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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극의 탑
11화

적과 아군 2

단 한 번의 공방으로 다리가 풀렸다. 육체적인 고통이 아닌, 정신적인 무력감이 몸을 지배했다. 기도가 막힌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좌절감을, 절망감을 떨쳐 내고 현성은 숨을 멈췄다. 쉬지 못할 숨이라면 쉬지 않는 편이 낫다.
현성은 재빨리 땅을 박차 거리를 벌렸다. 남자의 이동 기술은 빠르기는 하지만 대응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 오히려 근접할수록 대응하기 어려워진다.
의외로 남자는 현성을 추격하지 않았다. 그가 거리를 벌리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겨우 숨을 돌린 현성은 상대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그에게는 현성의 공격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 감촉도 뒤늦게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몬스터를 사냥할 때 직접 베는 감촉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마치 커다란 바위를 내려치는 것처럼 손이 저려왔다. 현성은 모르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수호 계열 직업인 <몽크>의 방어 스킬, <호신강기>의 효과였다.
<가디언>의 <방패 막기> 스킬과는 달리 대미지를 무효화하지는 못하지만, 방어력을 극한까지 끌어 올려 대부분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스킬이었다. 하지만 <몽크>를 본 적도, 관련 지식도 없는 현성이 알 리 없었다.
남자가 다시금 <축지>로 돌진해 왔다.
이제 두 번째. 이번엔 보였다. 사고의 가속이 이루어졌다. 남자가 오른 주먹을 쥔다. 그렇다면 다음 공격은 오른쪽 주먹으로 하는 공격. 빠르다. 하지만 반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자세로 보아 이번에 올 공격은 아마 어퍼, 아니면 스트레이트.
“……!”
턱을 노리고 날아오는 어퍼를 피했다. 상대의 얼굴에 당혹감이 묻어 나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느려지지는 않았다. 남자의 몸이 회전했다. 사고의 가속은 그대로였다.
현성의 눈이 남자의 발의 움직임, 팔의 움직임 하나까지 전부 읽어갔다. 상대는 <몽크>. 두 팔만이 아닌, 신체 모든 부위를 무기로 사용하는 직업이다.
회전의 축은 오른쪽 다리. 두 팔이 아니라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가 있다. 몸을 회전시키고 있으니 원심력을 이용한 돌려차기다. 목표는 여전히 턱.
생각을 끝낸 현성이 몸을 아래로 숙였다. 위협적인 바람 소리를 내며 현성의 머리 위로 다리가 휘둘러졌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이번이 진짜였다. 남자가 쥐고 있는 오른 주먹이 붉은빛을 띠고 있다. 스킬 공격이었다. 스킬명은 불명.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그것이 공격이라는 것만 알고 있다면.
초고속으로 주먹이 내질러진다. 하지만 현성의 눈에는 공격의 궤도가 보였다.
눈을 크게 뜨고, 현성이 종이 한 장 차이로 공격을 비껴냈다.
그와 동시에 검이 휘둘러졌다. 사용되는 스킬은 <초승달 베기>. 현성의 검이 남자의 몸을 깊숙이 갈랐다.
이번엔 느낌이 왔다. 강철을 두드리는 감촉이 아닌, 가죽을 뚫고 뼈를 끊는 느낌.
왼손이 뻗어왔다. 권(拳)이 아닌 장(掌)이다. 하지만 이번엔 피할 수 없다. 공격의 대가였다. 스킬 시전 중에는 몸을 크게 틀 수 없다. 너무 깊이 파고들어 회피 스킬도 발동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현성이 발로 땅을 살짝 차서 몸을 띄웠다. 일격을 허용하는 대신, 상대의 공격을 역이용해 거리를 벌리겠다는 심산이었다.
파앙!
충격파와 함께 현성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남자가 사용한 <팔괘장>의 효과였다. 약 5m 정도 넉백된 현성은 곧바로 자세를 다잡고 검을 쥐었다.
남자의 오른쪽 어깻죽지부터 왼쪽 허리까지, 대각선으로 베인 흔적이 보였다. 이번엔 확실히 들어갔다.
“…….”
남자는 말없이 현성을 노려보았다. 반면 현성은 방금 전까지의 감각에 당혹해하고 있었다. 사고가 미친 듯이 가속되어 세계 전체가 느려진 느낌이었다.
다시 격돌하면 그 감각도 돌아올까?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소득은 있었다. 확실한 것 하나. 남자는 공격할 때 그 방어 스킬을 쓸 수 없다. 그리고 그만한 스킬에 아무런 대가가 없을 리 없다.
현성의 발이 땅을 박찼다. 이제까지 후퇴하고 물러나기만 하던 현성의 돌진에 남자의 표정이 변했다. 남자가 오른 주먹을 뒤로 뺐다. 양주먹에 흰빛이 휩싸였다.
현성은 <초승달 베기>, 남자는 정체불명의 연격 스킬을 발동시켰다. 현성의 검이 남자의 어깻죽지를 갈랐다. 남자의 주먹이 현성의 몸을 난타했다. 총 8연격 스킬, <연풍>. 현성의 HP가 한순간에 40%나 감소했다. 남은 HP는 20%.
