구보다 선명하게 그것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아직 부화하지 않은 씨앗이 아이의 작은 몸속에서 반짝반짝 빛을 뿌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대로 가져야 하나 아니면 부화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손만 내민다면 씨앗을 얻을 수 있다. 샤나메는 마치 그의 일부처럼 친숙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부른다면 금방이라도 돌아올 힘처럼 느껴진다. 그런데도 자하크는 섣불리 손을 내밀 수 없었다.
-우연은…… 아니겠지.
샤나메가 선택한 아이다. 우연은 아닐 것이다. 분명히 이유가 있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어쩌면 그 이유가 자신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될지 모르는 일이다.
-좀 더 지켜봐도 좋을까?
마치 의견을 묻듯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빛 씨앗을 향해 자하크는 가만히 물어보았다. 그러자 순간 티르의 미간에 생겨난 세 개의 황금빛 불꽃들이 작게 타오르다 가라앉았다. 갑자기 기분이 유쾌해졌다. 더 이상은 지루하지 않게 되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