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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극의 탑
8화

앨리스 2

반짝반짝 빛나며 흩어지는 빛무리 속에서 소녀는 자세를 바로 하며 들고 있던 대검을 가뿐하게 등 뒤에 걸었다.
현성은 어안이 벙벙하여 멍하니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 소녀가 보여준 전투는 자신의 전투와는 차원이 달랐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속 스킬 사용, 단 한 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회피와 이어지는 반격까지.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어울릴 정도로 완벽했다. 자신은 흉내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정작 그런 아름다운 전투를 끝낸 소녀는 너무나도 태연한 얼굴로 현성을 바라보며…….
“상대했죠?”
산뜻하게 말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싶던 현성은 곧 방금 전 자신이 홧김에 던진 말을 기억해 내고는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하며 볼을 긁적거렸다. 자신이 목숨을 걸고 싸우던 상대를 저렇게나 쉽게 압도해 버리면 민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기요, 고맙다는 말은 안 해요? 그래도 나름 구해준 건데.”
“아…… 고맙습니다.”
현성은 그제야 소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위기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다. 그런데 감사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소녀는 만족한 듯 웃음을 띠고 현성을 샅샅이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괜찮아 보이네요. 죽기 직전까지 몰리면 트라우마 때문에 폐인이 되는 사람들도 있는데, 멘탈이 튼튼하신가 봐요?”
“그야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니까요…….”
현성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탑에 들어오기 전에는 늑대 무리에게 당해서 죽었고, 탑에 들어온 이후에는 수십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 무덤덤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물론 이번엔 특히나 위험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하긴, 그렇게 싸우면 항상 간당간당하겠죠.”
소녀가 무심하게 현성에게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렸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현성은 콜록거렸다.
방금 전까지 <글래디에이터>는 좋지 않느니 쓰레기니 생각해 온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정작 그 사용법을 찾기 위한 노력조차 하지 않고서.
소녀는 싱긋 웃었다. 장난기가 다소 섞여 있는 미소였다.
“괜찮아요. 스킬 연계 테크닉은 모르는 사람도 꽤 되니까. 그래도 10레벨 넘게 모르는 사람은 처음 봤지만.”
이번엔 어퍼였다. 2연속 공격에 현성은 비틀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소녀는 빙그레 웃으면서…….
“장난이에요. 팩트 폭력이란 거 생각보다 재밌네요.”
결정타를 날렸다.
사레가 들린 현성이 콜록거리고, 소녀는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미니 맵 팝업 창을 켰다. 그러고는 현성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최근에 탑의 미니 맵 탐색률이 갱신돼서 와본 거거든요. 이 맵 갱신한 거, 그쪽 맞죠?”
“네, 맞습니다만…….”
“어떻게 그 상태로 여기까지 오셨대? 살아 있는 게 용하네요.”
콤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끝난 줄 알았던 콤보가 다시 이어지자 현성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사실 소녀의 말은 틀린 것이 한마디도 없었다.
소녀는 그런 현성의 표정을 보다가 태도를 바꿔 진지하게 물었다.
“단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 안 했어요? 스킬 연계가 없었다면 엄청 불편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전투를 할 때마다 느낀 사항이었다. 다른 전위 공격계 직업과 비교해서 <글래디에이터>의 스킬들은 장점은 없고 단점만이 부각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에 대한 해결책은 떠올리지 못하고 불평만 하던 것이 그였다.
“……했죠. 하지만 불평만 했죠.”
왠지 모르게 시무룩한 현성의 표정을 본 소녀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장난기가 지나쳤나 싶었다. 아무리 멀쩡해 보여도 방금 전 죽음의 위기를 넘긴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장난이 조금 심했다.
소녀는 속으로 조금 반성하며 현성을 향해 위로하듯 말했다.
“혼자 다니면 모를 수도 있어요. 실제로 초보 <글래디에이터>들이 자주 하는 실수고…….”
내뱉고 나서야 아차 싶어서 소녀는 현성을 보였다. 현성은 충격받은 얼굴로 ‘초보’라는 말만 반복해서 되뇌었다.
소녀는 피식 웃었다. 죽음의 위기는 멀쩡한 정신으로 받아넘기면서 이런 소소한 장난이나 말실수에 이렇게 반응하다니, 의외로 여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쪼끔 귀엽네?’
묘하게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여리기만 한 게 아니라, 마치 상처받은 강아지 같은, 자신의 상처를 가리기만 하는, 그런 사람 같다. 근거도 뭣도 없는, 혹자가 ‘여자의 감’이라고 말하는 직감일 뿐이지만.
