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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계약 관계(1)



강산하는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으려다 움찔 뒤로 다시 손을 뺐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다.
“이건 뭐 게이트 들어갈 때보다 더 무섭구만, 젠장.”
여동생 예정에게 오늘 들어간다고 말해놨었는데 그 오늘이 지금은 어제가 돼버렸다.
이대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간 홍두깨나 뚝배기에 처 맞고 바로 마빡이 깨질게 틀림없었다.
“하… 이걸 뭐라고 변명하지. 갑자기 던전이 엄청 위험해져서 죽을 뻔하다가 늦었다고 하면… 아냐, 그러면 던전에서 죽기 전에 지가 먼저 죽여준다 하겠지.”
예정의 아파트 문 앞에서 그는 팔짱을 낀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옆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났다.
“저기… 거긴 저희 집인데 혹시 무슨 용무라도?”
“여기가 그쪽 집이라고요? 그럼 당신이 설마…….”
“그래, 우리 자기다.”
어느새 문이 열리고 고리눈을 치켜 뜬 예정이 현관에 나타났다.
그녀와 새로 나타난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던 산하는 자세를 꼿꼿이 하더니 남자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왜… 왜 이러시는지.”
“정말 죄송합니다!”
“네?”
“제가 이 요괴 몬스터 할멈 같은 녀석 오빠 되는 사람입니다. 하필이면 이런 것한테 걸리셔서 창창한 인생 망치신 것, 무엇으로도 보상할 길이 없네요. 그저 세상 다른 남자들을 위해 하신 숭고한 희생이라 눈물이 앞을 가릴 뿐 입니… 꾸억!”
“야이, 미친 새끼야!”
뒤통수에 작렬한 뚝배기에 쓰러져 있던 산하에게 아린이 달려 나와 몸을 흔들며 울부짖었다.
“으아앙~ 우리 삼촌 또 죽었어! 오긴 왔는데 벌써 시체가 돼서 왔네. 여친 손 한번 못 잡고 죽었으니 이걸 어쩌면 좋아! 원통해서 눈도 못 감고 죽었네~ 으흐흐흑!”
“야… 나 아직 안 죽었어. 니 멋대로 산 사람, 시체 만들지 마.”
“으아~ 그새 귀신이 됐나, 환청까지 들려! 삼촌, 너무 원통해 말고 편히 가. 모쏠에 한 맺혔다고 총각 귀신되면 죽어서도 꼴사납잖아. 아 젠장, 기분 나빠. 여친 없은 지 48년짜리 모쏠 총각 귀신이면 대체 얼마나 굶주린 변태 귀신이 되는 거-“
“야이~ 썅! 차라리 칼로 찔러라 이것들아! 이제 보니 모녀가 아주 쌍으로 미쳤네, 어엉!?”
세 사람의 우당탕대는 한바탕 촌극을 멍하니 바라보던 남자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휴우~ 이제야 집에 온 느낌이 나는군.”

