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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극의 탑
4화

풍요의 낙원과 절망의 탑 2

창문 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현성의 눈을 간지럽혔다.
현성은 잠에서 덜 깨 아직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눈을 비볐다.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푸르게 빛나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현성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날씨는 좋네…….”
꾸르륵, 하는 소리가 배에서 조그맣게 울렸다. 현성은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그런 후 문을 나서기 직전, 방을 돌아보며 짧게 한마디를 남겼다.
“다녀올게요.”
여관의 계단을 내려가 1층에 도착하자, 그곳에서는 음식을 앞에 둔 채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앉아 있는 유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정 역시 현성을 포착하고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현성은 별말 없이 다가가 그 앞에 앉았다.
“잘 잤어요? 이상한 망상 안 하고?”
“……의외로 성격 나쁘시네요. 남은 배고플까 봐 미리 주문까지 해놨는데.”
눈을 살짝 흘기며 유정이 쏘아붙이는 말이 재미있어서 현성은 살짝 웃었다. 원래 장난기가 적은 그이지만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으면 괜히 놀리고 싶어진다. 자신을 파렴치한으로 취급한 것에 대해 보복도 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현성은 웃으며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을 보았다. 토스트로 된 샌드위치와 우유, 샐러드. 간단하지만 적당한 아침 식사였다. 현성은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 있었어요?”
“저, 그게…….”
유정은 곤란하다는 듯이 우물거렸다. 눈치가 그리 빠르지 않은 현성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돈은 없다.
“죄송해요. 나중에 공격 스킬 배워서 벌면 갚을 테니까…….”
“괜찮아요. 편하게 드세요.”
유정은 두 번이나 얻어먹는다는 것이 미안한지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도 샐러드의 야채 하나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현성 역시 아침식사를 빵으로 해결하는 것을 그리 싫어하지는 않기에 별 불평 없이 먹었다.
식사 후 준비를 마치고 나와 숙소 문 앞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의 모습을 보고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둘 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복장이었기 때문이다.
현성은 검붉은 색으로 칠해진 레더 아머를 겉에 입고, 그 안에 천 옷을 입어 활동성을 높인 가벼운 경장 차림이었다. 왼쪽 허리에는 길이 1.2m 정도의 롱 소드, 등에는 버클러가 매달려 있었다.
유정은 가톨릭 성직자들이 입는 흰 사제복을 입고, 오른손에 길이가 약 1.7m 정도 되는 석장을 들고 있었다.
만약 현실 세계에서 이런 차림을 한다면 모두가 이상하게 볼 것이다. 어디 코스프레 동호회 모임에서나 입을 법한 복장을 하고 있는 서로의 모습이 어색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대로 판타지네요.”
“그러네요.”
유정이 던진 농담에 현성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제 사냥할 때도 느꼈지만, 중세 유럽의 병사 혹은 전사와 비슷한 복장을 한 자신이 낯설었다.
숙소를 나서자, 온통 흰색으로 덮인 가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현성은 별생각 없이 걸었지만, 유정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묘하지 않아요?”
“뭐가요?”
“여기 말이에요. 어제부터 생각한 건데…… 여기 뭔가 이상해요. 뭔가 양식은 중세 유럽의 고딕풍인데 한국 전통 양식의 처마가 존재하고, 도로는 완전 현대식이잖아요? 인도와 차도가 존재하고, 차도는 중앙선 기준으로 왕복 이차선. 횡단보도도…….”
유정은 중세 유럽의 고딕 양식과 이 세계의 기묘한 양식의 차이점, 무엇이 어떻게 혼합되었는지, 도로가 어떤 식인지 마구 늘어놓았지만, 현성은 그 말의 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현성은 중학교 이후로 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 동생이라면 모를까, 그가 그 말들을 다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론은! 이 세계의 양식이 뭔가 이상하다는 거죠! 뭐랄까, 중세 유럽을 어설프게 구현해 놓고, 편의를 위해 대충 이것저것 짜깁기했다는 느낌?”
하지만 그 말만큼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현성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다. 길이 지나치게 익숙했던 것이다. 그게 현성이 느낀 위화감의 정체였다. 마치 현대 도시의 길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현성에게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던 유정은 문득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현성을 살폈다. 아리송한 그의 표정을 본 유정은 부끄러운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사과했다.
