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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서점 1화

<1부>

1. 오후 3시 (1)



“안녕하세요.”

“네. 어서 오세요.”

몇 주 전부터 우리 서점에 매일같이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서점에 매일 오는 게 어떻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글쎄. 책의 수를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대형 서점이라면 모를까, 여긴 나 혼자 운영하는 작은 개인 서점이었다. 좀 특이한 점이라면, 가드닝을 함께한다는 것 정도.

저것 봐, 또 웃네. 분무기를 쏘며 작은 화분들에 물을 줄 때도 곁눈질로 책을 보는 남자를 살폈다. 따라 씨익 웃으며 눈을 돌리다 내 앞에서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던 손님과 눈이 마주쳤다.

“하하.”

젠장. 동시에 어색한 웃음을 흩뿌리며 자리를 피했다. 바보같이 웃고 있던 것이 들켜 짜증이 난 것이다. 하지만 저쪽도 그리 근사한 미소는 아니었기 때문에 서로 빚진 걸로 치자 생각하며 서점 밖에 있는 화분에 물을 주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외관이 전부 나무로 된 서점 건물 위로는 역시 체리 나무를 깎아 만든 반듯한 목판에 가게 이름이 오목한 모양의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도토리 서점>

글자 옆에 새긴 책 모양의 그림과 직접 고른 덩굴로 가장자리를 장식해 놓은 모습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인조 덩굴이라는 점이 아쉬웠지만, 자연 덩굴로 해 놓았다간 몇 년 안에 온 건물이 덩굴에 잠식당한 으스스한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던 인테리어 시공자의 말 때문에 의견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서점 입구의 좌우로는 목장의 울타리처럼 툭툭 대충 박아 넣은 나무 기둥이 자연의 분위기를 더했다. 그 주변으로 온갖 풀과 꽃들이 가득하니 오는 손님마다 숲속에 있는 비밀 서점에 온 것 같은 기분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북적거리는 공간이 되는 것은 내키지 않아 일부러 인적이 드문 곳에 터를 잡았는데도 예쁜 외관 때문인지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울타리에서 입구와 가까운 곳에는 여러 가지 꽃들이 심어져 있는데, 개화 시기가 제각각이라 계절마다 번갈아 가며 노랑, 파랑, 빨간색 꽃들이 생명을 피웠다. 같은 색의 꽃이 피는 걸 사이좋게 두 번씩 봤으니 서점을 운영한 지 2년째가 되는 달이었다.

촌스럽게 볼 수도 있지만 나는 이렇게 자기만의 일정한 주기를 갖는 것들이 좋았다. 굳이 달력을 보지 않아도 시간과 계절을 알려 주는 것들. 또 관심을 들인 만큼 싱그러운 빛을 내 주는 게 보람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풀 향내 나는 곳에서 책을 읽는 것은 어찌나 좋은지, 손님이 없을 땐 울타리 뒤쪽에 마련해 놓은 나무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게 일상이 되었다. 햇살에 그을린 책 냄새를 킁킁대며 맡고 있으면 그날은 차라리 손님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니 이상한 일인 거다. 매일 같은 방문에 벌써 적응이 된 건지, 오후 3시만 되면 오는 그 남자 손님이 지나치게 반가웠다. 물론 티를 낸 건 아니었지만.

예의 바른 남자는 들어올 때마다 항상 인사를 거르지 않았다. 모든 손님들이 인사를 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매일같이 똑같은 시간에 한사람에게서 인사를 받는다는 건 꽤 특별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개나리가 봄이고, 붓꽃이 여름, 코스모스가 가을, 동백꽃이 겨울이라면, 저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햇살이 깊게 들어오는 오후 3시가 되어 있던 것이다.

남자가 3시에 와서 하는 행동은 거의 같았다. 서점 한가운데 놓여 있는 추천 도서 코너에 서는 것. 어쩌면 그게 그 남자를 신경 쓰이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있었다.

다른 서점과는 다르게 도토리 서점의 추천 도서는 오직 주인인 내 기준에서 고른 책들이었다.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라 읽어 보고 좋았던 책을 올려놓는 곳인데, 남자는 항상 그중 책 하나를 골라 들고는 얼굴을 찌푸리다, 웃다가, 어쩔 때는 눈물을 글썽거리곤 했다.

