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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23화)
6. 실마리를 찾아서… (2)/

킬과 눈싸움을 하고 있는 사이 스칼라가 내 옷깃을 잡아당기더니 말없이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곳엔…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울고 있는 나기가 앉아 있었다.
“흑… 정말로 죽어? 목이 잘리고… 까마귀 먹이… 훌쩍… 왕야, 죽으면 안돼! 도련님이 나기처럼 될거야.”
“나기야…”
킬을 붙잡고 펑펑 울어대는 그를 우리는 그저 말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킬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새, 생각해 보고 가능하면 살도록 하마.”
“정말이지? 흑, 고마워, 왕야.”
“그래, 고맙다니 다행이구나. …이 놈의 자식, 내 옷에 콧물 닦지 마.”
달라붙는 나기를 한손으로 떼어 놓으며 킬은 연신 악악거렸다. 하얗게 빼입은 그의 옷은 이미 콧물로 누렇게 얼룩이 져있었다.
시끌벅적한 가운데 몇 시간을 달려 상단에 도착하자 드레인 영감이하 상단의 식솔들이 거대한 삼층 건물 앞에 죄다 몰려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입을 꾹 다물고 눈에 힘을 주고 있는 것이… 마치 중요한 결전이라도 치르는 사람들처럼 잔뜩 긴장한 모습들이었다.
“왜, 왜들 저래?”
“흐응, 영감이 단단히 교육을 시킨 모양이군. 그래봤자 쉽게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 순 없을 걸? 즉, 최후의 승자는 이 몸이란 말이지. 흐흐흐…”
“그게 무슨 뜻?”
“크험, 아무것도 아니다, 아들아. 자, 그럼 그만 가볼까?”
무언가 찝찝한 말을 들은 것 같았는데… 다시 물을 새도 없이 그는 나를 잡아끌고 마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왔군.”
“왔소. 물건은?”
“안에.”
영감과 킬은 짧게 끊어지는 대화를 나눈 다음 나를 사이에 두고 소리 없이 동시에 돌아섰다. 그리고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빠른 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링카를 만들었다는 사람에 대해서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왠지 살벌한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망설이고만 있었다. 그러는 사이 뜻 모를 승부감에 불타는 두 사람을 따라 순식간에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계단을 오르고 창이 넓은 방안의 의자에 주저앉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만 좀 할 수 없어요?”
도시의 전경과 멀리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눈싸움을 하고 있는 영감과 킬을 향해 스칼라가 드디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녀는 외숙인 딜런과 함께 우리보다 한발 늦게 방으로 들어섰는데 말 한마디 없이 줄곧 살벌하게 마주 보기만 하는 두 사람을 주시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낸 것이었다.
“하여튼 한번 시작하면 끝을 낼 줄 모르는 게 문제예요. 이번엔 또 무슨 내기를 하신 거예요? ‘계단 빨리 오르기’ 같은 거라도 하신 거예요?”
“아니다. 우리 수준이 그것밖에 안되는 줄 아냐?”
“맞아. 우릴 너무 낮게 보지 말라구. 이래봬도 우린 오늘 명예를 걸고 이 자리에 앉았어.”
“암, 그렇고 말고. 딜런, 놈을 데려오너라.”
드레인 영감이 비장한 목소리로 말하자 딜런은 한숨을 내쉬고 돌아서서 방안에 있는 또 다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곳에 이링카를 만들었다는 자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대감은 둘째 치고 그 정체의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어서 나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자꾸 엉덩이를 들썩이며 고개를 길게 빼고 그 문 쪽을 흘깃거렸다.
“미리 말해두지만 놈이 이링카를 만들지 못하면 말짱 소용없는 것이오.”
“흥! 그런 걱정은 절대 할 필요가 없다. 놈은 내게 하늘이 무너져도 이링카만은 꼭 만들어 주겠다고 맹세를 했으니까. 흐흐흐…”
그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킬은 미간을 찌푸리며 불안한 듯 한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내기들을 했길래 그러는 것이지? 명예 어쩌고 하긴 했지만 도무지 짐작이 안가는 관계로 나는 맥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리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앉아있는 나기를 한번 바라본 후 다시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찌됐든 여기까지 와서 녀석을 실망시킬 수는 없지.’
기대 반 설레임 반으로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 너머로 사라졌던 딜런이 문제의 그를 데리고 나타난 것은.
