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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청계산 여로(旅路) (2)



“앗, 아저씨 오신다. 와 진짜 많네요. 다 데려오셨나 봐요.”
해미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한참 만에 보는 듯 성현을 반기며 달려 나왔다.
그런 해미가 마냥 예뻐 보이는 성현이 머리를 헝클어트려 주었다.
“에이. 또 이런다.”
그러면서도 성현의 팔에 팔짱을 끼고 척하니 같이 걷는다.
“어린 것이 발랑 까져 가지고. 못 배워 묵은 것들은 떡잎부터 알아봐.”
서 여사가 뭐가 못마땅한지 입을 삐죽였다.
“이보게 서 여사, 내 한마디 하지. 자네는 그 주둥이로 말미암아 고난을 불러들일 거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는 알고 생각 좀 해서 말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야.”
“니미럴. 사돈 남 말 하시네. 영감이야말로 조심하슈. 내 입으로 내가 말하는데 뭔 상관인데? 죽을 날 받아놓은 영감마냥 구시렁대기는.”
김원일 박사는 구제 불능인 서 여사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웅성웅성.
쿵!
성현이 중형 승용차 위에 뛰어올라 새로이 합류한 이들을 주목시켰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고 삽시간에 정적이 흘렀다.
“아시는 분은 아실 테고 모르시는 분을 위해 몇 가지 말을 전달하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청계산을 목표로 가고 있습니다. 정부에서 대규모 피난시설을 만든 것으로 추측되는 곳입니다. 그곳에 가지 않으실 분은 지금 빠지시면 됩니다.”
성현이 말을 하고 ‘쓱’하고 바라보자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없었다.
“좋습니다. 청계산까지의 안전은 저와 제 동료가 맡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빠르게 가면 금일 중으로 충분히 청계산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1시간 걷고 10분씩 휴식하며 이동하겠습니다. 저는 박 중사라 부르시면 됩니다. 질문 있습니까?”
아무런 질문이 없자 성현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지킬 의무나 책임 같은 게 없는 사람입니다. 사정상 군복을 입었으나, 여러분과 똑같은 입장입니다. 이점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또한, 제 지시에 불응할 시 예외 없이 대열에서 이탈시킬 테니 명심하십시오. 번복 없습니다. 불합리한 지시는 없을 테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절대 지시에 불응하지 마십시오.”
새로 편입한 이들의 시선이 모두 서 여사를 바라봤다. 성현은 차에서 내려와서 두식과 용칠을 찾았다.
성현은 둘을 데리고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갔다.
“너무 딱딱하게는 하지 말자. 너희나 나나 아직은 어색한 사이인 건 알지만, 그리 어려워 하지 마라.”
성현이 둘을 부르자 잔뜩 얼어 있음을 보고 한 말이다.
“네, 중사님 알겠습니다. 헤헤.”
두식이 넉살 좋은 웃음을 짓고 말했다.
“그래그래. 우선 너희 둘은 한 몸처럼 같이 붙어서 행동해. 좀비가 만일 나타나도 같이 대응하고 움직여라. 그리고 돌발 상황 발생하면 좀비에 한해서 선 조치해도 좋다. 이점 명심하고 너희에게 기회를 준 만큼 그만한 재량도 준다는 거다. 알겠지?”
“옙! 박 중사님 알겠습니다.”
“넵!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슬슬 출발하자. 너희 둘은 우측면 외곽을 지키고 난 후방, 해미가 선두에서 길을 연다. 가자.”
성현은 둘에게 주의사항과 전달할 내용을 말하고 대기하고 있던 새로이 합류한 이들에게도 출발을 알렸다.

