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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룡전 1권 (23화)
6장 황보세가 (5)


황보영천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 역시 진운룡의 진정한 실력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진운룡은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의 관심을 무시했다.
어린 아이들의 혈기 어린 도발에 하나하나 발끈할 만큼 진운룡의 수양이 낮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때, 미리 주문해 둔 음식과 술이 나왔다.
“하하하, 술이 나왔으니 다들 우선 한 잔씩 걸칩시다!”
황보영천이 술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고, 다시 화기애애한 술자리가 이어졌다.
모두의 관심은 진운룡에게서 다시 모용주란으로 향했다.
황보 형제들은 모용주란의 선심을 사기 위해 애썼고, 제갈무진 역시 은연중에 자신을 내세우며 모용주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다른 이들의 분위기가 어떻건 진운룡은 조용히 술을 음미하는 데 집중했다.
그가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으나, 오랜만에 맛보는 모태주의 향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황보영천의 말로는 오늘을 위해 특별히 구한 삼십 년이 넘게 묶은 최고급 모태주라 했다.
모태주가 본래 오래 묶을수록 향이 점점 더 그윽해지고 값어치 또한 높아지는지라 삼십 년을 묶인 모태주면 사실 황보영천도 꽤 무리를 한 셈이었다.
덕분에 진운룡은 백 년 만에 입이 호강할 수 있었다.
술기운이 돌면서 후기지수들끼리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마교에게 포로로 잡힌 무림맹주 남궁진천의 손자에 대한 이야기, 간신 엄숭의 횡포에 대한 이야기, 무림맹에서 개최하는 무림대회에 대한 이야기 등 현 강호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주제들이 그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돈 후 후기지수들의 화제는 현 강호에서 제일 강자가 누구인가로 이어졌다.
“아무래도 현 맹주이신 검제(劍帝) 남궁진천 어르신을 따를 자는 없지 않겠소? 이미 현경을 넘어섰다는 소문이 있지 않소이까? 검제께서 버티고 계신 덕에 마교도 함부로 날뛰지를 못하고 있으니 말이오.”
황보영호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남궁세가의 가주이자 현 무림맹 맹주를 맡고 있는 남궁진천은 정파의 지주(支柱)와도 같은 존재였다.
“마교 교주인 마제(魔帝) 하우광도 만만치 않지요. 많은 강호 고수들이 개인의 무력만으로는 그를 따를 자가 없다고들 하니까요.”
황보영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단일 세력인 마교가 정도무림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하우광의 존재였다.
하우광 역시 이미 현경을 넘어선 지 오래였으며, 그 시기는 오히려 남궁진천보다 십 년이나 빨랐다.
정파인들 사이에서야 남궁진천의 이름을 높이 사고 하우광을 깎아내리곤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모두 하우광을 두려워했다.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제갈무진이 입가에 오만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십이천의 꼭대기에 있는 두 사람보다 더 강한 이가 있단 말입니까?”
황보영천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다른 이들의 관심 역시 제갈무진에게 집중되었다.
제갈무진은 모두의 시선을 즐기는 듯 만족스런 모습으로 잠시 좌중을 둘러봤다.
“저는 소림의 선승이신 망우대사야말로 현재 천하제일인으로 가장 어울리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놀란 눈을 했다.
망우대사라면 이미 세수가 백이십 세가 넘었다 알려진 소림 최고의 고승이었다.
만일 그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정사마(正邪魔) 통틀어 가장 강력한 고수일 것이라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다만 문제는 이미 삼십 년 전에 일선에서 물러나 그 이후로는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에 그가 과연 아직까지 살아 있기는 한 건지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어떤 이들은 그가 소림의 은자림(隱者林)에 머물며 불도에 전념하고 있다고 하였고, 이미 입적을 하셨을 것이라 짐작하는 이들도 있었고, 혹자들은 그가 반로환동을 한 후 정체를 숨긴 채 세상을 유람하고 있다고도 했다.
이렇듯 강호인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니 망우대사를 천하제일인으로 언급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분께서는 아직까지 살아 계신지조차 불확실하지 않습니까?”
역시나 모용제가 그 점을 지적했다.
“돌아가셨다는 증거도 없지 않소?”
제갈무진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 공자의 의견은 어떠신가요? 누가 현 무림에서 진정한 강자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때 갑자기 모용주란이 진운룡에게 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녀가 볼 때 진운룡은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출중한 외모는 일단 젖혀 놓더라도 다른 이들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우선 세상일에는 전혀 관심 없는 듯한 그의 무심함은 이제 스무 살을 갓 넘은 혈기방장한 청년들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는 다른 사내들과 달리 자신에게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제껏 그녀는 어딜 가나 모든 사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곤 했다.
