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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극의 탑
5화

풍요의 낙원과 절망의 탑 3

현성은 천천히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 두근거리며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그것으로 자신이 살아 있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다.
방금 그 느낌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세계로부터 자신이 삭제당하는 느낌, 자기 자신을 잃고 완전히 무(無)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정상적인 자아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만으로 정신이 붕괴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아무 영향도 없었다. 그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곱씹게 하는 계기가 될 뿐이었다. 그것은 불쾌했지만, 한편으로는 다소의 쾌감마저 느껴졌다.
“은총이라…….”
현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 웃음에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관리자는 이것이 무한한 부활의 은총이라고 했다. 웃기지도 않다. 이런 것은 은총이 아니다. 죽음과 부활이 이런 것이라면, 정상적인 사람은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 마음이 무너져 내린들 이상하지 않다. 저기서 울고 있는 그녀처럼.
“흑…… 흐윽…… 윽……!”
대신전의 구석에서 유정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서럽게 울고 있었다.
현성은 자신을 부활시켜 준 대신전의 제단에서 내려와 그 옆으로 갔다. 그녀는 현성이 다가오자 눈물로 젖은 얼굴을 들었다.
두 눈은 초점이 맞지 않고, 눈물 탓에 퉁퉁 부어 있었다. 풀려 버린 두 눈은 그녀의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친 유정은 너무나도 서글프게 배시시 웃었다.
“현성 씨도…… 오셨네요…….”
현성은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은 살아 있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마치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그녀는 대신전 밖으로 나가, 푸르른 하늘과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크게 숨을 쉬었다. 허파에 산소가 차오르는 감각을 느끼며, 유정은 일부러 계속해서 숨을 크게 쉬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죄송해요.”
“아뇨. 유정 씨 잘못은…….”
“그게 아니라…… 저, 그만하려고요.”
그녀의 말에 현성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마음을 그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있기에 말리거나, 위로하거나, 혹은 반대하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징벌의 빛>으로도 사슴 정도는 잡을 수 있으니까요. 사슴만으로도…… 숙식은 해결되니까……. 저 이런 건 정말 못할 것 같아요…….”
유정은 마치 생명이 없는 인형처럼 멍한 눈으로 도시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현성은 입술을 꾹 깨물며 간신히 한마디만을 내뱉을 수 있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현성의 말을 들은 그녀는 마치 구원받았다는 듯 아주 조금 밝아진 얼굴로 비틀거리며 도시를 향해 걸어갔다.
현성은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녀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잘못은 아니다.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맹수들에게 물어뜯기고, 패닉 상태에 빠진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 현성에게 회복 주문을 걸어주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고개를 들자 원래 세계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의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살아 있다. 이 세계에 존재한다.
이런 당연한 명제가 바닥부터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면, 멀쩡한 게 오히려 비정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는 비정상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정신에 큰 충격을 받을 만한 경험을 했는데도, 현성의 마음은 잠시 바람에 흔들린 정도에 불과했다.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이상성을 확인할 줄은 몰랐다.
현성은 발걸음을 뗐다. 그 이상성이 지금은 고마웠다. 그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돌아가기 위해, 자신의 소망을 위해, 그리고 삶의 이유를 위해 그는 걷기 시작했다.

