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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청계산 여로(旅路) (3)



"안 돼!!"
해미의 손이 들리고 지팡이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내려치려는 찰나, 김원일 박사가 끼어들었다.
멈추기에는 이미 늦은 탓에 해미는 급히 지팡이의 방향을 틀었다.
콰쾅!!!
지팡이가 옆에 있던 아름드리나무를 가격하자 포탄이 터진 듯한 굉음이 났다.
후두두둑!
아름드리나무가 거의 밑동만 남기고 산산이 부서져 비산했다.
큰 줄기와 윗동은 십여 미터 떨어진 곳까지 날아가 떨어져 내렸다.
모두가 서 여사를 싫어한 탓에 누구도 가까이 오지 않은 게 어쩌면 천만다행이었다.
하마터면 폭발하듯 비산하는 나무 파편에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끄르륵.”
서 여사는 거품을 물고 쓰러져있었다.
해미는 그 모습을 보고도 솔직히 분이 다 풀리지 않았다.
소식조차 모르는 아빠를 들먹였고,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은 엄마를 끄집어내었다.
“크윽. 해, 해미양. 그러지 말게··· 허억!”
“할아버지!!”
누군가 해미의 바지 단을 잡았다.
쓰러진 김원일 박사였다.
옆구리에 큼지막한 나무 조각이 박혀있었고, 곧 숨이 멎을 거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우웅.
급히 해미가 힐을 넣고, 이도 부족하다 느꼈는지 500% 증폭된 힐을 시전 했다.
성스럽기까지 한 빛이 해미의 손에 모여들더니 김원일 박사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스르륵.
천천히 빠져나오던 나무 조각이 완전히 제거되고 출혈도 멎었다. 벌어진 상처도 순식간에 아물었다.
“할아버지. 미안해요. 저도 해치려던 게 아니고 겁만 주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해미가 죄송함에 눈물을 글썽였다.
“이이!”
그러다 떠오른 늙은 여자를 돌아봤다.
덥석.
김원일 박사가 해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해미가 가볍게 털면 떨어질 손이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 * *

치직.
“무슨 일이야? 방금 거기서 난 소리 맞지?”
-네 맞습니다. 근데······.
“뜸 들이지 말고 똑바로 말 못해!”
성현이 무전기에 대고 언성이 살짝 높였다. 어떤 일이 발생하면 간단명료하게 정확한 상황을 전해야 한다. 그게 무전의 기본이다.
주저한다는 건 있는 그대로가 아닌 자기 생각이 가미된다는 걸 뜻했다.
이런 부분은 돌아가면 확실히 교육을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넵!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였습니다.
성현은 무전기 너머로 들려온 두식의 말이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너, 지금 나랑 스무고개 하냐?”
-아, 아닙니다. 여기 새로 합류한 일행 한 명과 언쟁을 하다 해미양이 화가 나서 나무를 부쉈습니다.
성현은 일단 무전을 마쳤다.
누가 다치고 한 게 아니라면 큰 문제는 없다.
그리고 나이는 어리지만 해미가 누군가를 먼저 건들고 행패 부릴 그런 성격은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 먼저 건들었거나. 자기방어에 가까운 행동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돌아가 알아보면 된다.”
철컥.
성현은 탄약을 모두 소모한 탄창을 빼내고 새로운 탄창으로 갈아 끼웠다.
타탕! 퍼-겅!
아직 숨이 붙어 있던 좀비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이곳은 고속도로에서 머지않은 서초구에 위치한 외교센터 빌딩이다.
사살한 좀비는 모두 아홉 마리. 굳이 이 건물에 있는 모든 좀비를 죽일 필요는 없었기에 눈에 보이는 좀비들만 잡았다.
1층부터 11층까지 비상구와 연결된 문을 모두 잠그고, 제일 꼭 대기층인 12층 스카이라운지에 있는 좀비만 깨끗이 청소했다.
대충이나마 좀비 사체를 치워 내고 나니 하룻밤 유숙하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남은 놈들은 애들 훈련 겸 잡으면 될 거 같고······.”
성현은 사람들을 옥상으로 데려온 뒤 남아있는 좀비들을 박멸할 생각이었다.
12층 스카이라운지에서 멀리 일행들이 있는 곳을 내려다봤다.
상당한 거리지만, 드문드문 그늘에 사람들이 보였다.
“돌아가자. 우리 해미가 왜 그랬는지도 알아봐야지.”

