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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24화)
6. 실마리를 찾아서… (3)/

“어서 오너라, 아가. 다음 차례는 할아비란다.”
“흡!”
황제폐하는 물론이고 여전히 신경질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황비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인 다섯 왕야들과 파티에 참석했던 귀족들이 천막을 치고 길게 둘러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었다. 맙소사. 애초에 완벽하게 준비를 해두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제.대.로.일 줄은 정말 몰랐었는데… 예상 밖의 상황에 놀란 나는 입을 쩍 벌리고 선채 한동안 움직이지를 못하고 있었다. 나 정말 이런 곳에서 대련을 해야 하는 거야?
“오호호, 오딜란의 아들이 제법 뛰어나다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는데 오늘에야 확인을 하게 되는군요. 저는 기대가 아주 크답니다, 폐하.”
“흐음, 아마 우리는 실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오. 저 녀석은 보기보다 튼튼하거든.”
큰소리로 말한 황제는 나를 향해 히죽 웃어 보이곤 기대가 크다고 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나마나 이 시끌벅적한 구경꾼들을 모아들인 건 그가 분명해 보였다. 솔직히 그가 아니면 누가 있어 또 이런 일을 간단히 벌일 수 있겠는가?
“아주 작정을 하신 거요?”
“흐으, 오해하지 마라. 설마하니 내가 불러들였겠냐? 오전에 안부를 물으러 갔다가 우연히 대련 얘기를 했더니 저 노망난 영감이 글쎄 죄다 불러들이더라?”
“하! 어련하시겠소.”
킬은 어색하게 웃는 사왕야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한숨과 함께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곤 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큰소리를 내어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한방에 보내버려도 된다. 아비의 자존심이 네 양어깨에 걸려있음이야.”
“……”
이 대련과 그의 자존심 사이에 무슨 심각한 관계가 있다고 그런 어이없는 요구를 하는 것이지? 그러다 만약에 내가 지기라도 하면 무슨 소리를 하려고? 눈에 힘을 팍 주고 진지한 얼굴로 하는 말이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안 그래도 가뜩이나 기분이 엉망이었던 나는 이 기회를 잘 이용해서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보기로 결심했다.
“자아, 그럼 가볼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형님.”
“크흐흐, 아무렴 내가 네 아들내미에게 얻어맞기라도 할까봐?”
“쯧, 난 분명히 주의를 해주었으니 혹시라도 나중에 원망하기 없기요.”
아주 많이 배려준다는 듯 말하는 킬에게 사왕야는 가차 없이 콧방귀를 날렸다. 그리곤 마치 자랑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뚜두둑’하는 뼈 부딪치는 소리를 내면서 한바탕 요란하게 몸을 풀더니 곧 나를 이끌고 연무장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때까지 나는 전혀 위기감 없는 얼굴로 멀뚱히 서 있었다. 그러다 장난처럼 검을 한손에 들고 질질 끌면서 그를 따라 연무장 한가운데로 걸어갔는데 그걸 본 황제는 또 엉뚱한 소리를 해서 사왕야와 나를 기막히게 했다.
“아자, 우리 아기 이겨라! 아무 걱정 말고 그 망할 자식을 절단 내버려!”
“…!”
“큭! 젠장, 저놈의 영감탱이가 나한테 무슨 원수를 졌나. 왜 사사건건 시비야?”
상당히 열 받았는지 그는 얼굴까지 벌겋게 붉히고 이를 거칠게 갈아 부쳤다. 그리고 동시에 방금 전까지는 없던 맹렬한 살기를 내뿜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 이러다 오늘 완전히 죽어나가는 거 아냐?
“자아, 그럼 시작해 볼까?”