알기 쉬운 그 감정 표현 탓에 나는 요즘 나 혼자만 아는 퀴즈 놀이에 빠져 있었다. 남자가 책을 하나 골라 들면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발주 받은 책들을 정리하다 뒤를 돌아보니 입맛을 다시는 얼굴이 보였다. 약간 들떠 보이는 표정. 아, 요리 묘사 장면이겠구나. 책이 넘어간 페이지를 감안하면 정답인 것 같았다.

“계산해 주세요.”

“아, 네. 카운터에서 계산 도와드릴게요.”

다른 손님이 부르는 소리에 정리하던 책을 박스 위에 눕혀 두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바로 뒤에서 그러고 있는데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남자는 독서에 푹 빠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겨우 그곳에서 눈을 돌리고, 계산하기 위해 눈앞의 여자 손님에게 웃어 보였다. 마주 보는 얼굴에 붉은 홍조가 떠올랐다. 그제야 손님의 이름이 기억났다.

“홍주 씨, 요즘 자주 오시네요.”

“어머. 사장님. 이름 기억해 주시네요? 와! 드디어 6개월 만에!”

“하하, 제가 이름을 잘 못 외워서 그렇지 홍주 씨 자주 오는 건 알죠.”

서점에 자주 발을 들이는 손님 중 하나였다. 자주 오는 목적은 책이 아니라 다른 이유 같긴 하다만.

“사장님 요즘엔 표정이 더 밝아 보여요. 혹시 연애하시는 건……?”

“표정 관리하고 있는데 잘 안 되나 봐요. 큰일이네.”

딱히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대답을 내 놓았다. 이 이상 곤란한 기류가 형성되는 걸 방지하기 위한 꼼수인 셈이다. 하지만 표정이 밝아 보인다는 말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내 표정이 그렇게 풀어졌나? 말로 꺼낼 정도면 은연중에 티를 냈다는 뜻이 되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런 내 얼굴을 보고 홍주 씨는 내게 정말 애인이 있구나 확신이 들었는지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다.

“어쩐지. 사장님 잘생겨서 인기 많으실 줄 알았어요. 아쉽네요.”

당당하게 마음을 표현해 주는 건 꽤 호감이 가는 행위였다. 하지만 그 순간 히익 하고 숨 넘기는 소리가 들려와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추천 도서 코너로 향했다. 경악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옆모습이 보였다. 뭐에 그렇게 놀랐는지 혼이 나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한껏 벌어진 입이 우스워서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 냈다.

나와 똑같이 고개를 돌렸던 홍주 씨가 잠시 후 나를 보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소근거렸다.

“그런데, 저 손님은 자주 오나 봐요. 종종 보는데.”

“그러게요. 홍주 씨는 사람 얼굴을 잘 외우나 봐요? 홍주 씨 오는 시간이랑 달라서 몇 번 못 봤을 텐데.”

“무슨 소리예요, 사장님!”

반박하기 위해 내지른 홍주 씨의 목소리가 조금 컸다. 뒷담화는 아니었지만 바로 앞에 대상을 두고 나누는 대화였기 때문에 지레 놀란 나는 입 앞에 검지를 가져다 대고 조용히 해 달라는 모양을 취했다. 다행히 남자는 아직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홍주 씨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죄송해요, 사장님이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셔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조금 전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실언한 부분은 없는 것 같은데.

“저렇게 인형 같은 얼굴을 어떻게 기억 못해요.”

“아.”

그 말을 한 후에, 소리 지른 게 조금 부끄러웠는지 홍주 씨는 가겠다는 인사를 남기곤 입구 밖으로 쏜살같이 빠져나가 버렸다.

나는 홍주 씨가 나간 후에도 얼이 나간 채 카운터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이번엔 표정 맞히는 놀이를 관두고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기만 했다. 인형 같은 얼굴. 그러고 보니 객관적으로 봐도 꽤나 예쁜 얼굴이긴 했다.

그래도 왠지 억울한데.