“흐응? 저자가…”
“흐흐, 그렇다. 델마로에서 데리고 온 카시라는 자다. 이링카를 만들었지.”
사내는 푸른색 셔츠와 구깃구깃한 가죽바지를 입은 사십대의 중년인으로 새치가 많은 금발머리에 뿌연 갈색 눈동자를 가졌는데 나른해 보이는 얼굴 가득 지저분하고 짧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게다가 술을 마셨는지 가까이 다가올수록 진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게으른 나귀처럼 슬금슬금 걸어 나오는 깡마른 얼굴의 그를 보고 약간의 실망감을 맛보았다. 만병통치약으로 소문난 이링카를 만들었으니 분명 어딘가 남다른 면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그는 어느 한구석 특별한 곳이 없어보이질 않는가.
‘저 사람이 진짜 이링카를 만들었단 말인가? 내 눈엔 마치… 권태기에 접어든 불량 중년으로만 보이는데?’
느긋한 태도로 다가와 인사 한마디도 없이 앞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그를 나는 매우 뜨악한 얼굴로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이자가 이링카를 만든 것 맞아? ‘훅’하고 코를 찌르는 술냄새에 기분이 조금씩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빨을 드러내고 히죽 웃더니 곧 허리를 펴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예쁜 아가씨로구만. 흐흐, 왜 이링카를 찾는지 알만해.”
“…?”
“하긴 이링카로 치장하면 아가씨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미녀로 불릴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알다시피 이링카는 워낙 귀해서 실수로라도 거저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절대 아니지. 크흠, 유감스럽지만 아무리 적게 잡아도 천금은 줘야겠어.”
“…!”
“…뭐, 아가씨가 직접 술을 한잔 따라준다면 조금 깍아줄 수도 있고.”
이건 또 무슨 생소리지? 천금은 둘째 치고 아가씨가 뭘 어쩌고 어째?
나는 기가 탁 막혀서 입을 쩍 벌린 표정으로 잔뜩 의기양양해 있는 드레인 영감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이미 어색한 모양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정말 이 사람이 맞아요?”
“크흠, 믿기 어렵겠지만 맞다.”
“흥, 헛소리 마쇼. 깜빡 속아서 엉뚱한 놈을 데려온 거 아뇨?”
“속긴 누가 속아? 이날 이때까지 내 눈을 속인 놈은 없었다. 쓸데없이 성질만 더럽고 버르장머리 없는 칼잡이, 네놈만 빼고.”
“하! 어련하시겠소.”
그런 말은 백번을 들어봐도 믿음이 안 가는 것이 당연했지만 영감이 워낙 큰소리를 쳐서 우선은 그려러니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따지는 것은 실제로 확인을 해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당신이 이링카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겠어요. 그러니 우리 앞에서 사실을 증명해 주길 바랍니다.”
“흐흐, 얼마든지. 근데 이링카를 만들자면 눈물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 아가씨의 눈물이라면 아주 아름다운 이링카가 만들어지겠군.”
불량 중년 카시는 기어이 내 화를 부추기고 있었다. 아가씨라니… 댁은 눈깔이 삐었어? 요샌 알게 모르게 키도 조금 크고(?) 나이도 많이 먹어서 성숙함도 풍길 텐데 내가 어디로 봐서 아가씨야? 안 그래도 황제의 노골적인 애 취급에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는 몸이거늘… 으윽, 서글픔에 가슴이 미어진다. 이링카만 아니라면 당장 절단을 내놓는 건데…
“…후우, 경고하겠는데 한번만 더 아가씨라고 부르면 날 만날 걸 후회하게 될 거야.”
“죽이기라도 할 거란 소리인가?”
“물론이다, 이 밥맛없는 놈아. 내 아들내미가 안 죽이면 내가 대신 죽여줄 수도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아니 이링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여봐라, 이 잡것을 당장 끌어내라.”
“어허, 애도 아직 가만히 있는데 왜 니가 먼저 날뛰고 지랄이냐? 앙? 아무리 열 받았어도 이렇게 치사스럽게 나오면 안 되지.”
“그… 크흠. 마음이 불안하면 이링카는 만들어지지 않는데…”
“네놈은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내기에서 지고 싶지 않은 킬이 당장이라도 목을 베어낼 듯 날이 잘 선 단검을 들이밀자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래졌다. 그러더니 그제야 상황파악이 된 듯 당장 태도를 달리하기 시작했다. 즉, 삐딱한 웃음을 머금고 있던 얼굴이 서늘하게 굳어지고 앉아있던 자세도 금새 고쳐 아주 단정해진 것이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역시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세상이구나.