“저기…… 죄송해요. 제가 원래 그런 쪽을 공부했어서…… 저도 모르게 신나서 이야기했네요.”
“괜찮아요. 뭔가 중요한 것을 알게 된 느낌이니까.”
현성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느끼던 위화감이 조금 더 형체를 갖고 느껴지는 것 같았다. 현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뭔가를 더 안다면, 더 생각한다면 중요한 결론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그의 눈앞에 휘휘 휘둘러지는 하얀 손이 있었다. 현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
“무슨 생각 하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죠.”
현성은 다시 걷기 시작하며 주변을 흘끔 쳐다보았다. 알 듯 말 듯한 찝찝함을 안고, 현성은 방금 전의 대화를 마음 어딘가에 묻어두고 걸음을 재촉했다.

* * *

맑은 쇳소리가 초원 한복판을 울렸다. 푸른 털을 가진 멧돼지 몬스터, <와일드 보어>가 엄니를 세우며 현성에게 달려들었다.
현성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버클러를 앞에 내밀어 그 돌진을 막아내며 살짝 흘리고, 멧돼지의 등 뒤로 돌아 오른손의 검을 우측 하단에서 좌측 상단으로 올리며 베었다. 강철로 만들어진 날이 햇빛을 반사하며 번뜩이고, 푸른 멧돼지의 가죽을 뚫고 검상을 남겼다.
<와일드 보어>가 고통에 찬 괴성을 질렀다. 그러고는 분노에 눈을 불태우며 몸을 돌려 다시금 현성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현성은 이미 버클러를 앞으로 내밀고 검을 뒤로 빼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은빛 날이 섬광이 되어 쏘아졌다. 날카로운 롱 소드의 날은 멧돼지의 가죽 정도는 손쉽게 뚫고, 미간을 정확하게 관통해 두개골을 부수며 그 안에 있는 뇌까지 정확하게 찔렀다. 그것으로 모든 생명력이 다했는지 와일드 보어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황금빛 빛무리가 되어 사라져 갔다.
“현성 씨! 왼쪽이요!”
날카로운 유정의 외침이 들렸다. 현성이 급히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이미 바로 코앞까지 멧돼지가 돌진한 후였다. 반격할 시간은커녕 막을 시간조차 없었다. 손쓸 도리도 없이 푸른 멧돼지가 엄니를 세우며 사정없이 현성의 허리를 들이받았고, 현성은 그 충격으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큭……!”
둔중한 통증이 느껴졌다.
현실이었다면 이것만으로도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멧돼지에게 무방비로 들이받혀도 바로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터프한 생명체가 아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달랐다. 게임과 같은 규칙이 적용된 탓인지, 촉감은 별다를 것이 없는데 통증은 굉장히 약화되어 있었다. 멧돼지에게 들이받히는 것도, 싸움을 하다가 주먹에 얻어맞은 정도의 통증으로 약화되어 있었다.
전투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다행이다. 현성은 그렇게 생각하며 작은 신음을 내뱉는 것으로 통증을 참은 후, 검을 들며 다시 달려들려는 멧돼지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때, 황금빛 광선이 날아와 멧돼지의 몸을 관통했다. 레벨 3이 되어서야 겨우 배운 <프리스트>의 공격 스킬, <징벌의 빛>이었다.
대미지는 높지 않지만 피격된 대상에게 다소의 경직을 주는 효과가 있다. 멧돼지가 잠깐 멈칫하는 그 순간을 노려, 현성은 곧바로 땅을 차며 멧돼지에게 돌진했다. 경직 시간이 풀리고, 멧돼지가 엄니를 휘둘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깔끔하게 회피하며 그 옆으로 돈 현성은 원심력을 이용해 멧돼지의 옆구리를 가르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멧돼지의 등뼈에 검을 깊게 박아 넣는 것으로 공격을 마무리했다.
“죄송해요. 저도 넋 놓고 보느라 늦게 알아차려서…….”
“아니에요, 괜찮아요. 오히려 도움이 됐어요.”
