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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극의 탑
19화

다시 흐르는 시간 4

위이이잉…….
현성의 몸을 희미한 흰빛이 감쌌다. 주변에 있는 파티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빛은 약 5초 정도 머물다 사라지고, 현성은 신기한 듯이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느낌 신기하네…….”
“그치? 이 세계는 뭔가 연결됐다 하면 다 느껴진다니까.”
신기한 듯이 중얼거리는 현성의 말에 유리가 밝게 되물었다. 확실히 느낌이 기묘했다. 모두와 보이지 않는 사슬로 연결되는 듯하던 파티 가입 때보다 훨씬 약하고 가늘지만, 확연히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연결 고리가 이어진 느낌이었다.
현성은 공용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러자 위치별로 멤버들이 소지한 아이템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호기심 삼아 인벤토리에 손을 넣어보자 정말로 꺼낼 수 있을 것처럼 잡혔다. 내용물들을 살펴보니 중요한 아이템들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속옷은 개인 인벤토리에 넣어두니까 찾아도 소용없다?”
“그걸 왜 찾아…….”
장난스럽게 뾰로통한 얼굴을 하며 유리가 농담을 던졌다. 물론 현성은 전혀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사실 그에게 여성 속옷에 대한 성적 인식은 없는 것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년가장이 되고 나서 여동생의 속옷까지 손빨래를 해온 세월이 워낙 길었던 것이다.
“……재미없네.”
“……무슨 장난인지 설명 좀 해줄 사람?”
도저히 이해를 하지 못한 현성이 주변을 둘러보며 설명을 요구했지만, 당연히 설명을 해줄 사람은 없었다.

경건한 순백의 도시 사이에 있는 이단아 중 하나, ‘악마의 휴가증’은 오늘도 붐볐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유리와 파티 멤버들은 그곳에 모여앉아서 나무로 만들어진 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고롬∼ 고롬∼ 해장은 술로 하면 되는 거라고!”
우려 섞인 현성의 물음에 베오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 대답에 현성은 어색하게 웃었다. 해장술의 결과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현성이 듣기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같은 생각인지 유리는 자못 엄격한 얼굴로 손가락 세 개를 펴며 말했다.
“안∼돼! 오늘은 세 잔 이상 금지! 내일 숙취에 쩔어도 안 챙겨줄 거니까!”
“졸면서 걷다가 기둥에 머리 박고 울먹거린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현성이, 너!”
현성의 말에 한바탕 웃음이 멤버들 사이로 번져 나갔다. 유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현성을 찌릿, 노려볼 뿐이었다. 술이 원인은 아니지만, 졸면서 걷다가 기둥에 머리를 부딪친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뭐라 변명할 수도 없었다.
“그러는 오빠는 울었잖아? 도대체 아까 왜 운 거야?”
“그러게? 공용 인벤토리가 그렇게 감동적이었나?”
이번엔 화살이 현성에게로 돌아갔다. 베오와 수정은 서로를 번갈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현성은 대답이 궁해졌다. 민망하기 때문은 아니다. 차라리 민망한 이유가 낫다. 그 이유를 아예 몰라서야 뭐라 대답할 말이 없는 것이다.
“……몰라.”
“뻥치지 말고.”
“아니, 정말로 몰라.”
현성은 곤란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무리 추궁해도 모르는 것을 대답할 순 없는 노릇이다. 현성이 다시 고개를 내젓자 흥미를 잃은 둘은 ‘쳇’ 하고 혀를 찼다. 유리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주제를 바꿔 현성에게 질문했다.
“앨리스랑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우리도 듣고 싶어요!”
유리의 질문에 고딩 둘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눈을 빛냈다. 무심한 듯하지만 유진 역시 흥미가 있는 듯 흘끔 바라보았고, ORP 역시 흥미진진한 눈빛이었다.
물론 그녀의 유명세를 모르는 현성으로서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비공식 최강이라는 말을 들은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앨리스가 그렇게 유명해?”
“유명하지. 아담에 이어서 미궁의 제2관문을 연 것도 앨리스인걸. 이런 소식, 하나도 못 들은 거야?”
그제야 현성의 뇌리에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느 한 주점에서 다음 관문을 여는 것이 아담인지, 앨리스인지 내기를 하던 사람들의 대화를, 그는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관문 개방 소식에 정신이 빼앗겨 사람 이름에는 관심이 없었고, 때문에 이후 앨리스를 만나 그녀의 이름을 듣고서도 아무 감흥이 없었다.
“유명했구나…….”
