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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서점 6화

1. 오후 3시 (6)



“이래 보여도 할 일 많아. 회사만 다닌 너는 모르겠지만.”

팔짱을 끼고, 단호하게 말하자 이제 곧 이죽거리려고 발동을 거는 입이 보였다. 이현이 헛소리를 늘어놓을까 봐 나는 서둘러 마루의 어깨를 토닥이곤, 문 쪽으로 등을 떠밀었다.

“마루야. 시간 다 됐으니까 먼저 가 봐.”

“아, 네. 형 수고하셨어요.”

자리가 불편하긴 했는지, 마루는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부리나케 짐을 챙겨 발을 옮겼다. 출입문 쪽으로 가는 도중에 이현에게 목 인사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련 한 톨 없어 보이는 뒷모습에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사이 잠깐 뒤를 돌아본 마루가 내게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내일 봐요, 형.”

욱씬. 심장이 아릴 정도로 귀여운 얼굴이었다. 그 기분은 마루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도 지속되었다. 입꼬리가 뇌의 신호를 어기고 하늘 높이 치솟자 옆에서 지켜보던 이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얼씨구.”

“뭐. 왜.”

마루가 가고 나니 드디어 편한 말이 나왔다. 사실 이현에게는 항상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는데, 그런 모습을 마루에게 보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현은 카운터 책상에 팔을 올려 기댄 채 고개를 까딱거렸다.

“귀엽네. 우재가 얼굴을 많이 보는 편이었구나?”

“얼굴 보고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런 것치고는 너무 예쁘게 생겼는데.”

“그거 말고는…… 아무렇지 않아?”

“뭐가?”

이현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태하도 그렇고 둘을 보면 내 친구지만 참 편견 없는 사람이다 싶다. 내가 이런 말을 꺼내는 게 무색할 정도로.

“남자잖아.”

“……?”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에 이현은 코미디 프로그램이라도 본 것처럼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풀이 죽은 내 목소리가 우스웠을까? 수치스러움이 밀려드는 동시에 괜히 말했다는 후회를 했다. 내가 그만하라고 성을 내도, 이현은 아예 눈꼬리에 눈물까지 매달고 내게 삿대질을 해 댔다.

“네가 그런 걸 신경 써? 우재 성질 다 죽었네, 이렇게 소심해지고.”

“하, 내가 너한테 뭘 물어. 여긴 왜 왔는데.”

한창 나를 놀리던 이현은 그제야 여기 온 목적을 자각한 모양이었다. 반듯했던 미간이 좁혀지며 탐탁지 않은 마음을 내비쳤다.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주제에 태세 전환 한번 빠르다.

“오늘 가족 모임 하자는데 네가 전화를 안 받아서 그렇잖아. 왜 나보고 데려오라는 건지.”

전화? 확인한 통화 목록에는 부재중 전화 열 통이 찍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종일 휴대폰을 켜 본 기억이 없다.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마루랑 있는 게 좋아서, 진동이 오는 걸 느끼지도 못했다. 나는 툴툴댄 게 민망해져 멋쩍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화 온지 몰랐네.”

“도우재 부모님 불쌍해…….”

“야. 너도 그렇게 좋은 딸은 아니잖아.”

“너보단 나아. 나는 군말 없이 회사 다니잖아.”

그 말은 맞았다. 이현의 아버지는 내 아버지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동네 친구였는데, 대학을 졸업한 후 비슷한 시기에 사업을 시작하셨다. 아버지는 어릴 때 가난한 집에서 자란 탓에 군것질을 하지 못한 게 한이었다고 한다. 같은 이유로 슬픈 기억이 있던 이현의 아버지는 저렴한 아이스크림을 널리 보급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지금의 방긋하드, 대한민국 굴지의 아이스크림 회사를 창립하셨다. 뒤이어 아버지가 과자 회사인 킹스낵을 만들면서, 두 회사는 주가 한번 내려가는 일 없이 지금껏 승승장구해 온 대기업으로 자라났다.

확실히, 아버지가 열심히 키워 낸 회사를 걷어차고 나온 나보다 기업을 이어받기로 마음먹은 이현 쪽이 조금 더 나아 보였다.

장태하와 나는 유년기 시절부터 함께했지만, 이현과의 인연은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전까지 이현이 해외에서 거주했기 때문이다. 타국에서 생활하기 힘들었겠다 해도, 덕분에 한국말보다 더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가졌으니 본인은 만족하는 듯했다.

그리고 이현은 우리를 처음 본 그날, 장태하에게 반했다.

“태하는 왜 같이 안 오고.”

“먼저 끌려갔어. 네가 아들 노릇을 제대로 못하니까 괜히 장태하만 고생하잖아. 화상아.”

