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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19화)
5. 거래 (2)/

쓰러지는 그를 곁에 있던 어의 시크가 달려와 받아 안았다. 그리고 급히 그를 옮기고 상태를 진찰하는 등 한바탕 소란을 떨었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찬바람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가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결국 이유를 듣지 못했어. 왜 아우를 해쳤는지… 왜 나기의 아비를 죽여야 했는지… 하지만 반드시 찾아내 알아내고 말테다, 루이베르.’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짐하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킬이 나를 불렀다.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기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말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바로 옆방으로 옮겨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손수건부터 꺼내 들었다.
“어디 손 좀 보자. 아비가 깨끗하게 닦아주마.”
그 말을 하면서 그는 묻은 것도 없는 내손을 꼼꼼하게 닦는 시늉을 해보였다. 대체 뭐하자는 짓인지…
“에고, 금쪽같은 우리 아들내미가 하마터면 다칠 뻔 했네. 망할 놈의 노친네, 감히 내 아들을 그렇게 세게 밀쳐내? 일어나기만 하면 그냥…”
“시끄럽다, 이놈아. 뭘 잘했다고 큰 소리냐?”
진찰을 받는 백작을 보고 온 황제는 주절거리는 킬을 꾸욱 눌러주고 눈빛을 번뜩이더니 슬며시 나를 잡아 끌었다.
“아가, 할애비 곁에 앉고 싶지? 자아, 여기 사탕도 있단다.”
“…!”
사탕을 내밀면서 생글생글 웃는 황제가 정말이지 너무 미웠다. 그러나 결국 이번에도 반항 한번 못해보고 그의 무릎위에 주저앉고 말았는데 바로 그때 하인 하나가 나기의 목걸이를 가지고 돌아왔다.
“호오, 이것이냐?”
황제는 시종을 통해 목걸이를 받아들고 이리 저리 살펴보다가 내게 내밀었다. 그것은 둥그런 순금장식에 커다란 사파이어가 박힌 큼직한 목걸이였는데 이상하게도 상당히 낯이 익은 느낌이 들었다. 비슷한 목걸이라도 가지고 있었던 건가?
“나기 거다.”
“응? 아, 그래.”
보채는 나기에게 목걸이를 걸어주고 보니 더더욱 낯이 익어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일이지? 어째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걸까?
“흐음, 정말 귀해 보이는 물건이구먼. 이런 것을 어떻게 요놈이 가지고 있는 것이지?”
킬이 의심스럽다는 듯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나기는 목걸이를 꼭 쥐고 그를 팩 노려보았다. 또다시 빼앗길까봐 두려운 모양이었다. 소중한 물건일까? 하긴, 그렇게 목숨처럼 아끼는 것을 보면 정말 소중한 물건이겠지? 잔뜩 긴장하는 녀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자 놈은 금새 고개를 돌리고 헤죽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이링카만 찾으면 된다. 헤에…”
“아, 이링카? 하지만 찾을 필요가 없어. 둘째 도령은 네 아비가 죽인게 아니니까 네가 구해줄 필요도 없거든.”
“아니다. 나기는 둘째 도령 구해야 해. 둘째 도령은 은인이야. 아비랑 나 데려와서 따뜻한 방에 재워줬는 걸? 나기는 따뜻한 방에서 처음 자봤다. 따뜻한 빵도 먹고…”
그 말을 하면서 나기는 정말 행복한 듯 헤죽 웃어보였다. 처음이라…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준 사람… 그는 나기에게 그런 의미를 가진 사람인 건가?
“아가, 백작을 미워하지 말거라. 모든 것이 다 내 불찰이란다. 젊은 시절 우리는 늘 함께 싸움판을 찾아다녔지. 그러다보니 자식이 태어나도 보아줄 수 없었고 필요한 때에 곁에 있어줄 수도 없었단다. 그것이 죄가 되어 늘 가슴 한구석이 아프다 하더니… 결국 이런 꼴을 겪는구나. 불쌍한 사람. 이제 어찌 살꼬?”
