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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지상으로 (3)



뚝뚝뚝.
흠칫.
얼굴에 촉촉한 물기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진다. 짭조름한 물기가 입술을 적시고, 입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찰싹찰싹.
기분 더러우면서 찰진 고통이 느껴졌다.
“허업. 헉, 헉··· 해미야.”
헬멧의 바이저를 올린 해미가 눈물범벅인 얼굴로 오른손을 펼치고 있다.
금방이라도 내리칠 것만 같다.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고도 짐작이 간다.
“크윽.”
둔중한 통증에 왼쪽 두개골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대뇌 중추가 흔들린 탓인지 어지럼증도 심했다.
“흐앙. 아저씨 죽는 줄 알았잖아요. 엉엉엉.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머리에 맨홀 뚜껑 맞고 쓰러졌는데, 일어나지는 않고. 으아앙.”
해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옆면이 살짝 찌그러진 맨홀 뚜껑이 있었다.
‘빗맞았으니 망정이지. 머리가 터져 죽지 않은 게 다행이다. 근데 좀비는 어떻게?’
미처 파악 못한 좀비의 행방이 궁금했지만, 우선 해미를 달래야 했다.
“······미안하다. 앞으로 반드시 헬멧 쓰고 다니마.”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생긴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해미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성현은 해미를 품에 안고 등을 쓰다듬으며, 어르고 달랜다.
‘아직은 여린 것을··· 같은 실수는 두 번 하지 않으마.’
아무리 강한 척 해도 아이는 아이다. 그리고 성현은 두 번 다시 이 같은 실수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참을 들썩이며 울고 있던 해미가 겨우 진정이 되는지 눈물을 멈추고 일어선다.
“나쁜 놈.”
퍼걱.
“아저씨가 죽을 뻔했잖아!”
해미가 손에 쥔 지팡이로 이미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를 맹렬히 내려친다.
‘저, 저놈이었구나.’
이미 피곤죽이 되어 있는 좀비였다. 얼마나 살벌한지 성현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살점이 찢어지고 진득한 핏덩이가 사방으로 튄다.
그럼에도 화가 덜 풀리는지 연신 씩씩대며 발로 걷어찬다.
“해, 해미야······.”
“왜요!!!”
해미의 섬뜩한 눈이 성현을 바라본다. 성현도 찔끔할 정도다.
“이··· 이제 괜찮으니 그만하자. 이리와.”
해미는 성현이 내민 손을 보고 바닥의 고깃덩이 좀비의 사체를 힘껏 걷어차 복도 저 멀리 차내고 성현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제 특수스킬 아니었음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스킬 쿨 타임이 1시간이라 그사이에 또 다치면 안 돼요.”
해미의 특수스킬은 치유 스킬의 효과를 1회 500% 증폭하는 기술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인한 건, 즉사만 피한다면 해미가 어떻게든 살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 명심하마.”
절대 다치지 말라도 아니고, 1시간은 지나서 다치라는 말 같았다.
성현은 해미의 한마디 한마디가 무섭다 왠지 자신이 또 다칠 것만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게 한다.
“내가 정신을 잃은 게 오래됐어?”
“그게······.”
해미가 손가락을 펴고 꼼지락 된다. 시간을 가늠하는 것 같았다.
성현은 스마트 폰을 꺼내어 시간을 확인했다. 처음 좀비 한 마리를 잡고 봤을 때로부터 7분여가 흘러있었다.
‘짧으면 3분. 길면 5분 정도.’
전투 상황을 가정하면 맥시멈 5분 정도로 판단했다.
“됐다. 내가 기억하기로 5분은 안 지난 거 같다. 으윽.”
아직도 두개골의 상처가 완전히 낫지는 않은 건지 통증이 쉬이 가시질 않았다.
“괜찮으세요? 힐!”
해미의 치료 스킬덕분에 한결 편안해진 성현은 해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맙다. 이제 자연 회복으로 충분할 것 같아. 이미 늦었으니 서두르자.”
언제 좀비 때가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당장 길을 막고 덤벼든 데도 하등 이상할일이 아니었다.
이 정도 소란이면 영등포 지하철은 물론이고, 인근 시가지에 모두 울려 퍼져 지금이면 소리의 진원을 찾고 다닐 놈들이 있을 것이었다.
성현과 해미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다.