지극히 편파적인 결론에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아들 노릇을 못 하는 건 사실이지만, 장태하가 집안에 끌려다니는 건 천성이 착하기 때문이었다. 자기도 그런 성격 때문에 태하를 좋아하면서 꼭 저렇게 내 탓을 한다. 나 때문에 둘이 있을 기회를 놓쳐 속상해서 저러는가 싶어 토를 달지는 않았다. 전에는 몰랐는데 마루를 좋아하게 되니 이현의 마음이 어떨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 봤자 10년째 짝사랑 중인 이현의 발치에도 못 미치겠지만.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모이자는 건데?”

“몰라. 어차피 또 말도 안 되는 이유일 텐데.”

어련할까. 나와 이현, 태하의 부모님은 쓸데없는 이유들로 가족 모임을 만들어 내곤 했다. 갑자기 윷놀이가 하고 싶어졌다며 급히 호출당했던 적도 있고,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고 호들갑을 떨길래 버선발로 달려가 보니 빙 둘러앉은 자리 한가운데 개가 짖고 있었다.

매번 당하면서도 우리가 싫은 소리 하지 않고 꼬박꼬박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사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고 싶은 가 보지 뭐.”

이현은 그 말을 하면서 파스스 웃었다. 가족. 명백히 다른 세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이 관계를 그것 외에 다른 단어로 정의 내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팍팍한 세상에서 내 편들어 줄 사람이 아홉이나 된다는 건 꽤 멋진 일이었다. 보통 빽이 아니다. 나는 문득 든든하다고 말하던 마루의 얼굴이 떠올라 웃어 버렸다. 역시 아홉은 좀 애매해. 열 손가락을 채우고 싶다는 간지러운 욕심을 내며 이른 마감을 하기 시작했다.



***



-둘이 같이 오고 있어? 얼른 와. 운전 조심하고.

차를 타고 가는 길에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별다른 내용이 없는 통화였지만, 둘이 같이 오고 있냐고 강조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의심스러웠다. 등 뒤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왜 오한이 드는 거지. 뭔가 수상한데.”

“뭐 어때. 나는 어른들 일 꾸미는 거 보면 재밌는데. 이럴 땐 꼭 작당하는 애들 같아.”

하지만 으레 그랬듯이, 부모님들은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의 사고를 치고야 만다.

팡-!!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터지는 폭죽을 보며 의미를 알 수 없는 축하를 받아야 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신가. 아버지는 핑크 셀로판지를 덧대 만든 우스꽝스러운 하트 모양 안경까지 쓰고, 나와 이현의 어깨를 동시에 잡았다. 설렘 가득한 얼굴이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이현이 아빠랑 얘기해 봤는데. 너희 둘 약혼시키기로 했다.”

“예?”

“네?”

동시에 당황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침 드라마라도 보셨나 갑자기 무슨 약혼이야. 당연히 장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어수선한 분위기에도 부모님들의 얼굴은 제법 진지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하나 마음먹으면 끝장을 보는 사람들이었지. 뭐에 꽂힌 건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가다간 꼼짝없이 이현의 약혼자 행세를 해야 될 판이었다.

그러던 순간, 나는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기가 막힌 묘안을 떠올렸다. 이현이 태하를 좋아한다고 알리는 것. 그치만 이걸 말해도 되나? 찰나 고민하는 사이 강이현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나를 팔아먹었다.

“우재 좋아하는 사람 있는데요.”

순식간에 여덟 개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쏟아졌다. 망할 강이현. 아무래도 오늘 봉변은 내 몫인 게 분명하다. 묻고 싶은 게 많은 입들이 하나같이 씰룩거렸다.



쨍-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거실 안을 청명하게 메웠다. 멀쩡한 소파를 두고 나와 장태하, 강이현은 내 집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둘러앉아 뒤풀이를 하는 중이었다. 가족 모임이 끝나고 나면 늘상 있는 일이다.

“아씨, 애초에 장태하 네가 이현한테 말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거잖아.”

나는 꽤 들이부은 술에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상태로, 투정 부리듯이 성을 냈다.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태하는 붉어진 뺨을 마른세수하듯 문지르며 웃어 댔다.

“진짜 웃긴다. 아무리 그래도 거기서 빵 터뜨릴 줄은 몰랐지. 적당히 어른들 맞춰 주다 보면 잠잠해질 텐데 왜 그랬어, 이현아.”

“쟤랑은 그 적당히조차 하기 싫어서 그렇지.”