그는 짧게 혀를 찼다. 안타깝기 이를데 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채. 그리하여 나는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그에게 말했다.
“백작이 일어나는 대로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어요. 그와 할 얘기가 있어요.”
“글쎄다. 만나고 싶어 할지 모르겠구나.”
“찾아오지 않으면… 대가 끊길 거라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가문의 문을 닫아야 할 거라고도…”
“호오, 진심이냐?”
“보고도 모르시겠어요? 요 녀석은 한다면 하는 녀석이예요. 독하게 굴 땐 저보다 더하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킬이 끼어들어 뚱하게 중얼거리자 황제는 한동안 말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무릎을 탁 치면서 하는 말.
“역시, 이놈은 나를 닮았다. 암만 생각해봐도 그런 게 틀림없어. 으허허, 에고 이쁜 놈.”
방정맞은 황제의 웃음소리가 한동안 고요한 방안을 뒤흔들었다. 아아, 민망한지고. 할 말을 잃은 나는 한숨을 포옥 내쉬고 표 안 나게 고개를 저었다. 언제쯤이 돼야 저 가당치도 않은 착각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심히 걱정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푸르뎅뎅한 얼굴을 한 채 잔뜩 굳어있는 하인에게 질문을 던진 것은 바로 그 직후의 일이었다.
“혹시, 루이베르가 그를 왜 죽였는지에 대해 말한 것이 있느냐?”
나는 마치 비밀 얘기를 하듯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가뜩이나 긴장해있던 그는 어깨를 움찔거리고 놀라더니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요. 정말입니다. 단지 언젠가 한번 작은 도련님과 그가 보아선 안될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만 기억할 뿐…”
“보아선 안 될 것?”
“보아선 안 될 것이라… 무언가 의미심장한 느낌을 주는 말이로구먼?”
결국 그 한마디 외에 우리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는 정말로 아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겠구나. 더 있다간 파티 시간에 늦어 버리겠어.”
황제는 심드렁하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러난 일의 전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듯한 태도였다.
“이보게, 시크. 자네는 이곳에 남아 백작과 그 둘째 아들을 계속 보살펴 주게나. 그리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거든 백작과 함께 궁으로 돌아와.”
“알겠습니다, 폐하.”
그가 볼일 다 본 사람처럼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우리도 어쩔수 없이 그를 따라 일어서야 했다. 아직 몇 가지 할 일이 남았는데… 아니, 하다못해 아프다는 백작의 둘째 아들 얼굴이라도 보고 갔으면…
“다음 기회가 또 있잖냐? 상태가 조금 나아지면 그때 봐도 늦지 않아.”
킬이 손을 잡아끌면서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하긴, 계속 수면 상태에 있는 사람을 본다고 해서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니 그의 말처럼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나는 조금 개운치 않은 기분을 애써 달래며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황제 몰래 그에게 속삭였다.
“기사들을 풀어 루이베르를 찾아야겠어.”
“하지만 폐하께서도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텐데?”
“그렇겠지. 하지만 그가 찾기 전에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해. 무엇보다 거짓말을 못하게 만들어야지. 얘기를 듣는 것은 그 다음이야.”
뜻밖의 것을 만날 것만 같은 정체모를 예감.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가시같은 작은 불안감이 싹트고 있었다.
“어라? 눈이다!”
마차를 타기 위해 막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무언가 허연 것이 눈앞을 스친다 싶어 고개를 들었더니 내내 흐리던 하늘에서 드디어 뽀얀 눈송이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아, 이런 눈을 맞는 것은 대체 얼마만의 일인가. 나는 새삼 감개무량해서 고개를 번쩍 쳐들고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하늘을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소리 없이 떨어져 내리는 그것이 내 눈엔 흡사 하염없이 흩날리는 불두화의 꽃잎처럼 보이고 있었다.