도와주고 싶었다. 이런 실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을 보니 단순히 위험하다고 탑에 도전하는 것을 포기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이왕 알게 된 거, 죽지 않도록 강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소녀는 등 뒤에서 대검을 뽑아 정자세를 취했다. 현성이 움찔, 하고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소녀는 피식 웃었다.
“잘 봐요. <글래디에이터>는 이렇게 쓰는 거예요.”
다소 유쾌하게, 하지만 진지함을 담아 소녀는 그렇게 말했다. 오른발이 앞으로 내디뎌졌다.
오른쪽 상단에서 왼쪽 하단으로 대각선을 그리는 내려 베기.
칼날이 차가운 은빛을 뿌렸다. <초승달 베기>.
그 직후, 내려간 검이 대각선으로 위로 올라가며 허공을 가르고, 몸이 그대로 회전하며 비스듬히 내려치는 <회전 베기>가 이어지고, 다시 몸이 한 바퀴 회전하며 원심력을 이용해 다시 강렬한 내려 베기, <일섬>으로 이어졌다. 세 개의 스킬, 총 4연격이 연계되는 동안 소모된 시간은 고작 2초 미만. 물 흐르듯 부드러운 스킬 연계였다.
아까도 보았지만 놀라운 속도였다. 현성이 가진 <글래디에이터>에 대한 생각이 전면 수정되는 순간이었다.
MP 소모가 적고, 쿨타임이 짧으면서 대미지도 약한 스킬들의 성능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한 방이 아닌, 이렇게 공격을 끊임없이 몰아치기 위한 부품으로서의 스킬들. 그 ‘부품’을 ‘스킬 연계’라는 완성품으로 조립하기 위해 줄어든 스킬 자원.
“이게 스킬 연계예요.”
소녀는 검을 내리고, 다시 검을 등 뒤에 집어넣었다.
“<글래디에이터>는 이 스킬 연계로 끊임없이 공격을 몰아치는 직업이에요. 남들이 묵직한 거 한 방 넣을 때, 대여섯 개의 스킬을 꽂아버리는 것이 특기죠. 대신 연계를 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성능을 내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고.”
“그렇군요…….”
현성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문제는 그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이었다. 직업의 특성조차 이해하지 않고 불평만 해 대던 자신에게.
소녀는 살짝 현성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고는 잠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곧 미소를 지었다. 장난기가 가득한 짓궂은 미소였다. 소녀는 그 미소를 지우고 최대한 친절한 표정을 지었다.
“한 번 해보실래요?”
“네?”
“스킬 연계요. 요령은 간단해요. 스킬이 끝날 때쯤, 바로 다음 스킬을 사용하면 부드럽게 연계돼요. 한 번 해보세요!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해보는 것이 낫잖아요?”
소녀의 말에 현성은 순순히 검을 뽑았다.
스스로 연구해서 알아내지 못했으니 배우기라도 해야 한다. 이 ‘위’로 더 올라가기 위해서, 죽지 않기 위해서.
현성은 오른손에 검, 왼손에 버클러를 들고 자세를 잡았다. 준비하는 첫 번째 스킬은 <일섬>.
현성의 검이 붉은빛으로 빛나고, 곧 붉은 잔상을 남기며 휘둘러졌다. 뒤이어 현성은 <반월 베기>를 사용했다. 오른발을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딘 순간, 그대로 현성은 대지의 품에 안겼다.
“……어?”
쿠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현성은 보기 좋게 넘어졌다. 상황 자체는 익숙했다. 스킬을 사용한 후에 으레 찾아오는 경직 현상이다. 문제는 왜 연계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무언가 잘못한 부분이 있었겠지.
현성은 그렇게 생각하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설명을 요구하고 싶었다. 그 순간, 작은 소리가 현성의 귀를 간지럽혔다.
“풉.”
소녀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현성은 먼지가 묻은 옷을 탁탁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피함에 얼굴이 빨개졌지만, 물어볼 것은 물어봐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소녀의 얼굴을 보자, 묻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두 볼은 빵빵하게 부풀어 있고, 눈은 반달 형태로 휘어져 있었다.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쿡쿡 웃던 소녀는 박수까지 치며 진심으로 감탄하기 시작했다.
“와, 굉장해요! 멋진 몸 개그였어요! 하마터면 진짜로 뿜을 뻔했다니까요.”
당신, 진짜로 뿜었잖아!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을 현성은 간신히 억눌렀다. 그런 후에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담아 소녀에게 질문했다.
“뭐가 문제죠? 바로 다음으로 연결했는데.”