재빨리 초급 회복 스킬, <치유의 손길>을 걸어주며 계속해서 사과하는 유정에게 현성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별로 대단한 대미지도 아니었고, 대응 불가능한 상황에 빠진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후위에서 회복 스킬을 캐스팅하며 지원해 주는 그녀 덕분에 사냥의 효율이 크게 올라갔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감사할 정도였다.
현성의 위로에 유정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미소를 되찾았다. 그러고는 살짝 망설이며 현성의 눈치를 살피더니 말을 걸어왔다.
“대단하시네요. 저기…… 혹시 원래 검도 했나요?”
“아뇨. 그런 건 전혀…….”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부정했다. 검도는커녕 그 흔한 태권도 학원조차 다녀본 적이 없는 그였다. 중학생 이후부터는 동생을 뒷바라지하느라 학교에조차 가지 못한 것이다.
“죄송해요! 그…… 검을 너무 잘 쓰셔서, 혹시 검도 하시던 분인가, 하고 생각했어요.”
“아, 그건…….”
현성은 그제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이런 실력을 갖게 되었는지는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다. 열두 개의 직종 중 근접 공격 계열인 <글래디에이터>를 선택하고, 검을 잡은 순간부터 자신의 몸에 주입되어 있던 것이다.
“직업을 선택하면 그에 맞는 기술을 얻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글래디에이터>니까 검술이고, <레인저>나 <스나이퍼>라면 뭐…… 궁술이겠고. 유정 씨도 스킬 쓰는 방법을 누구한테 배우거나 하진 않았잖아요?”
“아, 그런가요? 되게 편리하네요.”
“편리하죠.”
현성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편리했다. 검이라는 무기는 생각보다 다루기 쉬운 무기가 아니다. 단순히 정지된 물체를 찌르고 토막 내는 정도가 아니라, 실전에 적용할 정도로 제대로 다루려면 많은 연습과 수련이 필요한 무기인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을 전부 패스하고 몸에 바로 주입시켜 주니 편리하다는 말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현성은 검을 집어넣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레벨 3∼5 정도의 몬스터인 와일드 보어와 레벨 2∼3 정도인 회색 사슴, <그레이 디어>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현재 현성의 레벨은 7, 유정의 레벨은 4까지 올라 있었기 때문에 낮은 레벨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은 점점 효율이 떨어지고 있었다.
“저기 한 번 가보면 어떨까요?”
유정이 다시 명랑한 목소리로 말하며 손가락으로 어느 한곳을 가리켰다.
푸른 나무가 울창한 숲이 눈에 들어왔다. 그다지 먼 곳은 아니었다. 걸어서 10분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기 뭐가 나오는데요?”
“마을 사람들 말로는 숲에 늑대가 산다고 그랬거든요. 늑대라면 멧돼지보다 레벨이 높지 않을까요?”
“왠지 무리 생활을 할 것 같은데…….”
현성은 껄끄럽다는 듯이 중얼거렸지만, 사실 좀 끌렸다. 전위직인 현성과 후위 회복직인 유정은 꽤 조합이 좋았고, 만약 유정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직 다른 사람들이 발을 들이기 전인 사냥터를 선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볼까요, 그럼.”
“네. 회복은 맡겨주세요.”
사실 그녀의 회복은 타이밍이 살짝 느리지만, 현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밍이 좀 늦어도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고, 상대가 다수라면 그녀가 뒤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지가 된다.
숲은 생각보다 멀었다. 약 15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숲은 멀리서 보던 것과는 조금 모습이 달랐다.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울창한 숲이라기보다는, 듬성듬성 자란 고목이 햇빛을 가리고 있는 텐트 같은 느낌이었다.
“현성 씨, 저기……!”
유정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성은 재빨리 발검하며 몸을 돌렸다. 시퍼런 안광을 빛내며 그들 쪽으로, 늑대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숫자는 세 마리.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고유명이 그들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그레이 울프>. 레벨은 각각 6, 6, 7. 멧돼지를 상대한 경험을 고려한다면, 세 마리 정도는 그다지 상대하기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였다. 현성의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그는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후방에서 <그레이 울프> 네 마리가, 좌우측으로 두 마리씩이 더 모습을 드러냈다. 총 열한 마리.
“쳇…….”
