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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침없이
프롤로그

Prologue

검은 눈발이 휘날렸다.
화산재처럼 도시 곳곳에서 불타고 남은 재가 눈발처럼 휘날렸다.
저 멀리 활활 불타고 있는 경복궁과 폐허가 된 도시. 곳곳에서 일어나는 가스폭발과 누전으로 새하얀 불꽃이 튀고, 메케한 연기 속에선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숨 막히는 열기에 메마른 기침이 터져 나왔다. 재가 눈에 들어가 팔로 얼굴을 비비니 그을음이 잔뜩 묻어 나왔다. 아마 지금 내 얼굴은 땟물로 가득하리라.
붉은 빗방울이 땅을 적셨다.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은, 사람만 한 크기의 박쥐 녀석들이 시민들을 발톱으로 낚아채 붉은 빗방울 같은 피를 흩뿌렸다.
개중엔 먼저 먹겠다고 저들끼리 서로 다투어 갈기갈기 찢긴 사람의 내장과 사지가 나뭇가지에 걸렸다.
그건 마치 사람의 피를 마시고 태어난 나무에 맺힌 열매 같았다.
지상엔 냄새나는 마물들이 지렁이처럼 얼기설기 뒤엉켜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그들은 크기나 생김새가 전부 다르지만, 딱 하나 공통점이 있었다.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다는 것.
마치 음식을 눈앞에 두고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개처럼.
그런 모습을 허망하게 죽 둘러본 나는, 마지막으로 시선을 발치에 떨어뜨렸다.
그곳에는 내가 존경하는 리더와 하나뿐인 여동생의 머리가 굴러오고 있었으니까.
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두 사람의 머리를 부둥켜안고 소리 없는 절규를 내질렀다.
나는 무력하다. 가족도, 지인도… 무엇 하나 지키지 못하는 무력한 놈이다.
그게 죄였다. 강하지 못한 나는 죄인이었다.
그래서 신은 나에게 무엇 하나도 남겨주지 않았는가.
그래서 신은 세상에 악마를 풀어놓았는가.
그래서 신은 인류를 멸망시키려는가.
악마 놈은 좌절하는 나를 보며 웃었다. 어릿광대처럼 더없이 즐겁다는 듯이.
내 머리 위로 스산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더는 참지 못한 마물들이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거대한 마물이 내 팔을 비틀어 뜯었다. 피가 뿜어져 나오자 흥분한 작은 마물이 등에 올라타 목을 물었다. 그것이 마치 신호탄이라도 된 듯, 수십 마리 이상의 마물들이 거머리처럼 들러붙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새빨갛게 변한 시선으로 황금색 뿔의 악마 놈을 노려보았다.
너만큼은, 너만큼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 나는 죽었다.

∥ 거침없이
1화

나는 죽었다 (1)

