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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서점 5화

1. 오후 3시 (5)



그렇게 돌아오는 시간이 아쉬울 정도로 독서를 좋아하는 나를 오늘 아침부터 웃게 만든 건 책이 아니었다. 출근 준비를 하는 머릿속에는 하얀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얼른 보고 싶네.

그런 생각이 드니 또 견딜 수 없어지는 것이다. 테이블 위에 컵을 아무렇게나 올려 둔 채 욕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몸을 씻은 뒤 가장 좋아하는 생장미 향의 향수를 뿌리는 동안에도 쿵쾅거리는 심장 때문에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다.

이거 데이트 아니다.

그러면서도 내 손은 멋대로 머리에 왁스를 바르며 멋을 내고 있었다. 괜찮은 것 같기도 한데…… 예전에 도이설이 이마를 내놓으면 나이 들어 보인다고 지적했던 게 떠올랐다. 그때는 그냥 욕하고 넘겼는데 왜 이제 와서 신경이 쓰이는 건지.

결국 왁스 바른 머리는 다시 감아야 했다. 평소와 같은 차분한 흑발마저 심심하게 느껴져, 염색이나 해 볼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보태며 집을 나섰다.

집에서 도토리 서점까지의 거리는 차로 40분 정도가 걸린다. 근처에 집을 구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슈퍼만 가도 서점 손님을 마주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대학 시절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잡았다가 얼마나 피를 보았는지. 심심하면 현관문 앞에서 들여보내 달라 죽치는 애들 때문에 조용할 날이 없었다. 주로 주동자는 장태하 놈이었다. 다 큰 성인이 되어서 친해진 이 중 그럴 사람이 있겠나 싶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내 집에 들어오는 불청객은 이미 둘로 충분하다.

서점 근처 주차장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9시 40분이 되어 있었다. 일찍 일어난 것치고 그리 이른 출근은 아니었다. 평소 잘하지도 않는 치장을 한다고 늦장을 부린 탓이다. 차 시동을 끄고 백미러를 통해 확인한 내 얼굴 표정은 아주 가관이었다. 아, 이게 뭐라고 긴장까지 하냐. 얼굴이 화끈거려 눈썹 위까지 내려온 앞머리만 괜히 만지작거렸다.

심호흡을 하고 뒷좌석을 돌아보니 미리 준비해 둔 화분이 흐트러짐 없이 잘 놓여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가드닝 서점인데, 마루에게 꼭 맞는 식물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마침 또 여름이기도 하니 적합해도 이렇게 적합할 수가 없는 꽃이다. 나는 활짝 핀 꽃송이가 다치지 않게 화분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차에서 내렸다.

또각또각, 오늘 처음 꺼내 신은 구두굽 소리가 가는 길목을 울려 댔다. 심장 박동은 그것보다 훨씬 빨랐다. 얼른 가서 커피부터 내리고 정돈을 마친 깔끔한 모습으로 반겨 줘야지. 아침을 안 먹었을 수도 있으니 동네 빵집에 가서 빵도 사 와야겠다. 일할 때 불편하니까 슬리퍼도 사고, 그다음엔…….

“아.”

나도 모르게 내뱉은 탄성이 두서없이 생각한 머릿속의 계획을 모두 날려 버렸다. 길목 끝에 다다라 보니 도토리 서점 앞에는 이미 나보다 먼저 와 있는 사람이 있었다. 울타리 사이에 놓인 나무 계단에 쪼그려 앉은 마루의 손에는 흰색 우유갑이 들려 있었다. 이제 우편함이 사용될 일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나는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앉아 있는 얼굴과 고즈넉한 서점 풍경이 퍽 잘 어울려서 한참을 그러고 서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눈을 굴리고 있던 마루는 자신이 먼저 나를 봤다고 생각했는지 벌떡 일어나 양팔을 뻗어 휘적거리기 시작했다.

“형, 안녕하세요!”

뒷목이 기분 좋을 만큼 뜨끈해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마루가 있는 계단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갈수록 심장은 더 깊게 뛰었다. 빠르게 뛰는 것과는 다른, 긴장으로 묵직하게 눌리는 감각. 왜 이런 감각이 오는 건지는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었다.

마루가 나를 기다리는 모습이 처음이라서.

겨우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붕 뜨기에는 충분했다. 드디어 마루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을 때, 마루는 다른 마음이라곤 한 톨도 없는 아이처럼 싱글벙글 웃었다. 그와 대조되게 한껏 굳어 있던 백미러 속의 얼굴이 생각나 실소가 터졌다. 아이고, 저걸 언제 나 좋아 죽게 만드나.

