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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극의 탑
12화

적과 아군 3

“무슨 똥배짱들이에요? ‘바벨탑’에서 노 듀얼 PVP라니.”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긴장된 분위기를 단번에 깨뜨릴 정도로 태평하고, 또 가벼웠다. 앨리스와 비슷한 분위기처럼 느낄 수도 있겠지만, 조금 달랐다. 앨리스에게 다소의 장난기가 있다면, 이 목소리에는 그보다 더한 천진난만함이 있었다.
현성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했다. 눈앞에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잠시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눈에 들어온 것은 다섯 명의 남녀로 이루어진 한 무리. 그중에서도 가운데에 있는 소녀였다.
윤기 나는 밤색 머리카락은 포니테일 형식으로 뒤로 묶었고, 앞머리와 옆머리를 적당한 길이로 길러 자연스럽게 늘어뜨렸다. 마치 인형처럼 얼굴은 조그맣고, 눈은 그 작은 얼굴의 절반은 차지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크고 맑았다. 코는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콧대가 있었고, 동글동글하면서도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 귀여운 인상을 주었다.
입고 있는 푸른색 봄 코트는 <메이지>용 로브를 개조한 것처럼 보였다. 앨리스가 예쁘기는 해도 평범한 범주 안에서의 미인이라면, 그녀는 어디에 있든 눈에 확 들어오는 미인이었다.
열 살쯤 더 먹는다면.
“……초등학생?”
현성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리고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녀는 겉으로만 봐서는 누가 보아도 초등학교 4~5학년생 정도의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높게 잡아도 중학생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이 실언이었다는 사실은 곧이어 들려온 폭소 덕분에 알게 되었다.
“아하하하하하! 초, 초등학생이래! 하하하하하하!”
소녀의 등 뒤에 서 있던, 큰 덩치를 풀 플레이트 아머로 감싼 소년이 터뜨린 폭소 소리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푸른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예쁘장한 소녀가 마찬가지로 배까지 잡아가며 웃음을 터뜨렸다. 놀림을 받는 대상인 자그마한 소녀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언……!”
“<라이트닝 볼트>로 지져지고 싶지 않으면 닥쳐.”
“……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거대한 살기를 내뿜으며, 겉으로는 너무나도 어리고 순수해 보이는 소녀는 싸늘하게 경고의 메시지를 날렸다. 그리고 그 경고 한 마디에 두 명은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현성은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소녀는 절대로 어리지 않다.
“그보다 두 분은 무슨 원한 관계이시기에 이렇게 죽자고 싸우실까? 여기가 바벨탑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신 건가요?”
이마에 돋은 힘줄을 지우고 소녀는 현성과 남자 쪽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그러나 소녀의 표정은 다음 순간 차갑게 식었다. 소녀의 조그마한 몸에서 차가운 적의가 피어올랐다. 소녀의 마력이 그 적의를 받아들여 주변의 온도를 급격히 하강시켜 가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소녀의 발밑에서 서리가 피어올랐다.
“잊어버렸을 리가 없겠죠. 당신이 여기 있는 목적은, 아마 PK…… 아니, 살인일 테니까.”
바벨탑에서의 모든 죽음은 진짜가 된다. 탑 밖에서의 은총 따위, 이 안에는 닿지 않는다. 그렇기에 밖에서는 단순한 PK일지라도 적어도 이 탑 안에서는 살인과 다를 바 없는 행위였다.
“아담, 당신이 탑으로 들어가기에 무슨 꿍꿍이인가 해서 따라왔더니, 노 듀얼 PVP라…… 저 사람을 포함해서, 탑에 들어온 사람들을 전부 죽이기라도 할 생각이었나요?
“음? 날 아나?”
“모를 리가요. 미궁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들 중 하나인데. 물론 악명으로.”
소녀는 적의를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놀랄 만큼 빠른 손놀림으로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마도서를 꺼내 펼쳤다. 그와 동시에 소녀의 마력이 형태를 이루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아마도 후위 공격 계열 직업, <메이지>일 것이다. 모든 직업을 통틀어 공격이라는 측면에 있어 최강이며, 그 압도적인 공격력은 수호 계열 직업 중 하나에 속하는 <몽크>인 그에게도 부담이겠지.
하지만 남자, 아담은 너무나도 태평했다. 이 상황이 위기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있는 듯이 보였다. 아담은 목을 꺾어 뼛소리를 내고는 소녀의 적의가 피어오르는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곤란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곤란한걸. 그때 누가 보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그에게서는 마치 짓궂은 장난을 치려고 하다가 들킨 소년 같은 천진한 분위기까지 느껴졌다. 오싹, 소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소녀의 마도서가 빛을 발했다. ‘에너지’로서 존재하는 그녀의 마력이 명백한 공격의 의지를 받아 번개로 화해 번쩍거렸다. 그것을 신호로 소녀의 등 뒤에 있는 그녀의 파티원들이 진형을 갖추었다.