“그야 연계가 안 되는 스킬을 연계했으니까요. 정확히는, 순서가 틀렸어요. 아무거나 막 연계되는 게 아니라고요. 아무 순서나 막 연계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그걸 어떻게 알죠? 일일이 써봐야 하나요?”
“……저기요, 스킬 툴팁 안 읽어요?”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소녀가 물었다. 정말 그렇게 당연한 것을 모르느냐는 태도였다. 하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애초에 스킬 연계 자체를 오늘 처음 알았으니까.
그리고 현성은 원래 스킬 툴팁을 꽤나 성의 있게 읽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현성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읽는데요?”
“……안 읽었네요.”
“읽었다니까요?
“읽었는데 그걸 몰라요? 툴팁상에 떡하니 적혀 있는데……. 아, 잠깐! 그럼 스킬 어떻게 찍었어요? 아니다, 내가 직접 봐야겠어. 스킬 창 열어요! 공개 모드로 해서 보여 달라고요!”
소녀가 마구 닦달했다. 정말로 급박한 상황이라도 일어난 듯한 그 기세에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스킬 창을 열었다. 공개 모드로 전환하자, 소녀는 재빨리 현성에게 찰싹 달라붙어 열심히 그 스킬 창을 보았다. 지금 자신이 현성에게 안겨 있는 것과 같은 구도라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건 소녀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고, 그 구도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현성은 괴로움을 맛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달콤한 괴로움이었다.
“읏…… 잠깐……!”
“아, 조용히 좀 해봐요. 집중 안 되니까.”
소녀에게서 풍기는 달콤한 여성의 체취와 그녀의 특정 부위에 밀착된 팔뚝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바람직한 감촉이 현성의 머리를 어질어질하게 만들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머리 위로 김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녀는 열심히 현성의 스킬 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 입장에서야 당사자의 시야를 기준으로 나타나는 스킬 창을 보려니 밀착할 수밖에 없다지만…….
약 3분이 지나갔다. 현성에게는 세 시간과도 같이 길고, 3초보다도 짧은 3분이었다. 다 읽었는지 소녀는 고개를 들었다.
“이거 봐! 이럴 줄 알았어! 스킬 공격력만 보고 찍었네!”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소녀는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면서 손가락은 팝업 창을 부술 듯이 툭툭 쳐 대고 있었다. 물리적인 실체가 없는 팝업 창이지만, 그렇게 하니 정말로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소녀는 바로 현성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거 봐요! 툴팁 안 읽었……!”
그 순간, 소녀의 몸이 굳었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현성의 얼굴이 보였다. 소녀는 그제야 자신과 현성이 얼마나 밀착해 있는지를 깨달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으앗……!”
소녀는 급히 현성에게서 떨어졌다. 심장이 가슴 밖으로 뛰쳐나올 것처럼 요동치고, 얼굴은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소녀는 열심히 손 부채질로 얼굴을 식히고, 현성은 붉어진 볼을 손가락으로 긁적였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결국 그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소녀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 아무튼! 스킬 완전 잘못 찍으셨어요! 대미지만 보고 찍으니 그렇죠! 그 상태로는 연계 못해요. 되는 스킬 조합이 있어봐야 한두 개 정도예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방금 전까지의 감정은 날아가 버렸다.
게임을 많이 해보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스킬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보통 스킬을 되돌리는 것은 대부분의 게임에서 커다란 대가를 요구한다.
다시 시무룩해진 현성을 본 소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당황한 것을 감추기 위해 너무 직설적으로 말했나 싶었다.
그 순간, 소녀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소녀의 얼굴에 마치 악동 같은 짓궂은 웃음이 떠올랐다.
“저기요.”
“네.”
소녀는 인벤토리에서 투명한 병을 하나 꺼냈다. 병 안에는 맑은 푸른색의 액체가 들어 있었다. 소녀는 최대한 화사한 웃음을 지은 채 찰랑찰랑 소리가 들리도록 병을 흔들었다.
“이게 뭐인 것 같아요?”
“글쎄요…….”
현성으로서는 처음 보는 액체였다. 병의 형태로 보아서는 물약이나 비약인 것 같기는 한데, 도무지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소녀의 화사한 웃음이 기묘한 미소로 바뀌었다. 어떻게 보면 짓궂은 장난을 구상하는 말괄량이 소녀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의 매혹적인 표정 같기도 했다. 절대 조화될 리 없는 두 분위기가 어우러져 기묘한 느낌을 풍겼다.
“이건요, ‘망각의 비약’이에요. 그럼 효과가 뭘까요?”