***

“형님, 한잔 받으시죠.”
“잔 만 받을게요. 술은 잘 하지 않아서.”
좁은 집이었지만 상다리는 부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린이는 눈앞의 음식들에 눈을 빛내며 허겁지겁 입 안에 퍼붓고 있었고 예정은 간만에 솜씨를 부려 만든 화려한 만찬에 만족한 모양이었다.
“어때, 자기야? 이렇게 요리 솜씨 좋은 와이프가 있어서 행복하지?”
“그래, 꿀꿀이죽보단 낫네. 김서방 그거 알아요? 얘가 옛날에 라면이랑 밥, 따로 하는 거 귀찮다면서 전부 한군데에 끓였다가 면인지 밥인지 모를 돼지죽을 만들고선 그걸 또 좋다고 신나게 처먹은 적이… 야! 칼 놔, 칼 놓으라고! 이게 어딜 자기 오빠한테 식칼을 들이대?!”
“뒈져! 그냥 뒈지라고!”
코앞까지 들이댄 부억칼을 붙잡고 서로 끙끙대는 오누이를 보며 강예정의 남편, 김인재는 밝게 웃었다.
“가족이 늘어서 좋네요. 우리 집은 꽤나 한적했거든요. 집이 좁아서 죄송할 뿐입니다.”
“아니에요, 얹혀사는 내가 미안하지. 빠른 시일 내에 나갈 테니 그때까지만 참아줘요.”
“아뇨! 아닙니다, 왜 그러세요. 어차피 전 지방 출장이 잦아서 남자 하나가 집에 있어주면 오히려 든든하죠. 그러지 마세요, 형님.”
김인재는 평범한 모습의 소탈한 남자였다.
예정이 교태를 부리며 그에게 안긴 모습을 보고 미친년이라 중얼대던 산하는 다시 날아온 식칼을 열심히 피하며 식사에 전념했다.
그렇게 시끌벅적한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산하와 인재는 집 밖으로 나와 담소를 나누었다.
“전 사회복지계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외부 지원 담당이라 자주 집을 비우죠. 예정이랑 아린이한테 항상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 정도 이해 못할 정도로 멍청한 애는 아니니까 염려 말아요.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름 빡세게 교육시켜 놨으니.”
손에 든 음료수를 들이킨 산하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쟤나 나나 공부 머리는 없었어도 똥밭에 던져놔도 억척스럽게 살아남을 깡은 길러놨어요. 자다 일어났더니 그 깡이 좀 심하게 세져버린 것 같긴 하다만, 킥킥.”
“동인천 게이트 사건에 계셨다고 했죠?”
“얘기를 들으셨구만. 맞아요, 20년 동안 병신처럼 얼어 있었지.”
“저도 당연히 병원에 가서 뵈었었습니다. 깨어나셨다는 소리는 진작 들었는데 제가 계속 지방에 있었던 터라 찾아뵙질 못했네요.”
“김서방이 없어서 오히려 다행이었어요. 아린이하고도 좀 친해지고 예정이하고도 대충 옛날 스타일로 지낼 수 있게 됐으니까. 아깐 볼만했죠?”
“아… 예, 뭐…….”
“부모님 돌아가시고부터 그 녀석이랑 나랑 하던 짓이에요. 그렇게라도 안하면 정말 미칠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어느새 아린이까지 물들어버렸더군, 나 원 참.”
“지금 헌터를 하신다고 했죠?”
그 말에 산하는 잠시 움찔했다가 천천히 손가락을 비볐다.
“살면서 가장 잘하는 일이 그것뿐이다 보니…….”
“주변에 몇 명 각성자가 가족인 사람들을 봤습니다만 다들 그리 좋은 관계들이 아닌 것 같아서요.”
“하! 그거야 당연합니다. 각성자가 되면 자기가 무슨 수퍼맨이라도 된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요.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우습게 느껴지니까.”
산하는 계속해서 손가락을 비볐다. 그의 눈은 그들이 앉아 있던 벤치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옛날이랑 다르게 요즘 각성자 수입이 엄청나다고 하니 복권 맞은 양, 가족이랑 연 끊는 놈도 있다고 하고… 무슨 신인류라 떠들어대지만 고작 그런 수준밖에 안 되는 겁니다. 같잖은 것들이니 그냥 신경 꺼버려요.”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됩니다. 예정이는 저보다 더 믿음직한 아내지만 가끔 정말 약한 부분이 눈에 들어오거든요. 형님 문제가 특히 그랬죠.”
“알만 합니다… 극구 말리던 작전에 돈만보고 참여했다 식물인간이 돼서 돌아온 못난 오빠였으니까.”
산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재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 동생이지만 이젠 내가 뒤 봐줄 것도 없는 강한 애로 자랐어요. 남은 건 김서방 몫이니 잘 부탁합니다.”
“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요, 난 주변 산책 좀 하다 들어갈 테니.”
“네, 그러시죠. 저도 한동안 집에 있을 테니 그간 잘 부탁드립니다.”
“별 말씀을.”
산하는 집으로 들어가는 인재의 뒷모습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비벼대던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건너편 풀숲 사이를 헤치고 들어갔다.
거기엔 한 남자가 검붉은 반투명 촉수에 붙잡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보아하니 각정자가 아니군. 민간인까지 써서 내 뒤를 캐려던 놈은 대체 누굴까?”
“끄… 헉…….”
쓰러진 남자는 숨조차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입꼬리가 귀까지 걸쳐진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봐, 혹시 대답할 용의 있어? 일반인 주제에 각성자의 뒤를 캔다는 무시무시한 의뢰를 받아들이는 놈이면 쉽게 대답할 것 같진 않다만 말이다.”
“끄흐윽!”
그 말과 동시에 남자의 몸에서 푸른 연기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산하가 입을 막고 뒤로 빠지자 그의 몸과 소지품이 순식간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남은 건, 사람 모습을 한 검게 탄 바닥의 자국뿐이었다.
산하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져 갔다.
“아무래도… 최대한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정말 짜증나는 일이 생기고 말겠는걸.”

