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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룡전 1권 (18화)
5장 제남으로 향하다 (2)


“이얍!”
오진이 이를 악문 채 다시 한 발 전진하며 검을 더 밀어 넣었다.
스읏!
하지만 이번에도 검은 아슬아슬하게 적산의 몸을 비껴 나갔다. 적산이 철판교의 수법을 펼치듯 허리를 뒤로 젖혀 땅과 거의 수평이 되게 누워 버렸기 때문이다.
오진은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검을 내려쳤다.
그의 눈은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빛나고 있었다.
몸을 누인 상태에서 적산이 자신의 검을 피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파악!
그러나 그의 뜻과 달리 검은 흙바닥을 때리고 말았다.
놀랍게도 적산이 그 상태에서 몸을 옆으로 틀며 검을 피해 낸 것이다.
그것도 나려타곤(懶驢打滾)으로 바닥을 구른 것도 아니고, 바닥과 몸이 닿지 않은 상태에서 급격히 뒤틀어 피했다.
자신의 공격이 계속 실패로 돌아가자 오진은 조바심이 일었다. 동료들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놈! 어디까지 피할 수 있는지 보자!”
흥분한 오진이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쉬익! 쉬이익!
한 수 한 수가 모두 치명적인 매서운 검격이 이어졌다.
하지만 적산은 계속해서 간발의 차이로 오진의 검을 피해 냈다.
제검문 무사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홍천상의 얼굴도 이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저 적산이란 녀석 당신처럼 건방지기는 해도 운은 제법 좋은 모양인데요?”
소은설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과연 운일까?”
진운룡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적산을 바라봤다.
“운이 아니면 설마 저자가 진짜 고수라는 말이에요?”
놀란 소은설이 물었다.
“아니, 분명 실력은 형편없지. 하지만 재능을 타고났군.”
“재능이라구요?”
소은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진운룡을 바라봤다.
진운룡은 소은설의 물음을 무시한 채 묵묵히 적산의 모습을 지켜봤다.

* * *

한편, 오진은 이제 상대가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우연이라 생각했으나, 이미 이십여 수가 넘어간 상태에도 오진의 검은 처음과 같이 허공만 가르고 있었다.
게다가 어쩐지 적산의 움직임은 점점 더 빠르면서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후후, 넌 너무 약하군. 재미가 없어.”
그때, 피하기만 하던 적산이 갑자기 오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엇!”
오진의 검이 앞으로 찔러 들어가던 상황이어서 이대로라면 적산의 목이 검에 꿰뚫릴 것이었다.
아무리 오진이 흥분한 상태였지만 상대의 목숨까지 빼앗을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검을 거두기에는 너무 늦은 상태였다.
“이런!”
오진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검이 적산의 목을 꿰뚫는다 싶은 순간 적산의 신형이 갑자기 밑으로 쑥 꺼졌다.
“헉!”
목표를 잃은 검이 허공을 찌르며 오진의 상체가 무방비로 드러났다.
퍼억!
적산의 검이 검집 채로 오진의 명치를 찍었다.
“컥!”
급소를 맞은 오진의 허리가 굽혀지는 순간, 온몸의 체중을 실은 적산의 몸통 박치기가 꽂혔다.
콰앙!
“크악!”
화탄이 터져 나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오진이 뒤로 튕겨 나갔다.
이 장 가까이 날아가 바닥에 떨어진 오진은 의식을 잃었는지 움직임이 없었다.
“역시 약해.”
적산이 손을 툭툭 털며 몸을 일으켰다.
충격적인 결과에 제검문 무사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어디보자 누가 제일 강할까? 역시 영감인가?”
적산이 다시 한 번 일행을 살폈다.
“아니야……. 영감도 명을 받는 거 같으니, 저 도련님인가?”
적산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임덕화가 움찔했다.
“저놈이!”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임덕화가 발끈했다.
“쳇, 영감보다 약하군.”
하지만 적산은 곧 임덕화에게 흥미를 일었는지 다른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 바퀴 돌던 그의 시선이 진운룡에게서 멈췄다.
씨익!
적산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바로 당신이군!”
순간, 적산의 신형이 섬전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간 보여 줬던 것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었다.
“뭐, 뭐냐!”
적산이 갑자기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자 놀란 무사들이 검을 휘둘렀다.
타닥!
하지만 적산은 오히려 검을 차고 훌쩍 허공으로 뛰어 올랐다.
마치 한 마리 나비와 같이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텅! 텅!
검을 차고 날아오른 적산은 무사들의 어깨를 타고 단 두 번의 도약으로 진운룡에게 다다를 수 있었다.
“호오.”
진운룡이 제법이라는 듯 탄성을 토해 냈다.
아무런 기세를 흘리지 않았음에도 자신이 강한 것을 알아차린 것이 신기했던 것이다.
아마도 타고난 본능을 통해 강자를 느낄 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진운룡의 얼굴에는 일말의 긴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진운룡 앞에 이른 적산이 주저하지 않고 검을 뽑아 그대로 내려쳤다.
그의 눈은 마치 야수처럼 빛나고 있었다.
쉬아악!
검집을 벗어난 검이 벼락처럼 대기를 가르며 진운룡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터억!
하지만 무섭게 떨어져 내리던 검이 마치 벽에라도 막힌 듯 진운룡 머리에서 한 치 정도 거리에 정지해 버렸다.
놀랍게도 적산의 검은 어느새 진운룡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여 있었던 것이다.
“너무 가볍군.”
진운룡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진운룡의 놀라운 신위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적산이 아무리 힘을 줘 봐도 검은 진운룡의 손가락 사이에서 꿈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산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그대로 진운룡의 옆구리를 향해 전광석화 같은 발길질을 날렸다.
타타타탁!
진운룡은 한쪽 다리만으로 적산의 연속되는 발길질을 여유 있게 막아 냈다.
“크하하하! 역시 대단해! 당신은 진짜야!”
적산이 흥분된 목소리로 광소를 터뜨렸다.
파파파팍!
다시 한 번 발길질을 날린 적산이 풀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
“후후후, 이거 피가 끓어오르는데?”
적산이 두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뭐, 뭐야 저 사람!”
소은설이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갑자기 다짜고짜 진운룡에게 달려들다니 옆에 있던 그녀로서는 심장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주변에 있던 제검문 무사들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적산을 노려봤다.
“재능은 타고났는데, 기본이 너무 없어. 게다가 공력은 무시할 정도, 성격은 동네 파락호 수준이야. 이래서야 얼마 안 가 개죽음 당하기 십상이군.”
진운룡이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적산의 눈썹이 꿈틀했다.
“개죽음이라! 그것도 좋겠지! 강자와 겨루다 죽을 수 있다면 까짓 개죽음 따위야 어떻단 말인가!”
적산이 이를 드러낸 채 다시 진운룡에게 달려들었다.
“이제 흥미가 떨어졌으니, 그만 끝내야겠군.”
쩌어엉!
퍼억!
진운룡이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적산의 검이 산산조각으로 터져 나갔다.
지풍을 날려 적산의 검을 부순 것이다.
하지만 적산은 포기하지 않고 그대로 진운룡을 향해 몸통 박치기를 날렸다.
후우우웅!
순간, 진운룡을 중심으로 묵직한 기파가 퍼져 나갔다.
콰아아앙!
폭음이 터지며 적산의 신형이 달려들던 속도보다 배는 빠르게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쿠쿵!
“커억!”
흙바닥에 처박힌 적산이 신음을 토해 냈다.
“쯧, 덤빌 사람한테 덤벼야지. 광오하기가 자기보다 열 배는 더 되는 사람인데…….”
소은설이 안쓰러운 얼굴로 적산을 바라봤다.
적산은 그 와중에도 몸을 가누려 애쓰고 있었다.
“크크크크, 다, 당신은 정말 강해! 맘에 들어! 쿨럭!”
피를 토해 내면서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적산이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크크큭, 결정했어! 이제 당신이 나의 목표야! 반드시 당신을 내 손으로 꺾고 말겠어! 크하하하!”
모두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적산을 바라봤다.