지극히 외적이기만 한 평가에 왜 내가 섭섭한지 모르겠다. 그동안 저 남자를 쳐다보던 많은 시선들이 대부분 같은 이유를 가졌다는 말인데…… 만약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면 나도 그런 사람들로 분류될까? 그렇게 생각하니 얼굴을 훔쳐보는 게 조금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예 보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저 정도로 책에 솔직한 열정을 보이는 사람은 잘 없으니까.

그래. 내가 뭐 찔리는 게 있어서 일부러 눈을 돌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던 생각에 억울해져서 더욱더 노골적인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번엔 너무 대놓고 보는 바람에 시선이 느껴지긴 했는지, 남자가 읽던 책을 슬쩍 내리고 내가 있는 카운터 쪽으로 눈을 돌렸다.

서로의 눈이 퍼즐 맞춰지듯 딱! 하고 맞물렸다.

훔쳐보는 걸 들켰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숨이 멎었다. 아니, 이러면 더 이상한데? 창피한 마음에 모른 척 시선을 돌릴까 하다가 그냥 씩 웃어 버렸다. 괜히 불편하게 만들까 봐 그런 것인데, 내 웃음이 남자를 몇천 배는 곤란하게 만든 것 같았다. 당황한 낯빛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려 갔다.

전에 없이 안절부절못하던 남자는 내렸던 책을 아예 덮어 버리고 진열대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내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뭐지? 보고 있던 걸 따지려는 건가? 그 정도로 기분 나빴다고? 머리 위로 비상벨이 울렸다. 생각이 표정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얼굴은 단단히 굳힌 채였다. 남자가 가까워질수록 불안해져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아버지한테 골프채로 얻어맞기 직전에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저기요.”

이제 카운터까지 걸어와 걸음을 멈춘 남자가 나를 불렀다. 결심에 차 있는 어조에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뭐라고 변명하지? 책 취향이 비슷한 것 같아서 눈이 갔다고? 아님 반응이 솔직해서 쳐다봤다고? 생각할수록 차라리 얼굴이 예뻐서 쳐다봤다는 게 더 타당해 보일 정도로 음침한 이유였다.

답지 않게 굳어서 대답을 지체하는 바람에 어색한 침묵이 우리 주변을 감쌌다. 일단 뭐라도 말해 보자 싶어서 입을 뗐지만, 남자는 애초에 내 대답 따위는 들을 생각도 없었다는 듯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꺼낸 무언가를 카운터 위에 탕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남자는 빨개진 얼굴로 사과하더니 내가 말할 기회는 주지도 않고 빠른 보폭으로 입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 잠시만요, 손님?!”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남자를 불렀지만 이미 가게 밖으로 나가 버린 후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중 카운터 위에 남자가 놓고 간 물건의 정체를 획인했다. 엄지손가락 한 뼘쯤 될 만한 크기의 살구색 병.

“요구르트?”

이걸 왜 준 거지? 죄송하다는 건 또 무슨 말이야. 내 큰 손바닥 위에 올려 보니 미니어처가 따로 없어 보이는 요구르트를 보며 나는 남자가 내준 다른 형태의 퀴즈를 풀어야만 했다.

주어진 단서는 당황해서 빨개지던 얼굴뿐인데. 정말로 미안한 것 같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후에 혹시 책을 훼손하기라도 했나 싶어 이리저리 뒤적거려 봤지만, 문제가 있는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을 알 길이 없어 다음에 서점에 오면 물어봐야겠다 다짐했는데, 금방 풀릴 것이라 생각했던 그 퀴즈는 속절없이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남자가 내게 사과한 이후 사흘 동안이나 서점에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



카운터 뒤편, 예약된 책을 놓아 두는 책장의 구석에는 아직 마시지 못한 요구르트가 쓸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제법 서늘한 곳에 두었다 생각했는데도 상온에 발효된 내용물이 입구의 녹색 껍질을 볼록하게 만들었다.

왔다 갔다 일을 볼 때마다 시선에 박히는 그 요구르트는 자꾸만 붉게 달아오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왜 사과를 했을까? 딱히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지만, 간만에 책을 좋아하는 진짜배기를 놓친 것만 같아 착잡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괜히 오후 3시만 되면 가게 앞을 나가 서성여 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일부러 찾아오는 건 아닌 듯한데. 3시부터 5시까지 두 시간, 그 정도 시간을 매일같이 왔다면 근처에서 일하는 사람이 확실했다. 아니면 동네에 살거나.

