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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20화)
5. 거래 (3)/

“오, 역시. 나 기억하고 있었구나? 무지 보고 싶었지?”
“…!”
오 마이 갓?! 이런 곳에서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사람이었던 터라 나는 한순간 착하기 이를데 없는 내 귀를 의심했더랬다. 그러나 희미하게 드러난 그의 모습은 둘째 치고 하는 짓으로 봐도 영락없이 내가 알고 있는 시바가 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그를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었다. 그 얄미운 말에 밧줄은커녕 돌뎅이를 던져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졌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근데 시장에서 달걀을 팔던 그가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지?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충분히 들어오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나였다.
‘하긴, 달걀도 금화 한냥에 팔아넘기는 사람인데 이 정도 일이 문제겠어?’
그런 시바라면 궁전의 담벼락이 아니라 성벽이라도 가뿐하게 넘어서 들어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돌려 도로 방안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어찌됐든 방안에 들여놓고 보자는 생각에 우선은 그에게 던져줄 밧줄이나 혹은 그 비슷한 줄 같은 것을 찾아보려는 것이었는데… 글쎄, 그게 또 생각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 이 방안에 밧줄 따위가 있을리 없지.”
그리하여 결국 어떻게 됐느냐 하면…
“이거라도 잡고 올라와.”
“에? 이게 뭐야? 시트잖아?”
두장의 시트를 길게 묶어 내려 보내는 고전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도대체 적당한 것이 있어야 말이지.”
나는 시트의 한쪽 끝을 침대 다리에 묶은 다음 나머지를 아래로 내려 보냈는데 길이가 조금 모자란 덕분에 그는 풀쩍 뛰어 올라서야 그 끄트머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을 겪는 것이 한두번이 아닌 듯 그는 말 그대로 능숙하기 이를 데 없는 솜씨로 쑥쑥 올라오더니 기어이 창문을 훌쩍 뛰어넘어 방으로 들어왔다. 아아, 어찌나 날렵한 모습이던지 정말 도둑 고양이가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하아, 하마터면 얼어죽을 뻔 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정말로 얼어 죽었을 거야.”
머리와 어깨에 쌓인 눈을 호들갑스럽게 털어내며 그는 유쾌하게 떠벌렸다. 그리고 숨도 안쉬고 나를 향해 돌아서면서 묻는 말.
“헤에, 오랜만이야. 나 무지 반갑지 않냐?”
“…아니, 전혀. 그보다 한가 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혹시 직업이… 도둑이야?”
추위로 벌게진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묻자 그는 갑자기 얼굴을 굳히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서 ‘아, 역시 내 짐작이 맞는 것이구나’하며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어째 갈수록 그의 표정이 점점 수상쩍어 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입술을 깨물면서 볼을 실룩거리고… 눈물까지 글썽이는 것이… 설마…
“푸웁! 킥, 흐흐… 푸하하하하!”
역시. 어디서 많이 본 표정이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시바는 허리를 젖히고 요란하게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쳇,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면 그만이지. 웃긴 왜 웃는 거야? 민망하게스리.
“이봐, 그렇게 웃어도 되는 거야? 넌 지금 몰래 들어온 거잖아?”
“아! 아하하하, 그랬지 참. 나도 모르게 그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참아보려고 노력을 하긴 했는데 그게 실패해서 자꾸만 실실거리는 이상한 웃음을 흘리게 되고 말았다. 조금은 음흉하고 살며시 소름이 돋기도 하는 그런 야릇한 느낌의…
“웃지만 말고 용건이나 말해. 조금 있으면 사람들이 올 거야. 파티가 벌써 시작됐을 테니까 나를 데리러 올 거라고.”
“그런가? 크흠, 그럼 우리 조용하게 대화를 한번 나눠 볼까?”
그렇게 말해놓고 그는 히죽 웃는 얼굴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손짓으로 내게 맞은 편 의자를 권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마주 앉으려는데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가 사정없이 내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이링카를 찾는다지?”
“어라? 그걸 어떻게…?”
나는 화들짝 놀라 바람소리가 나도록 홱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링카를 찾고 있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벌써부터 시장바닥에 떠들썩하게 소문이 났어. 모치즈 가의 상인들이 한바탕 난리를 치고 있는데 모를 수가 없잖아?”
“아, 그런가? 그렇구나.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지?”
그러고 보니 그에게서 이링카라는 말이 나온 것부터가 조금 의아한 일이었다. 그는 왜 내게 그런 말을 꺼낸 것이지? 설마 그도 이링카를 찾고 있는 것인가? 불행하게도 내 예상은 빚나가지 않았다. 의문을 품기가 무섭게 그는 대뜸 이런 말을 꺼내놓았던 것이다.
“그거… 나한테 양보하면 안돼냐?”
“뭐?”
