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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멸망의 전조, 그리고 각성 (3)



사가가각.
꾹. 꾸욱.
“해미야, 뭐해?”
“아. 별거 아니에요.”
“그 칼은······?”
“헤에. 그냥 테스트에요, 테스트.”
성현은 살짝 소름이 돋았다.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애가 눈치 보면서 자신의 손목을 커다란 칼로 그어보고 허벅지를 푹푹 찌르는데 무섭지 않다면 그게 이상할일이다.
“아야야!”
‘사고 날 거 같더라.’
“힐!”
해미의 영창에 신비로운 빛이 순간 나타났고, 허벅지의 상처에 잠시 머물렀다.
“조심 좀 하지. 괜찮아?”
성현이 다가가 해미의 상처를 살핀다. 부위가 허벅지 안쪽이라 해미가 수줍은 듯 찢어진 바지를 살짝 가리며 몸을 틀었다.
“네. 괜찮아요.”
다행히 상처는 이미 아물어 출혈은 멎어있었다.
스릉.
성현은 해미가 떨어트린 검을 집어 들었다.
‘이걸로 상처를 낸 건가?’
서걱!
푸하학!
“크윽!!!”
살짝 가따 대기만 한, 검 날에 살이 움푹 파이면서 핏줄기가 뿜어졌다.
HP 막대가 빠르게 줄어들며, 순식간에 20% 이상이 증발했다.
“어머! 힐, 힐, 힐!”
해미가 놀라 급히 힐을 시전하며, 일어섰다.
해미가 다리를 강하게 찔러 겨우 작은 상처가 난 걸 보고 성현은 별생각 없이 테스트할 겸 살짝 팔에 가져다 댄 것뿐인데, 이건 너무도 다른 결과였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검의 날이 두부 자르듯 살을 파고들었다. 만일 힘주어 내려쳤다면, 그대로 잘려나갔으리라.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고, 고맙다.”
겨우 출혈이 멈추었지만, 상처가 깊어 통증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시선을 들어 HP를 다시 확인하니 해미의 힐로 인해 거의 회복되어 있었다.
“에구구.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충전 돼요. 많이 아파요?”
“잘못했으면 팔이 잘릴 뻔했네. 덕분에 살았다. HP 거의 회복했으니 이제 더 안 해줘도 괜찮아.”
해미의 힐 스킬은 30초에 하나씩 충전이 가능했고, 5회까지 충전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해미는 걱정이 되는지 이후 충전되는 힐을 한 번 더 사용하고, ‘나 잘했죠?’라는 표정을 지으며 싱긋이 웃었다.
“해미야. 확인 좀 하게 스텟 수치 좀 불러볼래.”
“네. 잠시만요. 근력이 33, 민첩 37······.”
“자, 잠깐만 너 수치가 왜 이렇게 높아?”
성현은 해미의 스텟을 듣고 놀라 말을 끊었다.
“아. 이거요 저 3차 전직한 거는 그대로 적용되어서 전직 효과로 뻥튀기된 수치에요.”
성현은 그제야 무릎을 쳤다.
해미는 힐러 계열이라 기본 스텟이 낮지만, 전직을 거듭할 때마다 모든 스텟이 늘어나. 3차 전직을 한 지금은 무려 모든 스텟에 +30이 붙어 있었다.
“그, 그래 그럼 계속 불러볼래.”
“아 그리고 내성 32, 마력 45, 체력 36 이예요.”
의혹은 풀렸다.
내성이라는 스텟은 육체의 내구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스텟이다.

박성현
레벨 : 1 (EXP 0 %)
직업 : 무기 전문가 [1차 전직]
근력 12 (+10) → 22
민첩 9 (+10) → 19
내성 9 (+10) → 19
마력 5 (+10) → 15
체력 14 (+10) → 24
보너스 스텟 : 0