“……”
황제의 한마디에 자극받은 사왕야는 간단하게 걸친 갑옷과 손에 낀 건틀릿을 한번씩 두드려 보인 다음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을 던지며 천천히 검을 들어올렸다. 나, 이러다 오늘 완전히 죽어나가는 거 아냐? 그의 기세가 워낙 살벌해 보여서 나는 슬며시 흉갑을 챙겨 입었다. 그런 다음 숨을 한번 크게 들이키고 그와 마주서서 검을 맞들었다.
“최선을 다해서 덤비거라.”
“아, 네.”
싫다고 했다간 사단이 날 것 같아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정말로 온 힘을 다해 막아보기로 결심했다. 막 공격 자세를 잡은 사왕야가 왠지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풀풀 풍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진짜로 죽이려는 거 아냐?’
굳은 얼굴,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빈틈없는 자세… 어쩌면 진짜일지도 몰라.
따끔거리면서 신경을 자극하는 매서운 살기를 느끼며 나는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후끈거리는 느낌과 함께 일어난 거센 힘이 온몸을 한바퀴 돌면서 잊고 있던 감각을 서서히 일깨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왠지 완벽해진 것 같은 기분. 그 쾌감과도 같은 짜릿한 느낌이 나를 유쾌하게 만들고 있었다.
“오너라!”
“…차앗!”
묵직하게 외치는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튕겨지듯 달려 나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면서 검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카가가가… 캉!
“크읏! 제법인데…”
“왕야께서도 제법이에요.”
맞부딪친 검에서 불꽃이 튀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터져 나오는 순간 우리는 다시 한번 더 칼질의 교환한 다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떨어져 한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직후 사왕야는 내 검 끝에 맺혀있는 붉은빛 마나를 보고 히죽 웃으며 칭찬 비슷한 말을 해주었다. 그래서 나도 그의 검 끝에 희미하게 맺혀있는 우윳빛 마나를 보면서 그대로 칭찬을 돌려주었는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미간이 꿈틀하더니 갑자기 마나의 길이가 한 뼘이나 길어지는 것이었다.
“과연 저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한눈에 반할만 하구나. 좋다, 아주 좋아. 그런 의미에서 이젠 봐주지 않을 테니… 자아, 다시 오너라.”
“조심하셔야 할 걸요?”
검에 마나를 더 주입하면서 나는 진심어린 충고를 해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쏘아진 듯 빠른 속도로 접근해 아래에서 위로 똑바로 올려 그은 다음 한바퀴 돌아 정면에서 내리꽂히는 그의 검을 막아냈다. 요란한 폭음이 고요한 연무장을 가득 메우고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어디 이것도 받아 보려므나.”
날을 맞댄 상태로 검과 함께 공중에서 수평으로 몸을 한바퀴 돌린 그는 땅에 발을 딛기도 전에 똑바로 팔을 내뻗어왔다. ‘훅’하는 바람과 함께 마나가 가득 실린 검이 정면에서 찌르고 들어온 것이다. 나는 순간 허리를 뒤로 젖혀 검을 피해낸 다음 그대로 재주넘기를 해 다시 그의 검을 짓쳐갔다. 까강! 파앙! 캉!
서너 번의 공격을 교환한 후 나는 이제 끝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결 신중해진 표정으로 자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리는 거의 동시에 튕겨져 나가 서로를 죽일 듯 검을 내뻗었는데 그의 살기에 반응한 내가 그만 참지 못하고 잠깐 마나를 제어하지 못하는 바람에 생각보다 더 큰 힘이 검에 실려 버리고 말았다.
즉, 내가 내뻗은 검이 그의 검을 튕겨내고 그마저도 모자라 산만한 그의 몸을 저만치 멀리 떨어진 천막 앞까지 날려버린 것이다.
쾅! 풀썩!
“헉!”
순간적으로 ‘아차’ 싶어서 황급히 마나를 흩어 버리긴 했지만 이미 한발 늦어 그는 모질게 날아가 천막 바로 앞에 놓여있는 기다란 탁자와 함께 거칠게 내동댕이쳐졌다.
