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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17화)
4. 트리키 가의 비밀 (4)/

“오늘따라 날이 꽤 춥구나. 하늘이 제법 흐린 걸 보니 한바탕 눈이라도 쏟아질 모양이야.”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가능한 서둘러서 돌아와야 겠는데요? 파티에도 참석하셔야 하니까…”
“흐음, 그래야겠지. 가만, 그러고 보니 막내 녀석이 거느리고 다니는 놈들이 생각나는구나. 떼로 돌아다니다 어디 길바닥에서 얼어 죽지는 않았는지…”
“얼어 죽을 놈들도 아니지 않습니까? 근데 막내가 궁에 들어오긴 했습니까?”
“그저께 들어왔더라. 그럴듯한 선물(?)도 받았지. 그러고 나선 또 감감무소식이지만 말이다. 뭘 하는지 꽤 바쁜 모양이야. 나랑 놀아주지도 않고 그냥 가버렸거든.”
하품을 하면서 늘어놓는 말에 나는 귀가 솔깃해졌다. 막내라면… 분명 그 시커먼 놈들의 주인이라는 칠왕야일테니까.
‘기사들을 살피는 것보다 직접 그에 대해서 알아내는 편이 더 빠를까?’
호기심이 동한 나는 기회를 보아 그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킬에게 물어도 될 일이었지만 그는 성질이 더러워서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않으니까 황제에게 묻은 편이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었다. 하는 짓으로 봐선 쉽게 장담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럴듯한 선물이라니요?”
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자신이 선물한 유리 조각보다 더 좋은 선물이었냐고 묻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자 황제는 갑자기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한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게 말이다. …무슨 새알이라고 하는데 정력에 그렇게 좋다는 구나. 회춘의 묘약이라나? 막내가 온 동네를 다 뒤져서 간신히 하나 찾아냈대.”
“…!”
킬의 입이 떡 벌어졌다. 물론 황제 옆에 앉아있는 어의 시크와 내 입도 벌어졌다. 이 무슨 민망하기 짝이 없는 말인지… 마차 안엔 한동안 원인모를 정적이 맴돌았다.
“아, 그렇구나.”
“나기야, 아무 때나 고개 끄덕이지마.”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나기를 한 대 쥐어박아 주고 나는 슬며시 마차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흐흐’거리고 웃는 그를 진정으로 외면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킬도 같은 심정이었는지 잠시 숨을 멈추고 있다가 갑자기 마차가 떠나가도록 버럭 소리쳤다.
“응큼하게 웃지 마세요. 애가 보고 있는데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그 연세에 무슨…”
“흐응, 내 나이가 뭐가 어때서? 이 나이에 자식을 보는 인간도 종종 있다더라. 안 그런가, 시크?”
“허허허… 그, 글쎄요.”
사십대의 점잖은 중년 어의 시크는 살짝 올라간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사뭇 당황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하도 어이없는 말이라 뭐라 대답을 하기가 상당히 민망한 것이리라. 나는 어깨 부근까지 자란 그의 갈색 머리칼을 바라보며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황제를 향해 혼잣말처럼 물었다.
“벌써 일곱이나 있는데 또 자식을 낳고 싶으세요?”
“크허험, 적적해 그런 게야. 다들 떠나버려서 심심하잖냐? 하나라도 곁에 붙어서 재롱을 떨어주면 좀 덜 쓸쓸하련만…”
“거짓말하지 마세요. 쓸쓸은 무슨 얼어 죽을 쓸쓸입니까? 자식들 죄다 내팽개쳐 놓고 신나게 놀러 다니던 것이 바로 엊그제 일인데 그런 말이 잘도 나오십니까? 이제껏 살아오면서 일년중에 폐하 얼굴을 뵌 건 고작 열 번도 되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막내가 큰형님이 아버지인줄 알고 자랐겠습니까?”
아항, 그런 처절한 과거가 있었구먼. 구구절절 흘러나오는 과거사에 황제는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구겨졌다. 역시 지은 죄가 많아서인지 이렇다할 변명 한마디 못하는 그였다. 그러게 왜 그런 헛꿈을 꿔서 괜히 구박을 받고 그래요? 나는 안됐다는 듯 그의 어깨를 조용히 두드려 주었다. 그러자 그는 ‘그저 날 위해주는 놈은 너밖에 없구나.’ 라고 중얼거리며 나를 끌어안고 부비거려서 다시 한번 킬에게 가차 없는 칼질을 당하고 말았다. 이번만큼은 위로의 여지조차도 없는 그였다.
