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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극의 탑
9화

앨리스 3

날카롭게 찔러오는 창날이 햇빛을 반사하여 주변에 눈부신 빛을 뿌렸다.
푸른 하프 아머에 우는 얼굴 가면을 쓰고, 장창을 든, 15∼18 정도 레벨의 병사형 몬스터, <환몽의 수호병> 세 마리가 가운데에 있는 현성을 노리고 있었다.
삼각형 형태로 서 있던 몬스터들은 곧장 땅을 박차고 현성에게 섬광 같은 찌르기 공격을 날렸다. 마치 세 줄기의 유성이 날아오는 듯한 그 일격은 그 자리에서 현성이 사라짐으로써 무력화되었다.
목표물을 잃은 세 자루의 창날은 같은 자리에서 부딪치며 금속음과 불꽃을 흩뿌렸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몬스터들의 몸이 움찔했다. 그들이 창을 빼려는 순간, 두꺼운 가죽으로 만들어진 검은 전투화를 신은 발이 그 겹쳐진 창날을 콱, 밟았다. 방금 허공으로 도약하며 몬스터들의 공격을 회피한 현성의 발이었다.
창날을 발로 밟은 채로 현성이 휘두른 검이 푸른빛을 흩뿌리며 원형으로 휘둘러졌고, 세 마리의 몬스터를 전부 베어 갈랐다. 공격 스킬, <만월 베기>였다.
뒤이어 십자 형태로 교차하며 적을 베는 <십자 베기>가 뒤쪽의 몬스터를 베고, 곧바로 붉은 선을 허공에 그리며 <일섬>이 우측의 몬스터의 몸을 양단했다.
고작 2초 만에 벌어진 공방이었다. 몬스터들은 비틀거리며 뒤쪽으로 물러섰다. 그 틈을 노린 현성의 찌르기 일격, <섬광>이 뒤쪽 몬스터의 몸을 관통하며 빛의 무리로 만들었다.
「불신자는…….」
몬스터가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현성을 향해 휙 창을 내질렀다. 그것을 뒤에서 지켜보던 앨리스가 현성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피 스킬이 아니라, 흘려서 반격…….”
현성이 그 말을 들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앨리스의 말 그대로 현성은 검을 세로로 세운 방어 자세로 창의 찌르기 공격을 흘려내고는 곧바로 그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푸른빛을 뿌리며 <초승달 베기>를 시전하고, 뒤이어 <쾌속 연격>으로 연결했다. 총 8연격에 달하는 초고속 연격이 2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 동안 몬스터에게 작렬했다.
그것으로 남은 몬스터는 한 마리. 그마저도 남은 HP는 약 50%에 불과하다. <환몽의 수호병>이 휘두른 창이 바람 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구르기>, 반격.”
이번에도 앨리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 그대로 현성은 곧바로 <구르기>를 써서 피해 버리고, 곧바로 다시 <만월 베기>, 뒤이어 <일섬>을 사용해 몬스터의 몸을 양단했다.
마지막 몬스터가 빛무리로 화해 흩어지고, 현성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후, 들고 있던 검을 허리춤에 꽂았다.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앨리스였다.
“잘했어요. 70점.”
“뭔가 묘하게 점수가 짠 것 같은데…….”
“70점이 만점인데요? 나머지 30점은 제가 가르쳐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그게 뭔데요?”
“너무 포괄적이라서 가르쳐 줄 수 없는 것.”
앨리스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알 도리가 없었다.
현성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아직 리스폰된 몬스터는 없다. 앨리스는 현성의 표정을 살피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30점을 더 얻을 수 있는데요?”
현성이 물었다. 앨리스는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더니, 씨익 웃으며 말했다.
“타인과의 경험.”
“네?”
“다른 클래스의 싸움을 보고, 직접 충돌해 보기도 하고…… 같이 힘을 합쳐 싸워보기도 하고…… 이런 경험이 있어야죠. 이 게임, 혼자서는 명백한 한계가 있으니까.”
현성은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앨리스는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설명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거니와, 설명한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니었다.
애초에 자신 혼자서는 가르쳐 줄 수도 없다. 같은 <글래디에이터>로서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글래디에이터>에 대한 것뿐이다.
앨리스는 현성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장비들은 어때요? 몸에 맞아요?”
“예. 훨씬 성능이 좋네요.”
현성의 모습은 이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먼저 버클러가 사라졌다. 한 손과 양손을 번갈아가면서 쓰기에 용이한 ‘바스타드 소드(Bastard sword)’ 타입의 검을 쓰면서 버클러 같은 애매모호한 방패는 버리는 것이 좋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었다.
두 번째, 착용하고 있는 방어구도 조금 달라졌다. 경갑부터 장갑, 전투화까지. 그녀는 보다 좋은 아이템을 현성에게 주었다. 부담스러워하며 거절하는 현성에게 ‘금화 다섯 개 값은 아니에요’라고 말하며 억지로 입혔다. 성능은 현성이 쓰던 것보다 한결 뛰어났다. 그 결과, 현성의 전투력은 수치상으로도 꽤나 상승해 있었다.