“아, 하필이면…”
그가 탁자와 함께 뒹구는 것을 보고 나는 바짝 긴장했다.
하얀 천을 두른 그 탁자위엔 이제 막 시종이 황제폐하의 갑옷을 전시물처럼 폼 나게 나란히 늘어놓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것을 사왕야가 온몸으로 깔고 뭉개버린 것이다. 예상외의 결과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폐하의 갑옷을 뭉개버렸기 때문인지 가뜩이나 조용했던 장내는 그야말로 쥐 죽은 듯이 고요해져 있었다.
그 바람에 막 사고(?)를 쳐버린 나는 더더욱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동안 발만 동동 굴러대야 했다. 그러다 내동댕이쳐진 사왕야가 웬일인지 축 늘어져서 한참이나 꼼짝 않는 것을 보고 놀라 나도 모르게 검을 집어 던지고 황급히 달려갔다. 서,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와, 왕야?”
“…….”
“…크, 크하하하하! 과연 내 아들이로구나.”
침묵을 깬 것은 공포의 팔불출 노릇을 하고 있는 킬이었다. 그는 연무장이 떠나가고도 남을 큰 소리로 껄껄 웃어젖히며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기절한 사왕야를 열심히 흔들어 깨우고 있는 나를 말도 없이 불끈 안아 들더니 어깨위에 올려놓고 그대로 돌아서는 것이었다.
“사왕야는 어쩌고?”
“내버려둬도 안 죽는다. 조금 있으면 말짱하게 일어나 다시 한번 더 싸우자고 매달릴 거다. 나한테도 그랬거든.”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없지만 혹시나 내장을 다쳤을지도 모른다고 내심 걱정하고 있는데 킬은 그런 걱정마저도 전혀 할 필요가 없다고 큰소리를 쳤다. 성질만큼이나 목숨도 질긴 사람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에고, 이쁜 내 새끼. 역시 나를 쏙 빼.닮.아.서. 어딜 봐도 전혀 모자란 점이 없다니까. 크하하하…”
킬은 황제 앞으로 다가가면서 있는 대로 잘난 척을 해댔다. 그러자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던 그는 순간 눈을 가늘게 내려뜨더니 ‘흥’ 하고 콧바람을 날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게 아니라 나를 닮은 덕분이겠지. 누누이 말하지만 암만 봐도 그 녀석은 나를 닮은 것이 틀림없다. 암, 그렇고 말고.”
“흥, 우길 걸 우기세요. 그런다고 믿어줄 줄 아십니까?”
“뭐라? 이보게, 자네들이 보기엔 어떤가? 저 녀석의 모습이 마치 짐의 어린 시절과 똑같은 것 같지 않은가?”
“어허허,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습니다, 폐하.”
“저도 마침 폐하를 꼭 빼다 박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음, 이 나라에도 간신이 넘쳐나는군.
죽 늘어앉아있던 귀족들은 황제의 한마디에 넙죽 고개를 끄덕이며 갖은 간사를 떨어댔다. 나의 출신 성분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결정적으로 내가 잘 알고 있는데 난데없이 닮기는 누굴 닮았다고 그러는 것인지 원. 이구동성으로 판박이라고 외쳐대는 그들을 보며 나는 할 말을 잃고 한숨만 푹 내쉬었다. 언제쯤에야 제대로 된 말을 들어볼 수 있는 것일까?
“폐하께서는 억지도 심하십니다.”
“응? 억지라니요?”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에 저 아이는 제 어미를 꼭 빼닮은 것을요.”
모두의 의견을 무시하고 꿋꿋하게 외친 사람은 다름 아닌 황비였다. 하얀 털 코트를 드레스위에 걸치고 나온 그녀는 처음엔 약간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리고 방금 전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살펴보고 있다가 드디어 때가 왔다고 여긴 듯 자랑스럽게 한마디를 해놓은 것이다. 나는 그녀가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눈이 제대로 박힌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의를 구하듯 주위를 돌아보는 그녀에게 날아든 말은 예상외로 조금 매정한 것이었다.
