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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16화)
4. 트리키 가의 비밀 (3)/

“반년전이었습니다. 워낙 어려운 이들을 돕기 좋아하던 작은 아이가 영지내의 가난한 마을을 돌아다니다 심하게 다쳐 쓰러져있는 어느 부자를 발견하고 치료를 해줄 겸 집으로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사내는 벙어리였다고 한다. 초췌한 몰골로 아이를 품에 꼭 부둥켜안고 있었는데 전신에 칼자국이 나있는 것을 보고 백작은 그가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그는 상처가 치료되는 대로 그들을 집에서 내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런 내용을 작은 아들에게 미리 말해놓았다.
“머무는 내내 그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고 아이는 곧잘 재롱을 부려서 모두를 즐겁게 했지요. 그래서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그날, 새벽에 작은 아이 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 가보니… 녀석이 검은 피를 토하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허어, 저런. 어쩌다 그리 됐을꼬?”
“독에 당한 것입니다. 그 은혜도 모르는 놈이 작은 아이에게 독을 먹여 죽이려 한 것이지요.”
“왜…? 아니, 그래서?”
“하인 하나가 작은 아이 방에서 도망치는 그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죽였군요?”
서늘한 투로 단정지어 묻자 백작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는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 했다는 이유로 나기의 아버지라는 자를 죽인 것이다. 그리고 아들을 되살리기 위해 나기에게 이링카를 찾아오라고 시킨 것이고.
“증거가 있나요?”
“그놈이 작은 아이의 방에서 나오는 걸 본 사람도 있고 놈이 이상한 약 같은 것을 만드는 장면도 목격한 자가 있었다.”
“단지 그것 뿐인가요? 결국 어느 누구도 그가 백작님의 아들을 죽이기 위해 독을 넣는 모습은 보지 못한 것이군요? 상황이 그럴 듯 했을 뿐.”
“아니다. 분명 놈이 그 아이를 죽이려 한 것이야!”
백작은 눈을 부릅뜨고 단호하게 소리쳤다. 자신이 직접 목격이라도 한 것처럼 단 한점의 의심도 없이. 어쩌면 그렇게 자신할 수 있는 것인지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직접 본 사람이라도 ‘설마’ 하는 마음에 약간의 의심 정도는 품게 마련일텐데… 어쨌든,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오히려 나기와 녀석의 아비에겐 아무 죄도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심증을 굳혀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거짓말을 했을 거라는 사실도.
“한가지만 물어도 될까요?”
“…?”
“그를 어디에서 붙잡으셨죠?”
“…아이 곁에서 자고 있었다.”
“거참, 이상하군요? 목격자가 있는 이상 붙잡히는 건 시간 문제였을텐데… 어째서 도망가지 않은 걸까요?”
“…!”
매우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하고 빤히 바라보자 그는 흠칫 놀라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이미 전부터 깨닫고 있었을 것이었다. 다만 어떤 이유 때문에 애써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일뿐. 나는 그런 점도 철저하게 조사해 진실을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느릿하게 일어서며 말했다.
“파티가 끝나면 죽은 자의 아이와 함께 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시신도 거두어야 하고 목걸이도 돌려받아야 하니까요. 그리고 그를 목격했다는 사람도 만나보고 싶군요.”
“그, 그건…”
“아이의 아비는 벙어리였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변명 한마디 못했겠군요. 그 변명, 제가 대신 해드리죠. 그리고 대가도…”
어처구니없는 누명 때문에 나기가 아비를 잃고 죽음의 숲으로 보내졌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새삼 치가 떨렸다. 일 자체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째서 그렇게 쉽게 진실을 외면하고 죄없는 사람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일까? 분노어린 시선으로 노려보자 그는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더니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흐응, 정말 묘한 구석이 있는 일이로구먼.”
얘기를 듣고만 있던 황제가 하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척 듣기만 해도 호기심이 물씬 묻어나는 말이었다. 설마, 따라나서는 것은…
“그렇지. 아가, 나들이도 할 겸 할애비가 같이 따라가주마.”
“흡! 아니,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예상에서 한치도 안 벗어나는 결과에 흠칫 놀라 나는 슬그머니 사양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용의주도한 황제는 능구렁이처럼 금새 말꼬리를 돌려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근데 말이다. 무엇 때문에 네가 그 꼬맹이의 일을 대신 해주는 게지?”
“그야, 약속을 했으니까요.”
“약속?”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어요.”
무언가 속는듯한 기분으로 말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갑자기 히죽 웃더니 이번엔 백작을 향해서 말했다.
“이보게, 파티가 끝나는 대로 자네 아들내미 문병을 가겠네. 그래도 돼나?”
“…뜻대로 하십시오, 폐하.”
“고맙구먼. 그런 뜻에서 시크놈을 데려가도록 하지.”