* * *

“형님, 두식이 형님.”
“쓰읍. 좀 조용히 해라. 그건 그렇고. 용칠아 방금 들었냐?”
“네. 형님 안 그래도 옥상에서 망보다 달려온 거 아닙니까.”
지금도 간간히 들려오는 총성에 키가 190이 넘는 두식은 턱을 괴고 잠시 고민했다.
“혹시 군대가 구출 작전 같은 거 하는 게 아닐까··· 가볼까?”
“에이, 설마요. 지들도 살기 바쁠 텐데. 전 아니라는데 한 표.”
“쓰바. 뭔지는 알아봐야 할 거 아냐? 이리 둘만 나다니다가는 언제든지 훅 갈 수 있다.”
“아이고, 형님 첫날부터 지하철만 피해서 다녔는데 왜 갑자기 그래요. 청계산인지 뭔지 그냥 그리로 갑시다.”
“됐고, 확인하자. 오늘 촉이 좋아. 가서 뭔지만 확인하고 오후 3시 전에 거점 잡자. 그 정도면 안전 확보하고 시간은 충분하잖아.”
“휴-우.”
용칠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
솔직히 겁이 난다.
좀비 같은 괴물로 변한 인간들을 눈으로 보고 직접 싸우기까지 했다. 한둘이라면 어떻게든 상대가 가능하기도 했다.
둘은 이틀 동안 9마리의 좀비들을 해치웠다.
하지만 그것도 한 마리씩이라 둘이 힘을 합쳐 상대가 가능했지, 그 이상이면 힘든 게 사실이다.
세상이 망하네. 어쩌네 하던 그 날 이후 어찌 된 영문인지 힘도 부쩍 쌔지고 몸도 날래졌다.
하지만 좀비들도 만만치 않았다.
힘으로만 싸운다면 1대1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지만, 놈들은 이로 물고 뜯고 손톱으로 할퀴고 전신이 무기여서 안전하게 싸우려면 둘이서 한 마리 정도가 적당했다.
“아직 괜찮잖아. 걱정하지 말고 가보자.”
다행이 아직 낮이었고, 시간이 넉넉하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차피 두식의 말대로 하게 될 거란 걸 용칠이 모르지는 않았다.
덩치만 컸지 순진한 구석이 많은 용칠은 자신을 친동생처럼 아끼는 두식을 잘 따랐고, 이견이 있을지언정 끝까지 반대한 적은 없었다.
“에이! 갑시다. 사나이 한번 죽지 두 번 죽나. 까짓것······.”
“새끼··· 형만 믿어라. 가즈아!”
두식과 용칠이 있던 곳은 영등포시장역에서 직선거리로 대략 200m 정도 떨어진 아파트 공사 현장이었다.
이들은 해가 뜨면 이동하고 날씨가 조금이라도 흐릴라치면 즉시 안전한 장소를 찾아 숨어다녔다.
이동 간에는 사방이 확 트이고 햇살이 잘 들면서 사태 발생 당시 사람들이 없을 만한 지형만 찾아다녔다.
좀비들의 특성과 행동을 이틀 동안 몸소 알아냈고, 이를 토대로 파악한 생존 방식이었다.
두식이 커다란 오함마를 들고 앞장서고, 용칠이 청테이프를 칭칭 감은 쇠파이프를 들고 뒤를 따랐다.
아파트 공사장 밑까지 내려왔지만 별다른 낌새가 없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낸 두식과 용칠이 연신 주위를 살피며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타타타탕.
콰쾅.
멀지만 날카로운 총소리와 둔중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 * *

“해미야 달려!”
성현은 해미와 이제 머지않은 출입구를 향해 바람처럼 달렸다.
구오오오.
뒤에는 열댓 마리의 좀비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좀비 Lv3]
[좀비 Lv2]
모두 2~3레벨의 좀비들.
지금까지 역사를 빠져나오며, 총 6번의 좀비집단을 상대했다.
모두 합하면 대략 200마리는 될법한 숫자였다.
“던진다.”
“네에-!”
성현은 K413 수류탄 두 개를 달리는 방향과 반대로 가볍게 던졌다.
휘익.
‘하나, 둘, 셋!’
꽈과광.
후끈한 후폭풍이 밀려와 성현을 가볍게 밀었다.
따다다당.