누군 하고 싶은 줄 아나. 그 와중에도 장태하의 옆에 꼭 붙어 앉은 이현의 모습이 꽤나 얄미웠다. 내가 먼저 확 질러 버리는 건데. 가족 모임 내내 질문에 시달렸던 것을 생각하니 또 억울한 마음이 태풍처럼 몰아쳤다.

“강이현 너 진짜…… 너도, 어?”

“너도 뭐.”

말자 말아. 여기서 더 말하면 나만 쓰레기 되는 거지. 나는 태하에게 사실을 말하려던 쪼잔한 마음을 한 발짝 물렸다.

이현이 내게 짝사랑을 들켰을 때 처음 했던 말은 도와줄 거 아니면 모른 척만 해 달라는 소박한 부탁이었다. 놀라거나 눈물을 보이지 않는 그 덤덤한 반응이 참 강이현답다고 생각했는데, 약하게 주먹 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가벼운 마음이 아니라는 건 그날 단박에 알았다.

“그래서. 언제부터 친해진 건데? 어쩔 줄 몰라서 난리칠 땐 언제고.”

아마 이 자리에서 제일 아무 생각 없을 태하가 해맑은 질문을 던졌다. 뒤에 이현이 눈을 부라리며 말을 보탰다.

“말도 마. 둘이 같이 있는데 얼마나 면박을 주던지, 눈빛이 아주. 한 대 치는 줄 알았네.”

“지금 쳐 줄까?”

“아니.”

대답은 잘한다. 저러면서 태하의 입에 마른 오징어를 넣어 주는 게 가증스럽기까지 했다. 이현은 내가 짝사랑을 눈치챈 후부터 묘하게 까칠하게 굴더니 요즘은 대놓고 나를 갈구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태하가 눈치 못 챈 게 신기할 정도다. 쟤는 혼자 꽃밭에 사는 건가. 어떻게 저렇게 티가 나는데도 모를 수가 있지?

그러고 보면 학생 때부터 그랬다. 발렌타인데이 날 태하는 자기 서랍에 있는 초콜릿을 몽땅 나에게 주면서 ‘애들이 잘못 넣었나 봐’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오히려 이현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하필 바보를 좋아하다니…….

딴생각에 빠져 있으니 장태하가 다시 옆구리를 푹 찔러 왔다. 평소와 다른 내 행동에 호기심이 왕성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관심은 딱 거기까지만, 그 정도가 좋았다.

“그냥 시간이 맞아서 알바만 하게 됐어. 그리고 너희 둘, 오늘부터 도토리 서점 출입 금지야.”

“와, 우재 단속한다.”

“이미 다 봤는데 뭐 어때. 남한테 안 보여 주려는 거 그거 집착이야.”

도대체 이놈들 뇌 속에 나는 어떤 이미지인 걸까. 단속한다고 놀리는 이현보다 침착하게 잘못이라 짚어 주는 태하의 말이 더 상처였다. 해도 해도 너무하네. 정말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서 그러는 건지, 답답함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애초에 지금 너희 때문에 이 사달이 났는데 그렇게 말하고 싶냐?”

“하긴. 나 아까 우재 아버지 말씀하시는 거 보고 깜짝 놀랐어.”

태하는 아까의 일을 회상하며 몸을 흠칫 떨었다. 덕분에 나도 쓸데없는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나도 며느리 생긴다! 며느리 생기면 하루에 과자 열 박스씩 줄 거다!’

‘하지 마요. 그런 거…….’

뻐근한 눈 옆을 양손으로 꾹 눌렀다. 누구 배를 터뜨려 죽이려고. 그런 불량 식품을 마루에게 먹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예쁜 입에는 전문 파티쉐가 만든 건강하고 예쁜 디저트가 들어가야 한다. 알록달록하고 귀여운 그런 것들 말이다. 예쁜 입술이 오물오물거리는 걸 상상하며 바보같이 웃고 있자, 이현이 대번에 찬물을 끼얹었다.

“잔뜩 기대하시는 것 같던데. 근데 우린 상관없지만. 우재 부모님도 상관없나? 남자인 거.”

분위기가 일순 얼어붙었다. 우리야 그렇다 쳐도 부모님들이 쉽게 이해해 주실지 모르는 일이었다. 태하는 벌써 가엾다는 듯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도닥거렸다.

“내가 우재 아버지 설득해 볼게. 그래도 좀 개방적인 분이시니까 괜찮지 않을까?”

술 취해서 얼굴은 시뻘게진 주제에 혀꼬임 한 번 없이 잘도 말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이르다. 누가 설레발 집안 아니랄까 봐. 둘은 가장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문제를 간과하고 있었다.

“야…….”

커다란 한숨 뒤에 입을 떼자 둘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걘 지금 내가 자기 좋아하는 줄도 모르거든?”