“다행이네요. 그거 제가 입던 건데.”
“푸읍!”
앨리스의 말에 현성은 마시던 물을 그대로 뿜어냈다. 제대로 사레가 들려서 콜록거리는 현성의 모습을 보고 앨리스는 깔깔 웃어 댔다.
“농담이에요, 농담∼ 아, 너무 예상한 대로 반응하니까 계속 놀리게 되잖아. 일단 사이즈부터 아니잖아요.”
현성은 소매로 입을 닦으며 계속 콜록거렸다. 그러고 보면 옷의 사이즈가 자신과 굉장히 잘 맞았다. 맞춤옷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사이즈 잘 맞는 기성복 같은 느낌이었다.
“드롭 템이에요, 드롭 템. 저한텐 어차피 애물단지라서 드린 거고.”
앨리스는 가볍게 말했다. 애물단지일 리가 없었다. 이 정도의 물건은 내다 팔면 전부 합쳐 금화 한 개 정도는 받을 수 있다. 이것도 일종의 호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감사히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현성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앨리스는 미니 맵을 켜서 자신이 얼마나 왔는지는 확인하고 있었다. 처음 이 탑에 들어와 전멸당한 파티보다 더욱 깊이 들어온 탓인지 맵 데이터가 갱신되어 있었다.
“그럼…… 중형급[Middle Class] 몬스터 한 마리 잡고 졸업시켜 드릴게요. 일대일로 중형 몬스터를 잡으면 어디 가서 한 사람 몫도 못한다는 소리는 들을 일 없을 테니까. 지도를 보니 조금만 더 들어가면 중형 몬스터가 나오겠네요.”
앨리스의 말에 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중형급 몬스터가 어느 정도로 강한지조차 알지 못했다. 조우해 본 적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워낙 혼자 다니다 보니 이런 정보에 어두웠다.
몬스터의 등급은 크게 소형[Small], 보통[Normal], 중형[Middle], 정예[Elite], 수장[Boss]급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 중형까지가 일반적으로 필드에 출현하는 몬스터이고, 정예급이나 수장급은 특정한 위치에서만 출현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리고 현성은 모르고 있겠지만, 중형급을 혼자서 잡는 것이 가능한 인물은 꽤나 드물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급 몬스터와 비교해서 일단 HP부터 열 배 이상 차이가 나고, 공격력이나 방어력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일대일로 쓰러뜨리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그럼 좀 더 들어가 볼까요.”
앨리스의 말에 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탑의 안쪽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앨리스의 귀에만 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따르르릉’ 하는 요란한 벨소리였다. 이것은 게임이라면 음성 채팅, 현실이었다면 전화라고 부를 법한 시스템이었다.
앨리스는 현성에게 손짓하여 멈춰 세우고는, 시야 오른쪽에서 요란하게 흔들리며 소리를 내는 작은 수화기 모양의 버튼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발신자 : 미르’라고 적혀 있었다.
“응, 미르야. 왜? 나? 나 바벨탑에 잠깐 왔는데. 왜? 엉? 그거 진짜야?”
가까이 가면 들리는 현실의 전화와 달리, 이 세계에서 원거리 음성 통신은 엿듣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현성은 잠자코 스킬 상태나 스탯, 장비를 점검했다.
“제 3관문이라고? 와, 너 진짜 개 쩐다! 벌써 찾았어?”
‘관문’이라는 말에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관문은 현재 그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였다.
각층마다 여섯 개씩 있는 관문. 그것은 보스 몬스터가 있는 제단으로 가는 길이며, 각 관문마다 정예급 몬스터가 지키고 있다.
현재 라비린토스는 탑과 달리 부활의 은총이 있다는 점 때문에 이미 제 1, 제 2관문까지 개방된 상태였다. 그리고 앨리스의 통화 내용에 따르면, 지금 제 3관문이 발견된 모양이었다.
“그럼 아담은? 아직 안 왔다고? 오케이, 그럼 빨리 갈게. 응, 응.”
앨리스는 그렇게 대답하며 전화를 끊고 현성의 표정을 살폈다. 방금은 급한 마음에 가겠다고 말해 버리기는 했지만, 막상 그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중형급 몬스터를 일대일로 잡는 것을 보고 나서 졸업시켜 주겠다고 말한 지 5분도 지나지 않았다. 5분 만에 말을 뒤집어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 우선순위는 저쪽이 높았다.
“미안해요. 급한 일이 생겨서…….”
“관문……이라고 했죠?”
“네?”
현성이 조용히 내뱉은 말에 앨리스의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 그는 혼자서 바벨탑에 들어와 있던 사람이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이곳에서, 아무런 정보도 없이 들어와, 목숨을 걸고 탑을 올라가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아마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려는 의지가 강하리라.