입고 있는 군복을 뚫고 라이트 아머와 헬멧에 텅스텐 규빅 탄자들이 날아와 두드려댄다.
라이트 아머와 헬멧은 생각이상으로 높은 방어력 가지고 있었고, 성현의 증폭된 능력으로 시험 삼아 쏜 소총탄을 무난하게 방어해냈었다.
‘근거리에서 쏜 탄환도 막는데 이 정도쯤이야.’
이를 알고 수류탄을 투척하고 엄폐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현이 잠시 뒤를 돌아봤다.
자욱한 피 보라가 먼지와 함께 공기 중에 퍼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아저씨 빛이에요. 빛.”
해미가 여태껏 들어본 목소리 중에 가장 밝은 톤으로 말했다.
뒷모습만 보이지만 해미가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성현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올라가자!”
성현과 해미는 가파른 계단을 날듯이 뛰어오르며 지상으로 발을 내딛었다.
“너무 좋아요.”
해미는 따듯한 햇살을 만끽하는 듯. 하늘로 고개를 한껏 들어 빛을 음미했다.
성현은 해미와 달리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지상에 올라 지하철 출구 아래를 계속해서 주시했지만, 따라 올라오는 좀비는 없었다.
‘다 죽은 건가? 따라올라 오는 놈들이 없네. 헌데···. 주변이 너무 조용해.’
사주경계를 하고 있지만, 평온 그 자체였다. 별 탈이 없을 듯하자 해미를 따라 헬멧을 벗고 온전한 햇살을 느껴봤다.
‘이 좋은 걸 평소에는 모르고 살았다는 거겠지.’
감은 눈 사이로 스며들듯 싱그러운 햇살이 더없이 포근하다.
얼굴을 감싸 도는 열기는 뜨겁지도 않고 적당한 온기를 전해준다.
그렇게 잠시지만 지금의 상황을 잊을 수 있는 여유를 찾아 줬다.
“해미야. 가자. 언제 좀비들이 나타날지 모른다.”
“네. 아저씨.”
성현은 방향을 가늠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래도 걸어가야 할 거 같네.’
왕복 2차선 도로와 왕복 6차선 도로가 만나는 사거리다. 사거리를 기준으로 사방은 차량들로 서로 물리고 물려 넘쳐났고 틈 없이 막고 있었다.
차량을 이동수단으로 삼기가 힘들어졌다.
구어어.
멀찌감치 좀비의 괴성이 들렸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마음가짐이 틀려진 탓이었다.
이미 기백의 좀비를 사냥했고, 언제 어느 때든 나타날 수 있다는 준비된 자세에서 기인한 평정심이었다.
“좀비겠죠?”
“그래. 차량 위로 올라가자. 차량 사이사이에도 좀비가 나올 수도 있으니.”
탓.
성현이 먼저 근처 승용차 위로 올라서자 해미도 따라 올라왔다.
해미는 거기서 한 번 더 폴짝 뛰어 건너 버스 위로 올라섰다.
버스의 높이가 승용차보다 2m는 더 높았지만,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너무도 쉽게 올라섰다.
3차 전직한 근력과 민첩의 힘이었다.
“와, 우리나라에 차들이 많긴 하네요.”
해미는 높은 버스위에 올라 손날을 이마에 붙이고, 멀리까지 내다보며 말했다.
꼬리에 꼬리를 문 차량들의 행렬은 끝을 모르고 이어지고 있었다.
타탓. 부지직.
‘보기보다 부실하네.’
성현은 여러 대의 차량들을 밟고 앞으로 가다 한 고급 외제승용차의 천장을 밟고 찌그러진 강판을 탓했다.
이제 이런 물질적인 값어치에 대해 무덤덤 해하는 자신이 새롭다.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는 것 같아 만감이 교차했다.
구오오.
앞서보다 좀 더 가까워진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방향이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해미야 그쪽은 뭐 보이는 거 있어?”
“아뇨, 없어요.”
해미는 성현보다 앞서서 가다 시내버스 위에 서서 말했다.
“알았다. 내가 그리 갈게.”
쿠쿵. 쿵. 쿵.
성현은 평지를 걷듯 차량들 위를 뛰어 한달음에 버스위로 올라섰다.
확실히 시야가 넓어졌다.
성현은 왕복 6차선 도로 옆에 있는 골목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