점점 더 흐릿해지는 하늘을 이고 마차는 꽁꽁 얼어붙은 길을 달려 숲길을 벗어났다. 벌겋게 속살을 드러낸 길을 중심으로 양쪽에 길게 늘어서있던 나무들이 사라지자 이번엔 다리 너머로 탁 트인 넓은 대로와 제법 복잡한 도시의 거리가 보였다. 수도를 완전히 벗어나 한참을 내달린 후 만난 첫 번째 도시였는데 암만 봐도 한 가문의 영지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커보였다. 설마 트리키 가의 영지가 아닌 건가?
“이곳은 텔란시란다. 젊은 귀족들과 기사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인데 지금은 둘째 형님이 다스리고 있지. 이곳만 지나면 곧바로 트리키 가의 영지가 나온단다. 금방이야.”
도시의 오른쪽 너머로 저 멀리 보이는 뾰족한 탑을 가리키며 킬이 설명을 해주었다. 초록색 지붕 끝에 매달린 작은 깃발이 팽팽하게 펼쳐져 바람을 맞고 있는 모습.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쏟아낼 듯 무거운 회색빛을 띄고 있는 하늘 아래에서 세차게 펄럭이고 있는 그것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보이는 것만큼 가깝지는 않아서 트리키 가의 대문앞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두어 시간을 넘게 더 달려야했다. 조금은 지루한 시간이었다.
“문을 열어라!”
검은 칠을 한 대문 앞에 멈춰서서 누군가가 길게 소리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면서 열렸고 마차는 미끄러지듯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앙상한 나무들과 누렇게 말라붙은 잔디 그리고 드문드문 눈을 덮어 쓰고 있는 작은 관목들 너머로 거대한 저택이 불쑥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마차 밖으로 고개를 길게 내밀고 점점 가까워지는 그 회색빛 건물을 바라보았다. 크고 넓지만 어딘지 모르게 황량한 느낌을 주는 대저택. 쌩쌩 불어대는 겨울 바람 못지않게 추운 느낌을 주는 건물은 늙은 트리키 백작처럼 어딘지 모르게 쇠락해가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그것은 배경처럼 드리워져있는 흐린 하늘 때문일까?
“어서 오십시오, 폐하.”
군데군데 눈이 쌓인 정원을 가로질러 막 저택앞에 멈춰선 마차에서 내려서자 마중 나와있던 트리키 백작이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는 잿빛 털옷을 걸친채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애써 꼿꼿하게 서있었는데 그런 그의 등뒤로는 금발을 가진 삼십대의 청년과 하인으로 보이는 십여명의 사람들이 나란히 서서 하나같이 우리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 가득 시린 긴장감을 담은채로.
나는 황제의 뒤를 따라 마차에서 내려선 다음 주춤거리는 나기를 이끌고 그의 등뒤에 서서 백작과 그의 식솔들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백작을 본 나기가 갑자기 흠칫 놀라더니 붙잡을 새도없이 냉큼 내 등뒤로 숨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나기야?”
쌔근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등을 타고 희미한 떨림이 전해지고 있었다. 녀석은 백작이 두려운 걸까? 하긴 아비를 죽인 사람이니 두려울만도 하겠지만… 혼자 죽음의 숲으로 들어올만큼 간 큰 녀석이 이렇게까지 두려움에 떤다는 것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설마 몬스터보다 백작이 더 무섭기라도 한 건가?
‘하긴 인간보다 잔인한 동물은 없다는 말도 있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살짝 돌아서서 녀석의 등을 두드려주고 조용히 손을 잡아 끌었다. 잠깐 망설이던 녀석이 그제야 입술을 질끈 깨물고 천천히 내 뒤를 따라나섰다. 그때였다. 앞서가는 황제와 백작을 따라 돌아서던 금발의 청년이 서슬퍼런 눈으로 나를 노려본 것은.
‘뭐지? 왜 나를 노려보는 거야?’
짧은 순간이었지만 섬뜩하게 스쳐지나간 시선이 조금 신경에 거슬렸다. 그 선명한 금발 아래에서 빛나는 엷은 초록빛 눈동자는 분명 살기를 머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흠칫 놀랄만큼 아주 강렬한 살기를…
“뭘 하고 있니? 이러고 있다간 감기 걸리겠다. 어서 들어가자.”
멍하니 서있는 나를 킬이 잡아끌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저택안으로 들어갔는데 안으로 들어서자 환한 불빛과 함께 그제야 ‘훅’ 하고 따스한 훈기가 느껴졌다. 우리는 외투를 벗어 시종에게 맡기고 백작의 뒤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섰다. 작은 아치형의 벽난로에서 모닥불이 기세좋게 타고 있었다.
“아가, 여기 할애비 곁으로 와 불을 좀 쬐렴. 이런 날씨엔 감기에 걸리기 쉽단다.”