그런 사람 앞에서 라비린토스의 관문을 열겠다 말하고 있다는 것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어느 쪽이 이기든 별 상관은 없지만…….'
현재로서는 명백히 라비린토스 쪽이 유리하다. 바벨탑을 올라가려는 이들까지 탑을 올라가기 전의 자기 강화 목적으로, 경험을 쌓기 위한 목적으로 본의 아니게 라비린토스 탐색을 도와주는 꼴이 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었다.
“……가세요.”
“어…… 그…….”
“괜찮아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애써 웃으며 하는 말에 앨리스의 미안함이 가중되었다. 바벨탑 같은 곳에 혼자 놔두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단 한 번의 죽음도 ‘진짜’가 되어버리는 곳. 스킬 연계조차 모르는 상태로 이곳에서 싸워서 살아남은 현성이지만, 앞으로도 그런 운이 따르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스킬 연계를 거의 완벽히 익히고 이전보다 강해졌다지만, 중형급 몬스터를 이기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런 곳에 혼자 놔두어도 될까?
‘아…… 망할 오지랖…….’
신경이 쓰인다. 빌어먹을 오지랖.
그렇게 자신을 탓하며 앨리스는 메뉴를 조작했다. 곧 현성의 시야에 낯선 팝업 창이 떴다. 친구 등록 메시지였다. 현성이 앨리스를 바라보자, 그녀는 볼을 살짝 붉히고 조그맣게 말했다.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요. 이렇게 놔두고 가기에는 그…… 조금…… 불안하니까. 아니, 아니, 정기적으로 연락해요! 알겠죠? 생존 신고 꼭 해요! 알겠죠?”
현성은 예상 못한 반응에 잠시 멍해져 있었다. 그러다가 곧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그녀 나름대로의 호의일 것이다. 걱정되니까 꼭 연락하라는.
섭섭한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아무렴 어떠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의 삶이 있다. 라비린토스를 선택했다면, 자신이 그걸 막을 권리는 없다. 단지 지금은 그녀가 보여주는 작은 호의가 고마웠다.
현성은 가벼운 손놀림으로 수락을 클릭했다. 그러고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 나름대로의 괜찮다는 의미였다. 어차피 혼자서 탑에 들어왔다. 누군가에게 이런 대가 없는 호의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알았어요. 생존 신고 정기적으로 할게요.”
그 미소에 앨리스는 헛기침을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볼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메뉴를 조작하여 파티를 해체했다. 자동적으로 현성과 앨리스를 이어주던 파티의 연결 고리가 끊어졌다.
앨리스는 아직도 미안한지 흘끔거리며 현성을 보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그는 70점짜리였다. 그녀는 곧바로 현성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같이 다닐 파티원을 찾아요. 솔직히 그쪽이 중형급을 이길 거라는 생각도 안 들고, 중형급을 어찌어찌 잡는다고 쳐도, 정예[Elite]급은 무리예요. 그건 정말 파티 단위로 들어가도 힘들어요. 수장[Boss]급은 정말 어림도 없고……. 그니까 같이 다닐 파티원을 찾아요.”
앨리스의 말에 현성의 표정이 굳었다. 현성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이곳에 가장 먼저 발을 들인 그들, 5인 파티의 얼굴이 떠올랐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말 한 번 붙여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과는 다르게 용감히 이곳에 도전했고, 힘이 다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 이후로 이 탑은 ‘죽음의 탑’이 되었다. 어느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는 죽음의 장소. 이런 곳에 다시 올 사람이 있을까?
“아무도…… 오지 않을 거예요. 이곳은…….”
“글쎄요. 난이도가 라비린토스랑 비슷하다는 사실만 퍼뜨려도 올 사람은 오지 않을까요?”
앨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현성은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앨리스가 보기에 현성도, 그리고 탑을 올라가고자 한 다른 사람들도 지나치게 겁에 질려 있었다. 현성은 다른 이들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그리고 다른 이들은 그곳이 ‘죽음의 탑’이라는 공포에.
어차피 그건 앨리스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어떻게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것은 이 탑을 선택할 사람들이 해결할 문제.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단 하나 마음에 걸린다면, 그것은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남자였다. 왠지 모르게 위태로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나참, 내가 남자에게 신경을 쓰게 되다니…….’
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한 번 더 당부했다.
“뭐…… 선택은 그쪽이 할 문제지만요. 아무튼…… 저는 가볼게요. 정기적으로 생존 신고 하시구요. 알겠죠?”
사실 친구로 등록되어 있으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다. 영구적인 소멸이라면 친구 목록에서 지워지든지 어떤 표시가 날 테니까. 하지만 소녀는 꼭 연락을 하라고 말했다. 그것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미안함의 표시이자, 그에 대한 호의의 표시이기도 했다.
현성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스는 다시 한 번 더 현성의 얼굴을 바라본 후, 귀환서를 사용해서 사라져 버렸다. 귀환서의 빛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현성 한 명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