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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그냥 매니저(2)



이방철 패거리가 찾아온 이유는 단순했다.
도그마 차원 레이드에 대한 상세 정보가 뒷세계에도 널리 퍼진 모양.
거기서 CS 매니지먼트의 이름을 듣게 된 이방철은 나름대로의 아이디어를 짜냈다.
“그러니까 결국 돈 받아내겠다고 온 거란 말이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요…….”
CS 사무실 안.
일렬로 무릎을 꿇고 있는 덩치들 앞에서 이방철은 너저분하게 변명을 해댔다.
“여기 차 사장하고 합심해서…….”
“차 사장님.”
“아, 옙! 존경하는 차수린 사장님과…….”
“오버하지는 말고.”
“옙. 차수린 사장님과 어떻게 함께 협력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온 겁니다.”
“그 ‘어떻게 함께’라는 게 구체적으로 뭔데?”
“어, 그러니까 저희 방철 산업이 차 사장님께 부족한 자본을 지원해 주는 거지요.”
“결국 빚을 더 늘리겠다는 거잖아. 하여간 뭔 일이 있으면 어떻게든 빨대 한 번 꽂아 보려고 달려들기는.”
“그! 그런 게 아니라…….”
“아니라고?”
심혁진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이방철의 눈꼬리가 슬그머니 내려갔다.
기싸움이라면 밀려 본 적이 없는 그인데, 심혁진 앞에선 꼬리 내린 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의 악몽이 이미 각골에까지 새겨진 탓이었다.
이방철과 똘마니들은 인체 실험에 가까운 폭력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심혁진은 쓸데없이 협박이나 으름장 따위를 놓지 않았다.
그저 몸 곳곳을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뚝 분지르고 우지끈 비틀어 버릴 뿐.
그것이 아프긴 더럽게 아픈데 정신은 말짱해지는 종류의 고통인지라, 이방철과 똘마니들은 정녕 죽을 맛이었다.
문제는 그런 식으로 몸뚱이를 망가트려 놓고, 아이템으로 말끔히 회복시킨단 점이었다.
처음 베히모스의 체액을 경험했을 땐 다행이다 싶었다.
딱 봐도 비싼 회복템인데, 설마 남용하진 않겠거니 싶었던 것이다.
한데 아니었다.
심혁진은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독한 인간이었다.
몇 번이고 고통을 겪고 회복되길 반복하니 적개심조차 생겨나지 않았다.
그저 이 인간 앞에서는 설설 기어야겠구나 하는 생각만 들 뿐.
나중엔 이방철과 수하들이 심혁진에게 충성을 맹세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도 심혁진으로선 적게 쓴 것.
김태성에게 반복한 횟수를 이방철 일당이 들었다면 실로 기절초풍했을 터였다.
“어쨌거나.”
“예, 옙!”
“쓸데없는 짓일랑 할 생각 말고 가도록 해. 빚이야 우리 사장님이 제때 알아서 갚으실 테니 걱정 말고.”
심혁진의 말에 이방철이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비, 빚이라니요. 그냥 저희에게서 상납 받았다고 생각하시고…….”
“대출금은 반드시 갚을 거예요.”
“무, 물론이지요! 차 사장님이 그러시다면 그런 거지요!”
차수린이 딱 잘라 말하자 이방철이 호들갑을 떨었다.
“하여간 오늘은 이만 가보세요. 괜한 소리 흘리고 다니지 마시고요. 어차피 그래 봤자 이방철 사장님만 힘들 거예요.”
“물론이지요. 한 마디도 뻥끗하지 않을 겁니다. 암요, 그럼요.”
이방철과 덩치들이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문으로 향했다.
그러고도 심혁진의 눈치를 한참 살피다가, 가라는 턱짓을 하니 부리나케 달아났다.
차수린은 그 모습에 안쓰러움마저 느꼈다.
“저 인간에게 연민이 생길 일은 평생 없을 줄 알았는데.”
“인생이란 게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벌어지기 전엔 설마설마 하는 법이죠.”
“그나저나 괜찮을까요? 앞에서는 저러고 뒤에선 음모를 꾸밀지도…….”
“정말 저들이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뇨.”
잠시 생각한 차수린이 대답했다.
피식 웃은 심혁진은 소파에 상체를 파묻었다.