하지만 상관없다. 이미 남자는 그의 사정권 안에 들어왔다. <초승달 베기>는 시동기일 뿐, 현성은 이미 다음 스킬을 연계하여, <연풍>을 맞으면서도 5연격을 남자의 몸에 꽂아 넣었다.
<연풍>이 끝나고도 현성의 연격은 이어졌다. 깎여 나가는 HP에 당황한 남자가 두 팔을 X자로 교차시켰다. 뼈와 살을 베는 느낌이 사라지고, 다시금 금속을 때리는 느낌이 두 팔을 통해 전해졌다.
금속음이 끝없이 울렸다. 남자의 얼굴에 당혹이 피어올랐다. 연격이 끝나지 않았다. 20연격, 30연격…… 아니, 그 이상. 공격이 끝없이 쏟아졌다. 레벨 20때 습득 가능한 <글래디에이터>의 연격 계열 스킬, <노도>였다.
MP가 허락하는 한, <노도>의 성난 파도와도 같은 공격은 계속된다. <노도>의 연격, <호신강기>의 방어. 누가 더 오래 버틸 것인가.
“큭……!”
남자의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그는 X자로 교차시킨 두 팔을 풀고 몸을 돌리더니, 어깨를 앞쪽으로 세우며 그대로 몸을 부딪쳐 왔다. <몽크>의 방어 겸 반격 스킬, <철산고>였다.
하지만 방어할 필요는 없다. 현성은 이 순간만을 노렸다. 적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반격을 시도하는 그 시점을. 공격의 위력이 높다 한들 한 번에 20%를 깎지는 못할 것이다.
그 알 수 없는 직감만을 믿고 현성은 곧바로 다음 스킬로 연계했다. <노도>의 최대 장점, 그것은 우수한 연타 스킬임에도 불구하고 스킬 연계를 끝맺는 최종 스킬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자의 <철산고>가 현성의 몸을 타격했다. 동시에 현성의 검이 남자의 오른쪽 허벅지를 깊게 갈랐다. <철산고>의 넉백 효과로 현성의 몸이 튕겨져 나가고, 10m 정도 날아가 나동그라졌다.
“5%…… 간당간당하네.”
현성이 고통스러운 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리곤 몸을 일으켰다. 몸 구석구석이 부서진 것처럼 저려왔다. 남은 HP가 5%도 남지 않았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손해는 아니지.”
현성은 상대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바닥에 쓰러진 채 두 팔로 몸을 지탱하며 현성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허벅지는 깊은 검상으로 인해 피투성이였다.
남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자신의 허벅지를 바라보았다. 이 세계에서도 상처를 입으면 피가 흐르긴 한다. 하지만 그 양은 적고, 순식간에 지혈이 이루어져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상처는 달랐다. 이 세계에서 흐르는 피라고 생각하기에는 그 양이 너무나도 많고, 지금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글래디에이터>의 스킬, <힘줄 가르기>는 피격 부위에 상태 이상 ‘출혈’과 ‘부위 손실’을 입힌다. 앞으로 약 2분간 남자는 오른 다리를 쓸 수 없다.
남자는 <초승달 베기>와 <노도> 5타, 그리고 <힘줄 가르기>를 허용했다. 아마 HP가 20~30% 정도는 감소했을 것이라고 현성은 추측했다. 남은 HP는 약 70∼80% 사이일 것이다. 현성의 HP 잔량은 5%. 하지만 남자에게 2분간 거동은커녕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디버프를 걸었다. 아마 그 영향력은 전투력 상실.
“디버프인가……. 그러고 보니 <글래디에이터>는 이런 스킬들이 많았지. 제기랄.”
중얼거리던 남자는 돌연 땅을 짚은 두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는 베여 버린 오른 다리를 접은 채 멀쩡한 왼쪽 다리로 몸을 들어 올리며 다시 일어섰다.
“후우…….”
현성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비록 현실에 비해서 굉장히 약화된 통증이라지만, <힘줄 가르기>라는 스킬이 부여하는 디버프의 특성상 그 통증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서 있을 수 있다니.
“이 정도면…… 저쪽에서 배에 바람구멍 났을 때보다는 견딜 만하구만…….”
현성은 급히 다시 자세를 잡았다. 실수였다. 저쪽이 일어서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을 날려야 했다. 하다못해 HP 회복 포션이라도 먹어야 했다.
남자가 걸을 때마다 상처 부위로부터 피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남자는 얼굴을 조금 찌푸릴 뿐,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현성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상대하고 있는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지금 자신은 디버프를 걸면 거는 대로 그 효과 그대로 적용되고, 자신이 의도하는 대로 움직이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의지를 가진 인간을 상대하고 있다.
“뭐 하냐, 안 오고.”
남자가 그를 노려보았다. 현성의 검을 쥔 손에 땀이 맺혔다.
단 한순간의 방심이 다시 상황을 뒤엎었다. 물론 전투력이 반감했겠지만, 전투 불능이 아닌 이상 남자는 2분, 아니, 1분 정도는 너끈히 견디고도 남을 것이다. 그 후에 현성이 승리할 가능성 따위는 없다.
남자의 오른 주먹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현성이 들어 올린 검끝이 햇빛을 반사했다. 그때였다.
“무슨 똥배짱들이에요? ‘바벨탑’에서 노 듀얼 PVP라니.”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