“그니까 들려줘. 되게 궁금하거든.”
유리가 눈을 빛내며 묻자 현성은 다소 민망한지 볼을 긁적였다. 그녀와의 첫 만남은 자신이 얼마나 미숙하고 바보 같았는지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망설임도 잠시. 현성은 곧 이야기를 시작했다.
레벨 10이 넘도록 스킬 연계를 쓰기는커녕 존재조차 모르던 자신, 위기에 몰린 상황과 앨리스가 자신을 구해준 것, 자신에게 ‘망각의 비약’을 외상으로 건네주고 전투법을 가르쳐 준 것까지…….
이야기를 들을수록 파티 멤버들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해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야기가 끝나고…… 다들 현성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호구…….”
유리가 맨 처음 꺼낸 말이었다. 그 말에 동조하며 파티 멤버들이 한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당했네.”
“중증인데…….”
“……호갱이슈, 형님?”
물론 현성은 그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현성을 보며 유리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러더니 허공에 인벤토리를 띄우고는 그곳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현성의 눈에도 익은 아이템이었다.
“……망각의 비약?”
“그래, LV. 2야. 이거 틸문 시 중앙 마법 조합에 가서 의뢰 하나만 해결해 주면 세 개나 준다고. 그다지 어려운 의뢰도 아니고.”
“……?!”
순간, 현성의 뇌가 정지했다. 앨리스는 분명 망각의 비약 LV. 2의 가격은 금화 40개라고 했다. 당시 짓궂은 미소를 짓던 앨리스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현성은 천천히 유리에게 물었다.
“……그거, 가격 금화 40개라고…….”
“틀린 말은 아냐. 마법 조합의 ‘외부인’에게는 금화 40개 받고 파니까. 의뢰를 해결해 주는 건 ‘조합에서 고용한 용병’이라는 뜻이라 하더라고.”
그 말을 듣고 현성은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앨리스가 저런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외상으로 파는 것을 선택했다. 한순간 ‘사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현성은 고개를 저었다. 사기를 칠 거였으면 상대가 구매할 수 있는 금액을 불러서 즉시 돈을 받는 것이 현명하다. 현성은 도저히 앨리스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걸 빌미로 친해지고 싶었던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 그에게 유리의 말이 날아와 박혔다. 현성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부정했지만 유리는 여전히 히죽히죽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잖아? 괜히 빚을 지운 다음에 붙어 다니면서 이것저것 가르쳐 주고, 매일 연락까지 하라 그러고. 딱 그건데?”
“그러고 보니 그러네? 오올∼ 현성 오빠∼!”
손뼉을 짝, 치며 수정도 유리의 추측에 동의했다. 그러고는 유리와 마찬가지로 히죽거리는 얼굴로 현성을 보았다. 현성은 말문이 막혔다. 묘하게 설득당하는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같은 여성 둘이 동조한 것이다.
말문이 막힌 현성의 표정을 보며 유리의 미소가 더더욱 짓궂어졌다. 유리는 팔꿈치로 현성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놀리듯 말했다.
“내가 볼 때는 확실하다니까? 넌 걔 어때? 저번에 한 번 봤을 때는 되게 예쁘던데.”
“어떠고 자시고…… 그런 거 아닐 거라니까. 나도 아무 생각 없고.”
“에이, 거짓말. 위기 상황에서 예쁜 아가씨가 구해주고, 정성스럽게 가르쳐 주고, 연락하라며 호감까지 보여주면…… 나라도 반하겠다!”
“그런 거 없다니까. 에…… 예쁘기는 했지만, 누나만큼은 아니었고.”
당황한 현성이 손을 내저어가며 말했다.
그 순간, 시간이 멈췄다. 장난을 치던 유리도, 히죽거리며 동조하던 수정도, 그리고 지켜보던 나머지 모두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현성만이 의문스러워하다가 곧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깨달았다. 얼굴이 순간적으로 확 달아올랐다.
솔직한 심정이기는 했다. 유리는 누가 보아도 감탄이 나올 정도의 미소녀였다. 동시에 그것을 직접 말하는 것은 굉장히 꺼려지는 외모이기도 했다. 누가 보아도 10세 내외의 소녀처럼 보일 정도로 너무나 앳된 외모인 것이다. 아무리 나이를 많게 잡아도 중학생 정도로 보였다.
얼어붙어버린 분위기 속에서 한 소녀의 웃음소리가 침묵을 깨뜨리며 터져 나왔다. 유리였다.
“풉…… 푸흐흐…… 푸흐하하하하하!”
