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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극의 탑
20화

첫 번째 관문 1

며칠이 지나갔다.
그동안 유리 파티의 바벨탑 탐색은 꽤나 진행이 되어 있었다. 바벨탑과 라비린토스의 면적 차이를 생각해 볼 때, 조금만 더 나아가면 ‘관문‘에 도달하지 않을까 추측될 정도까지 깊숙이 들어온 것이다.
“우오오오오!!”
괴성을 지르며 베오가 시전한 <광격>이 중형급 몬스터, <환몽의 사제>의 몸에 꽂히며 붉은 이펙트를 튕겼다.
레벨 24∼26의 이 마법사형 몬스터는 물과 빛 속성의 마법 공격을 가하는 본체와, 좌우측에서 보조 마법과 회복, 또는 단검에 의한 물리 공격을 가하는 수습 사제로 이루어져 있는 몬스터였다.
로브라는 장비 특성상 <환몽의 수호기사>보다 방어력은 낮지만, 여러 개의 물의 창을 소환하여 내리꽂거나 자가 회복을 하는 등 꽤나 까다로운 패턴을 보유하고 있었다.
붉은 호를 그리며 휘둘러진 베오의 <광격>이 <환몽의 사제>의 사제복을 찢어발기며 총 20%에 가까운 HP를 앗아갔다. 그런 후, 등 뒤에서 나타난 유진의 <스파이럴 피어싱>이 사제의 몸을 꿰뚫었다.
“또 한 놈이 그쪽으로 간다! 현성이 형!”
“알았어!”
베오가 소리쳤다. <환몽의 사제>의 가장 까다로운 점은 공격 사거리가 긴 주제에 숫자가 많아, 전투 중에 다른 <환몽의 사제>를 건드릴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점이었다. 즉, 전투 중에 의도치 않게 주변의 다른 <환몽의 사제>들을 끌어들일 확률이 높았다.
베오의 외침에 현성은 곧바로 수정과 유리 쪽으로 달렸다. 전위직과는 달리 <프리스트>인 수정과 <메이지>인 유리는 생존성이 낮다. 돌발 상황 시에 최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신의 정원을…….」
<환몽의 사제>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은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음색이지만, 현성에게는 칠판을 긁는 소리보다도 시끄럽게 들렸다.
“시끄러워!”
힘차게 땅을 박찬 현성의 몸이 5m 안쪽까지 접근하자 <환몽의 사제>의 손이 움직였다. 마치 벌레를 쫓아내려는 듯한 손짓. 그 손짓이 신호, 혹은 주문이라도 되는 듯 허공에서 물빛의 창 일곱 자루가 나타나더니, 현성을 향해 쏘아졌다.
현성은 푸른빛이 도는 칼날을 가진 아름다운 검을 쥐고 회피 스킬, <공중제비>로 그 모든 창날을 회피하며 순식간에 <환몽의 사제>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환몽의 영검>을 쥔 손에 힘을 넣어 강력한 종베기를 날렸다.