현성은 혀를 찼다. 이렇게 된 이상, 뒤에서 회복 스킬을 써줄 유정을 믿고 수비전을 펼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일검이 아닌 검과 방패 조합이다.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돌린 순간, 현성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어…… 으…… 아…….”
유정은 완전히 겁에 질려 새파래진 안색으로 이빨까지 부딪치며 떨고 있었다. 두 손은 가슴 앞쪽에 모은 채 석장을 있는 힘껏 쥐고 있었다. 손의 떨림이 석장에 전달되어 끝에 달린 방울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무리도 아니다.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다. 화면 너머로 조그맣게 표시되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상대는 자신을 먹잇감이라 생각하는 맹수이며, 그들은 맹수의 생생한 살의와 정면으로 마주쳐야 하는 것이다.
서슬 퍼렇게 빛나는 눈, 침을 질질 흘리는 입과 그 입속에 있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면 인간은 어느 누구라도 원초적인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하물며 유정은 현대 도시에서 평범하게 살던 여자일 뿐이다.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는 맹수에게 익숙할 리 없었다.
이 세계가 게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잊고 있었다. 현성도 그 사실을 간과했다. 작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그 사실을 간과한 대가는, 공포에 질려 패닉 상태가 된 그녀의 모습이었다.
현성은 유정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눈에 눈물까지 고인 채 덜덜 떨며 자신을 바라보는 유정에게 현성은 짤막하게 말했다.
“길을 열게요. 떨어지지 마세요. 스킬은 자제하고.”
유정은 덜덜 떨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현성은 검과 방패를 쥐고 입술을 꾹 깨물며, 가장 숫자가 적은 왼쪽을 향해 달음박질했다. 속도를 유정과 맞추며 현성은 두 마리의 늑대에게 육박했다.
늑대 두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멧돼지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그 속도에도 현성은 당황하지 않고 버클러를 들어 한 마리의 돌진을 차단하고, 오른손의 검으로 남은 한 마리의 목을 정확하게 그었다.
깨갱!
애처러운 울음소리와 함께 검에 베인 한 마리가 잠시 동안 나가떨어졌다. 현성은 휘두른 검을 회수하며 동시에 버클러에 매달린 늑대의 목을 꿰뚫은 후, 그대로 팔을 휘둘러 늑대를 옆으로 던져 버리며 검을 뽑았다.
하지만 나머지 늑대들이 가만히 구경만 할 리가 없었다. 어느새 그들을 포위하고 있던 늑대들 중 두 마리가 그 빈틈을 정확히 찔러 들어오며 현성에게 이빨을 들이댔다.
“이익!”
이상한 기합과 함께 유정이 캐스팅한 <징벌의 빛>이 두 늑대의 머리를 관통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를 돕기 위해 있는 힘껏 쏘아낸 그녀의 스킬은 현성이 자세를 바로잡을 소중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현성은 검을 납도하듯 왼쪽 허리춤에 갖다 대며 자세를 낮췄다. 늑대 다섯 마리가 한꺼번에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타이밍을 맞춰 현성의 팔이 움직였다.
“고개 숙여요!”
다급한 외침에 유정이 황급히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녀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베어내며, 현성의 검이 원형으로 휘둘러졌다. 달빛처럼 푸른 검광을 뿌리며 <만월 베기>가 다섯 늑대의 몸을 나란히 깊게 갈랐다.
단 일격으로 늑대 다섯 마리의 HP가 70%가량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리스크도 컸다. 스킬 사용 후 찾아온 딜레이를 틈타 한 마리가 왼쪽 어깨를, 다른 한 마리는 허벅다리를 물어뜯었다.
“윽……!”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참을 만하다. 현실보다도 훨씬 약화된 이 세계의 통증에 감사하며, 현성은 즉각 허벅다리를 깨문 늑대의 머리에 검을 박아 넣고 찢듯이 검을 뽑아내며 상처를 넓혔다.
뒤이어 왼쪽 팔꿈치를 뒤로 세게 빼 늑대의 복부를 가격하고, 떨어져 나가는 늑대를 다시금 검으로 베었다.
그사이 캐스팅된 유정의 <치유의 손길>이 현성에게 닿았다.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느끼며 현성은 다시 검을 휘둘러 달려드는 늑대들을 베어버린 후에 뚫린 길을 향해 달렸다.