한데 진운룡은 전혀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일까?’
오히려 역으로 자신의 관심을 끌기 위한 술책일지도 모른다고 모용주란은 생각했으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진운룡은 그녀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똑같이 무심하고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의도가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진운룡은 그녀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것이다.
“황보 공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진 공자께서도 상당한 고수이신 것 같은데, 무인으로서 목표로 삼는 강자가 있으실 것 아니에요?”
모태주를 음미하고 있던 진운룡은 갑작스런 질문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냥 끼리끼리 놀 일이지 굳이 자신까지 귀찮게 구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진운룡에게로 향했다.
“글쎄, 이제껏 강하다고 느껴지는 자들을 만나 보지 못했소만…….”
진운룡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순간 좌중에 정적이 흘렀다.
사실 진운룡 딴에는 본래 자신의 생각보다 상당 부분 순화시켜 이야기한 것이었으나, 듣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옆에 앉아 있던 소은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하하하! 역시 당신답군! 정말 마음에 들어! 최고야!”
잠자코 술만 마시던 적산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다른 후기지수들의 얼굴에는 못마땅함과 비웃음이 가득했다.
이제 고작 스물을 조금 넘은 자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너무도 광오한 한 마디에 한편으로는 기가 막혔고,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하하하! 진 공자가 강호에 출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호고수들이나 사정에 대해 잘 모르니. 이해해 주세요.”
소은설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얼른 상황을 수습했다.
“흥! 하긴 그렇다면 강자들을 거의 접해 보지 못했을 테니 이해가 가는군요. 그래도 진 공자께서는 좀 더 겸양을 배우실 필요가 있을 것 같소. 강호라는 곳이 젊은 혈기만으로 함부로 부딪힐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오.”
제갈무진이 조롱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투에는 다분히 진운룡을 도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렇게 되자 진운룡이 어떻게 대응을 할지에 모두의 관심이 쏠렸다.
진운룡의 기고만장한 성깔을 너무도 잘 아는 소은설로서는 괜히 그가 참지 못하고 사고를 칠까봐 애를 태울 수밖에 없었다.
무림 세가들과 척을 지는 일은 초가장 정도와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황보영천의 손님들이었다.
자칫 황보세가와의 좋은 관계도 틀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제남은 황보세가의 영토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 아버지를 찾아야 하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황보세가의 비유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때, 진운룡의 무심한 시선이 제갈무진에게 향했다.
동시에 제갈무진은 마치 얼음구덩이에 떨어진 듯한 한기를 느꼈다.
‘이, 이게 무슨…….’
그는 급히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진운룡의 시선과 맞닿은 순간 무슨 일인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이 그의 가슴을 온통 지배했다.
‘제갈세가라…….’
제갈세가와 진운룡은 제법 관계가 깊었다.
그가 사랑했던 여인이 바로 제갈세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피식 웃은 진운룡이 흥미를 잃은 듯 제갈무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술잔을 기울였다.
제갈무진을 압박하던 한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느새 진운룡의 얼굴은 예의 그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제갈무진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자신이 진운룡에게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밀려왔다.
“이……!”
제갈무진이 입술을 깨물며 진운룡을 노려봤다.
“호호호호, 정말 재미있으신 분이군요. 하기야 피가 끓는 무인이라면 직접 상대해 보지도 않은 이를 강자라고 인정할 수는 없겠네요.”
그때, 모용주란이 화사한 목소리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냉각되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부드럽게 바뀌었다.
이렇게 되자 제갈무진도 감정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끄응…….”
“하하하, 모용 소저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내라면 그 정도 기개는 있어야지요! 어차피 우리는 젊으니 이제 천천히 알아 가면 되지요. 오늘처럼 좋은 만남들을 갖다 보면 친분도 쌓고, 강호에 대해서도 조금씩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건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황보영천이 얼른 건배를 제의하며 어색했던 분위기를 띄웠다.
이후로는 별다른 사건 없이 화기애애한 자리가 이어졌다.
특히 모용주란은 특유의 매력과 언변을 뽐내며 술자리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결국 모용주란으로 인해 술자리는 별다른 사건 없이 흥겹게 끝났고, 소은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적당히 술기운이 오른 일행은 다음을 기약하며 천미각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