“자, 그럼 이제 다시 얘기를 시작해 볼까?”
“미리 말해두는데 이링카가 없으면 네놈의 모가지도 같이 없어질 게다. 그리고… 이 앤 아가씨가 아니라 내 아.들.내.미.다. 알아들었냐?”
“네에? 아, 그게… 네. 알아들었습니다요.”
놀란 듯 눈을 부릅뜬 사내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왠지 아까보다 더 기분이 나빴다. 그리하여 나오는 말도 당연히 냉랭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지금 당장 시작하세요.”
“아, 저 그게… 눈물이 있어야…”
“눈물?!”
눈물이라는 말에 우리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어느 순간 일제히 나기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가장 눈물이 흔하고 잘 울게 생겼으며 조금만 자극을 줘도 역시나 눈물을 펑펑 쏟아낼 사람은 암만 봐도 녀석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기야, 이링카를 만들려면 네 눈물이 필요해.”
“눈물? 그치만 나기 지금 눈물 안 나.”
“안 나면 나게 만들어야지.”
녀석에게서 눈물을 받아내는 것은 상당히 쉬운 일이었다. 킬이 딱 한마디를 하자마자 펑펑 쏟아냈으니까.
“그나저나 네 아비도 이 자리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비? …흑, 아비야아…”
“자, 여기 싱싱한 눈물이 있다. 어서 만들어.”
킬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나기를 앞으로 내밀면서 말하자 카시는 일순간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을 하더니 곧 마르고 병적일 만큼 하얀 손을 가만히 나기의 눈으로 가져갔다. 그의 움직임과 함께 내 가슴도 같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조용히 숨을 멈추었다.
땡그랑!
그것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다거나 무언가 신비한 징후 같은 것도 전혀 없이 그저 눈물이 떨어지듯 갑자기 눈에서 떨어져 내렸다. 나는 빛을 머금은 듯 현란하게 반짝이는 밝은 주홍빛 보석을 내려다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제껏 본적 없는 아름다운 빛깔을 가진, 마치 눈물방울처럼 생긴 보석. 이것이 정말 우리가 찾던 그 이링카인 것일까?
“아?!”
이링카가 확실하냐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아까까지만 해도 담담한 얼굴이던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왜 그러는 것이지?
“정말 따뜻한 색이군. 꼬맹이는 아비를 진심으로 사랑한 모양이야. 허! 허허… 이것이 이링카요.”
“으허허허, 성공이군.”
“으음, 망할…”
“어머, 예뻐라.”
그의 선언에 약간의 소란과 함께 희비가 엇갈렸다. 나기는 멍하게 앉아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고 드레인 영감은 세상을 다 가진 양 음침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흘려내는데다 킬은 일그러진 얼굴로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으며 스칼라는 이링카의 아름다움에 눈길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과 상관없이 나는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공허하고 무언가가 궁금해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허탈하게 웃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허탈한 얼굴을 하고 울고 있는 거지?”
“…!”
“아파보여. 당신의 눈은 계속해서 이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정말 이것이 당신이 말하던 이링카인가?”
내 물음에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방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꼭 일분여가 지났을 때였다. 스칼라의 손바닥위에서 빛을 뿌리고 있던 주홍빛의 이링카가 마지막으로 반짝 빛을 뿜어내면서 다시 무색의 눈물로 돌아갔다. 또다시 희비가 엇갈렸다.
“우하하하,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영감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이런 젠장할! 역시나군. 물러가 있거라.”
드레인 영감은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 카시를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그대로 내보냈다. 물론 이대로 완전히 내치는 것은 아니었고 방으로 돌아가 잠시 쉬게 한 것뿐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요?”
“본 그대로다. 이번엔 실패구나.”
“이번엔? 그럼 또 해볼 거란 말요?”
“당연히! 진짜 이링카가 나올 때까지 백번이 아니라 천 번, 만 번이라도 시도하게 할 테다.”
영감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내가 궁금해 하고 있는 건 아직 말해주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그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를 그냥 내보냈지요? 내가 알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또 있나요?”
“크흠, 그렇다. 딜런 네가 설명해 주거라.”
“네, 아버님.”