“빨리 가자꾸나.”
“이런, 잘하면 정말로 늦어버리겠는 걸? 서둘러야겠다. 어서 가자!”
“에? 우에에에… 내, 내려놔!”
나는 기겁을 해서 사정없이 발을 버둥거렸다. 잠시 넋놓고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나란히 걷고 있던 킬이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나를 번쩍 안아들더니 짐짝처럼 어께에 매고 서둘러 마차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말로 해도 알아듣고 손을 잡아 끌어도 충분했을 일이었는데 하필이면 들어서 어깨에 매다니… 그것도 보는 눈이 그득하게 널려있는 곳에서.
‘내가 못 살아!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고오…!’
결국 쪽팔림이 뼈에 사무친 나는 얼굴을 벌겋게 붉힌 채 움직일 생각도 못하고 한동안 돌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차 안에 넣어졌을 때는 쿠션에다 얼굴을 박고 조용히 엎어져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 도마뱀을 어찌 죽여야 속이 시원해진단 말인가?
“…멋있다.”
뭐라? 남의 사정도 모르고 나기가 감탄성을 터뜨렸다. 그러자 우쭐해진 킬은 괜히 헛기침까지 난사하며 사정없이 잘난 척을 하는 것이었다. 대체 뭘 잘했다고…
“어험, 그랬냐? 하긴 내가 원래 멋있긴 하지. 하하하!”
“쯧쯧쯧,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눈이 안 좋다니… 심히 불쌍한 일이로다.”
“…질투하십니까?”
“질투는 무슨! 나는 단지 저놈의 미래가 참으로 안타까워서 해 본 말이다.”
흐응, 그러면서 왜 멀쩡한 나를 끌어다 옆에 끼고 앉는 것이지? 게다가 사탕은 또 왜 내밀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잠시 사탕과 황제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하는 수 없이 낼름 받아먹었는데 그건… 안 먹어주면 그가 정말로 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진짜루.
어쨌든 이런 안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마차는 빠른 속도로 백작가를 벗어나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빨리 가자’는 황제의 명령을 지키느라 거의 순식간에 굵은 눈발이 쌩쌩 날리는 길을 더듬어 백작가의 영지를 지나고 다시 둘째 왕야의 텔란시를 가로질러 금새 수도로 진입한 것이다. …말 그대로 전광석화였다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갈때는 시간이 꽤 걸리던 것이 돌아올 때는 그 반도 걸리지 않았다. 물을 것도 없이 마차가 워낙 무서운 속도로 내달린 까닭이었다. 오죽하면 마차에서 내릴 때 하늘이 빙글 돌고 땅이 가볍게 용트림을 다 했을까.
“다행히 늦지는 않았구나. 간단히 요기나 하고 조금 쉬어야겠다.”
잔뜩 늘어져서 허연 숨을 쌕쌕 몰아쉬는 여덟 마리의 말을 지나치며 황제는 그렇게 말했다. 그의 눈엔 말은 둘째 치고 퍼렇게 질린 우리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혹은 못 본척 하는 것이거나.
아무튼 점심때가 지난 늦은 오후 무렵이 되어서야 궁전에 도착한 우리는 마차에서 우르르 내리자마자 잽싸게 각자의 처소를 향해 돌아섰다. 하나같이 똑같은 요구 사항을 중얼거리면서. 같이 움직인 마당이니 황제든 마부든 춥고 배고픈 것은 모두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어쩐지 어딘가가 허전하다 했더니만…”
킬은 가볍게 기지개를 켠 후 하품을 하며 사라지는 황제의 등짝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나를 끌고 별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씻지도 않고 우선 밥부터 찾았다.
“호오, 그래서?”
“그래도 자식이라고… 쩝쩝… 후루룩. 백작이 끼어들어서 놈을 도망시켰어. 그리고 곧바로 기절했지. 덕분에 놈을 당장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할 수가 없더군.”
