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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룡전 1권 (17화)
5장 제남으로 향하다 (1)


희미하게 등잔이 켜진 열 평 남짓한 작은 석실.
사방에는 나무로 된 새장들이 가득했고, 그 안에는 까마귀들이 안광을 뿜어냈다.
그 중앙에 올빼미 머리 모양의 가면을 쓴 사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크으윽! 쿨럭!”
한동안 움직임이 없던 사내가 갑자기 신음과 함께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커어억!”
허리를 꺾으며 괴로워하는 사내의 입에서 다시 한 번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크으으……. 대, 대체 어떻게 눈치챈 거지?”
사내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복령수(僕靈獸)가 죽으며 그 충격이 그대로 사내에게도 전해졌기 때문이다.
“크윽……. 복령수를 알아보는 자가 있을 줄이야…….”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대체 어디서 그런 자가 나타난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일이 아니야. 이 사실을 빨리 통주(統主)께 보고를 올려야 한다.”
어느 정도 충격이 가신 듯 고개를 든 가면 사내가 서둘러 석실을 나섰다.

* * *

“그래 언제 제남으로 출발하기로 했느냐?”
소진혁이 소은설에게 물었다.
“이틀 후예요. 일단, 여행에 필요한 준비도 해야 하고, 조사단 임무에 대한 보고와 마무리가 끝나야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소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에서 직접 맡긴 임무를 해결했으니, 제검문 입장에서는 큰 공을 세운 셈이다.
마지막 마무리까지 빈틈없이 끝내 이번 기회에 맹에서 입지를 끌어 올리려 할 것이다.
게다가 아직 일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초진도의 뒤에 배후 세력이 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추가 조사를 할 것인지의 여부는 맹에서 결정할 것이지만, 그 판단을 위해서는 초가장이나 화재사건에 대한 모든 정보나 증거자료를 수집해서 맹으로 보내야 했다.
제검문에게는 이틀도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한데, 도무지 진 공자의 정체를 짐작할 수 없구나. 마치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지.”
소진혁이 턱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정도 실력을 가진 고수라면 하오문 정보망에 포착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껏 진운룡과 같은 젊은 고수가 산동에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자기 말로는 광룡이라면 다 안데요. 무슨 혈마를 죽였다나 뭐라나.”
소은설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광룡이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역시 광룡이라는 별호를 가진 고수에 대해서는 들어 보지 못했다.
“혈마라면 백 년도 훨씬 전에 강호를 피로 물들였었다던 전설의 혈귀(血鬼)가 있긴 한데, 설마 그 혈마를 말할 리는 없고……. 최근에 혈마라고는 없는데 말이야…….”
백 년 전 혈마는 거의 전설과 같은 실존했는지조차 확실치 않은 존재였다.
게다가 그 혈마는 누구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갑자기 스스로 강호에서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었다.
“모르죠. 워낙 허풍기가 있으니 그 혈마를 말하는 게 맞다고 할지도.”
진운룡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엄청난 고수임에는 분명해. 내 오십 평생을 살면서 그런 놀라운 솜씨를 가진 자는 처음 봤다니까? 뭐, 십이천이나 구대문파의 고수들은 어떨지 모르겠다만, 이 근방 무인들 중에 진 공자를 이길 사람은 없을 게야. 쩝, 설마 진짜 반로환동한 고수는 아니겠지?”
소진혁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전에 진운룡과의 대화가 기억났던 것이다.
자기 입으로 농담이라고 하긴 했으나, 어쩐지 조금 불안했다.
“어차피 그가 누구든 상관없어요. 중요한 것은 그가 정말로 강하다는 것이죠.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 그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진운룡과의 약속이 생각난 소은설이 얼굴을 붉혔다.
“그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분명 희망이 있지…….”
소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남 분타에도 미리 연락을 넣어 둘 테니, 도착하면 들러서 도움을 청하도록 해라. 그곳은 그래도 제법 규모가 있어서 형님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거야.”
문득 생각이 난 듯 소진혁이 말했다.
“네, 숙부.”
소진태가 정확히 제남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지라, 제남 분타에서 최근 수집한 정보를 받을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소은설은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아버지를 찾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이틀 후 소은설과 진운룡은 아침 일찍 제검문 조사단과 함께 제녕을 나섰다.
연주까지는 하루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기에 일행은 비교적 여유 있게 움직였다.
임설향은 여행 내내 쉴 새 없이 떠들며 진운룡을 귀찮게 했다.
일행은 처음 예상했던 대로 연주까지 가는 동안 세 번이나 검문을 받았다.
하지만 제검문과 함께 한 덕으로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고 편안히 통과할 수 있었다. 반나절 넘게 움직인 끝에 일행은 해가 저물어 갈 때쯤 연주 초입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응?”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제검문에 도착하기 위해 걸음을 서두르던 홍천상과 제검문 일행이 갑자기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하여 앞쪽을 살피던 소은설의 눈이 동그래졌다.