성현도 1차 전직은 유효해 모든 스텟 +10이 되었지만 3차 전직한 해미에 비교하면 초라한 수치다.
자신은 딜러계열이라 버퍼계열인 해미보다 기본 스텟이 마력을 제외하고는 모두 높은 수치다.
그럼에도 내성은 19 해미의 내성수치는 무려 32였다. 숫자상으로는 2배가 안 되지만, 기본 효율은 3배가 넘었다.
스텟은 10단위를 기준으로 능력이 대폭 상승한다. 앞자리가 바뀔 때마다 거의 1.5배씩 능력치가 높아진다고 보면 된다.
‘일대일로 붙으면 내가 지겠지?’
100% 확률로.
어느 정도 각자의 능력치를 확인하고 둘은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했다.
“일단 우리 능력은 최대한 감추는 방향으로 갈 거야. 다만 위험하면 아끼지 않고 쓰는 걸로 하고.”
“넵, 저도 찬성-! 근데 정말 능력을 가지게 된 사람이 아저씨랑 저 우리 둘뿐일까요?”
“섣부른 생각일 수도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특수한 경우야. 우리 같은 사람은 없다고 보는 게 맞아.”
성현은 해미에게 팔찌에 대한 부분은 빼고 알려줬다. 자신도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보니 이거 해미처럼 다른 사람들도 특성 부여가 가능하려나?’
확신은 못하지만, 이미 한번 가능했던 일이 두 번이라고 되지 말란 법은 없었다.
성현은 팔에 차고 있는 팔찌를 살며시 만졌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괜찮겠죠?”
성현은 해미의 말을 듣고 가만히 턱에 손을 괴었다.
“지금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우리가 살았으니 가능성이 높겠지만, 언제나 최악도 생각해야 한다.”
“네에······.”
왠지 해미가 기운이 없어 보인다.
“힘내자, 해미야.”
무슨 걱정인지 대충 짐작은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서 들추어낼 필요는 없었다.
그런 해미가 안쓰러워 지긋이 바라봤다.
“아저씨 배고프죠. 제가 맛있는 김치찌개 해드릴게요.”
어찌 보면 참 배려가 깊은 아이다.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을 생각해 밝은 척을 한다. 그런 모습이 더욱 아프게 보이는 성현이었다.
“그럼 어디 솜씨 좀 보자.”
둘은 오붓하게 앉아 만찬 아닌 만찬을 즐겼다.
김치찌개에 짜장을 곁들인 밥을 먹고, 통조림을 까서 파인애플로 후식 삼아 푸짐하게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 성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여기서 계속 있을 순 없겠지. 10시라. 오늘은 늦었으니······.’
사실 당분간 지낼 생각까지 했지만, 밖이 너무 궁금했다.
그리고 특성을 각성하고 얻은 능력은 더 이상 이곳에 있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들어 줬다.
“내일은 밖으로 나갈 생각이니 오늘은 푹 쉬어 둬라.”
“네. 아저씨도 쉬세요.”
성현은 해미에게 쉬도록 하고 모포 하나를 더 덮어 주었다.
게이머 특성을 얻고 특별히 추위를 타지 않겠지만, 아끼는 마음에 절로 나오는 행동이었다.
“어디 보자. 어떻게 해야 하나?”
성현은 조립식 패널 너머 산처럼 쌓여 있는 물건들을 바라보고 섰다.
‘게이머로 각성했다지만 충분하진 않아. 만일 밖이 그 모양 그 꼴이라면 공권력이든 뭐든 정상적인 게 없을 거다. 무법지대겠지··· 뭐, 특별히 해미가 위험할 것 같지는 않지만.’
지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은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가 이야기한 세기말의 한 장면 같았다.
성현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해미는 그새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그래! 어차피 고민할 것도 사실 없네.’
마음을 굳혔다.
덜컹.
이미 열어두었던 뚜껑을 걷어내자 갓 공장에서 나온듯한 K2c1이 검은 광택을 뽐내며, 들어있었다.
K2c1은 K2의 개량형으로 플랫탑 리시버와 핸드가드, 레일 시스템, 길이 조절식 개머리판을 업그레이드 한 신형소총이다.
지그재그로 한 박스당 열 자루의 총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처척.
성현은 한 자루를 꺼내어 개머리판을 펼치고 어깨에 견착해 ‘서서쏴’ 자세를 잡아봤다.
철컥. 처얼컥.
노리쇠를 후퇴하고 걸림이 없는지 천천히 확인했다.
‘깨끗하다.’
감회가 새롭다.
현역 이후 처음 잡아보는 K2였다. 특전부사관 시절엔 벨기에제 SCAL를 사용했지만, 사용 안 해본 총화기가 드물 정도였다. 그중 K2도 실탄사격을 해봤다.
비록 그 당시 자신이 사용한 것은 구형이고 지금은 K2c1신형이지만 오십보백보였다.
‘이놈 하나만 해도 이리 든든한데.’
묵직한 느낌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창고의 기능도 게임하고 다를 게 없겠지? 싹 다 챙겨가자!’
성현은 천정까지 쌓여있는 상자 중 하나를 캐릭터 창고에 넣고, 같은 상자 하나를 더 넣었다.
‘뭐야, 왜 안 겹쳐져?’
창고에 넣은 상자와 같은 상자임에도 겹쳐서 들어가지 않고, 별도의 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건 그대로 겹쳐지는데······.’
앞서 꺼내 논 K2c1은 아무런 문제 없이 창고에 같은 칸에 겹쳐졌다.
그리고 몇 자루 더 넣어 보니 칸의 카운트가 늘어나고 정상적으로 들어갔음을 알게 했다.
‘흐음··· 이렇게는 된다는 건데 어떤 제한이 있는 건가?’
캐릭터의 창고는 가로세로 10*10 100칸으로 동일한 품목에 한해서 한 칸에 9,999개까지 수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박스단위로는 입고가 되지 않았고, 정확한 기준을 확인하기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아저씨, 뭐해요?”
해미가 눈을 비비며, 다가왔다.
“미안. 시끄러워서 깼니?”
“괜찮아요. 사실 그리 피곤하지는 않아요. 제가 도와드려요?”
“괜찮아. 무겁고 힘들······.”
뿌지직. 덜컹.
해미가 한 손으로 박스를 내리고 원래부터 열려진 뚜껑을 열 듯 나무 상자를 개폐했다.
“이거 하나도 안 무거운데요.”
“그, 그렇지. 아하하.”
성현도 그리 무겁지는 않았지만, 해미처럼 할 자신은 없었다.
괜히 무안해져 크게 웃었다.
뿌직 턱. 뿌직 턱.
기계가 따로 없다.
성현은 해미가 넘겨주는 총기를 받아내기가 바쁠 지경이었다.
“이제 끝이 보이는구나.”
어느덧 방대하던 물자들이 줄어들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성현의 창고에 모두 입고시켰고, 일부만 해미의 창고에 수납했다.