마루는 내 손에 들려 있는 화분의 정체가 궁금했는지, 화분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이건 무슨 꽃이에요?”

가느다랗고 예쁜 손가락이 꽃송이 하나를 톡, 건드렸다. 바로 눈앞까지 온 얼굴에 숨이 멎을 것 같지만 다행히 늦지 않게 대답이 나갔다.

“설악초야.”

“설악초요? 와, 이름이랑 엄청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꽃이 안 필 때도 엄청 예뻐. 너 주려고 가져왔어.”

괜히 마음이 티 날까 봐 민망해 떠넘기듯이 품에 밀어 주니, 마루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화분을 안아 들었다. 여름에만 피는 설악초 꽃이 계절에 딱 맞게 탐스러운 모양으로 하얗게 만개했다.

여름의 눈꽃이라 불리는 설악초의 꽃말은 ‘환영합니다’. 그런 성대한 인사는 남몰래 전하고, 처음은 소박하고 편안한 인사면 됐다.

“어서 와, 마루야.”

화분을 들고 마주 웃는 얼굴이 눈부실 정도로 잘 어울리는 아침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건 이게 아닌데. 나는 지금 책을 사러 온 아주머니와 화단에서 신나게 떠들고 있는 마루를 번갈아 지켜보았다. 어제 많이 깊어 보였던 상처는 살색 밴드를 갈아 붙이니 앞머리 아래로 말끔하게 가려졌다. 아침에 몇 가지 알려 주었을 뿐인데 마루는 그새 기억한 꽃 이름을 아주머니께 알려 주며 살갑게 굴었다.

“얘는 붓꽃이에요! 지금 피어 있는 꽃들은 다 여름에만 피는 꽃이래요.”

“어머, 보라색이 예쁘기도 하지.”

생각보다 더 잘 웃네. 저러고 있으니 꼭 엄마한테 재롱부리는 막내아들 같기도 하다.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고, 옹기종기 붙어 있는 둘의 모습이 썩 보기 좋아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한편으론 마루를 빼앗긴 것 같아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한창 속으로 서러움을 토로하던 중 갑자기 내 쪽으로 돌아보는 마루와 시선이 부딪혔다.

왜?

입 모양으로만 물어보니, 고개를 살랑살랑 젓기만 하고 다시 대화를 이어 간다. 나도 마루랑 말하고 싶은데. 새치기한 아주머니가 미워지려던 참이었다. 이제 집에 가려는 건지, 화단 앞에 쪼그려 앉았던 몸을 일으킨 아주머니가 마루의 팔을 툭툭 두번 도닥였다. 그새 정을 붙인 마루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스몄다.

배웅을 마친 마루는 곧장 나에게로 걸어왔다. 총총 걸음으로 다가오는 얼굴은 뭔가 말해 주고 싶어 견딜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내 욕이라도 한 걸까. 딱히 부적절한 태도를 취한 것도 아닌데, 서점에 오는 어르신들 중에는 나를 어려워하는 분이 많았다. 괜스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마루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험담이 아니었다. 마루는 자기가 칭찬받은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입을 뗐다.

“아주머니가 형 되게 잘생겼대요.”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적절하게 수긍했다.

“그래.”

마루가 생각한 대답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잠시 동안 넋을 놓던 마루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역시. 자기 잘생긴 거 잘 아는구나.”

장태하는 종종 나에게 칭찬할 건 껍데기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거라도 훌륭해서 다행인가 싶었다. 그래도 못생긴 것보단 잘생긴 게 낫겠지. 마루가 종종 내 얼굴을 쳐다보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는 말이 딱히 핀잔 주는 투는 아니어서 부정하지 않고 웃어 버렸다.

“아주머니는 마루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저 아는 아주머니예요. 카페 알바 할 때 몇 번 오셨거든요. 거북이 슈퍼에서 조금 더 가면 있는 달님빌라에 사신대요.”

풉, 또 거북이 슈퍼. 문득 마루는 이 버릇에 대해 자각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비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아 내고 말을 이었다.

“마루야. 너 여기 동네에 얼마나 살았어?”

“여기서요? 음…… 한 6년 정도 된 것 같아요.”

“어? 얼마 안 됐네?”

당연히 어릴 때부터 살았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게 개발이 되지 않은 지역이라 굳이 타 동네 사람이 옮겨 올 만한 곳이 아니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마루가 말을 덧붙었다.