“우와, 깬다…… 오빠, 그런 취향이었어?”
유리의 웃음을 트리거로 수정이 노골적으로 혐오하는 표정을 지으며 두 팔로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베오는 웃음을 겨우 참고 있고, ORP는 허탈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유진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엄청 깬다, 오빠…….”
수정의 경멸하는 표정도 이미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멤버들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현성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결국 베오는 더는 참지 못하고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오래 웃음을 참은 탓인지 눈에 송골송골 맺힌 눈물을 닦으며 베오가 말했다.
“아니, 유리 누나가 예쁜 건 맞는데, 그 예쁜 게 아니잖아. 킥킥킥…….”
“야, 넌 또 왜 그래, 사람 민망해지게. 예쁘긴 무슨.”
유리의 말로 다시 분위기가 싸악 얼어붙었다.
이유를 모르는 것은 이번엔 유리 혼자였다. 유리는 분위기가 얼어붙은 이유를 모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현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왠지 유리가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 왜 그래?”
“그걸 모른다는 것부터 문제가 좀 있지 않을까…….”
베오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유리는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유리의 귀에 유진의 간략한 설명이 들려왔다.
“닮았네.”
“응?”
갑자기 입을 연 유진에게 유리가 고개를 돌렸다. 유진은 술잔에 담긴 술을 홀짝, 한 모금 마시고는 현성과 유리를 보며 짧게 말했다.
“닮았다고, 두 사람.”
유진의 말에 유리와 현성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의 얼굴에 동시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나머지 셋도 어리둥절해했지만, 유진은 더 이상의 대답은 하지 않았다.

시원한 밤바람이 불었다. 날씨가 맑은 탓인지 어제보다도 많은 별들이 하늘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조금씩 동그란 모양을 찾아가는 달을 올려다보며 유리는 흘끗 자신의 옆에 서 있는 현성의 얼굴을 살폈다.
“닮았다라…….”
“뭐가?”
현성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유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게 마치 먹이를 요구하는 다람쥐를 연상시켜서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픽 웃었다.
“안 닮았어. 나랑 누나가 무슨…….”
“아니…… 아니야. 닮았어.”
“엥?”
뜬금없는 유리의 말에 이번에는 현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유리를 내려다보았다. 유리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현성을 빤히 쳐다보다가 무언가 납득한 듯이 ‘음음’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가?”
“음……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유리는 커다란 눈을 굴리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어떤 느낌이 닮았는지는 안다. 하지만 그걸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한동안 말을 고르던 유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뒤만 보고 있다는 거?”
“뭐?”
“아니, 좀 다르네. 음, 뭐라고 해야 하지…….”
유리는 다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곧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현성에 대해서 조금만 더 알고 있다면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 모르겠다. 말로 표현이 안 되네. 그냥 닮았다고 쳐.”
“뭐야, 그게?”
사실 말로도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느낌은 있었다. 아무 근거 없는 그저 감에 불과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사실. 유리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입에 담았다.
“현성아…… 혹시 말이야…… 너…….”
현성이 고개를 돌렸다. 상대의 기분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듯이 말을 거는 그녀의 모습이 왠지 어색해 보였다.
유리는 꽤 오랫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입술을 꾹 깨물며 한참 동안 망설이던 유리는 결국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손을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미안, 잊어줘.”
“뭐야? 뭔데?”
“아무것도 아냐. 피곤하다. 오늘은 일찍 자야지. 먼저 자러 갈게.”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작위적인 하품을 하며 유리는 발코니의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방 앞에 도착해 문고리를 잡은 채 유리는 문을 열지 않았다.
유진은 현성과 자신이 ‘닮았다’고 했다. 확실히 닮았다. 들을 당시에는 몰랐지만, 생각해 보니 어떤 부분이 닮았는지 알 것 같았다. 정확히는 닮았었다. 유진은 ‘그때’의 유리를 알고 있는 유리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진이 눈치챌 수 있었겠지.
“큰 사고를 당한 적 있냐고…… 어떻게 물어봐…….”
유리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현성에게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다. 속 시원히 묻지 못한 답답함에 한 번 더 한숨을 내쉰 유리는 문고리를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유진은 두 잔 마시고 취해서 뻗어 있고, 수정은 커다란 베개를 꼬옥 끌어안은 채 새근거리며 자고 있었다.
둘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며 유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조심스레 이부자리를 펴고 옆에 누운 유리는 그녀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고마웠어. 잘 자.”
감사와 사랑을 담은 한마디. 그 한마디를 남기고 유리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