* * *

“그래서 그 노친네는?”
성현의 말이 딱딱하다. 두식에게 사건 전말을 전해 듣고 나서였다.
그리고 화가 났다. 해미가 고개 숙이고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박 중사. 미안하네. 내가 제대로 사람들을······.”
“아닙니다. 어르신이 죄송할 일은 아닌 거 같네요. 그나저나 몸은 좀 어떠십니까?”
성현은 다가와 말하는 김원일 박사의 피에 젖고, 찢어진 셔츠를 보며 말했다.
“지금은 말짱하네. 해미가 잘 살펴 줬어. 걱정할 거 없네.”
“원래 그런 사람이었습니까? 그 서 여사인가 뭔가 하는 사람?”
“내가 할 말이 없네. 처음부터 우리 내에서도 말이 많았던 이였네. 주의를 주고 하는 데 까지 해봤지만, 천성이 그런 것을 어쩌겠나. 그렇다고 버리고 갈 수는 없지 않나.”
솔직히 성현의 입장에서는 여기 새로이 합류한 사람들 김원일 박사를 포함해서 전부와 해미 중 누구를 택하라고 하면 단 1의 고민도 없이 해미일 것이다.
해미는 내 사람이고 내가 지켜줘야 할 대상이지만, 이들은 아니었다.
내 것과 아닌 것의 경계는 명확하다.
“섭섭하게 들리시겠지만 이것 하나만 확실히 하죠. 여러분들 전부와 해미 한 사람의 무게가 같지 않습니다. 한없이 해미 쪽에 쏠립니다. 지시에 불응한 것은 아니니 이번은 넘어가지만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그때는 여러분과의 인연은 거기까지입니다. 저희는 저희 길을 가겠습니다.”
성현은 등을 돌리고 해미에게 갔다. 그리고 가만히 옆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냐.”
해미의 마음도 지금 말도 아님을 안다. 화는 났지만 그렇다고 해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안다.
누군가 다치고 자칫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상처를 입었다. 놀랬으리라.
갑작스레 너무 큰 힘을 얻고 일종의 컨트롤 미스가 발생했다.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 믿었다.
“저··· 아저씨.”
“응, 그래.”
“저한테 화 안 내세요? 제가 잘못해서 할아버지가 크게 다쳤는데······.”
“음··· 해미야. 넌 처음부터 할아버지를 다치게 할 생각이었니?”
“아니요. 제가 왜요? 절대 아니에요.”
“그래 그럼 된 거지 않니?”
“네에? 아니 그게··· 만일 잘못했으면··· 저는······.”
해미는 성현의 괜찮다는 말에 우물쭈물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미 반성은 하고 있다는 거다. 이러면서 큰다고 생각한 성현이었다.
“해미야, 그걸로 된 거다. 물론 잘못한 건 맞다. 하지만 세상이 이리된 지금 내 안의 기준에서만큼은 아니다. 만약 해미 네가 그 서 여사라는 사람을 크게 다치게 했더라도 나는 널 탓할 생각이 없어. 아니, 오히려 괜찮다고 말했을 거야. 그게 지금 내 기준에서는 맞다.”
궤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성현은 진심이었다.
“해미야. 우리만 생각하자. 우리만 위해 살아도 힘든 세상이 되었다. 우리만 보자······.”
해미가 성현의 어깨에 기대어 온다. 갑갑하던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을 해미는 느꼈다.
먹먹하던 머리가 씻은 듯이 깨끗해졌다.
“저···. 박 중사님.”
성현과 해미가 고요하고 정적인 나눔을 나눌 때 두식이 찾아왔다.
“왜, 무슨 일 있어?”
“그게, 서 여사란 여자가 없어졌습니다. 탐문하니 하행 방향으로 가는 걸 본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놔둬, 우리도 지금 이동한다. 모두에게 전달해.”
스스로 떠난 사람을 찾아 나설 만큼 성현은 한가하지 않다.
오는 사람은 가리지만 간다는 사람 붙잡을 용의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 서 여사라면 더욱더.
사람들이 이동하기 위해 부산스레 움직인다.
낮잠을 청하던 사람 친한 이와 수다를 떨던 사람 모두가 입을 닫고 지시를 기다린다.
“해미야 저기 보이는 큰 빌딩이 우리 목적지다 저기로 간다.”
“네에-! 제가 앞장설게요. 모두 따라오세요.”
해미의 날씨가 비 옴에서 어느덧 무지갯빛으로 변했다. 장점이라면 장점일 수 있고, 단점이라면 단점이 되는 성격이다.
‘그래, 훌훌 털어라. 앞으로 더한 일도 수두룩할 테니.’
해미가 앞서고 김원일 박사를 포함한 일행 모두가 움직였다.
아직 해가 지려면 한참인 시간이지만,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거점이 되는 빌딩을 청소해야 했다.