“여기가 어머니가 살았던 동네라고 하더라구요.”

그 이상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이곳으로 왔다는 뜻이었다. 가족과의 추억이 가득한 집이 괴로워 떠나면서도, 어머니의 흔적은 그리워서였을까.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는 마루를 다독여 주고 싶었다.

“나도 여기로 이사 올까?”

“왜요? 통근 시간이 긴 게 좋다면서요.”

내가 그렇게 말했었나? 그 와중에 이유가 정 없어 보일까 봐 둘러댄 모양이었다.

“그땐 그때고. 지금은 다르지.”

“지금은 왜요?”

그땐 혼자서 책을 볼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또 다음에 기억하지 못할 가짜 핑계를 댔다.

“너무 덥잖아.”

“……역시 돈 많은 사람의 심리는 모르겠어요.”

“내가 돈 많은 걸 어떻게 알아.”

“형 나이에 이런 서점 하나 차릴 정도면 잘사는 거 아니에요? 권리금에 월세에 알바도 쓰고 차도 좋은 거 타면서.”

무심하게 내뱉는 마루의 말이 하나같이 현실적이어서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조금 많이. 얼굴 때문에 그런가, 스물여섯이면 그렇게 세상 물정 하나 모를 나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마루는 그런 것에 둔할 줄 알았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마루는 청소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얼이 빠진 나를 두고 서점 안쪽으로 향했다.

오늘 내가 당황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알던 모습은 마치 내 입맛대로 해석한 상상에 불과했다는 듯 마루가 보이는 행동 모두가 내 예측을 빗나갔다. 지금 팔을 걷어붙이고 야무지게 걸레질하는 모습 역시 그랬다.

나는 마루에게 책 정리하는 것을 시범 삼아 보여 주고, 커피 머신 사용법을 가르쳐 준 후 화단과 화분에 줘야 하는 물의 양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원래 내 계획은 일을 처음 배우는 마루가 실수할 때마다 능숙한 모습으로 처리하며 나를 어필하는 것이었는데, 이것 역시 내가 마루를 잘 몰랐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어설픈 발상이었다.

“우재 형! 너무 더러워요. 오늘은 안쪽만 닦고 내일 바깥쪽 닦을게요.”

“응…….”

되게 열심히 하네. 착용한 검정색 앞치마에는 희뿌연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마루는 일을 아주 잘하는 편이었다. 요령 피우는 법 없이 부지런한 모습은 또 마루답긴 했다. 책을 좋아해서 그런지 책 분류하는 법은 금방 배웠고, 카페 알바 경력이 있어서 커피 머신 다루는 건 일도 아닌 것처럼 해냈다. 꽃 이름도 말하면 척! 한 번에 외울 정도니 화단에 물 주는 것은 단 한 번만 알려 주어도 충분했다.

오후가 되고 나선 부정하고 싶었던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마루가 나보다 낫다. 처음에는 생각했던 그림이 나오지 않아 풀이 죽었었는데, 저렇게 열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딱히 그럴 일도 아니다 싶었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등이 아주 의젓해 보였다.

멋있네. 우리 마루. 괜스레 뿌듯한 마음이 들면서 웃음이 나왔다.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좋긴 했는데, 하나 아쉬운 건…… 풀타임이 아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편의점 알바 시간까지 모두 서점에서 일하면 안 되냐고 물었더니, 마루는 오래 일했던 곳이라 갑자기 그만둘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도 좀 우겨 볼 걸 그랬나. 전보다 한참 늘어난 일곱 시간마저 부족해서 갈증이 일었다.

“마루야. 이리 와 봐.”

언제까지 청소만 할 거야. 나 좀 봐 줘. 속뜻은 노련하게 숨기고 이름을 부르니 동그랗게 뜬 눈으로 달려온다. 나는 카운터 안쪽까지 들어온 마루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의자 위를 두드렸다. 알아들은 마루가 의자 위로 엉덩이를 붙여 앉는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자꾸만 눈치 없이 입꼬리가 올라가서 손으로 수습하며, 겨우 입을 뗐다.

“편의점 알바 몇 시부터야?”

“6시부터 11시까지예요.”

믿기지 않는 노동 시간에 경악하는 건 속으로만 했다.

“너무…… 늦게까지 하는 거 아냐? 위험하게.”

“괜찮아요. 남잔데 뭐 어때요. 그리고 저 생각보다 힘세요.”