영감의 명령에 다소곳한 자세로 그의 등 뒤에 서있던 딜런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우선은 눈물이 문제입니다. 어떤 눈물이냐에 따라 나오는 보석이 천차만별(千差萬別)이라고 할 만큼 다릅니다. 몇 번의 시험을 통해서 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만… 사실, 보석이 만들어 진 것은 이번이 겨우 두 번째입니다.”
“특별한 눈물이 필요하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혹시나 싶어 그가 오래전에 이링카를 만들 때 썼던 눈물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혹은 무엇이었는지 물었었는데… 몇 번이나 간곡하게 물어도 입을 다물고 말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만?”
“그를 아는 자가 말하길, 이링카를 만들고 난 후 그는 거의 죽어가는 몰골로 발견되었다고…”
“…!”
뜻밖의 말에 나는 매우 놀랐다. 죽어가고 있었다니… 설마 이링카 때문에 그렇게 되었었다는 말인가?
“그 때문에 우리는 놈에게 ‘목숨 값을 주마.’ 하고 데려온 게다. 이링카를 만드는데 목숨을 바쳐야 한다면 천금이든 만금이든 들여서 그 목숨을 사겠다고…”
“목숨 값이라… 그렇다면 놈은 돈에 목숨을 팔았다는 말이냐?”
“그는 현재 여러 곳에 빚을 지고 있는데다 병을 앓고 있어서 돈이 많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어렵사리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죠.”
“병?!”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며 나는 그가 사라진 문 쪽을 한번 힐끗 바라보았다. 방금 전 그는 마치 나기의 애틋한 마음을 그대로 따라 느끼고 있는 듯 서글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정말로 그랬다.
‘이상한 사람이다. 어떤 게 진짜 모습인지 모르겠어.’
술에 절어 건들거리던 모습과 소심하고 비굴한 모습 그리고 눈물을 흘리던 모습을 차례로 떠올리며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바보 같이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닌데…
“이런 상태라면 이링카를 얻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잖아요?”
그렇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지금 확인해야할 것도 있고 알고 싶은 것도 많아서 이링카가 만들어질 때까지 언제까지나 손놓고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입장이다. 사실 오늘만 해도 나는 당장 이링카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기약 없는 기다림과 궁금증만 더해졌지 않은가?
“당장 이링카를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단 말이에요.”
“들었소, 영감? 내 아들내미가 원한 것은 아까 같은 불량품이 아니라 완전한 이링카였단 말이오.”
“아, 그게 말이다, 조금만 기다려주면…”
“어허, 어디서 많이 듣던 변명을… 문득 치사하다는 생각 안 드시오?”
“흥, 내가 아무리 치사하다고 해도 네놈만 할까?”
킬과 영감은 질리지도 않는지 또다시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허탈함과 실망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던 나는 그만 울컥 짜증이 치밀고 말았다.
“그마안!”
“윽!”
“크험!”
큰 소리로 빽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돌아가겠어요.”
“크흠, 그러자꾸나, 아들아.”
“앗, 벌써 가면…”
“그 사람도 같이 데려가겠어요.”
“어머, 그럴래?”
카시도 데려가겠다는 말에 손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스칼라가 고개를 번쩍 들면서 반색을 했다. 아마도 그가 만든 보석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화사하게 번지는 그녀의 미소를 보며 나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앞날이 매우 고달플 것 같았다.
“약속을 잊지 마라. 이링카가 만들어지기만 하면…”
“행여나.”
은밀한 투로 약속 운운하는 드레인 영감을 뒤로 하고 우리는 기가 팍 죽어있는 카시를 데리고 상단을 떠나왔다. 그리고 궁전으로 돌아오자마자 저택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성질 급한 사왕야가 당장 들이닥쳤다.
“파비안, 약속을 잊지 않았겠지? 자아, 당장 결투다! 크하하하…”
“하아, 웨인 형님 지금 애를 데리고 뭘 하겠다고요?”
“앙? 못 들었냐? 저 녀석과 검술대련을 하기로 약속했는데…”
송충이 같은 시커먼 눈썹과 반듯한 얼굴선을 타고 자란 짧은 수염을 동시에 꿈틀거리면서 사왕야는 당당하게 소리쳤다.
“준비는 이미 완벽하게 해두었다. 나가자꾸나.”
“네에…”
결국 나는 그가 건네주는 검을 받아들고 별궁에 딸린 연무장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꽤 넓은 면적의 그곳으로 들어서자마자 딱 마주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