2020년, 8월 4일. 미국 백악관의 기자회견장에서 현직 대통령은 ‘천사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공표했다.
그가 말하기를, 천사는 이곳과는 다른 차원에서 왔으며 오래전부터 인류를 주시하고 있었다고 서두를 잇고는,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는 이 자리에 천족을 대표하는 자를 소개하겠다고 말해 인류를 경악에 빠트렸다.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천족은 시원스럽게 이마를 드러낸 보브컷 스타일에 자상하게 웃고 있는 미소가 무척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옷차림은 여름에 맞게 가벼운 브이넥 흰 블라우스에 부담스러워 보이지 않을 만한 크기의 은 목걸이를 착용하고, 무릎까지 오는 검은 스커트와 오래 걸어도 무리가 가지 않을 만한 높이의 구두를 신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세련되고 성숙함이 돋보이는 이미지라 할까.
결론만 말해, 어딜 봐도 평범한 여성이었다.
당연하겠지만, 당시 한껏 긴장하고 있던 기자회견장은 단번에 소란스러워졌다. 장난하는 거냐고 소리치는 기자도 있고,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젓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화를 참지 못해 들고 있던 펜을 던지는 자도 있었다.
그러한 소란을 묵묵히 미소로 받아내던 여성이 뭐라 말을 했는데, 소란스러움에 묻혀 버리자 곤란하다는 듯 턱을 괴는가 싶더니… 한 손을 어깨높이까지 들어 올려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 소란 통 속에서 그런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생각이 들 만한데… 놀랍게도 그 동작 하나만으로 장내는 잠잠해져 버렸다.
카리스마에 경직돼 사람들이 행동을 멈춘 게 아니었다. 당시 브라운관 안에서는 여전히 모두들 침을 튕겨가며 화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웃기게도 소리만 나오지 않는 게 이해되는가. 입을 막은 것도, 방음벽을 설치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당시 나는 실수로 음 소거 버튼을 눌렀나 하고 리모컨을 만지작거릴 정도였다. 그런 착각을 한 건 비단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여성은 간단히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긴 했지만, 이 정도론 믿지 않는 자가 있을 것 같으니 다시 실력을 행사해 보겠다며 다음엔 손바닥을 천장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레이저 빔 같은 걸 쏴 가볍게 천장을 꿰뚫어 버렸다.
하늘이 보일 만큼 휑하니 뚫려 버린 천장, 우수수 떨어지는 콘크리트 파편과 먼지.
기자회견장은 일순간 비명과 혼란으로 패닉을 일으켰지만, 웃기게도 장내는 조용하기만 해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관람하는 기분이 들었다.
여성은 마지막으로 가볍게 손뼉을 쳐 부서진 천장을 원상태로 되돌리더니―사실 이 부분이 나로선 가장 놀랐다고 할 수 있었다―이 정도면 충분하겠느냐며 다시 예의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인류는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브라운관을 통해 천사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천사는 천족을 대표해 사신으로 찾아온 ‘베르디’라고 소개했다.
자신들은 지구인을 우호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자신들처럼 고차원적인 존재로 진화하기를 고대해 줄곧 지구를 침공하려는 마족과 마물을 막아주고 있었으나, 최근 천상에 커다란 문제가 생겨 지구를 보살필 수 없게 되었다고 토로했다.
이 터무니없는 말에 전 인류는 혼란에 빠졌다. 믿기지 않는 말투성이였으나 최강국인 미국이 이 전부가 사실이라며 여성을 두둔하고 있으니, 어찌 혼란스러워하지 않겠는가.
그런 와중에 머리가 깨어 있는 한 기자가 지구를 침략하려는 마족은 얼마나 강하며, 앞으로 인간의 힘만으로 막아야 하냐며 묻자 여성은 이렇게 답변했다.
마물은 모르겠으나, 마족은 한없이 강하여 현 지구의 문명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렇기에 자신들이 고차원의 기술을 전수해 줄 것이라고. 그러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라고.
여성이 말한 기술이란 간단히 말해 초능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신체 강화나 염동력, 발열, 텔레파시, 투시 같은 것들 말이다.
그 기술을 전달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그녀가 가져온, 손바닥만 한 붉은 돌이 하나 있는데, 그걸 만지면 초능력을 각성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하여 이 초능력을 가지게 된 자들을 우리는 ‘각성자’라 부르게 되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각성하는 건 아니고, 몇몇 재능 있는 자들만이 각성의 기회를 마주할 수 있었다. 전체 인구로 따지면 각성자는 10% 안팎에 불과했다.
그래도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데 부족함은 없다고 할 수 있겠지.
그 뒤로 각성자의 시대가 열리고, 신세계 문명을 전수해 준 천족은 지구를 떠났다.
그로부터 1년 뒤, 천족이 말한 마물의 1차 침공이 시작되고, 3년 뒤에 2차, 그리고 10년 뒤… 터무니없는 규모의 3차 침공이 일어나 인류는… 멸망했다.
분명 그랬을 터다.
그런데 어째서… 왜 나는 멀쩡히 침대에 누워 있는…….
도중에 퍼뜩 정신을 차려 허겁지겁 온몸을 만져 보았다.
어, 어라? 아무 이상 없어? 나는 분명 온몸 여러 군데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까지 망가지고, 마지막으로 마물들에게 잡아먹혀…….
“우웁!”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살점이 뜯어 먹히는 감촉이 생생히 떠올라 헛구역질했다.