“허, 황비는 어째 그리 눈이 안 좋은 게요? 에잉, 기분 잡쳤다. 아가, 이젠 할아비랑 한판 붙어보자꾸나.”
“폐, 폐하…”
“오늘은 안 됩니다, 폐하. 아침 일찍부터 어딜 좀 다녀와서 몸이 많이 피곤한 녀석이라 이 한판으로 끝이라구요.”
“뭬야? 그런 게 어디 있냐?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떼쓰지 마시고 다음 기회(?)를 이용하세요. 그럼 저희들은 저택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만…”
“잠깐!”
다짜고짜 매달리는 황제에게 킬이 빠르게 한마디 내뱉는 순간 등 뒤에서 벼락처럼 들려오는 소리가 하나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일제히 고개를 돌려 그 쪽을 바라보았는데 그 소리의 주인공은 역시나 막 갑옷들 사이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는 사왕야였다. 그는 뿌연 입김을 후욱 내뿜으며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몸을 완전히 일으키자마자 소리쳤다.
“아직 안 끝났다. 한판만 더 하자.”
“…!”
“거 봐라. 내 말이 맞지?”
말을 듣긴 했지만 정말로 그럴 줄은 몰랐는데… 일어선 그를 상대로 다시 싸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놓고 나는 잠깐 고민을 했다. 그러나 간신히 일어선 후 상체를 휘청이고 있던 사왕야가 도로 뒤로 넘어가는 바람에 나는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고 킬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히 시선을 돌렸으며 황제는 다시 떼를 쓰기 시작했다.
“좋다. 그럼 대련은 다음으로 미루고… 짐이 선물한 망아지나 타고 가거라. 직접 배웅해주마.”
“마차 타고 가면 되는데 갑자기 웬 망아지 타령을 하고 그러세요?”
“그래도 선물인데 한번쯤은 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예의지. 안 그러냐?”
오, 맙소사. 차라리 걸어가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그 미친 망아지만은 안 탈 거야.
나는 어떻게든 망아지만은 타고 싶지 않아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미처 좋은 핑계거리를 생각해 내기도 전에 다시 방해꾼이 끼어들어 일을 망쳐버릴 줄이야.
“오딜란, 자네는 폐하의 명령을 거부할 생각인가? 폐하께서 원하시는데 그 정도도 못해주시겠나?”
또다시 날카로운 황비의 목소리가 튀어나온 것이다.
“자네가 폐하의 체면을 생각해 주지 않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한 줄은 정말 몰랐네. 게다가 갑옷까지 상하게 해 놓고도 사죄의 말 한마디 없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으신가?”
“크허험, 황비의 말이 백번 옳다. 내 이렇게 여러 번 양보했거늘 대련도 안 해주고 선물로 준 망아지도 안 받아주고… 그러면 안 되지. 안되고말고.”
“아니, 그게 어째서… 으음,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망아지인지 송아지인지를 타고 가게 하지요. 허나, 아무리 그래도 대련은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킬은 하는 수 없이 한발 물러섰다. 그러자 황제는 금세 밝아진 얼굴로 히죽 웃어보였고 덕분에 망아지를 타게 된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온 몸에 소름이 좌악 돋는 순간이었다.
“자아, 그럼 아가 돌아가기 전에 할아비랑 점심식사나 같이 하자꾸나.”
“송구합니다만, 폐하. 그 아이는 저와 체스 약속이 되어 있어서…”
“엥? 이번엔 둘째 너랑 체스를 둬야 한다고?”
약속을 미루고 싶지 않았는지 이왕야가 불쑥 나서서 한마디를 했다. 직후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대련은 뒤로 미루어졌는데 체스는 그냥 두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으니 가뜩이나 시샘 많은 그가 가만히 있을 리 있겠는가? 즉, 그는 분노했다.