“사람을 죽이려고까지 하다니…… 당신에게는 ‘이 세계에서의 영생’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살인마저 불사할 정도로?”
“영생……인가…….”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소녀의 말에 아담은 작게 그 말을 읊조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대답이 나왔다.
“영생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그럼…….”
“영생보다 중요한 건, 이 ‘세계’지.”
그 대답에 소녀는 말문이 막혔다. 이곳은 ‘낙원’. 아주 조금의 노력만으로도 배고픔이나 가난 따위는 겪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계다. 그것은 어쩌면 영생이라는 것보다 중요할지도 모른다. 늙고, 병들고,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는 영생을 누가 바랄까. 영생이란 것에 욕심을 내는 것은 한 가지 전제 조건이 깔려 있다. 그 세상이 행복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세계는 그 전제 조건을 충족시켜 주지는 못하지만, 그 전제 조건을 충족시켜 줄 조건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가난도, 노화도, 병마도, 죽음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겉으로 보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상향.
그것이, 현실에 절망하고 쓰러져 버린 이들의 욕망을 얼마나 부채질하는 요소일지 소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절망하는 것 외에 할 수 없는 이들에게, 이 세계에서의 삶이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일 것이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려야 한다’고 지껄이는 새끼들이 있지. 깨끗한 척, 정당한 척, 그런 여유들을 부리신단 말이야. 목적 달성에 실패하더라도 ‘난 실패했지만 깨끗했다’고, ‘가치 있는 실패’라고 자위질할 여유가 있으니 그런 소리를 지껄이지. 하지만…… 나에겐 그딴 여유는 없어서 말이야. 공교롭게도 처음부터 더러운 삶이거든.”
아담은 태연하게 그런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러고는 저벅저벅 소녀를 향해 당당히 걸어갔다. 그의 온몸에서 살기가 피어오르며 시퍼런 안광으로 소녀를 쏘아보았다.
“물론 나도 내키지는 않아. 하지만…… 어쩔 수 있나……. 내게 남은 것은, 이 세계뿐인데…….”
남자의 눈에 순간적으로 서글픔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강렬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남자의 살기에 소녀의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비켜.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도 적으로 간주한다.”
싸움은 피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소녀의 마도서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그 힘을 더했다. 소녀의 주변을 번쩍거리던 번개는 이미 표적을 조준하는 화살이 되어 있었다.
소녀의 옆, 즉 파티의 선두에 서 있던 <가디언> 청년이 방패를 앞으로 내밀어 파티원을 감싸는 구도로 움직였다. <프리스트> 소녀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고, <스피어맨> 아가씨와 <버서커> 소년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당신 혼자서 저희 모두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못 이길 것 있냐? 싸움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닌데. 이 세계에서는 더.”
“허세 부리지 마세요. 물론 싸움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니지만, 완성된 파티를 혼자서 이길 만큼 당신이 압도적인 것도 아니니까.”
“글쎄…… 그건 어떨까…….”
아담과 소녀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일촉즉발의 상황. 이 상황은 마치 한계까지 부풀어 버린 풍선과도 같았다. 바늘 하나라도 닿으면 터져 버릴 극단적인 대치. 그 대치 상황 속, 소녀의 진영에서 검은 섬광이 뛰쳐나왔다.
그것은 섬광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너무나 빠른 속도 탓에 형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현성의 눈에도 그것은 섬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아까 보여준 아담의 속도조차 장난처럼 보였다.
아담이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코앞까지 창날이 쇄도해 있었다. 아담은 급히 <호신강기>를 발동시켰다. 하지만 창날은 눈부신 섬광을 흩뿌리며 무형의 갑옷을 뚫어버리고 손쉽게 아담의 몸을 관통했다.
“……!”
아담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시야에는 한 여성이 창을 빙글 돌리며 거두는 모습이 보였다. <호신강기>로 인해 극한까지 단련된 방어력은 아무 소용 없었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HP의 40%가 깎였다. 아직까지도 날카로운 통증이 남아 있는 가슴팍을 감싸며 아담이 혀를 찼다.
“젠장…… <스피어맨>이냐.”
창을 든 여성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스피어맨>의 최대 특징은 그 어떠한 직업도 따라올 수 없는 압도적인 기동력과 적의 방어력을 70%까지 관통하는 직업 전용 패시브 스킬이다. <막기> 스킬 종류로 방어하는 <가디언>이나 <팔라딘>과는 달리 순간적으로 방어력을 극한까지 끌어 올려 방어하는 <몽크>로서는 천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물러나.”