* * *

성현은 도보로 청계산 입구까지 14~15㎞ 정도로 봤고, 이 정도면 아무리 천천히 가도 네 시간이면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새로이 합류한 이들과 동작대교 부근에서 출발한 게 12시 10분경 현재 두 번째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벌써 2시 20분이 지났다.’
예상시간의 절반이 지났지만 이제 겨우 3분의 1지점인 한남대교 남단에 도착해 경부 고속도로 초입에 들어서 있었다.
거의 30분에 1㎞를 온 셈이니 성현은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중간에 좀비 20여 마리를 잡았지만, 그건 성현과 두식 용칠이 한 일이었다. 다른 이들이 거들 일이 없었다.
“저 사람들은 위기의식이 없다. 이 대로면 여섯 시가 넘어야 청계산 입구에 도착해. 산은 해가 일찍 지는 점을 감안하면 한 시간 남짓밖에 시간이 없다는 건데···. 만일 청계산에 피난민촌이 없던지 무슨 일이 생겨 들어가지 못하면 비박을 하는 수도 생긴다.”
비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인원을 데리고는 할 수 없다. 돌발 변수가 너무 많았다.
“강 병장. 가서 김 박사님 좀 모셔 와라.”
“네, 다녀오겠습니다.”
인원이 40명을 넘다 보니 사람들이 띄엄띄엄 중앙분리대 역할을 하는 가로수 그늘에 앉아 쉬고 있었다.
‘이런 장소에서 좀비들과 마주하면······.’
절레절레.
성현은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우측은 높이가 10m가 넘는 소음방지 벽이 설치되어있고 반대방향 차도 넘어도 소음방지 벽이 설치되어있었다.
앞뒤 말고는 갈 곳이 없는 외길이다.
기억으론 이런 소음방지 벽이 서초IC 까지 이어지고 거리상으로 4㎞가 넘는다. 지금 이동속도로는 2시간 이상.
당장은 낮이라 상관없지만 만약 이런 장소에서 대규모 좀비 때와 마주한다면 자신과 해미는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는 게 성현의 생각이었다.
“박 중사. 찾았다고.”
“네. 이리 모셔서 죄송합니다.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내 귀를 열고 경청하지. 말해보게.”
“현재 속도라면 청계산에 도착하기 전에 날이 저뭅니다. 힘든 건 알지만 이동속도를 올려야 합니다. 정확한 일몰 시간은 모르지만, 대략 일곱 시부터 노을이 지고 그림자가 길어질 겁니다. 좀비들의 활동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후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성현은 장애물 격인 차들로 인해 이동속도가 늦어짐을 알지만 그것을 고려해도 어떻게든 이동속도를 올려야 함을 설명했다.
“알겠네. 내가 너무 안일했구먼. 어떻게든 되지 않겠는가? 하고 막연한 생각만 했으이. 미안하네. 네가 어떻게든 모두에게 전달하고 시간을 맞춰 봄세.”
“10분 후 출발할 테니 그전까지 부탁하겠습니다.”
김원일 박사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해미가 다가와 큰 가방을 건넨다.
“할아버지 여기 음료수 좀 넣었어요. 가져가셔서 드세요.”
“허허 이거 참. 고맙네. 해미라고 했지. 얼굴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예쁜 처자구먼. 내 잘 마시겠네.”
성현은 해미가 유달리 김원일 박사에게 살갑게 구는지 대충이지만 짐작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조부의 손을 잡고 유치원을 다녔고,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고 했었다.
고등학교 진학과 동시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한동안 방황할 정도였다고 하니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부모 이상으로 컸을 거다.
그런 해미에게 할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의 인자하게 생긴 김원일 박사는 남다르게 느껴졌을 것이다.
“시간되었다. 천 하사, 강 병장 사람들에게 알리고 출발하자.”
출발을 알리는 성현의 말에 두식과 용칠은 빠릿하게 움직였다.
“자-! 모두 출발입니다.”
두식의 말에 하나둘 일어나 갈 길을 재촉한다.
다행히 이동속도는 훨씬 빨라졌다. 몇몇은 죽는다며 앓는 소리를 하지만, 개개인의 상황에 맞춰줄 수는 없었다.