* * *

진운룡과 소은설은 제검문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바로 제남을 향해 출발했다.
두 사람은 자꾸 따라나서겠다고 우기는 임설향을 떼어 놓느라 제법 진땀을 뺐다.
제검문에서는 두 사람을 은인으로 대접했다.
그도 당연한 것이 이번 사건을 해결함으로 인해 제검문은 상당한 이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산동 무림에서의 위상이 전보다 높아질 것이 분명했고, 이번 조사단을 지휘한 후계자 임덕화의 입지 역시 덩달아 탄탄해질 것이다.
무림맹에서도 분명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데 대한 보상이 있을 것이었다.
이 모든 게 결국 진운룡과 소은설의 덕이었다.
게다가 진운룡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
무림에서는 힘이 곧 권력이다.
한데, 멍청하게도 임덕화가 좋지 않은 인상을 잔뜩 심어 준 상태이니 문주인 임혁태는 임덕화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손이 발이 되도록 진운룡과 소은설의 비유를 맞추느라 애썼다.
하여튼 제검문의 호의로 인해 두 사람은 편히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문주 임혁태가 챙겨 준 상당한 액수의 여비까지 받아 나온 소은설의 얼굴 표정은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그런데 당신은 왜 자꾸 따라오는 거예요?”
문득, 소은설이 뒤쪽을 보며 소리쳤다.
그들과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적산이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목욕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적산의 모습은 과연 어제의 그 광인이 맞나 할 정도로 바뀌어 있었다.
나이는 이십대 초반 정도로 보였는데, 제법 사내다운 얼굴에 호리호리한 눈매가 상당히 호감이 가는 외모였다.
“나는 목표를 따라가는 것뿐이야. 저자를 내 손으로 꺾기로 마음먹은 이상 절대 놓칠 순 없지.”
적산이 능청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허…….”
소은설이 어이없다는 듯 적산을 바라봤다.
“제발 저 인간 좀 어떻게 좀 해 봐요! 뒤통수가 근질거려서 미치겠어요!”
소은설이 진운룡에게 하소연했다.
하지만 진운룡은 피식 웃기만 할 뿐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저러다 제남까지 따라오면 어떡해요? 저자가 아버지 찾는 일을 망칠지도 모른다구요!”
소은설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여전히 진운룡은 묵묵부답이었다.
“걱정 마, 아가씨. 네 아버지 찾는 일은 절대 방해하지 않을 테니. 후후.”
적산이 친근한 표정으로 손까지 흔들며 말했다.
“어휴!”
울화가 터지는지 소은설이 한숨을 토해 냈다.
결국 이렇게 세 사람의 기묘한 동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