“사실, 난 오래전부터 이링카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벌써 몇 년째인지 몰라. 처음엔 사람을 통해서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소식이 없어 나중엔 수하들을 풀었고 몇 년전부터는 직접 찾아다니기 시작했어. 제국 곳곳을 발바닥에 땀띠가 나도록 돌아다녔지. 물론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나름대로 비밀리에 한 일이니까. 그런데…”
“내가 끼어들어 빼앗기게 되었단 말이지?”
모치즈 가에서 이링카를 찾았다는 소식을 그도 들은 것일까? 이렇게 찾아온 것을 보면 아무래도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조금 냉랭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그것은 내 것이 아니야. 따라서 내 맘대로 결정을 내릴 수 없어.”
“뭐? 하지만 네가 찾고 있다고…”
“누군가가 내게 부탁을 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난 그것을 꼭 찾아주겠다고 약속하고 대가를 받았지.”
“대가?”
대가라는 말에 그는 눈을 빛냈다. 무언가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생각하면 안돼지. 나에게로 오기까지 나기가 치른 대가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말야.
“무엇을 주면 되지?”
그가 진지한 투로 물어왔다. 역시나 ‘대가’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듯한 물음이었다. 바보같이. 어쨌든, 앞 뒤 생각없이 덤비는 것을 보고 나는 그가 꽤나 맹목적으로 이링카에 매달려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양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이미 나기에게 주기로 약속한 물건이니까.
“어리석은… 넌 그가 내게 준 것을 줄 수 없어. 그것 또한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물건이었으니까. 게다가 나에겐 더 이상 부족한 물건이 없어. 잘 알잖아, 나의 외가가 어디인지?”
“끄응. 젠장! 그럼 그가 누구인지 가르쳐다오. 그와 담판을 짓겠다.”
시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난 절대 포기할 수 없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링카를 얻어야 해. 하다못해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
어라라? 생각보다 더 필사적이잖아? 목숨까지 걸겠다는 말에 나는 그를 다시 보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나를 똑바로 노려보는 서늘한 모습. 왤까? 무엇 때문에 그는 이렇게까지 필사적인 것이지? 누구를 위해서? 결국 나는 그것을 입밖으로 내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그러면 궁금해서 코가 막힐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넌, 누구를 위해서 이링카를 찾는 거지?”
“…”
“이유를 말해주면 그를 만나게 해줄게.”
“…미안하지만 그건, 말할 수 없어.”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그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지금은 안돼지만 이링카를 손에 넣으면 그때 가서 말해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대체 무슨 말이 그 모양인지… 도대체가 거래의 기본이 안돼 있잖아?
“그렇다면 용건은 다 끝난 거네. 잘 가.”
나는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시바는 황급히 내 팔을 잡아채더니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털썩! 갑자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뭐하는 짓이야?”
“…이렇게 부탁한다. 잠깐이라도 좋아. 그를… 만나게 해다오. 물론 그 사람도 뭔가 간절한 이유가 있겠지만… 나 또한 사정이 사정인만큼 직접 만나 되도록 진지하게 얘기를 해보고 싶다.”
“그를 설득하겠다는 말이군?”
내어놓고 물으면서도 나는 내심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기꾼 기질이 넘치다 못해 흐르는 시바를 순진해 빠진 나기 녀석과 만나게 해주었다간 보나마나 손해가 막심한 일이 벌어질 게 뻔한 노릇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내겐 그를 도와줄만한 뚜렷한 이유도 없고.
‘그냥 무시해 버릴까? 하지만 무릎까지 꿇은 걸 보면 무언가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이유를 몰라서 그런지 나는 그의 요구가 적잖이 신경 쓰였다. 스스로의 목숨을 내팽개 치면서까지 구하고 싶은 사람이 정녕 누구인지도 궁금하고 그런걸 생각하자니 새삼 그 자신의 정체도 몹시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곤 성을 생략한 흔해빠진 이름 하나가 고작이었으니까 말이다.
“좋아. 만나게 해주지.”
“아, 정말이냐?”
어렵게 고개를 끄덕이자 시바는 얼굴이 환해져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왈칵 다가와 내 손을 붙잡고 마구 흔들며 좋아라 웃어대는 것이었다. 마치 이링카를 벌써 얻기라도 한 것처럼 잔뜩 신이 난 얼굴로.
“고맙다, 파브. 나는 네가 내 부탁을 들어줄 줄 알았어. 역시 내가 사람을 잘못 본게 아니라니까. 아하하하!”
“이봐, 너무 좋아하지마. 내 말은 아직 다 안 끝났어.”
“아?! 그, 그래?”