* * *

“후아-. 덥다 더워.”
용칠은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를 걸으며 연신 땀을 훔쳐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이글거리는 아지랑이를 피워내고 있었고, 차들은 달아올라 뜨거운 복사열을 내뿜고 있었다.
“저기 앞에서 10분간 휴식합니다.”
성현은 제일 뒤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좌우가 꽉 막힌 소음방지 벽이 끝이 났다. 당장 태양 빛이 찬란한 이상 무슨 일이 나지는 않겠지만, 좌우를 둘러싼 장벽은 성현에게 갑갑함과 조바심을 안겼다.
‘그나마 많이 왔다.’
1시간 남짓 4㎞를 걸어왔다. 앞서보다 배에 가까운 이동 거리였다.
이 속도라면 오후 다섯 시전에 청계산 입구까지 진출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 여유를 부릴 상황은 아냐.’
청계산에 도착한 데도 정확한 피난소의 위치를 모르니 자칫했다간 시간만 잡아먹고, 이도 저도 안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차라리 오늘은 인근에서 쉬고 내일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성현이 잠시 생각에 몰두한 사이 서초IC 진출입로가 만나는 곳에 도착했고, 그나마 그늘이 있는 도로변 조경수 아래 삼삼오오 모여 지친 몸을 쉬었다.
“너희도 좀 쉬도록 해라.”
성현은 힘들 텐데도 주변 경계 중인 두식과 용칠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주고 음료수를 건넸다.
“아직 팔팔합니다. 괜찮습니다.”
절인 배추처럼 푹 숨이 죽은 두식과 용칠을 보고 ‘그 꼴을 하고 할 말이냐’ 하고 성현은 둘을 조경수 밑 그늘로 이끌었다.
그리고 쉴 수 있을 때는 쉬어줘야만 전투력이 유지된다는 말로 둘에게 편히 쉴 수 있도록 했다.
“상의드릴 게 있습니다.”
“오 왔는가. 우선 좀 앉게. 그래 상의할 게 뭔가?”
김원일 박사가 쉬고 있는 그늘 밑으로 다가온 성현은 생각했던 바를 알렸다.
“나보다는 자네가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가 낫지 않겠나. 이건 자네가 판단하고 우리들은 그 지시에 따르는 게 가장 합당할 듯 하이.”
“그리 말씀하시니 알겠습니다. 모두에게 지금 이곳 근처에서 숙박한다고 알리시고, 현재 장소에서 대기하도록 해주세요. 제가 주변을 둘러보고 장소를 물색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네. 고생해주게.”
김 박사는 성현이 떠나자 바뀐 일정을 전달하러 모여 있는 이들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못마땅하지만, 혼자 쉬고 있는 서 여사를 찾았다.
“죽을 둥 살 둥 걷게 해놓고 이제 와서 여기서 하루 더 머문다고?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이리 데려와 놓고 이제 와서 피난처가 어딘지도 모른다니 내가 큰소리 땅땅 칠 때부터 알아봤어. 고생은 고생대로······.”
“그만 좀 하게! 우리가 그 아파트에 남았다면 살았겠나? 지금 주변을 둘러봐!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아직도 몰라? 서 여사는 생각이 있는 사람인가? 저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내 장담컨대 우리 모두는 아파트에서 한 걸음도 못나오고 다 죽었을 거야.”
서 여사의 투정을 받아줄 만큼 받아준 김원일 박사가 드디어 크게 역정을 내며 질책했다.
“아니 말이야 바른말이지, 왜 나한테 소리 지르고 지랄이야 지랄이!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영감이야말로 저치들한테 뭐 받아먹은 게 있어 왜 그리 싸고돌아 싸고돌길!”
“아니 듣자, 듣자 하니까 할머니, 말이 좀 심하시네. 할머니 지금 뭐라고 했어요?”
해미는 웬 소란에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와봤는데 웬 할머니가 김원일 박사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난리도 아니다.
더군다나 성현과 자신들을 욕보이기까지 하니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한 것이다.
“뭐? 하, 할머니? 내가 어디 봐서 할머닌데? 어린년이 발랑 까져서 남자한테 꼬리나 칠 줄 아는 게 얻다 대고 할머니야! 너 내가 누군지 알아!”
해미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표정은 더없이 굳어 있어 한기마저 풍기는 듯했다.
“당신··· 말 다 했어?”
“다, 당신? 어디 이 호랑말코 같은 어린 계집애가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넌 애비 애미도 없냐!”
스창!
해미의 손에 난데없이 길 다란 지팡이가 쥐어진다. 은은한 빛이 감도는 은색의 지팡이였다.
“해, 해미양. 부디 참게.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김원일 박사가 급히 해미의 앞에 나서서 말린다.
“히익!”
놀란 서 여사도 뒤로 주춤주춤 물러선다. 빈 허공에서 나타난 지팡이며 해미의 서슬 퍼런 눈빛에 오금이 저린 것이다.
“할아버지. 비.키.세.요.”
해미는 김원일 박사에게 예의를 지키고 있었고 또 그의 말은 존중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저 할머니라고 부르기도 싫은 늙은 여자는 가만 둘 수 없었다.
파팟.
해미는 비켜서지 않는 김원일 박사를 순식간에 제치고 서 여사 앞에 섰다.
“다시 해봐.”
해미의 말은 스산함을 넘어 얼음장보다 차갑다.
“내··· 내가 하라면 못 할 줄 아 알고? 이 애비 애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