“젠장, 자식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더니…. 망할 놈의 자식들. 그렇게 말하면… 내가 그걸 용납할 것 같으냐?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무조건 다음 순서는 나야. 그러니 네놈도 다음 기회를 이용해. 그리고 오딜란… 너는 아이를 놓고 가거라.”
“예에?”
“헉!”
“반항하지 마라. 이건 명령이야.”
“폐하!”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고? 나를 두고 가라는 말에 웬일인지 킬은 당장 긴장해서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잠시 황제와 눈싸움을 하더니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나뿐인 아들을 두고 가라 하심은, 대체 무슨 까닭이십니까?”
“…긴장할 것 없다. 설마하니 잡아먹을까봐 그러느냐? 후우, 아무 말 말고 돌아가 있거라. 그러면 내 너에게 따로 전언을 줄 것이야.”
“하오나 폐하…”
“아무 말 말고 돌아가래두.”
버럭 소리친 황제는 여전히 킬의 어깨위에 앉아있는 나를 반 강제로 떼어 내더니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한번 살핀 다음 나를 업고 잽싸게 뛰기 시작했다.
“그럼 잘 가라.”
“앗, 폐…”
후다다닥…!
그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황제는 누가 잡기라도 할까봐 나를 들쳐 업고 눈썹이 휘날리게 달려 킬의 별궁과 한참이나 떨어진 웬 건물 안으로 들어서더니 기사들을 시켜 문 앞을 지키게 했다. 그런 다음 다시 뒷문으로 달려 나가 그곳에서 두어 건물을 더 지난 넓은 정원이 딸린 건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대체 뭐하자는 짓인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사랑의 도피라도 하는 줄 알겠네.
“후우, 다행히 성공했군.”
관목이 많은 정원을 지나 마른 담쟁이덩굴이 휘감고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서 황제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치 대단한 일을 해낸 사람처럼 뿌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펴더니 그제야 영문도 모르고 업혀온 나를 내려놓고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될 때까지 나는 아무런 반항도 할 수가 없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인데다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순전히 예감이지만 아무래도 나쁜 일을 겪게 될 것 같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만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를 조금 알고 있었으니까.
‘분명 다른 속뜻이 있을 거야. 그는 날카롭고 치밀한 사람이니까.’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것을 반드시 얻곤 했던 행동들을 떠올리며 나는 히죽 웃는 그의 얼굴을 진지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녀석, 걱정스러운 얼굴이구나. 할아비가 해코지라도 할까봐 그러느냐?”
“아니요. 아버지가 발작을 일으킬까봐 걱정돼서요.”
“으음, 하긴 나도 그게 가장 걱정이다. 그놈이 화를 내면 아무도 말릴 수가 없거든. 하지만 설마하니 나를 죽이기야 하겠느냐? 그래도 내가 지 아비인데…”
배짱 좋게 말해놓고도 그는 은근히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곧 단호하게 얼굴을 굳히더니 내 손을 잡고 건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건물은 낮인데도 곳곳마다 촛불을 켜놓고 있어 상당히 따뜻하면서도 푸근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결코 화려하지 않은데다 또 내 방처럼 온통 황금으로 만들어지지도 않았지만 왠지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한 기운이 감도는 것만 같았다.
‘대체 여긴 누구의 처소일까?’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그곳을 거닐면서 나는 진심으로 그것을 궁금해 했다. 그러나 처소 안으로 점점 더 들어가면서도 황제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앞만 보고 걸을 뿐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회랑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자 안쪽에서 시녀들이 알아보고 달려 나왔다. 그리하여 잠시 멈춰선 황제는 그답지 않게 목소리를 낮추더니 익숙한 동작으로 무릎을 꿇는 그녀들에게 가만히 물었다.
“오늘은 좀 어떠하더냐? 식사는 좀 하더냐?”
“아니옵니다. 애써 드신 약도 모두 도로 토해내셨습니다.”
“저런… 쯧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