“시크라면… 어의? 가, 감사합니다, 폐하.”
백작은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결국 그는 백작과 나 양쪽 모두의 미움을 사지 않은채 원하는 것을 얻어낸 것이다. 나쁜 말로 하면 교활했고 좋은 말로 하면 지혜로웠는데 그렇다는 사실을 깨닫자 헤실헤실 웃고 있는 그가 갑자기 무서운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갑자기. 그야말로 뜬금없이.
‘실수로라도 방심하면 안되겠는 걸? 예리한 사람이야. 그리고 잔인할지도 모르고. 원래 잘 웃는 사람일수록 화가 나면 무섭잖아?’
이제까지 만나온 사람들을 떠올려 보다가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당장 화를 내고 있는 사람보다 웃고 있는 사람이 종종 무서운 일을 저지르곤 했으니까 말이다. 오, 그러고보니 이타라도 일을 저지르기 전엔 항상 웃는 얼굴로 나타나곤 했었지. 그래, 나에게 오렌지주스를 가장한 정체불명의 약을 먹일 때도 놈은 웃고 있었어. 뼈아픈 과거를 되새기며 이번만은 절대 속지 않겠노라고 굳게 다짐을 하는 나였다. 그런데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제는 또다시 과자를 내밀며 히죽 웃는 얼굴로 물었다.
“근데 말은 탈 줄 아는고?”
“네, 당연히.”
“호오, 그것 참 다행이구나. 마침 누군가가 괜찮은 망아지를 선물로 보내왔는데 그걸 네게 주면 되겠구나. 으허허허…”
“…!”
망아지라… 공짜로 말 한마리가 생기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인 것 같은데, 그게 또 매우 이상하게도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얄궂게 생긴 시커먼 놈의 얼굴이 난데없이 머리속을 스치는 것이… 아무튼 무언가가 떨떠름한 가운데 나는 거의 마지못해 과자를 받아 먹으면서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만 싶었다.

“뭐, 뭐라? 칠일?”
날벼락은 예기치 못한 구석에서 나를 공격했다.
“명색이 황제폐하의 생신이잖냐? 원래는 한달 동안 계속해서 파티를 벌이는 것이 관례야. 하지만 그분이 워낙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서 그렇게 줄인 거라고.”
“맞아. 그래서 네 옷을 여섯 벌이나 지은 거잖니?”
“하. 하. 하아… 그럼 칠일 동안 계속 여기에서 지내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킬군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렇지 라니? 나한테 말 한마디 없었던 주제에 어떻게 그렇게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거야아…?
상황은 매우 어이가 없었다. 파티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을 무렵, 그만 돌아가자고 매달리는 내게 그는 말했다. 파티는 칠일 동안 계속되고 그 칠일 동안 우리는 예전 킬의 처소였던 별궁에서 지내야 한다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자그마치 칠일 동안이나. 나는 막 그 사실을 확인하고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목적을 이룬 이상 이제는 황제의 손바닥에서 벗어나 보려고 했는데 덜컥 발목을 붙잡히고 말다니…
“젠장, 그러면 나기를 데리고 트리키 백작 가를 찾아가는 일이 늦어지잖아?”
“아, 그건 걱정마라. 파티는 저녁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나고 낮에는 어딜 가든 자유니까 말이야. 뭣하면 나기를 불러들이면 되는 일이다.”
“그래? 그럼 당장 나기를 불러와!”
답삭 매달리면서 단호하게 외치자 킬은 한쪽볼을 실룩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빠, 부탁드려요오~ 라고 말하면…”
“관둬!”
느끼한 콧소리를 내며 요염하게(?) 눈을 깜빡거리는 그를 사정없이 무시해주고 나는 내 힘으로라도 나기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 사이 마법 실력이 꽤 늘었으니 나기 한사람 워프 시키는 것 쯤이야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킬군이 타이밍도 좋게 덥석 뱉어놓는 말.
“마법은 안된다. 아직 기사도 못된 주제에 웬 마법?”
“…들키지만 않으면 되잖아?”
“그러니까 안된다는 거야. 궁전안에서 마법을 썼다간 당장 들켜버리고 말테니까 말이다. 마침 초대받아 들어와 있는 대마법사들은 둘째치고 누구보다 역시 폐하가 만만찮은 분이거든?”
“뭐? 그럼 그분도 마법사란 말이야?”
“아니. 마법사는 아니어도 검기까지 쓸 줄 아는 소드 마스터시지. 워낙 감이 좋아서 마나의 움직임 정도는 귀신같이 알아채고 들이닥칠 걸? 게다가 그 불타는 호기심은 또 어쩌고? 아니 호기심은 둘째치고 강한 것을 숭배하는 버릇을 앞세워 위험한 짓을 벌일지도 모르지. 그거 아냐? 그가 널 이뻐하는 건… 물론 외모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네가 강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껏 보아온 손자놈들보다 그나마 강해보이기 때문에 맘에 들어 하는 거야.”