“하지만 오늘 중으로 우리 기사들을 풀어 몰래 잡아들일 생각이예요.”
킬과 나는 나란히 앉아 빵을 뜯으면서 스칼라에게 백작가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 주고 있었다. 대강대강도 아니고 처음 도착한 순간부터 떠나올 때까지의 자세한 과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털어놓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제제에게 우리의 행방을 묻다가 열받아서 그를 막 조각상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던 중이었으니까.
‘조금만 더 늦게 돌아왔다면 틀림없이 얼음 조각상이 돼있는 제제를 발견했을 거야.’
조각상이 돼있는 제제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나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언젠가 그녀의 레어에서 보았던 무수한 조각상들이 난데없이 머리 속에 떠올라서… 설마, 그게 모두 진짜 사람들은 아니었겠지? 아하하, 아니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는 사실을 이미 충분히 깨닫고 있는 나였다.
“그랬구나. 난 또 말없이 가버려서 조금 걱정이 됐지 뭐니? 오호호호…”
스칼라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한손으로 입을 가리고 뾰족하게(?) 웃어 젖혔다. 그러자 한쪽에 서서 우리의 시중을 들고 있던 제제가 흠칫 놀라며 슬며시 내 등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우리가 없는 사이에 말로는 못할 엄청난 고문이라도 당한 것일까? 조금 미안해져서 슬며시 그를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모든 게 다 내 탓이다, 제제야. 그러니 조금쯤은 날 원망해도 좋아.’
나름대로 진심이었는데 제제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갑자기 입을 꾹 다물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것이었다. 그건 대체 무슨 뜻이지?
“아, 참. 깜빡할 뻔 했구나. 상단의 아버님께서 연락을 해오셨다. 빠른 시일 내에 널 꼭 봐야겠다고 하시더라.”
“저를요?”
갑자기 나온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렇다할 말씀은 없으셨다만, 꽤나 자신만만하게 찾으시는 걸로 봐선… 성공한 것이 아니겠니?”
“설마, 이링카를 찾았단 말인가요?”
“아마도.”
벌떡! 너무 놀라서 나는 먹던 빵까지 내던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보석이라고 해서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벌써 찾았다니… 이것이야 말로 그 이름도 유명한 기적이 아니던가?
“그러고보니 이젠 꼼짝없이 할아버지라고 불러주게 생겼구나? 엄마는 정말 기대가 크단다, 아들아. 오호호호…”
“헉! 안돼! 그럴 수는 없어! 나도 아직 아빠 소리를 못 들었는데 이 마당에 그 노친네가 좋아 죽는 꼴을 보아야 한단 말이냐?”
“…지금 그 소리가 왜 나오는 거예요?”
경악을 금치 못하는 킬 덕분에 드디어 떠올리지 말아야 할 문제까지 떠올리고 만 나.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그 노친네한테 지고 있을 수만은 없어. 그러므로 파비안, 사랑하는 아들아. 당장 오늘부터 ‘아빠’라고 불러라! 그 외는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야.”
“헉!”
결국 질투에 눈이 뒤집혀 얼토당토않은 선언을 해버리는 킬. 이 마당에 나는 진정 기뻐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슬퍼해야 하는 것인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빵이 중간에서 딱 멈추는 것을 느끼며 나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과감하게…
“저… 쉬러 가요!”
도망쳤다. 도망치고 말았던 것이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어쩔수가 없었다. 그건… 너무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었던 데다가 무엇보다 내게는 조금 어렵게 여겨지는 문제이기도 했으니까.
“후우, 이게 뭐야. 바보 같잖아?”
방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길게 드러누우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 엄마, 아빠… 어차피 시작된 유희이고 거짓말이라면 그까짓 말 한마디 더 못해줄 것도 없는데… 대체 뭐가 어려워서 이렇게 망설이고만 있는 거지? 저들이 내 진심을 바라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 흔한 말 한마디가 뭐가 아까워서 이렇게…
“하아, 이것도… 병일까?”