“이제 오늘 일은 얼추 다 끝난 것 아닙니까?”
“아마도요. 이방철 같은 사람이 또 찾아온다면 모르겠지만.”
“찾아와도 허탕 치게 아예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그죠.”
“그 제안, 매력적으로 들린다는 건 인정하죠. 하지만 안 돼요. 혹시 모를 고객님이 방문할 수도 있으니.”
“고객님?”
“우리와 계약을 맺고자 하는 헌터, 혹은 일을 주려는 의뢰자 말이에요.”
“아, 하긴.”
이름부터 그렇듯 매니지먼트의 성격이 강하긴 하나 CS 역시 엄연한 헌터 길드.
의뢰나 요청을 받아 해결해 주는 일도 겸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차수린의 어조가 조심스러워졌다.
“그러고 보면 혁진 씨에게 묻지 못한 게 많네요.”
“뭔가 알고 싶은 게 있습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대답해 주시겠어요?”
“질문 여하에 따라서.”
“큰아버지… 에 대한 질문이라면요?”
심혁진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상구 말입니까?”
“예.”
차수린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 보면 전 큰아버지께 크나큰 빚을 진 셈이죠. 그런데도 막상 그분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
심혁진이 아니었다면 그날 차수린은 여러모로 곤란했을 것이다.
이방철은 선인까진 아니지만 천인공노할 악인 역시 아니었다.
심혁진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그녀에게 심한 해코지를 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곤란하지 않았을 리도 없는 것.
게다가 이어진 김창준 건이나 도그마 차원 건을 생각한다면…….
“그 때, 혁진 씨가 오게 된 것이 큰아버지의 유언 때문이라고 했잖아요.”
“그랬죠.”
“그러니… 최소한 그분의 마지막에 대해서라도 아는 게 예의일 거라 생각했어요.”
차수린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동안은 용기가 나지 않아 묻지 못했지만요.”
“그랬습니까?”
“네. 게다가 혁진 씨의 과거를 묻는다는 것도 조금은 망설여졌고요. 혁진 씨는 어떠시죠?”
“나 말입니까?”
“예. 만약 옛날 일을 얘기하는 게 꺼려진다면…….”
“그런 건 없습니다. 다만 여기저기 얘기가 퍼지진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그렇다면야.”
심혁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못할 건 없지요.”

* * *

서울시 명동.
강남과 더불어 가장 비싼 땅값을 자랑하는 그곳에서도 노른자위라 할 수 있는 곳에, 지상만 70층에 이르는 초고층 빌딩이 세워져 있었다.
이름하여 ST 캐슬.
본디 명동 타워라는 수수한 이름이던 것을 ST 그룹에서 인수하면서 개명한 것이었다.
70층이란 층수는 100층을 가벼이 넘기는 현대의 마천루들에 비하면 심심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내실을 따지자면 얘기가 달라진다.
ST 캐슬의 각층 높이는 일반적인 고층 빌딩의 두세 배에 이르렀던 것이다.
실제 높이 또한 610m가량.
지상 123층 높이인 L월드 타워보다 60m가량이 더 높았다.
넓이 또한 옛 명동 2가의 1할을 차지할 만큼 어마어마한 수준.
가히 현대의 아성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한 ST 캐슬의 50층엔 거대한 실내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천장에는 홀로그램으로 처리된 하늘과 햇살이 있었고, 인공적인 바람마저 솔솔 불어와 실제 숲을 방불케 했다.
그런 곳을 두 사내가 거닐고 있었다.
외모는 판박이, 체구 역시 거의 비슷했다.
멀리서 본다면 헷갈릴 만큼 닮았지만 풍기는 느낌은 정반대.
한쪽이 부드럽고 유약한 느낌이라면 다른 한쪽은 강맹하고 패기가 넘쳤다.
마치 그렇게 살자고 작당이라도 한 것처럼.
“이번 일을 실패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강인한 느낌을 물씬 풍기는 사내가 말했다.
누가 봐도 형인 것처럼.
“놈들의 모략을 눈치 채지 못한 건 전적으로 첩보조의 잘못이다. 계속된 안락함에 빠져 있던 무능한 놈들이 빚어낸 필연적인 실책일 뿐이야.”
“…….”