난로와 가까운 곳에 의자를 놓고 앉은 황제가 나를 돌아보며 손짓을 했다. 근데 왜 옆에 놓인 의자가 아니라 자신의 무릎을 가리키고 있는 거지? 수상하구운. 뒷골을 자극하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 그리하여 나는 방긋 웃고 있는 그를 조용히 무시해주고 푹신한 쿠션을 끼고 앉아 손짓을 하는 그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그는 눈살을 팩 찌푸리면서 킬을 바라보더니 대뜸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오딜란, 하여튼 네놈은 언제쯤이 돼야 맘에 드는 짓을 할거냐? 앙?”
“제가 뭘 어쨌다고 그러세요?”
“시끄러! 어디다 말대꾸냐? 어떻게 된 놈이 맘에 드는 구석이 하나 없어. 당장 멀리 내쫓던지 해야지 원.”
“휴우, 아들아…”
결국 난 킬이 멀리 내쫓기기 전에 얌전히 황제의 말을 들어야 했다.
‘비겁하다. 킬, 날 이렇게 팔아먹어도 되는 거야?’
나는 원망어린 눈동자로 킬을 진하게 바라봐준 후 흡사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처럼 비실비실 걸어가 황제의 무릎위에 올라앉았다. 그러자 그는 금새 ‘허허’ 거리고 웃더니 연신 한숨을 내쉬는 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으허허, 말년에 효도를 다하고… 기특하구나, 오딜란. 이건 오래전부터 생각한건데, 자식중에선 그래도 네가 제일 쓸만한 것 같아.”
아아, 이 무슨 깃털을 능가하는 가벼움이란 말인가. 순식간에 말을 바꾼 그가 좋아라 웃어젖히고 있을때 킬 이하 기타등등의 사람들은 괜시리 헛기침을 남발하며 애써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물론 나 또한 얼굴을 벌겋게 붉힌채 하릴없이 천장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고. 휴우, 사는게 뭔지…
“이보게, 시크. 자네는 우선 백작의 둘째 아들부터 진찰을 하고 오게. 꼼꼼히 살피고 와 내게 얘길 해주게나.”
“알겠습니다, 폐하. 그럼…”
황제의 말에 점잖은 중년 어의 시크는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일어나 하인을 앞세우고 둘째 도령의 방을 찾아나섰다. 어찌나 빠른 행동이던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어쨌든 우리는 사이좋게 둘러앉아 그가 가져올 소식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호오, 이 아이가 자네 큰 아이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루이야, 어서 폐하께 인사 올리거라.”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폐하. 루이베르 트리키라 하옵니다.”
“오냐. 반갑구나. 칼질은 잘 배우고 있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아직은 부끄러운 수준일 따름이옵니다.”
“하긴, 네 아비를 따라오려면 한참 멀어 보이긴 한다만…”
생긴 것만큼이나 반듯한 인사를 하는 그에게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마치 자신의 못생긴 아들내미들을 대하는 것처럼 사심 없는 태도였다. 아니 너무 솔직하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황제는 사심 없이 그를 평가했고 그 소리를 들은 루이베르 트리키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사실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자리에선 흔히들 아비를 능가하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해주긴 하지만 그의 경우는 워낙 대단한 아버지를 가진 덕분에 보기 드물게 뛰어나지 않은 이상은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오히려 욕이 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마치 평가절하 하는 듯한 황제의 말에도 다들 그러려니 하며 인정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어째 우리 아기보다 못해 보이누 그래?”
끝내 한마디를 추가해서 기어이 눈총을 받는 황제. 입이 방정이라는 말은 진정 그를 위해서 만들어진 말이 아닐까?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마지 않았다. 그 말이 나온 순간 백작은 물론이고 반듯하던 청년 루이베르 트리키가 흠칫 놀라 나를 보더니 한사람은 ‘설마’하는 표정을, 또 한사람은 ‘어딜 감히…’하는 표정과 함께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으니까. 근데 나 아무래도 저들 부자에게 미운 털이 박힌 것 같지? 미간을 찌푸리고 바라보는 폼이 꼭 그런 것만 같아서 나는 적잖이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으허허, 에고 요 이쁜 것. 아가, 사탕 하나 주랴?”
그러든 말든 황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지만. 대체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길래 이러는 것인지 속마음이나 한번 들여다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였다. 진짜루.

<책갈피> ― <그녀는 불안해졌다.>

“으허허허, 고놈 참…”
황제는 연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다섯째 왕야인 오딜란이 데려온 아이를 무릎위에 앉혀놓고 손수 과자를 쥐어주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아이는 그 큰 눈동자를 깜빡거리면서 황제가 입에 넣어준 사탕을 오물거리고 있었는데 혼을 쏙 빼놓을 만큼 귀여운 모습이라서 아닌 척 하면서도 모두들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남자 아이라는군요.”