여성이 차갑게 말했다. 그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물러나지 않는다면 죽이겠다는.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대에게는 충분한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여성의 차갑고 냉정한 태도는 그 위협의 신뢰도를 더욱 높였다.
잠시 상대와 대치하던 아담은 곧 몸에 가득하던 전의를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옷을 툭툭 털고 머리를 긁적이며 너무나도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니들이 이겼다. <스피어맨>이 있는 파티를 이길 자신은 없어. 운 좋구만, 너.”
너무나도 깨끗한 패배 인정이었다. 그 말에는 일말의 패배감도, 굴욕감도 느껴지지 않는 시원함이 있었다. 깨끗한 남자의 태도에 현성이 어리둥절해질 정도였다. 남자는 그런 현성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곧 소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난 싸움을 관뒀는데, 너희들은? 계속 싸우겠다면 뭐…… 난 좆 빠지게 튀는 방법밖에는 없는데.”
“저희도 됐어요. 당신이 물러나는데 굳이 싸울 이유도 없고. 바벨탑에서의 노 듀얼 PVP도 솔직히 껄끄럽고.”
소녀는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소녀 역시 현성이 놀랄 정도로 깨끗한 태도로 적의를 거둬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바벨탑 안에서 노 듀얼 PVP를 한다는 것 자체가 서로를 죽이려는 진흙탕 같은 싸움을 의미한다. 일단 시작한 이상, 서로가 빠져나올 수 없는 늪 속에 빠져들 뿐이다.
노 듀얼 PVP란, 듀얼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은 길거리 PVP를 의미한다. 듀얼 시스템을 사용하면 HP가 0이 되지 않도록 보호받으며 먼저 HP가 1로 떨어진 사람이 패배한다.
패자와 승자는 결착이 나는 것과 동시에 5분간 무적 상태, 전투 행위 금지 상태로 보호를 받으므로, 듀얼 참가자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 무한한 부활을 보장하는 여느 지역과 달리 죽음이 진짜가 되는 이 탑에서 노 듀얼 PVP는, 말 그대로 목숨을 건 데스 매치,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인 것이다. 소녀는 그녀 자신과 소중한 팀원들을 그러한 살육전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현성 쪽으로 뒤돌아봤다. 어찌 되었든 아담과 먼저 싸우던 사람은 현성이다. 자신들은 난입자다. 물론 고맙다는 인사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이 싸움의 종결에 대해서는 그의 입장도 중요하다고,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쪽도 불만 없죠?”
현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했다. 그러자 소녀는 싱긋 미소 지으며 손뼉을 짝, 쳤다.
“자, 그럼 싸움 끝! 거기 아저씨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앞으로는 탑을 올라가는 사람을 습격하지 마세요.”
“습격하면?”
“HP를 1로 만들어서 궁둥이를 걷어차 줄 테니까요.”
다소 어린애다운 대답에 아담은 피식, 웃었다. 아까의 살기와 긴장감은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현성은 그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는 ‘내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도, ‘수단 방법을 가릴 여유 따윈 없다’고도 했다. 그에게도 마음에 드는 방식은 아니겠지. 어쩌면 순순히 물러난 것은, 그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을 누군가가 말려주길 바란 탓인지도 몰랐다.
‘물론 불리해져서 튀는 것일 가능성이 높지만…….’
너무나도 당당하게 물러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법도 하지만, 어쨌든 그는 불리한 상황임은 확실하다. 어떻게 보면 도망이다. 너무나 당당한 도망.
현성이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쯤, 소녀가 현성을 향해 걸어와 그 앞에 섰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로 작았다. 현성은 자신의 키가 결코 크지 않다고 자각하고 있지만, 자신보다 30㎝ 가까이 눈높이가 낮은 것 같았다.
주먹만 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조그맣고 귀여운 얼굴에 큰 눈이 반짝거리며 자신을 올려다보자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쪽도 바벨탑을 올라가는 중이죠?”
소녀가 질문했다. 은방울이 굴러가는 듯한 미성까지는 아니지만, 충분히 호감을 살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다소 아이다운 맑은 느낌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현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기대한 대로의 답변이었는지 소녀가 생긋 하고 웃었다.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또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조금―이라고 하기에는 좀 많이―어려 보이는 외모이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굉장한 미소녀다.
“잘됐네요! 혹시 같이 다니실래요? 저희 파티에 한 자리가 비거든요. 들어오시면 딱 맞을 것 같은데.”
소녀가 박수를 짝, 하고 쳤다. 그러더니 현성의 팔을 붙잡고서, 그 크고 맑은 눈망울을 빛내며 제안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