“크흠, 잘 들어. 이링카는 그에게도 아주 중요한 물건이야. 하지만 녀석은 너무 순진한데다 세상 물정도 모르고 여리기까지 하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어떤 식으로든 그 애에게 상처를 주지마. 만일 그랬다간, 내가 용서 안 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최대한 위엄(?)있게 보이려고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말하자 시바는 제대로 이해했다는 듯 굳은 얼굴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심 흐믓해 하고 있는데 다음 순간 놈은 소리없이 히죽 웃더니 갑자기 손을 내밀어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너처럼 귀여운 놈이란 말이지? 음, 왠지 엄청 기대된다? 푸하하하…”
“이익, 이 손 당장 치우지 못해? 귀엽긴 누가! 젠장, 만나게 해주겠다는 거 다 취소야!”
“아, 걱정마. 이래뵈도 난 일편단심이니까. 절대로 널 버리지 않을게, 파브.”
아아, 이 무슨 간악하기 그지없는 짓이란 말인가? 무릎까지 꿇고 사정하길래 봐줬더니 금새 표정을 바꾸고 나를 가지고 놀아? 나는 화가 잔뜩 나 발을 탕탕 구르다가 당장 그를 창밖으로 내쳤다. 그러자 시바는 시트 자락을 잡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계속 ‘흐흐’거리는 이상한 웃음을 흘리더니 다 내려가서는 다정하게 손까지 흔들어 대는 것이었다. 물론 그전에 ‘내일 같은 시각에 찾아 온다’는 말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고.
“쳇, 결국은 나만 손해를 봤잖아? 아무래도 난 너무 물러터진 게 틀림없어.”
찬바람이 쑹쑹 들어오는 창문을 바라보며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나 오늘 웃었다고 해서 내일도 웃을 수는 없는 것.
“흥, 내일도 그랬다간 큰 코 다칠 걸?”
내일은 반드시 그를 무찌르고야 말리라.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전의를 다졌다. 음, 갑자기 없던 힘이 불끈 솟는 구나. 힘 내자꾸나, 파비안. 그때였다. 열린 창문 아래쪽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뭐야, 아직 안 간 건가?”
할 말이 더 남았나 싶어 나는 슬금슬금 창쪽으로 다가갔다. 늘여 놓았던 시트가 아직 그대로 있으니 올라 오려면 얼마든지 다시 올라올 수 있었다. 그래서 창문에 바짝 붙어 아래쪽을 내려다 보았는데…
“왜 다시 왔… 허걱!”
“파비안, 우리 진지하게 대화 좀 하자꾸나.”
…시트를 잡고 올라온 것은 시바가 아니라 킬이었다. 활활 타는 눈을 한 킬이 시트를 잡고 어둠속에서 쑤욱 나타난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 그 밑에 있었던 거지? 아하하, 클났다. 그날 밤, 그 예기치 않은 사고(?) 덕분에 나는 킬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밤새도록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럴 수가 있냐? 아빠라고 불러주기 싫어서 가출을 시도해?”
엉뚱하게도 그는 내가 가출을 시도했다며 파티에도 참석 안하고 스칼라와 번갈아 가면서 잔소리, 구박, 심지어 애원까지 일삼더니 새벽 무렵에 이르러서는 끝내 이런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가버렸다.
“그래도 넌 우리 아들이다.”
괜히 뜨끔거리는 것이… 가슴 한쪽에 작은 가시가 박힌 기분이었다.

‘백작님을 부탁한다, 파비안.’
응? 누구?
그는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래된 기억의 일부인 듯 조금은 낯익은 목소리로 다가와 그 속에 웃음기를 머금고 다정하게 소근소근… 누구지?
‘내겐 아버지와 같은 분이다.’
무슨 말이야?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나는 그를 올려다 보았다. 어둠 에 서있는 그의 가슴께에서 은은한 푸른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저게 뭐였더라?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손을 내밀어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다음 순간 말없이 뒤돌아 섰다. 이봐, 가지마. 나는 아직 당신이 누군지 몰라.
‘하하, 일곱 살 어린 내 동생.’

“헉!”
나는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누운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줄줄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지도 않고 멍하니 외쳤다.
“에시… 형?!”
이름을 떠올리자 환영처럼 눈앞을 스쳐가는 그의 웃는 얼굴. 아아, 그였다. 바로 그가! 갑자기 숨이 막힐 듯 거세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박차고 그대로 달려 나갔다.
“앗, 도련님?”
“제제, 나기는?”
“아, 식당에…”
잠옷 바람으로 달려 나와 다짜고짜 묻는 말에 놀라 제제는 동그래진 눈으로 식당 쪽을 가리켰다.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데… 괜찮으세요, 도련님? 도련님?”
등뒤에서 불러대는 그를 싹 무시하고 나는 냉큼 식당으로 달려갔다. 이제야 알았다. 처음 봤을때부터 그가 낯익었던 이유를. 이제는 나기에게서 그것을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벌컥! 쿵!