뭐라도 진전이 있어야 문제도 생기는 거지. 사귀는 건 고사하고 고백도 못 해 본 상태인데 애들은 상견례 걱정부터 하고 있었다. 내 말을 들은 둘은 잠깐 마주 보며 눈빛을 교환하더니 불길하게 웃어 보였다.

“우리가 도와줄까?”

“출.입.금.지. 라고 했다?”

분명 아까 경고했는데 씨알도 안 먹혔나 보다. 한두 번 말하는 걸로는 절대 듣지 않을 게 분명해서, 이번엔 좀 더 강경한 어투로 으름장을 놨다.

“진짜로 오면 둘 다 죽을 줄 알아. 특히 강이현. 넌 나한테 빚진 게 있을 텐데?”

너, 장태하. 이른다. 눈으로 강렬하게 말하자, 뜻을 이해한 이현의 눈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그제야 입에서 만족스러운 대답이 나왔다.

“그래. 우재가 알아서 잘하겠지 뭐. 태하야, 우린 신경 끄자.”

태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닥을 짚은 손이 살짝 삐끗하는 게, 이제 정말 취한 모양이었다. 나는 해결했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내일 또 서점에 출근하려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더 안 마셔?”

마음에도 없는 소리. 이현은 하나도 아쉽지 않으면서 괜히 내게 물었다. 눈으로는 얼른 꺼지라는 듯이 노려보고 있으면서. 예예, 안 그래도 들어갈 겁니다. 나는 속으로 욕을 하며 이현이 바라는 모범 답안을 내 놓았다.

“어. 술에 절은 얼굴로 출근하면 안 되니까.”

이건 진심이다. 마루에겐 멀쩡한 모습만 보여 줘야지.

나는 입 모양으로만 이현에게 ‘좋은 시간 보내’라고 말해 주며 침실로 걸어갔다. 뭐 할지야 뻔하지. 밤새도록 장태하 얼굴만 주구장창 들여다보고 있을 거다. 원래 사람이 사랑을 하면 저렇게 바보가 되는 걸까? 침실 문을 닫기 전 좁은 틈 사이로 보이는 이현의 얼굴이 행복하기 그지없어서, 나는 어이없이 웃고 말았다.



***



다음 날 아침엔 자주 가는 베이커리에 들렀지만 디저트가 준비 중인 상태여서, 아쉬운 마음으로 샌드위치를 구입해 도토리 서점으로 향했다. 그랬더니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계단에 앉아 있는 마루가 보였다. 손목시계를 확인해 보니 아직 9시 40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또 선수를 뺏기고 말아 속상한 마음에 마루의 앞까지 빠르게 달려갔다.

“마루야. 천천히 나와. 일찍 오면 매번 이렇게 기다려야 되잖아.”

“괜찮아요. 여기 앉아서 기다리는 것도 꽤 좋아요.”

기다리는 게 좋다니. 보통 지루해하지 않나? 나는 그걸 마음 쓸까 봐 둘러대는 변명 같은 것이라 치부했다. 미심쩍어하는 내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마루는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여긴 조용하고 예쁘고, 그리고…….”

그리고. 거기서 말을 멈춘 마루는 내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힐끗거리며 훔쳐보던 걸 들켜서 귀에 열이 화악 올랐다. 시선을 피해 버리면 더 이상한 모양새가 될까 봐 버티고 있었더니, 목 안이 부들부들 떨리며 경련했다. 하…… 진짜 좋다. 속으로 탄식하며 깊게 한숨 쉬자, 마루는 내게 싱긋 웃으며 말을 갈무리했다.

“아니에요.”

기분 좋아 보이네. 어제의 심란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환기되는 기분이었다. 마루는 손에 꼭 쥐고 있던 우유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샌드위치가 들어 있는 봉투를 들고 흔들어 보였다.

“들어가서 샌드위치 먹자.”

먹는 걸로 꼬시는 게 비겁하더라도, 이것만큼 잘 먹히는 건 없지. 운 좋게도, 내가 생각한 편법은 그 이상의 몫을 해 주었다. 봉투를 확인한 마루는 내 생각보다도 더 크게 기뻐해 주었다.

“달달 제과!”

“아는 데야? 여기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데.”

“어릴 때 아버지가 일 갔다 오시면 항상 이 가게에서 빵을 사 오셨거든요. 아직 하는 줄 몰랐는데. 신기하다.”

나는 속으로 환희를 내질렀다. 이현에게 부지런한 미친놈 소리까지 들어 가며 일찍 집을 나온 보람이 있었다. 역시, 신은 내 편이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베이커리에 마루의 추억이 담겨 있다니, 이게 운명이 아니면 뭔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