***

역삼동에 우뚝 솟은 최고급 빌딩 안, 구룡 그룹 보안팀에게 비상이 걸렸다.
한 남자가 다짜고짜 찾아와 보안층을 열으라 난리를 피우고 있던 것이다.
“내 얼굴 전에도 봤잖아. 백민지 흑민지 그것하고 만날 약속도 있었다고.”
“몇 번을 말씀 드립니까? 백미희 이사님껜 지금 손님이 와 계시다니 까요?”
“나도 몇 번을 말해? 그건 알았으니까 위에 올라가서 기다려 주겠단 거잖아.”
“그 손님이 아주 중요한 분이세요. 보안 절차가 강화돼서 아무나 들여보낼 수 없단 말입니다.”
“내가 아무나야? 팀에 들어와 달라고 사정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아무나? 빨리 이 문, 못 열어? 나도 계속 이러면 생각이 있어.”
“그건 저희도 마찬가집니다. 여긴 백미희 이사님만 계신 게 아니거든요.”
보안 요원들도 모두 최소 C랭크 이상의 각성자였다.
힘으로라도 이 막무가내인 사내를 막으려던 순간 교신기에 녹색 신호가 들어왔다.
그걸 본 사람들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백미희 이사님께서 당신더러 올라오라고 하시는군요.”
“제기랄, 진작 그럴 것이지 왜 이제서야…….”
거기까지 하고 말을 멈춘 산하는 보안 요원들과 똑같이 인상을 구겨댔다.
“이거 딱 봐도 내가 이용당하는 타이밍인 것 같은데, 안 그래요?”
그들은 불쌍하다는 듯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랴?
할 수 없이 엘리베이터를 탄 산하가 보안 층에 도착한 순간 그곳엔 실로 기묘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뭐야 이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눈에 들어온 것은 영화에서 흔히 보는 마약거래 장면처럼 둘로 갈라져 대치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한쪽엔 백미희와 떨거지들, 그 반대편엔 전에 본 적 없던 갈색머리의 미녀가 도도하게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녀의 손이 졸지에 두 그룹 사이에 끼어버린 산하를 가리켰다.
“새로운 놀이 파트너니?”
“비슷해.”
“커?”
“그쪽 아냐.”
“기집애, 내숭은.”
처음 본 여자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경호원들, 각성자임이 분명한 녀석들의 눈빛이 레이저처럼 따가워졌다.
“이름하고 나이.”
“…….”
“내 말 안 들려? 네 이름하고 나이 뭐냐고?”
“피식.”
산하는 차갑게 냉소를 날리다가 한마디 내뱉었다.
“이름, 시발럼. 나이, 개간년.”
“……너 죽고 싶니?”
“해봐, 자신 있으면.”
뒤쪽에서 살기가 뻗어 나왔다.
그녀 경호원들의 얼굴이 지옥의 악귀처럼 일그러진 것이다.
그걸 보자 산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전에 송학 코퍼 어쩌구 하는 회사에서 택배를 이용했는데 내가 뭘 잘못 말했는지 택배기사 안색이 싹 변하더군. 지금 저 뒤에 있는 것들 얼굴도 비슷하네. 너한테 꽤나 충성하나봐?”
“너 뭘 모르나본데 내가 바로 그 송학 코퍼레이션의 대표이사 신유화야. 네가 지금 백미희 품에 안겨있다고 재롱을 떨고 싶은 모양인데 쟤가 널 그렇게까지 소중하게 생각할까?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 같은 건 얼마든지-”
“영양가 없는 소린 그만 좀 닥쳐, 쭈글이.”
“뭣!”
순간 신유화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너… 방금 날더러 뭐라고.”
“쭈글이라고 했다. 넌 백민지 흑민지 쟤랑 나이차가 많이 나나 피부가 왜 그 모양이야? 대기업 대표이사라면서 관리 안 받나? 그래서 시집은 가겠어?”
“너, 너… 이 새끼…….”
산하는 지금 피부가 짜릿한 살기를 앞에서 느끼고 있었다.
그건 무슨 각성자의 힘, 그딴 것이 아니라 세상 천지에 당할 자가 없다는 노처녀 히스테리였다.
인상을 쓴 산하가 백미희를 쳐다보며 눈으로 말을 걸었다.
‘너 이러려고 나더러 올라오라고 한 거지? 머릿속에 구렁이가 한가득 든 년 같으니…….’
‘물론이죠. 당신이면 이 여자한테 쫄지 않고 달려들 줄 알았으니까.’
그리고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방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누가 이 개새끼 몸통을 당장 조각내 버려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