헉, 그런 사실이?! 순전히 그 괴이쩍은 취향 때문에 그러는 건줄만 알고 있었는데 의외로 그런 깊은 속뜻이 있었다니 역시 황제는 무시 못 할 사람이었나 보다. 하긴, 트리키 백작하고 얘기를 나눌 때도 그는 생긴 것 답지 않게 상당히 용의주도한 면모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런 걸 생각하면… 아무래도 앞으로는 더더욱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겠지? 아, 가만, 그럼 나기는 어쩐다지?
“아무래도 직접 데려오는 수밖에 없는 건가?”
“제제를 시켜서 마차로 데려오라고 이르면 될게다. 늦어도 내일 낮까지는 올 수 있을 테니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마. 근데 정말 녀석을 데리고 트리키 백작가로 찾아갈 셈이냐?”
“그렇다니까. 폐하도 같이 간다고 했어.”
“쩝, 그러면 그렇지. 그 재미있는 일에 빠질 양반이 아니지.”
킬은 이미 예상했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곤 ‘나도 따라가 볼까나?’라고 슬며시 운을 띄우고 내 눈치를 살피더니만 결국은 따라나서야겠다고 덜컥 결정을 내리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따라나설 생각을 하고 있었던 주제에 절대 안 그런 척 갖은 내숭을 떠는 모양이라니… 진정 가증스럽기가 이루 형용할 수조차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런 결정과 함께 우리는 그날 관례대로 여섯 개의 문을 가진 그의 별궁에서 밤을 보내야 했는데 잠자리가 바뀐 덕분인지 나는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계속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야 간신히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아침이 올 때까지 내내 바위에 깔려 죽어가는 무시무시한 꿈을 꾸고 말았다. 휴우, 정말로 죽을 뻔 한 날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다음날 아침. 더더욱 큰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당시 나는 피로와 꿈에 지쳐 늦은 아침까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벌컥! 쿵쿵쿵쿵…
“아가, 어서 일어나 망아지를 보러 가자꾸나. 으허허허…”
말도없이 불쑥 들이닥쳐 잘자고 있는 나를 사정없이 흔들어 깨우는 웬수같은 황제. 그는 이불속에 파묻혀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는 나를 허락도없이 불끈 일으켜 안더니 그대로 시종에게 넘겨 구석구석(?) 씻겨지게 만들었다(어찌나 민망하던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완전히 잠에서 깨고 말았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린 어느새 사이좋게 마굿간 앞에 서있는 것이었다. 대체 어느 틈에?
“너도 놈을 보면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게다. 참 잘생긴 놈이거든. 물론 약간 거친 면이 있긴 하지만 자세히 보면 나름대로 귀여운 구석도…”
웬만한 집보다 훨씬 크고 넓은 마굿간 건물을 바라보며 그가 흐믓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눈앞에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사고(?)가 발생해 버린 것은.
히이이잉… 콰자자작…!
“으악! 놈이 또 발광을 시작했다아..! 모두 피해에…!”
“폐, 폐하 어서 피하십시오!”
무슨 일인지 찢어지는 말울음 소리와 함께 갑자기 마굿간의 문이 박살나고 사람들이 우르르 대피를 하더니 누군가가 우리를 보호하듯 둘러싸고 폭풍처럼 잡아끌기 시작했다. 그래서 영문을 모르는 가운데 질질 끌려가고 있는데 바로 그 순간 마굿간 안에서 시커멓고 날렵한 무언가가 남은 문짝을 완전히 박살내고 무서운 속도로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뭐, 뭐지?”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나는 제대로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왠지 낯익은 풍경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
“폐하, 송구하오나 또 그 망아지 놈이 발광을 시작했습니다.”
“또오?”
마굿간에서 튀어나와 넓은 연무장을 돌아다니면서 미친 듯 마구 날뛰는 시커먼 망아지를 가리키며 한 말에 황제는 가볍게 인상을 찡그려 보였다. 하는 말로 보나 태도로 보나 역시 한두번 있는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근데 설마, 저 미친 망아지가 내게 준다던 그 망아지는 아니겠지? 갑자기 엄습하는 심상치않은 예감에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슬며시 돌아서려는데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황제가 갑자기 내 어깨에 손을 턱 올려놓으며 음침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바로 저놈이란다. 맘에 들지?”
“…!”
머시라고? 맘에 들기는 어디가? 미친 듯이 날뛰면서 울타리든 사람이든 가리지않고 아무데나 마구 들이박아대고 있는 저 시커먼 망아지 따위 결코 맘에 들 리 없잖아! 그런 생각과 함께 나는 퍼렇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돌려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농담이시죠?”
“아니. 정말로 저놈이야. 귀엽지 않니?”