퍽이나. 뼈대 자체가 얇은 마루의 손목은 내 손목의 반밖에 되지 않을 듯했다. 얼굴은 또 좀 예쁜가. 저런 얼굴로 생글거리며 손님에게 인사할 것을 생각하니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 아까부터 번호 물어볼 기회를 노리고 있던 나는 지금이 딱 적당한 타이밍이라고 판단했다.

“무슨 일 있으면 형한테 전화해. 알았지?”

그렇게 말하면서 주머니 속에 있던 휴대폰을 잡아 마루에게 내밀었다.

“번호 알려 줘.”

좋아, 자연스러웠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니 휴대폰을 가져간 마루가 번호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눌러 입력해 주었다. 사실, 알바 사장의 권한으로 받아 내면 될 일이었는데, 그런 간단한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나는 마루가 이름 칸에 입력해 준 <서마루>에서 <서> 자를 몰래 빼고 저장했다. 알려 준 내 번호 이름 칸에 <우재 형>이라고 적는 마루를 봤을 때에는 아주 흡족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럼 이제 저도 빽이 생긴 거예요?”

번호 저장을 마친 마루가 헤헤거리며 웃었다. 지난번에 내가 힘 있고 빽 있다고 한 말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어. 엄청 좋은 빽.”

“든든하네요.”

진심인지 모를 그런 말을 하면서 마루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벽시계를 확인하니 5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마루의 등 뒤로 손을 뻗어 착용하고 있는 앞치마의 매듭을 풀어내고 서둘러 벗겼다. 다시 청소한다고 일어나면 곤란하니까. 그러느라 바짝 붙인 몸에서는 포근한 살냄새가 났다.

“왜, 왜요?”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당황했는지 마루는 말까지 더듬으며 이유를 물었다. 귀여워서 꽉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아 내며 몸을 물렸다.

“좀 있으면 5시야. 이제 일 그만하고 쉬자.”

마루는 내 말을 들은 후에 시계를 확인하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 몰랐나 보다. 처음 하는 일에 정신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나와 있는 게 즐거워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루에게 지루하지 않았을 시간이라 생각하니 기쁜 마음이 들었다.

내부를 둘러보니 웬일로 이 시간에 사람이 없었다. 나는 잠깐 서점 문을 닫고 마루와 저녁을 먹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루가 뭘 좋아할까? 왠지 피자나 토마토 스파게티에 환장하는 아이 입맛일 거라 짐작되었다.

하지만 마루에게 저녁 먹자는 제안을 하기도 전에, 서점 안으로 여자 손님 하나가 들어섰다. 하여튼 눈치 없는 손님이다. 물건 파는 사람의 본분을 잃고, 원망스러운 눈으로 삐죽하게 쏘아보니, 꽤 익숙한 얼굴이 단정하게 웃어 왔다.

“우재야. 오랜만이네?”

자기가 분위기를 망친 줄도 모르는지, 웃으며 건네는 인사가 아주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오랜만은 무슨, 네가 여길 왜 와?”

강이현은 장태하와 같이 내 집에 쳐들어오는 불청객 중 하나였다.



내가 별로 달갑지 않다는 의사를 내비쳤음에도 불구하고, 이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뒤에 따라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장태하는 같이 안 왔나 보다. 원래 한 세트로 묶여 다니는 애들이 웬일인가 싶었다.

가까워지면서 나를 보던 이현의 시선이 마루에게로 넘어갔다. 그제야 다른 사람의 존재를 눈치챈 듯했다. 마루의 얼굴을 확인한 이현은 굳이 의아함을 숨기지 않았다.

“누구야?”

하여튼 눈치 하나는 빠르다. 이미 태하한테 들어서 잘 알 텐데, 굳이 내 입으로 소개받겠다는 의지가 번뜩이는 눈을 뚫고 나왔다. 재밌는 걸 발견했다는 거지. 이래서 강이현한텐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건데, 현장까지 잡혔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말해 주기엔 지는 기분이 들어서 잠시 버티고 서 있을 때였다.

“저는 알바생이에요.”

우리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마루가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소개했다.

“아. 아르바이트하시는구나.”

능청스럽게 반응한 이현의 시선이 다시 내게 돌아왔다.

“근데, 이렇게 한가한 서점에도 일할 사람이 필요해?”

이현은 아주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내 반응을 살폈다. 날카로운 질문이 귀를 파고들자 이마에 식은땀이 나왔다. 쟨 누굴 닮아서 저렇게 얄미울까. 대답하기 싫었지만, 마루가 보고 있어서 대충이라도 둘러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