* * *

나흘이 지나갔다. 그동안 죽음을 겪은 사람들은 늘어났고, 그들 중 유정처럼 죽음에 의한 트라우마로 인해 전투를 포기해 버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도시 근처에서 토끼나 사슴을 사냥하는 정도로, 즉 숙식만을 위한 최소한의 사냥을 하는 사람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심각한 트라우마 현상으로 아예 전투를 포기하고 길거리에 나앉는 사람들도 다수 생겨나기 시작했다.
“낙원이라…….”
현성은 피식 웃었다.
인간이라는 생명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이곳을 낙원이라고 할 리가 없을 텐데.
나흘간 현성은 레벨 10을 달성했다. 그리 빠른 속도라고는 할 수 없었다. 혼자서 숲 한가운데에 들어가 늑대들을 사냥하는 것은 미친 짓이나나 다름없었고, 위험부담이 적은 사슴이나 멧돼지, 여우 같은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것은 사냥 효율이 지나치게 낮았다.
현성은 식탁에 있는 음식을 한입 베어 물었다. 그리운 간장의 맛이 혀로부터 전해졌다.
그때, 귀에 들어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야, 정말 갈 거냐?”
“당연하지. 벌써 5일째야. 우리들 레벨도 평균 11이 됐으니까 들어갈 만할 거라고.”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다섯 명의 남녀가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대충 눈대중으로 봐도 수호 계열, 공격 계열, 회복 계열 직업들이 적절히 섞인 게, 밸런스가 좋아 보였다.
현성은 그들의 이야기에 몰래 귀를 기울였다. 그의 직감이 중요한 일이라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죽으면 진짜 죽는다고도 하고…….”
“안 죽으면 되지! <가디언>에 <프리스트> 조합이라고. 절대 안 뚫려. 거기에 생각보다 여기 몬스터들이 레벨에 비해 약해. 만약 올라가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살아 돌아올 수 있어.”
중장갑을 입고, 등에는 커다란 타워 실드와 장검을 메고 있는 남자가 열변을 토했다. 옆에 있던 로브를 입은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계속 겁먹고 있을 수는 없잖아. 슬슬 라비린토스를 내려가려는 녀석들도 나오고 있어. 경쟁에서 밀리면 안 된다고.”
듣자하니 그들은 바벨탑에 올라가려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총 다섯 명. 파티 시스템은 최대 여섯 명까지 가능하니, 저 사이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역시 바벨탑을 올라야 한다. 거기다 동료를 모으라고 관리자가 충고하기도 했으니.
현성은 그들에게 말을 걸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한 남자가 현성의 어깨를 잡고 눌렀다.
“관둬.”
근력 자체는 낮았다. 수치로 따지면 아마 현성보다도 훨씬 낮을 것이다. 로브를 입고 있는 것을 보니 <프리스트>나 <드루이드>, 아니면 <메이지>일 것이다. 즉, 근력(STR) 스탯을 올리는 사람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에 현성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장발의 남자였다. 녹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기이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눈초리는 날카로웠다. 한눈에 봐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저 녀석들 사이에 끼려는 거지? 그만두는 게 좋아.”
“어째서죠?”
남자는 이야기하던 다섯 명을 힐끗 보더니 대답했다.
“저 녀석들, 실패할 거야.”
“어떻게 확신하죠?”
“쟤들 싸우는 것을 내가 봤거든. 연계가 개판이야.”
남자는 현성의 식탁에 있는 음식을 하나 집어 먹고는, 현성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그리고 목숨이 걸린 일에 선두 주자가 되는 것은 좀 멍청한 짓이거든. 쟤들이 어떻게 되는지 보고 나서 판단해도 안 늦어.”
“어이, 카인. 우리도 다 먹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뒤로 어떤 남자가 나타났다. 중장갑을 입은 남자였다. ‘카인’이라 불린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곧 갈게.”
카인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현성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다지 좋은 첫인상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불쾌함이 앞섰다.
그의 말은 분명 합리적이었다. 누군가가 위험을 감수한다면, 그들의 도전을 이용하는 쪽이 더 안전하다. 논리적으로는 이해하고 있는데도 현성은 그가 하는 말에 극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보아하니 레벨도 낮은데 저런 데 끼는 것보다는 레벨을 올리는 게 좋을 거야. 당신, 자주 보였는데 자꾸 북쪽으로 가더라고. 동쪽에 좋은 사냥터가 많으니 그쪽으로 가는 게 어때?”
그렇게 가볍게 충고를 하고서 카인은 현성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현성은 식당의 문을 열고 나가는 카인의 등을 보았다.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따르기에는 거부감이 든다.
그러나 그런 거부감과는 별개로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그 말을 따르라고. 이성과 직감은 그의 말이 옳다고 말하는데, 감성은 그 말을 부정하고 있었다.
열띤 토론을 하던 다섯 명의 파티는 현성이 생각에 잠긴 동안에 이미 그 자리를 떠난 후였다. 선택의 여지가 사라져 버린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식사에 집중했다.