소녀의 미소에 짓궂음이 다소 짙어졌다. 현성은 뭔가 직감적으로 그 비약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스킬…… 초기화?”
“빙고!”
소녀는 장난을 성공시킨 말괄량이 소녀처럼 외쳤다. 그 순간, 현성이 득달같이 다가와 소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질렀다. 어깨가 아파올 정도의 힘이 전해졌다. 그 힘에 소녀는 경악했다. 분명 레벨의 절대치도, 근력(STR)치도 자신이 높을 텐데…….
“그거…… 그거 어디서 팔아요? 얼마예요?”
“저기…… 일단 이거 놔주실래요? 아프거든요.”
그제야 현성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깨달았다. 현성은 손에 힘을 풀고 한 발자국 물러났다.
소녀는 붙잡힌 어깨를 서로 다른 손으로 문질렀다. HP를 보니 약 5% 정도 깎인 상태였다. <몽크>도 아닌, 근력(STR) 수치가 그렇게 높지 않은 현성이 잠깐 잡았다고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으…… 아파라……. 아무튼 대답을 해드리자면, 틸문 중앙 마법 조합의 비약 상점에서 팔아요. 이건 ‘망각의 비약 LV. 2’니까 가격은 금화 40개. 레벨이 이미 10을 넘기셔서 LV. 2를 쓰셔야 해요.”
현성의 말문이 막혔다. 정말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 그의 전 재산을 털어도 어림없었다. <환몽의 신도> 한 마리를 잡을 때마다 드롭되는 돈은 은화 열 개 정도다.
물론 그것도 회색 사슴, <그레이 디어>와 비교하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드롭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금화 40개면 <환몽의 신도>를 400마리나 잡아야 한다. 도저히 지불 가능한 액수가 아니었다.
구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성은 아주 잠깐, 빼앗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검토했지만, 즉시 기각되었다. 소녀의 전투력은 자신과 비교할 때 절대적인 수치에서도, 테크닉 면에서도 압도적이다.
달라고 해볼까? 굳이 보여주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금화 40개라는 어마어마한 거금을 들여야 구입할 수 있는 물건을, 과연 오늘 처음 본 자신에게 공짜로 줄까 싶었다.
고민하는 현성의 얼굴을 소녀는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들여다보았다. 이제는 완연히 말괄량이의 표정으로 변해 버린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이거, 드릴 수 있는데…….”
“정말요?”
현성의 눈이 번쩍 뜨였다. 소녀는 짓궂게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공짜는 아니고, 외상이에요, 외상. 비약 값에 과외비까지 합쳐서 금화 45개! 과외 내용은 스킬 트리랑 스킬 연계는 물론, <글래디에이터>의 전투법까지. 상환 기간은…… 음, 2년으로 할까요?”
소녀가 웃는 얼굴로 장난을 치듯이 던진 제안은 현성에게는 말할 수 없을 만큼 고마운 이야기였다. 솔직히 ‘망각의 비약’으로 스킬을 초기화한다고 해서 제대로 찍을 자신이 없던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 주고, 필요한 물건을 주겠다고 한다. 외상이라고는 하지만, 과연 금화 45개가 언제까지 큰돈일까.
이곳은 현실이 아니다. 사냥에 사냥을 거듭하다 보면, 게임 유저는 부유해지기 마련이다. 초기에 많아 보이는 돈이라도 후반에 가면 푼돈이 될 것이다. 결국 돈을 받는 것도 그에게 무안함을 주지 않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것일까.
현성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오해는 하지 말아요.”
소녀가 현성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다소 짓궂어 보이는, 하지만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 그냥, ‘콜드 게임’이 싫어서 그런 것뿐이니까요. 재미없잖아요, 그런 건.”
현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콜드 게임이라니,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예스’예요, ‘노’예요?”
그 말을 듣고 확신했다. 그녀의 말은 이해하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알아듣지 못하도록 일부러 꼬아서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의 의미에 상관없이 현성의 직감은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라 말하고 있었다.
현성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현성은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손짓이었다.
“이현성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내밀어진 손. 소녀는 조금 놀란 얼굴로 그 손을 바라보다가, 곧 미소를 짓고 그 손을 잡았다.
“앨리스(Alice)예요. 잘 부탁해요.”
맞닿은 두 손. 그 손을 통해 서로의 온기가 전달되었다. 그 손의 감촉에 현성은 다소 놀랐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몸 크기만 한 대검을 휘두르며 파워풀한 전투 스타일을 보여주던 전사의 손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사랑받고 자란 듯한,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산 듯한 고운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