“달려요!”
유정도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글래디에이터>인 현성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은 <프리스트>인 그녀로서는 버거운 일이지만, 짐이 되기 싫다는 마음 하나로 열심히 다리를 놀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달려온 늑대들 중 한 마리가 그녀에게 덤벼들어 허벅다리를 물어뜯었다.
“아악!”
상당히 약화된 통증이지만 아프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통증이 약화되었기에 느낄 수 있는 것도 존재했다. 송곳니가 허벅다리를 뚫고 들어오는 생생한 감촉과, 살의를 드러내며 자신의 몸을 물어뜯는 맹수의 모습은 현대 도시에서만 살아온 그녀를 패닉으로 몰아넣기에는 충분했다.
유정은 그 자리에 힘없이 쓰러지며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아아악! 떨어져! 떨어져! 꺄아악!”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진 유정은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가느다란 다리가 허공에서 붕붕 휘둘러지며 늑대의 몸을 필사적으로 때렸지만, 육탄전과는 담을 쌓은 <프리스트>인 그녀의 발버둥이 의미 있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리 없었다.
“유정 씨!”
그 모습을 보고 그녀에게 달려 나가려던 현성의 앞을 늑대들이 가로막았다. 하지만 현성은 개의치 않고 그녀에게 똑바로 달려가며 손에 든 롱 소드를 휘둘렀다. 두 마리의 늑대가 검에 베여 쓰러졌지만, 그 틈을 타 달려든 다른 늑대들이 현성의 양 허벅다리와 옆구리를 물어뜯었다.
“큭……!”
옆구리와 허벅지 쪽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불쾌한 촉감을 애써 무시하며 현성은 유정 쪽으로 다시 시선을 던졌다. 이미 세 마리의 늑대가 유정의 사지를 물어뜯고 있었다. 눈물에 젖은 얼굴과 패닉으로 인해 공허해진 눈을 하고도 유정은 천천히 석장을 들어 올려 그에게 <치유의 손길>을 캐스팅했다. 놀라운 집념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 더 이상 비명을 지를 힘조차 없이 공허해진 눈으로 그녀의 몸은 축 늘어졌고, 오래 걸리지 않아 HP가 제로로 떨어졌다. 비참하게 늑대 무리에게 물어뜯기며 그녀의 몸은 천천히, 황금 빛무리가 되어 소멸해 갔다.
“망할…….”
자신도 머지않았다. 남은 HP는 약 20%. 유정을 공격하던 세 마리의 늑대도 유정이 사망하자 현성 쪽으로 다가왔다. 현성은 온몸이 물어뜯기는 와중에도 다시 같은 자세를 잡고 스킬을 발동시켰다.
반원 형태의 공격을 가하는 스킬, <반월 베기>. 하지만 이번에는 얕았다. 자세가 흔들려 검이 닿은 것은 고작 두 마리뿐이었다. 그 두 마리는 빛무리가 되어 사라졌지만, 나머지 네 마리의 몬스터는 사정없이 현성의 몸을 할퀴고 물고 뜯었다.
결국 현성의 HP 역시 0까지 떨어졌다.
“제기랄…….”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버티지 못한 현성은 결국 바닥으로 쓰러졌다. 온몸이 황금빛 가루가 되어 부서지기 시작했다. 의식이 어디론가 날아간다. 원래 세계에서 죽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느낌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느껴지고, 곧이어 현성은 자신의 존재조차도 확정 지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 간다. 나와 타인을 구분할 수 없다. 진짜 나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간다. 마치 세계가 의지를 갖고 그의 존재를 삭제해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곧 현성은 생각조차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의식은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의식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인지할 수 없었다. 그 인지할 수 없는 것에는 자신조차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현성은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를 잃어갔다.
잠시 후, 급속도로 의식이 재구축되더니 곧 모든 인식이 돌아왔다. 모든 존재가 느껴졌다. 자기 자신에 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현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성스러운 햇빛이 창살을 통해 들어와 현성을 비췄다. 현성은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동시에 의심하고 있던 어떠한 사실을 확신했다.
이곳은 대신전.
그리고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죽음이자 부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