* * *

“으아아, 지쳤다…….”
베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금 전의 전투는 확실히 힘들었다. 한 마리, 한 마리를 상대하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연달아 다른 <환몽의 사제>들을 자극해 버리게 된 것이었다.
“다섯 마리나 달라붙을 줄이야……. 이번엔 진짜 위험했어…….”
유리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온 얼굴과 머리가 땀에 젖은 ORP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현성 형님 없었으면 어쩔 뻔했수? 우리 다 죽었을지도 모르우.”
“에이……. 그 정도는 아니야.”
“겸양 떨지 마슈, 형님. 형님이 우릴 다 살렸으니.”
ORP는 여전히 갈증이 도는지 다시 수통에 입을 갖다 댔다. 현성은 민망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지만, 더 이상의 반박은 하지 않았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환몽의 사제> 다섯 마리가 한꺼번에 달라붙었을 때, 현성은 혼자서 두 마리를 잡아두고 있었기에 나머지 파티원들이 화력을 모아 세 마리를 간신히 처치할 수 있었다.
아무리 전투 중 생존에 유리하고 유격대로서의 가치가 높은 <글래디에이터>라지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글래디에이터>는 그들이 아는 한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솔직히, 이곳에 있는 모두가 현성의 집단전에서의 성장을 놀라워하고 있었다.
베오는 잠시 중갑을 해제하고 손부채질을 하며 마찬가지로 땀에 젖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힘들어 보이는 그 표정에 픽, 웃음이 절로 나왔다.
“현성이 형에 비해 저 바보는……. 말을 말자. 나 오늘 진짜 죽을 뻔했어.”
“쿨 돌아가고 있었다고! 네가 너무 처 맞는 거라고!”
“네∼ 네∼ 알겠습니다, 힐러님. 그러니까 다음에는 풀 피한테 힐 던져 주지 마시고요.”
“캬악!”
티격태격하는 수정과 베오를 보며 현성은 미소를 지었다. 지친 상태에서도 지친 기색을 내보이지 않고 오히려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도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현재 자신의 레벨은 24, 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 4레벨 높아져 있는 상태였다. 현재의 현성이라면 중형 클래스 몬스터를 1:1로 여유롭게 쓰러뜨릴 수 있었다.
스펙도, 기량도 높아진 덕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환몽의 수호기사>나 <환몽의 사제>의 패턴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파티에서 1:1로 중형 클래스 몬스터를 쓰러뜨릴 수 있는 것은 현성뿐이기에 주변 몬스터를 자극할 가능성이 높은 <환몽의 사제>와의 싸움에서, 현성은 주역 대미지 딜러보다는 주변에서 다가오는 몬스터를 상대하거나 시간을 끄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사실, 그것이 파티에서 <글래디에이터>가 하는 역할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이기는 했다.
바벨탑의 기둥에 조그마한 몸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던 유리는 수통을 꺼내 물을 몇 모금 목구멍 너머로 넘겼다. 시원한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며 몸을 식혀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후에 주위를 보았다.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유리는 애써 힘을 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리 체력이 강하다지만, 거대한 무구를 휘두르며 직접 발로 뛰는 전위직이 가만히 서서 마법을 써 대는 후위직보다 훨씬 지칠 것이다. 후위직인 자신이 지친 기색을 보일 수는 없다.
“얘들아, 조금만 더 들어가 보고 오늘 끝내자.”
“에에∼? 더 들어간다고?”
“언니∼! 더 들어가면 진짜 뭐가 있을지 몰라!”
베오와 수정으로부터 항의가 빗발쳤다. 유리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연속되는 전투는 수치상의 ST(스태미나)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피로를 유발한다. 오늘 그녀의 파티원들은 충분히 힘겹게 싸웠다. 그렇기 때문에 유리는 살짝 미안함이 담긴 미소를 보였다.
“아직 세 시밖에 안 됐잖아. 조금만 더 힘내보자.”
유리의 말에 파티원들 모두가 조용해지며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가장 먼저 ORP가 들고 있던 검을 땅에 짚고 몸을 일으켰다.
“아―아, 그렇게 말하면 거절을 못하잖수, 누님.”
베오도 앉아 있는 그 상태로 할버드를 땅에 땅땅, 두드리며 투덜거렸다.
“저런 얼굴로 말하면 거절하는 게 미안해진다고…….”
유진은 창을 짚고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고, 수정도 볼멘소리를 하며 결국엔 몸을 일으켰다. 그때까지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현성에게 시선이 쏠리자, 현성은 당연하다는 듯이 한마디를 꺼냈다.
“나야 뭐…… 누나가 가면 가는 거지.”
“에이∼ 그게 뭐야, 오빠!”
수정의 타박이 들어왔다. 파티원들을 둘러본 유리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마도서를 들었다.
“그럼, 조금만 더 가보자!”

* * *

그 후로는 이상할 정도로 몬스터의 출몰이 없었다.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유리만은 침착했다. 나름 짐작이 가는 바가 있던 것이다.
그리고 약 40분 정도 걸었을 때, 파티원들은 모두 납득할 수 있었다. 왜 몬스터가 없었는지, 그리고 유리가 왜 지친 자신들을 이끌고 강행군을 선택했는지.
거대한 문이었다.
금속 재질의 검푸른 색 문에는 이상한 문양이 가운데에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그 문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 살고 있던 주민이자 이곳의 주인인 ‘이브’ 인들이 세운 대신전의 ‘부활의 제단’에 있는 문양.
즉, 이브 인들의 신을 의미하는 문양이었다. 그리고 문양 주위로는 다양한 인물과 동식물이 새겨져 있었다.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바벨탑의 제1관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