아아, 황제는 눈이 삐어도 단단히 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미친 짓을 하고 있는 저 망아지를 향해 감히 귀엽다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설마 처치곤란 해서 떠넘기는 거 아냐?’
나는 슬며시 의심까지 해봤다. 그리고 저 미친 망아지 선물을 절대 사양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황제는 이의를 거부하고 그 자리에서 그 미친 망아지를 내 망아지라고 선포해 버리더니 마치 대단한 일을 한 듯 하늘을 향해 자랑스럽게 껄껄 웃어젖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 소리도 못해보고 꼼짝없이 미친 망아지를 가지게 된 나는…
“날 미워하고 있는 거야.”
땅바닥에 쪼그려 앉아 그런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음, 생각해놓고 보니까 왠지 매우 그럴듯한 결론이구먼. 에효, 사는 게 뭔지.
그렇게 한바탕 소동을 치른 후, 우리는 나란히 돌아와 늦은 아침 식사를 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났을 때쯤 제제가 나기를 데려왔고 그 사실을 알리는 소리에 성격 급하디 급한 황제는 당장 트리키 백작가로 찾아가자고 나를 잡아끌었다. 어차피 가기로 한 길이니 솔직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나를 마차에 태우고 헤벌죽 웃는 얼굴로 또 사탕을 내밀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그 짓 좀 그만두실 수 없습니까? 애가 싫어하잖아요?”
울상이 된 얼굴로 마지못해 사탕을 받아먹자 보다 못한 킬이 황제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그랬더니 사탕그릇을 껴안은 채 진지한 태도로 또 다른 사탕을 고르고 있던 황제가 뚱한 얼굴로 하는 말.
“흐응, 질투하는 거냐, 오딜란?”
“지, 질투는 무슨… 그거 이리 내세요!”
장난처럼 한 말에 킬은 얼굴을 희미하게 붉히더니 사탕그릇을 홱 빼앗아 갔다. 그래서 나는 나를 위해 한 일이려니 생각하며 내심 고마워하고 있었는데 다음 순간 그가 한 짓이란 것은…
“자, ‘아’ 해야지.”
“…!”
히죽 웃는 얼굴로 빨간색 사탕을 하나 집어 들더니 황제가 하던 것처럼 내 입에 넣어줄 듯 스윽 내미는 것이었다. 하아,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울컥 치솟는 화를 참느라고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나기도 먹고 싶은데…”
부글거리는 내 속도 모르고 곁에 앉은 나기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킬은 단번에 인상을 팩 찌뿌리더니 녀석에게 달랑 한 개의 사탕을 건네주고 다시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만큼 얄미운 행동이었다. 그래, 바로 앞자리에 황제와 시크라고 하는 어의가 떡하니 앉아있지만 않았어도… 크으, 주먹이 우는 구나.
“근데, 아가… 넌 어디서 저 꼬맹이를 주운 게냐? 듣자니 죽음의 숲으로 보내진 녀석이라던데…”
사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밀고 당기면서 킬과 눈싸움을 하고 있는데 황제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물어왔다.
“아, 그게요…”
“녀석이 공부하던 곳이 죽음의 숲 근처였습니다. 마침 스승과 그 부근을 산책하다 죽어가는 녀석을 주운 것이지요. 하하하…”
워낙 아무렇지 않은 말투였기 때문에 나는 하마터면 사실을 털어놓을 뻔 했다. 그래서 중간에 끼어들어 교묘하게 거짓말을 섞는 킬의 말을 들었을 땐 나도 모르게 퍼뜩 놀라고 말았던 것이다. 휴우,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어.
“흐응, 그래? 그럼 우리 아기를 가르친 스승은 어디의 누구인고?”
“말씀드려도 모르실 겁니다. 워낙 이름 없는 사람이라… 하지만 실력 하나는 확실해서 제가 오래전에 말을 해두었었지요.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돈 많이 들었습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이거야 원 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구나.”
능청맞은 킬의 거짓말에 깜빡 속은 황제는 허연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무척 아쉬운 얼굴을 해보였다. 그러다 ‘한번 찾아가 볼까나’라고 중얼거려서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내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하더니 그마저 실패하자 결국엔 언제 한번 대련을 해보자고 졸라대기까지 했다. 물론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으허허허, 에고 이쁜 것… 신관 하나가 내 말년 운이 좋다고 하더니 아마도 너를 보려고 그런 말을 들었나보다.”
호탕한 황제의 웃음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마차는 빠른 속도로 달려 궁전을 벗어났다. 그리고 넓은 대로와 거대한 저택들이 늘어 서있는 언덕을 지나 점점 더 시 외곽 쪽으로 빠지더니 어느 순간 앙상한 가지를 모두 드러낸 채 빽빽하게 서있는 나무숲 길로 들어섰다. 트리키 백작의 영지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