잔뜩 녹이 쓴 검을 검집 채 어깨에 걸친 청년 하나가 관도 한가운데를 막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무슨 연유로 백주대낮에 관도를 막고 서 있는 것인가?”
홍천상이 눈살을 찌푸리며 청년에게 말했다.
검을 든 것을 보니 무인인 듯싶었는데, 청년 외에는 주변에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산적이나 도적떼는 아닌 듯했고, 그렇다고 좋은 뜻으로 길을 막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청년의 몰골은 참으로 형편없었다.
허리까지 늘어져 있는 머리는 오랫동안 정리를 하지 않은 듯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여기저기 떡이 져 있는 상태에, 옷이라기보단 걸레에 가까운 헝겊들 사이로 드러난 피부는 씻지를 않아서인지 새카맣게 때로 덮여 있었다.
“검을 차고 있다는 것은, 무인들인가?”
청년은 홍천상의 질문을 무시한 채 오히려 되물었다.
형편없는 몰골과 달리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청년의 두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 아무래도 일부러 길을 막아선 것이 틀림없었다.
“우리는 제검문 무인들이네. 무슨 용무라도 있으신가?”
홍천상이 어이없는 얼굴로 물었다.
청년에게서 느껴지는 공력이 기껏해야 이류를 간신히 넘어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자신이 데려온 수하들은 제검문에서도 정예에 속하는 이들로 대부분 일류에 근접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뒤에는 진운룡까지 버티고 있지 않은가.
청년의 정체가 무엇이든 가소롭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씨익!
“후후, 무인이 맞군! 연주까지 가지도 않고 무인들을 만나다니 운이 따라 주는군.”
청년의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난 적산이라 한다! 너희들 중 누가 제일 강한가!”
홍천상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스스로 적산이라 밝힌 청년을 바라봤다.
갑자기 길을 막고선 다짜고짜 누가 제일 강하냐니, 도대체 적산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영감이 가장 강한 자인가? 좋아! 그렇다면 검을 들어라! 무인 대 무인으로 승부를 겨뤄 보자!”
적산이 녹슨 검을 들어 올려 홍천상을 향해 겨눴다.
홍천상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청년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이다.
아무래도 자신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 비무행을 나선 모양이다.
하지만 얼핏 자세만 봐도 적산은 제대로 무공을 익힌 자가 아니었다.
홍천상을 향해 거눈 검은 이리저리 흐느적거리고 있었고, 파락호들처럼 건들거리는 걸음걸이 역시 보법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한 마디로 상대할 가치도 없는 철없는 애송이인 것이다.
임덕화와 제검문 무사들 역시 킥킥대며 적산을 비웃었다.
“쯧쯧, 당신 같이 정신 나간 자가 또 하나 있네요.”
소은설이 혀를 차며 진운룡에게 말했다.
“글쎄…….”
그러나 의외로 진운룡은 다른 이들과 다르게 흥미로운 얼굴로 적산을 바라봤다.

“용기는 가상하나, 그대 같은 자를 상대할 만큼 우리는 한가하지 않으니 썩 비켜서게. 계속 객기를 부리면 나도 더는 좌시하지 않을 걸세!”
그때, 홍천상이 적산을 향해 엄중하게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산의 입가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잔소리는 그만하고 덤벼!”
일행을 한 번 주욱 훑어본 적산이 홍천상을 향해 검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허어, 어리석은…….”
이대로 적산의 도발에 응하자니 어른이 칭얼대는 아이와 드잡이질을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인지라 홍천상으로서는 그야말로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부대주. 제 주제를 알게 해 주는 것이 오히려 저자에게는 앞으로 목숨을 건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겠소? 시간 끌 거 없이 대원들 중 아무나 내보내 무림이라는 곳이 제 놈이 함부로 건방을 떨 수 없는 곳임을 보여 주시오.”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임덕화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공자님. 오진, 네가 나가서 상대해 주거라. 아직 강호 경험이 일천한 자 같으니, 사정을 좀 봐주도록 하고.”
홍천상도 더는 적산의 도발을 간과할 수 없다 여겼는지 수하에게 명을 내려 적산을 상대하게 했다.
명을 받은 오진이 조소를 흘리며 앞으로 나섰다.
“혹시 다칠 수도 있으니, 검집 채로 상대해 주마.”
오진이 여유롭게 검을 들어 올렸다.
검집을 벗기지 않은 채였다.
그러자 적산 역시 검집 채로 검을 겨눴다.
“큭큭큭, 그럼 나도 검집 채로 상대해 주지. 너한테서는 전혀 강한 느낌이 나지 않거든.”
오진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야말로 가소롭기 그지없는 자가 아닌가.
그는 최소한 팔 하나는 부러뜨려 쓴맛을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놈!”