[ 창 고 ]
K2c1 자동소총 (499)
K3 경기관총 (20)
K6 중기관총 (10)
K201 유탄발사기 (50)
KM181 60m박격포 (10)
.
.
<79/100>

이외 엄청난 양의 각종 탄약과 수류탄을 수납했다.
수류탄은 숫자도 숫자지만 그 종류가 상당했다.
비살상용인 KM-8연막탄, K409 섬광탄, K-MK18 조명수류탄 3종.
살상용인 K413 파편 수류탄 이놈은 살상반경이 무려 15m나 된다. 미제 M67보다 무게나 크기가 작으면서도 월등한 화력을 가진 놈이었다.
K-M14 소이수류탄, 2200도의 고열을 내뿜어 0.5인치(1.27㎝)의 금속판을 삽시간에 녹여버리는 괴물이다. 그 지속 시간 또한 35초로 사람은 뼈조차 남기지 않은 무시무시한 수류탄이다.
이밖에 경량화 수류탄도 일천여 개가 있었다. 살상력이 조금 낮지만 휴대량이 증가하고 투척 거리도 긴 수류탄이었다.
이밖에도 총화기에 부착하는 적외선 스코프, 핸드가드, 소염기, 소음기 등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복류와 숙영 도구 등을 챙겼다.
‘다행히 칸이 모자라지는 않겠다.’
창고 100칸 중 79칸을 사용하고, 아직 21칸의 여유가 있었다.
밖에서 가져온 배낭을 챙겨 넣어도 창고는 아직 여유로웠다.
작은 것 하나 버리고 가기엔 쓰지 않더라도 아깝다는 게 성현의 생각이었다.
“장비는 다 넣었고, 혹시 모르니 탄약은 수작업으로 좀 채워 넣자.”
사실 탄창에 총알을 장기간 삽탄해 놓으면 스프링에 문제가 생겨 정작 전투 시에는 불량이 많이 발생해서, 보통 전투 직전에 챙겨 넣는 게 상식이다.
“어차피 캐릭터 창고의 물건은 넣을 당시의 모습으로 변함이 없으니 문제없다.”
성현이 시험 삼아 뜨거운 물이 담긴 통을 창고에 넣고 몇 시간 후에 확인했지만, 여전히 금방 끓인 듯 뜨거웠다. 생각했던 결과를 얻은 것이다.
노가다의 시작이었다.
틱틱틱틱.
“어어, 해미야 숫자 세면서 넣어. 이미 다 넣은 거 같은데.”
성현은 해미가 도와준다며, 총알을 탄창에 삽입하는 모습을 보다 제지했다.
어지간한 힘이 여야지 혹여나 손가락 힘에 짓눌려 사고가 생길 수 있었다.
“아, 어쩐지 총알이 휘더라고요.”
탕!
“어머나!”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탄피만 손에 쥐고 해미가 앉은 채로 펄쩍 뛰었다.
그리고 탄피가 뜨거운지 냅다 던지고 ‘호호’ 분다.
‘내성이 있어도 저건 많이 뜨거운가 보네.’
“······아 나는 그만해야겠다.”
성현의 눈치를 보던 해미가 먼 산을 보며, 기지개를 켜고 일어선다.
주르륵.
“해미야··· 치료는 해주고 가야지.”
이제는 해미가 진짜 좀 무서워지려 한다.
성현은 놀란 가슴을 추스르고 최대한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그나마 내성 스텟의 영향으로 관통상 같은 치명상은 입지 않았다. 군복 상의를 찢고 팔뚝에 크지 않은 상처를 남겼다.
“아고고. 미안해요···. 힐. 힐.”
“그,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래 이젠 좀 쉬어라. 다 넣을 거는 아니라 얼마 안 걸려.”
“헤에. 그럼 아저씨도 빨리 쉬세요.”
성현의 속도 모르고 해미는 해맑게 웃으며 군용 라꾸라꾸에 ‘쏙’하고 몸을 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