생각할수록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서 나는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누가 알아줄까? 그 흔한 한마디를 떠올릴 때마다 이렇게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세상엔 있다는 것을. 바보같이.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누워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힘겨운 그리움 속에서 그렇게 조용히 잠이 들었다.
탁… 탁… 딱!
“우웅…”
그것은 뜬금없이 시작된 소리였다. 흡사 돌맹이끼리 부딪쳐 나는 소리인 듯한 그것은 곤히 잠든 내 신경을 끊임없이 자극하며 빨리 일어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노크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뭐지?’
잠결에 생각해봐도 조금 수상쩍은 소리이긴 했지만… 따지자면 또 어디에서든 날 수 있는 소리였던 까닭에 처음, 나는 그 소리를 가볍게 무시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같은 소리가 몇분 동안이나 계속해서 반복되자 결국엔 짜증이 나서 부시시 눈을 떴는데 그때까지도 방안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네. 어디서 나는 소리지?”
나는 길게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가구등에서 가끔 희끄무레한 빛이 반짝이는 모습. 이미 해가 지기 시작했는지 방은 제법 어두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꽤 오랜 잔 것이 분명했다. 근데 왜 이제껏 아무도 안 깨운 거지? 벌써 파티가 시작됐을텐데…
잔다고 인심도 좋게 그냥 내버려 두고 갈 킬과 스칼라가 아니었기 때문에(그들은 파티의 주인공이 황제가 아닌 바로 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이 상황을 매우 의심스럽게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또다시 ‘팍’ 하고 들려오는 괴이쩍은 소리. 아까는 잠결이라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감을 잡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다행히 정확하게 알아챘다. 귀가 좋아서가 아니라… 말짱하던 유리창에 난데없이 거미줄 모양의 큼직한 흉터(?)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걸 보고 나서야 나는 아래에 있는 누군가가 내 방 창문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소리 없이 냉큼 창가로 달려가 밖을 내려다 보았더니 눈을 잔뜩 뒤집어 쓴 웬 그림자 하나가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누구지? 일부러 소리를 내는 걸 보면 자객은 아닌 것 같은데…
그는 내가 내려다 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허리를 구부려 한참 바닥을 더듬다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손에는 내 머리통보다 조금 작아 보이는 큼직한 덩어리(?)가 떡하니 들려 있는 것이 아닌가?
‘헉! 이번엔 아예 유리창을 깰 생각인 건가? 저렇게 큰 걸 집어 들다니…’
나는 그가 기다리다 지쳐 드디어 독한 맘을 먹은 것이 아닌가 하고 잠시 걱정을 해보았다. 그러다 정말로 그 큰 돌을 던질 듯 자세를 잡는 것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나도 모르게 창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크게 외쳤던 것이다.
“잠깐! 그거 정말로 던질 거야?”
“헉! 뭐, 뭐야? 깨어 있었잖아?”
“어라? 이 목소리는…?”
나는 조금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의식 중에 말을 걸긴 했지만 누구인지 정체를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당황스럽게도 어딘가에서 들어본 듯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누구…?”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길게 내밀고 어둠 속에 서있는 그를 빤히 내려다 보았다. 그러자 그는 당장이라도 기어 올라올 것처럼 담벼락에 찰싹 달라붙으며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 못한다면 섭섭해. 한 침대에서 같이 밤을 보낸 사이인데…”
아래층에서 새어나온 누런 불빛에 서서히 드러나는 시커먼 머리칼과 갑옷 그리고 이 뻔뻔한 말투.
“이봐, 파브. 그러고 있지 말고 줄이라도 좀 내려줘. 응?”
허락도 없이 제 맘대로 부르는 이름… 그렇다는 것은?
“…시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