한걸음에 달려간 나는 단단한 오크목 문짝을 열어젖히고 황급히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오, 이제 일어났니, 내 아들?”
“근데 몰골이 어째 그러냐?”
스칼라와 킬이 아는 척을 해왔지만 모른 체 하고 나는 저만치 식탁 끝에 앉아 열심히 빵을 우물거리고 있는 나기에게 다가갔다.
“나기야?”
“응? 왜 그래, 도련님?”
제멋대로 자란 검은 머리에 시원하고 큰 다갈색 눈동자. 이렇게 닮았는데 왜 진작 알아보지 못했을까? 영문을 몰라 멍하니 바라보는 그와 한동안 눈을 맞추고 있다가 나는 손을 내밀어 녀석의 목에 매달려 있는 그 목걸이를 잡아챘다. 섬세하게 조각된 금장식 테두리 안에 박힌 서늘한 빛깔의 푸른 보석.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약간의 마나를 주입해 보았다. 그러자… 딸칵! 하는 소리와 함께 보석이 위로 돌아가고 그 아래에서 낯익은 몇 줄의 글이 나타났다.
[용병 왕국 셀리온의 초대 국왕
에시 가르얀에게
사랑하는 동생 파비안이.]
“아! …아아, 에시 형.”
그래, 이제야 기억났다. 이건 오래전 에시 형이 용병 왕국을 세우고 왕이 됐을 때 내가 보냈던 선물 중 하나였어. 그는 대관식 때 이걸 목에 걸겠다고 했었지.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고. 그런 그를 나는 지금까지 까맣고 잊고 있었다. 어쩌다 한번쯤은 떠올려 봤을 법도 한 일이었는데…
“너는… 에시 형의 후손이었구나.”
“응? 에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나기는 그가 누군지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양 얼빠진 표정으로. 하긴, 아비랑 단둘이 산속에서만 살았다니 모를 수도 있는 일이긴 하지. 아, 가만! 그렇다면 셀리온, 그의 왕국은 어떻게 됐지? 그들도 크샤인과 함께 멸망한 것인가? 그래서 왕족인 나기는 아비와 함께 도피 생활을 한 것이고?
‘설마’ 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고개를 돌려 멍청하게 앉아있는 킬을 바라보았다.
“킬, 셀리온도 멸망했어?”
“…아니.”
“뭐? 그럼 셀리온은 아직 남아있단 말이야? 어떻게…”
그것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크샤인과 셀리온은 동맹 관계를 맺은 나라였다. 아니, 내가 있을 때는 그랬다. 그런데 지금 크샤인은 멸망해 사라지고 셀리온은 남아 있다고? 어째서?
“킬, 이제보니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어.”
나는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곤 홱 돌아서면서 크게 소리쳤다.
“당장 티란 스승을 불러와!”
솔직히 그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내게 사실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누구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하필 그를 찾은 건 그래도 역사학자이니만치 누구보다 과거에 대해선 그가 아는 것이 많을 것 같아서였다. 실제로 킬도 그가 대단한 학자라고 말했었고.
아무튼 아는 것이 많으면 내가 묻는 말에도 잘 대답해 줄 수 있겠지? 최소한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진짜루.
“어쩌려고 그래?”
대충 씻고 옷을 걸치는 내게 킬이 쫓아와 슬며시 물었다.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지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흥, 그러면 누가 순순히 말해줄 줄 알고?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다, 킬. 잔소리는 어젯밤에 들은 것 만으로도 충분해.
졸졸 쫓아오는 그를 사정없이 무시해주고 나는 다시 방을 나섰다.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아서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야 말로 어떻게든 묻혀져버린 진실을 알아내고 말아야지. 내 손으로 티란 스승의 목을 졸라서라도 반드시! 나는 작심을 하고 두 손을 꾹 움켜쥐었다. 그런데…
“크흠, 모처럼 움직이려고 하는데 방해를 해서 미안하다만… 아들아, 우리는 지금 황제폐하께 가야 한단다.”
“에? 왜?”
“찾으시니까. 어제 파티에 안 나가서 삐쳤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무언가 다른 중요한 일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명령이라고 하니 가봐야 하지 않겠냐?”
제엔장!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왜 하필 우릴 찾는 거지? 어제 안 나갔다고 정말 삐친 건가?
“게다가 오후엔 그 노친네… 아니, 네 외할아버지께서 오신다는 구나. 크흠, 선물을 가져 온다고 큰 소리를 뻥뻥 치더라만 귀찮으면 안 봐도 된단다.”
뭣이라? 다른 것도 아닌 이링카를 가져온다는데 외면하라고? 이봐, 난 지금 그가 아니라 황제폐하를 외면하고 싶은 심정이야. 가능하다면 바보 도마뱀인 킬, 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