땅을 박차 단번에 거리를 좁힌 오진이 그대로 적산의 관자놀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쉬이익!
빠르면서도 간결한 움직임.
일체의 꾸밈을 배재한 정직한 공격이었다.
“흥!”
코웃음을 친 적산이 자신의 녹슨 검을 들어 막았다.
따악!
검집과 검집이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웃!”
동시에 적산이 튕겨 나듯 뒤로 한 걸음 밀려났다.
공력의 차를 이겨 내지 못한 것이다.
지켜보던 제검문 무사들이 혀를 찼다.
생각했던 대로 실력이 일천한 애송에 불과했던 것이다.
“후후, 힘이 센데?”
적산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오진은 어이가 없었다.
검을 부딪혀 본 결과 적산의 공력은 형편없었다.
한데, 무슨 배짱인지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흥! 공력도 일천한 놈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구나! 내 오늘 네놈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마!”
검에 공력을 잔뜩 불어넣은 오진이 몸을 낮춘 채 적산의 허리를 길게 베어 갔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공격이었다.
쉬이이익!
검에 대기가 갈라져 나가며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적산은 다시 한 번 검을 들어 올려 오진의 검을 막으려 했다. 오진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한 번 당하고도 또 내 검을 정면으로 막으려 하다니, 어리석은 놈!’
홍천상과 제검문 무사들도 혀를 차며 적산을 비웃었다.
모두가 곧 오진의 검에 맞은 적산이 쓰러져 땅바닥에 뒹굴게 되리라 여겼다.
그때였다.
오진의 검이 적산의 검과 맞부딪히는 순간, 적산이 손목을 살짝 틀었다.
동시에 적산의 검이 비스듬히 틀어지며 허리를 향해 오는 검의 검면을 쳤다. 별로 빠르지 않은 움직임이었으나 그야말로 시의적절한 순간에 펼쳐진 일 초였다.
퉁!
아까와는 달리 가벼운 타격음 들리며 허리를 향해 베어 오던 검의 방향이 아래로 틀어졌다.
쉬이익!
방향이 틀어진 검이 아슬아슬하게 적산의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엇!”
검이 비껴 나가면서 오진이 자신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옆구리에 빈틈을 드러냈다.
순간, 자세를 낮춘 적산이 그대로 오른쪽 어깨를 밀어 넣었다.
퍼억!
둔중한 타격음과 함께 오진이 뒤로 주춤주춤 세 걸음이나 밀려 나갔다.
적산은 공격을 멈춘 채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이런!”
오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옆구리와 적산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일격을 허용한 것도 놀랍지만, 적산이 자신의 검을 퉁겨 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제검문 무사들 역시 의외의 상황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분명 적산의 움직임은 눈에 훤히 보일 만큼 느렸고, 공력 또한 미약했다.
움직임 자체도 초식이라든지 보법하고는 거리가 먼 마구잡이였다.
한데, 배는 빠르고 공력 또한 비교도 안 되는 오진의 검을 퉁겨 내고 오히려 옆구리에 일격을 날린 것이다.
제검문 무사들의 눈에는 마치 오진이 혼자 달려들다 스스로 적산의 어깨에 옆구리를 부딪친 것처럼 보였다.
“오진이 너무 방심했군그래.”
“하기야 상대가 상대 같아야 제대로 싸울 맛이 나지.”
무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싱거운 웃음을 지었다.
홍천상 역시 놀란 눈으로 적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랍군. 그야말로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움직임, 거기다 상대의 힘을 역으로 이용하다니……. 단순한 운인가 아니면…….’
홍천상은 두 사람의 대결을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한편, 오진 역시 이번 일이 자신이 방심한 탓이라 여겼다.
초식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애송이에게 당하다니 망신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흥! 지금부터 제대로 상대해 주마.”
얼굴이 잔뜩 상기된 오진이 검집에서 검을 뽑아냈다.
“후후. 바라던 바다.”
“놈!”
공력을 잔뜩 끌어 올린 오진이 비호처럼 몸을 날렸다.
처음보다 배는 빠른 움직임이었다.
더는 적산을 경시하지 않고 전력을 다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쉬이익!
파공음과 함께 오진의 검이 분열하며 적산의 목과 심장을 동시에 노렸다.
“분검(分劍)! 허…… 그동안 성취가 있었구나.”
홍천상이 탄성을 터뜨렸다.
분검은 제검문의 비전신공인 분광검(分光劍)에 입문하기 위한 가장 기본이 되는 기술이었다.
분광검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곧 제검문의 중추가 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홍천상은 아직 젊은 나이에 벌써 분검을 펼치는 수준에 오른 오진을 기특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표정은 다시 굳어 버렸다.
적산이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가지처럼 몸을 뒤로 젖히자 한 치도 안 되는 차이로 오진의 검이 허공을 찔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