“그러니 그렇게 기죽을 것 없다. 표창후 같은 놈이 지껄이는 소리에도 신경 쓸 것 없어. 애초부터 열등감에 절어 있는 놈이다. 그러니까…….”
“형.”
뒤따르던 청년이 말을 잘랐다.
190㎝에 가까운 훤칠한 체격을 지니고도 유약해 보일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
그래도 띠고 있는 눈빛만큼은 명료했다.
“난 표 선배나 호사가들 때문에 괴로워하는 게 아니야.”
“그렇겠지, 준태야. 넌 겉보기만큼 얼빠진 녀석은 아니니.”
강한 인상의 사내가 실소를 머금었다.
입꼬리만 살짝 씰룩인 수준이었지만 윤준태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형, 윤준걸에게 있어 저 정도의 미소는 박장대소나 다름없다는 것을.
“어쨌든 좀 더 힘내도록 할게. 격려해 줘서 고마워, 형.”
“그래. 표창후는 나중에 시간 나는 대로 손을 좀 보마.”
“그러지 마. 더 이상 일을 키우고 싶진 않아.”
“흐흠, 글쎄. 일을 키우지 않고도 손봐주는 방법쯤은 무궁무진한데.”
“형.”
“농담이다. 어차피 그런 놈이 하나쯤은 있어 주는 편이 여러모로 유용하거든.”
윤준걸은 큼직한 느티나무 둥치에 걸터앉았다.
“내부의 분탕 종자들을 솎아내기에도 편하고 말이야.”
“…….”
“듣자하니 내 체제에 반감을 표하는 것들이 슬금슬금 표창후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다더군. 좋은 일이야. 놈들이 뭉칠수록 나로선 일망타진하기에 좋지.”
“그런 것보다… 뱀파이어에 대비해야 하지 않아?”
“일단은 추이를 지켜볼 생각이다. 안 그래도 이번 일로 우리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났거든.”
“그러면…….”
“첫 타자는 태백과 아프락사스가 될 거다. 우리로선 잘 된 일이지.”
태백 길드와 아프락사스 길드.
세레니티 길드와 함께 한국 제일을 다투는 길드들이었다.
“뱀파이어 놈들은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의 전력을 보유했다. 차원계의 이상 현상을 감안하면 난이도는 한층 상승하겠지.”
“놈들이 또 다시 도그마 차원을 통해 공격해 오려 할까?”
“그건 알 수 없어. 조사가 진행 중인데다가 확보한 정보는 한정적이니. 다만…….”
윤준걸이 냉소를 머금었다.
“왈라키아 차원에서 직통으로 포탈이 열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
“…….”
윤준태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도그마 차원은 기껏해야 전진기지.
그런데도, 비록 2군이라곤 하지만 한국 최강을 다투는 길드의 공격대가 크게 고전했다.
정체불명의 헌터가 없었다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르는 일.
기껏해야 전진기지 하나를 공략하려다 그렇게 된 것이다.
반면 왈라키아 차원은 뱀파이어의 본거지.
도그마 차원 같은 전진기지만 십여 개를 거느린 중심 차원이었다.
보유한 병력은 최소한도로 잡아도 수만.
순수 뱀파이어만 그 정도이니, 좀비나 구울 같은 하수인은 족히 백만 단위에 이를 터였다.
‘그런 곳에서 직접 공격해 온다면…….’
재앙이 벌어질 것이다.
윤준태는 두 번 전율했다.
공포스러운 전망에 한 번, 그 사실을 알고도 웃는 형의 모습에 또 한 번.
“태백 길드와 아프락사스 길드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거야?”
“아마도? 하지만 우리만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모르겠군.”
“정보 제공을 고려해야 하지 않겠어? 라이벌이기 이전에 같은 한국인으로서…….”
“준태야.”
윤준걸은 칼같이 혀를 찼다.
“안 그래도 우리만 보면 으르렁대는 놈들이다. 그런 작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해 봤자 고맙다는 소리나 들을 성싶으냐?”
“그건 그렇지만…….”
“그만. 이건 네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내게 하려는 말이 있다고 들었는데?”
“응. 이건 형한테 직접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뭐지?”
깊게 심호흡을 한 윤준태가 말했다.
“나, 길드를 탈퇴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