“세상에, 저 얼굴이?”
“안 그래도 너무 예뻐 오왕야께선 내어놓고 싸고돌며 애지중지 한다는 소문이예요. 저기, 치장한 것만 봐도 보통이 넘잖아요.”
“하긴, 저 정도면 그럴만도 하죠. 보세요, 폐하께서도 맥을 못 추시잖아요.”
“어쩜 저렇게 이쁘게 키우셨죠?”
“오호호… 제 핏줄이 어딜 가겠어요? 하지만 외모만 저를 닮았지 사실 소질은 왕야를 쏙 뺐답니다.”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는 소리를 애써 못들은 척 하며 그녀는 슬며시 발코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파티의 주인처럼 구는 모치즈 가의 계집을 보는 것도 꽤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전엔 아무리 불러대도 오지 않았던 주제에 어쩌다 돌아온 아들내미를 끼고 나타나 으스대는 폼이 몹시도 눈에 거슬리는 것이다.
“흥, 그래봤자 이쁘장한 아들내미 내세워 잠깐 싸구려 환심을 사려는 것뿐이겠지.”
“그렇게 태평하게만 생각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응?”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그녀는 흠칫 놀라 홱 돌아섰다. 그러자 발코니 쪽에서 인기척도 없이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놀라셨습니까, 누님?”
그녀의 친동생인 고가였다. 그녀와 똑같은 붉은 갈색 머리칼을 가진 그는 푸른색 외투를 걸치고 한손엔 피처럼 붉은 와인잔을 든 채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휴우, 너였구나. 난 또 누구라고… 그나저나 그건 또 무슨 소리니? 태평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니?”
“오왕야 댁의 도련님 말이예요. 그냥 이쁘장하게 생긴 꼬맹이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뭐라?”
영문모를 말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바짝 다가섰다. 고가는 녀석에 대해서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일까? 호기심이 동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는지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발코니의 그늘진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나직하게 속삭이는 말.
“정말 모르시겠어요? 누님의 아드님이신 시바인 전하의 일을 생각해 보세요.”
“무슨…?”
“폐하께서 처음부터 전하를 귀여워 하셨던가요? 아니지요. 늦게 본 막내 자식이라고 몇 번 찔러보긴 하셨지만 다른 왕야분들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거야…”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아니, 사실이 그랬다. 처음엔 자식들의 이름도 제대로 외우지 못할 만큼 관심이 없었던 황제였다. 그런 것을 그녀가 나서서 자꾸 이름을 들려주어 점점 익숙하게 만든 것일뿐. 그러던 그가 어느날인가부터 막내를 귀엽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게 언제부터 였더라?
“트리키 백작이 폐하께 시바인 전하의 검술 실력을 칭찬한 후부터였습니다. 그때부터 눈여겨보시다 가끔 귀엽다고 말씀해 주셨지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누님?”
“네 말은… 설마, 오딜란의 아들이 폐하의 관심을 끌만큼 뛰어나다는 뜻이냐?”
“왜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 저렇게 좋아하시는 것을 보면 분명 보통 실력은 아닌 게지요. 보기엔 연약하고 비리비리해 보여도 말입니다.”
“…!”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곱 왕자 중 다섯째인 오딜란을 제외하고서는 자신의 아들인 시바인이 가장 사랑받고 있었더랬다. 최소한 그녀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런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마냥 갑자기 나타난 어린 것이 황제의 관심을 온통 독차지 해버린 것이 아닌가. 아니, 관심을 넘어 이제까지는 없었던 사랑까지…
“대단한 녀석이예요. 모치즈 가의 부에 오딜란의 기사단 그리고 폐하의 사랑까지 독차지한 굉장한 꼬마가 아닙니까?”
“흥, 아무리 그래도 내 아들 보다는 못하다.”
“장담하실 수 있으십니까? 누님, 너무 태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혹시 압니까, 폐하의 관심을 차지하고 있는 저 꼬맹이가 다음대의 황제가 될지…”
“어림없는 소리!”
그녀는 단호하게 소리쳤다. 그럴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말로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떻게 살아온 세월인데 그 자리를 빼앗겨? 흥, 순순히 내어줄 줄 알고? 아무리 오딜란이라지만 이번만은 뜻대로 안될 것이야. 암, 그렇고 말고.’
그녀는 손을 꾹 움켜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황제의 품에 안겨있는 작은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연신 웃어젖히고 있는 황제보다도 더 미운 아이.
“네가 시험해 보려므나. 정말 저 아이가 폐하의 관심을 살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시린 밤공기 같은 희미한 살기만을 공중에 남겨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