* * *

이곳 ‘틸문(Tilmun)’이라는 도시는 바벨탑, 그리고 그 지하에 존재하는 라비린토스를 중심으로 세워진 도시였다.
몬스터들이 바글거리는 던전을 중심으로 도시를 세우다니, 도대체 누구의 센스일까?
현성은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곧 나름대로 도시를 세운 그들만의 이유가 있겠지, 하며 납득해 버렸다.
현성은 자연스럽게 도시의 중앙, 즉 바벨탑 근처에 와 있었다. 그 5인방과 카인이라는 남자의 말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건물의 숲을 헤치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현성은 말을 잃었다. 멀리서 봤을 때와는 그 박력 자체가 달랐다.
가까이서 보니 상상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하늘을 부유하는 구름을 뚫고 올라가 꼭대기가 보이지도 않았다. 지름은 아무리 작게 잡더라도 킬로미터 단위였다. 그저 벽돌로 대충 쌓아 올린 건축물이 아니라, 탑 곳곳에 어마어마한 정교함을 자랑하는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다. 예술로서의 아름다움과 거대 건축물이 가지는 경외로움, 그 둘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훌륭한 탑이었다.
“이걸 이 세계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현성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마법이 실존하는 세계라 해도 이 정도의 건축물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이건 현대 건축 기술로도 불가능에 가깝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 불리는 피라미드도 이것과 비교하면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지하에 최소한 이것과 동급 규모의 거대한 미궁이 있다는 것까지 고려한다면…… 이 아름다움은, 이 규모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위를 보니 그와 똑같은 느낌을 받은 듯, 멍하니 탑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이 꽤나 눈에 들어왔다. 탑에 도전하겠다던 그 5인 파티도 보였다.
“좋아! 들어가자!”
중장갑을 입고 방패와 검을 든 가디언이 기세 좋게 외쳤다. 현성은 그가 리더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의 대화에서도 그가 이야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의 기세 좋은 외침에 파티원들이 호응했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도 응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 성히 잘 갔다 와라!”
“멋지게 돌아와서 우리에게 희망을 줘!”
“도전자들 멋지다! 잘 갔다 와라!”
“죽지 말고 꼭 돌아와라!”
그렇게 외치는 이들은 그들처럼 탑으로 들어갈 용기가 부족한 이들이겠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관리자는 말했다. 무한한 부활의 은총을 받겠지만, 지금 현성의 눈앞에 있는 이 탑, 바벨탑에서의 죽음만큼은 진짜가 될 것이라고.
탑의 난이도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누구도 들어가 본 적이 없고, 그 내부에 대해 알고 있는 이 역시 아무도 없다. 그런 곳을 당당하게 들어가겠다고 하는 저 사람들이야말로 정말 용감한 영웅들이겠지.
“바보짓은 안 했으면 좋겠군. 전멸하면 정보도 얻을 수 없으니 세 명 정도는 살아 돌아와 줬으면 싶은데…….”
옆에서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인이었다.
현성은 그런 카인을 살짝 노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5인 파티의 뒷모습을 보았다. 여기 있는 모두가 카인과 같은 생각이겠지만, 카인의 말은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들었다. 이전에 들은 그의 말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런 내재된 이기심을 너무 직접적으로 표출해서 모두를 부끄럽게 하기 때문에 그에게 불쾌함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희가 위선이고, 나는 솔직하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5인의 파티는 바벨탑의 입구를 통해 사라졌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그 결말을 보겠다는 듯이 꼼짝도 하지 않고 그들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