* * *

타타타탕!
꽈-광!
“탄창 교체!”
두식이 코너 구석 열린 사무실 안으로 수류탄을 던지고 문을 닫는다.
그리고 자세를 낮춰 탄창을 교체했다.
성현과 일행은 지하 2층에서부터 지상 10층까지 대략 90마리의 좀비를 처리하고, 이제 마지막 층인 11층에서 대미를 장식 중이었다.
대부분은 성현이 처리했지만, 두식과 용칠도 한몫 단단히 해주었다.
비록 성현처럼 파괴적인 데미지를 주지는 못 했지만, 환상의 호흡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둘의 공격 방식은 물량 공세였다. 한 마리만 죽어라 패고, 또 한 마리만 죽어라 팼다.
대략 한 마리당 총알 10발씩은 쏴대어야 전투 불능상태로 몰고 갈 수 있었다.
따다다다당!
용칠의 총구에서 발사된 탄환이 좀비의 얼굴에 전탄 작렬하면서 한 마리를 또 잡아냈다.
“아따, 이놈들 질겨요. 이 거리에서 관통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머리만 노려 어차피 뇌가 곤죽이 되면 끝이야. 어설프게 몸통 노리지 말고. 총알 아깝다.”
퍼걱. 타탕.
성현은 갑자기 한 사무실에서 튀어나온 좀비를 개머리판으로 후려치고, 헤드에 총알을 먹였다.
단발이지만 더블탭 속사로 두 방을 먹은 좀비는 코 위의 머리가 풍선 터지듯 날아가고 말았다.
“천 하사님. 중사님 총이 정말 저희랑 같은 총 맞습니까? 무슨 화력이 저래요?”
“몰라. 튜닝하면 될라나?”
“튜닝한다고 소총이 저리되면 무기 개발은 왜 한답니까?”
“아니 이 자식이, 그냥 그렇다는 거지 왜 나한테 따지고 지랄이야.”
둘이 티격태격하면서도 착실하게 한 마리씩 작살내며 성현을 보조해 움직이고 있었다.
‘손발이 잘 맞아. 원래 같이 일을 해서 그런지 알아서 엄호 지원 상호보완까지 모두가 매끄럽다. 괜찮네.’
성현이 중앙을 돌파하고, 나머지 흘린 좀비들을 두식과 용칠이 처리 중이었다. 그리고 혹시 몰라 뒤를 해미가 받치고 있었다.
“에구. 눈먼 좀비 한 마리 안 덮치네.”
해미가 따라왔지만 할 일이 없었다.
성현이야 능력이나 아이템인 라이트 아머와 헬멧 때문에 다칠 염려가 없었고, 두식과 용칠까지 안정적으로 자신의 몫을 해내고 있었다.
해미에게 생색낼 기회가 오지 않은 것이다.
“잔탄 60.”
두식이 자신의 탄약 재고를 알려왔다.
“얼마 안 남았다. 마무리하고 탄약 보급 받아.”
성현은 좀비 소탕이 막바지에 다다랐음을 전하고, 전투를 마무리 짓기 위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