잔뜩 소름 돋은 목을 어루만지며 가빠진 숨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무슨 일이지? 나는 악마 놈에게 보기 좋게 이용만 당하고, 마물들에게 잡아먹혀 죽었을 터다. 그런데, 그런데 살아 있다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혼란스런 머리를 감싸 쥐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곳은 좁지만 아늑한 방이었다. 지금 내가 누워 있는 침대와 그 옆에 컴퓨터를 올려놓을 수 있는 책상, 책장이 대부분 공간을 차지하고, 그 맞은편엔 수많은 옷이 걸려 있는 행거와 잡다한 물건을 넣을 수 있는 자그마한 서랍이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긴 내게 매우 익숙한 방이었다. 하지만… 있을 수 없어.
그럴 리가 없다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일어난 나는 거의 몽유병 환자처럼 비틀거리며 책상으로 걸어갔다.
책상에는 낡은 컴퓨터 한 대와 전문용어가 가득한 서류나 자료들이 너저분하게 쌓여 있었다. 그 자료들은 전부 세계가 격변하기 이전, 내가 다니던 회사의 자료 문서들이었다.
믿을 수 없어 마구 헤뜨리며 살펴보았지만, 전부 틀림없이 내 작업에 쓰이던 자료들이었다.
그러다 문득, 옆 책장에 소중히 보관된 바이크 헬멧을 발견했다.
세월에 풍파가 느껴지는 허름한 헬멧. 바람을 막는 안면 실드는 반쯤 깨져 있고, 안쪽 내피엔 피가 눌어붙어 생긴 검정 얼룩이 곳곳에 있어 언뜻 보면 으스스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헬멧은, 내가 다시는 엇나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잊지 않기 위해 보관하고 있던 것이었다.
“아냐, 그럴 리… 없어.”
난 부정적으로 고개를 도리질 쳤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있을 수 없어. 그도 그럴 게, 이 방은, 이 헬멧은, 이 집은… 10년 전에 무너져 전부 사라져 버렸단 말이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마구잡이로 뽑아 살폈다.
한창 불량스럽던 때 사둔 바이크 관련 잡지들도, 그 사이에 고이 숨겨놓은 19금 잡지도, 바르게 살기로 마음먹은 뒤에 구매한 교육서들까지…….
하나하나 전부 다 내가 읽고, 내가 공부하고, 내가 좋아하던, 그렇기에 전부 사서 소장한 책들이었다.
그중 너덜너덜할 정도로 변색된 토익 책을 뽑아 종이가 찢어질 것처럼 거칠게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그 토익 책은 페이지마다 지저분하게 공부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는데,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기억난다. 이거, 전부 내가 쓴 흔적이다.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줄을 그어놓은 것도, 페이지를 접어놓은 것도, 장난으로 낙서한 것까지 전부 다!
두꺼운 토익 책을 가슴에 껴안고 입술을 꽉 깨물어 가까스로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억눌렀다.
어쩌면 누군가의 농락일지도 모른다고, 과거의 내 방을 똑같이 재현해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지만, 이것으로 전부 풀려 버렸다.
여긴 진짜, 한때 내 안식처이자 소중하게 여기던 곳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10년 전, 1차 마물 침공 때 완전히 박살 난 내 방 말이다.
여러 증거를 보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게 또 인정해 버리자니 혼란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이 현상은 뭘까? 나는 분명 죽었다. 그런데 어째서 살아 있으며, 또 어째서 존재하지 않아야 할 내 방에 서 있는 걸까?
무심코 벽걸이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춰 보았다.
얼굴에 흔한 주름 하나 없는, 내 20대 때의 젊은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을 만지고 있는 내 손 또한 물집 하나 없는, 깨끗한 손이었다. 한마디로 각성자로서 훈련하지 않을 당시의 손이었다.
여기까지 확인하니, 믿기지 않지만 한 가지 결론이 도출되었다.
정말 말도 안 되지만, 설마… 나는 과거로 회귀했단 말인가.
가슴이 마구 뛰었다. 도무지 진정되지 않아 방 안을 빙글빙글 돌던 나는 퍼뜩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 방문을 뛰쳐나갔다.
거실이다. 제대로 방은 이어져 있다.
싱크대, 식탁, 가족사진, TV에 소파까지 전부 똑같…….
“어라? 일찍 일어났네?”
내 시선이 소파로 돌아간 그때, TV를 시청하던 누군가가 나를 돌아봤다. 그녀는…….
“오늘 일 쉰다고 늘씬 잔다며? 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완전히 메말라 버린 줄 알던, 이제 그 느낌마저도 잊혀가던 그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흐리멍덩해진 시야 사이로 식겁해 입에 물고 있던 빼빼로를 툭, 부러뜨리고 만 동생, 현주의 모습이 보였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현주는 과자 부스러기가 옷에 묻은 것도 잊은 채 멍하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하아, 하아… 오빠, 전에 약속했지? 위험한 상황이 닥쳐도, 우리 절대로 살아남자고. 말해봐, 약속했지?”
“…그래.”
“그 약속, 꼭 지켜.”
“너…….”
“걱정하지 마. 나도… 곧 뒤따라갈게!”

지금도 눈앞에 생생히 떠오른다. 수백이 넘는 마물들에게 쫓기던 와중, 나보고 꼭 살아남으라며 쓰레기 더미로 집어 던지던 그때가.
그 전부가 아무 의미 없는 짓이었다는 것도 모른 채.
마지막으로 내가 본 건, 내 발치로 굴러온 동생의 머리였다. 머리를 잃은 몸뚱아리는 피 분수를 뿜었고, 나는 그저 마물들에게 게걸스럽게 뜯어 먹히는 걸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동생이 살아 있다.
살이 있어, 살아 있구나. 아, 아아아…….
“히햑!”
나는 현주의 머리를 부둥켜안았다.
오빠로서 동생 하나 구하지 못하고 지켜만 봐야 하던 현실이 얼마나 서러웠던가.
너를 잡아먹던 마물들을 찢어 죽이지 못한 게 얼마나 원통했던가.
“뭐, 뭔데? 왜 그러는데! 읍, 이것 좀 놓… 답답하다고!”
현주는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쳤지만, 나는 놓지 않았다.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그날, 한동안 나는 괴로워하는 현주를 붙잡고 서럽게 오열했다.
그리고 10년 전 과거로 회귀했다는 사실을 통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