사과까지 하고 사흘간 얼굴도 안 비추는 걸 보니, 이제 서점에 올 생각이 없나 보다. 유통 기한이 간당간당 했던 요구르트를 처리해야 할 날이 오고야 말았다. 이걸 왜 두고 있었는지. 마시고 치워 버리면 그만인 일을.

괜히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와 큰 손으로 우악스럽게 쥐어 잡은 요구르트 껍질을 까려던 때였다.

“야! 도우재 뭐 하냐.”

나는 분명 까려고 했지만, 그 순간 말을 시킨 장태하 때문에 그럴 수 없었던 거다. 손에 쥔 요구르트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았다. 뒤를 돌아보니, 긴 팔을 위로 뻗어 휘적거리는 태하가 보였다. 갸웃거리는 얼굴에 호기심이 그득했다.

“웬 요구르트?”

“누가 줬어.”

“누가?”

“손님이.”

“아, 초등학생? 귀엽네. 나 어릴 때 마신 이후로 처음 봤어.”

초등학생 아닌데. 대꾸하기 귀찮아 말하는 걸 관뒀다. 태하는 좋은 일이라도 생겼다는 듯 빙글거리는 얼굴로 한참을 웃었다. 물어봐 달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잠자코 있으니 참지 못한 태하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면-”

“안 물어봤는데.”

“그냥 좀 들어 봐. 이건 뭐 말 자르는 선수도 아니고.”

태하는 퉁명스럽게 쏘아 말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지지 않고 노려봤다. 무슨 말을 할지는 뻔했다. 내 삐딱한 태도에도 태하는 굴하지 않고 여기 온 용건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너 서점 접게 만들면, 너희 어머니가 나 전무 시켜 주신대.”

“아, 그거참 아쉽게 됐네. 네가 전무 될 일은 없겠다.”

“아니, 왜 그 큰 회사를 두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데!”

“계속 그런 소리 할 거면 조용히 돌아 나가라.”

꽤 날 선 음성으로 경고하니 분에 겨워 씩씩거리던 소리가 차츰 사그라들었다. 정말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네. 2년이나 흘렀는데.

태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와 함께 자란 몇 없는 친구 중 하나다. 대기업 회장인 내 아버지는 이 악물고 뛰어다니며 자수성가를 이뤄 낸 사람이어서, 날 때부터 재력가 집안인 주변 회장들과는 그 근본이 달랐다. 그래서 그런지 어릴 적 달동네에서 함께 놀던 친구와의 우정을 끔찍하게 여기시는 분이었다. 태하의 아버지 역시 그랬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식들 교육은 잘 시켜야 된다는 것이 오랜 신념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형편이 어려운 친구에게 기꺼이 자식들 교육비를 지급했다. 덕분에 태하와 나는 초, 중, 고 심지어 대학교까지 명문으로 진학하는 일명 엘리트 코스를 나란히 밟은 셈이다.

딱히 인간관계에 신경 쓰는 편이 아니라서, 어릴 때는 아무 감흥이 없었는데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아버지에게 감사해야 하는 일이었다. 시기와 질투가 난무하던 부잣집 도련님들 사이에서, 태하는 유일하게 내 숨통을 트여 주는 친구였으니까. 오죽 사이가 단단했으면 나중에는 우리가 형제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이 싫은 거다. 어머니는 지금 은혜를 빌미로 나를 설득해 달라 태하에게 난감한 부탁을 한 것이 분명했다. 이 속 좋은 놈은 또 거절 못하고 여기 와서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어 내는 거겠지. 어머니께 불려 가 푸념의 말을 족히 한 시간은 잠자코 들었을 태하를 생각하니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나가라는 내 정 없는 말에도 붙어 있는 녀석에게 한숨 쉬며 말했다.

“전무 하고 싶지도 않으면서.”

태하는 조용히 웃을 뿐이다. 그러면서 카운터 안으로 들어와 아예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았다.

“너 이러면 어머니 속상해하신다?”

“이미 불효자 됐어.”

“그렇게 회사에 들어가기 싫어?”

“너도 알잖아. 그러고 싶지도 않지만, 일단 경영에 소질이 없어. 누나가 잘하고 있는데 왜 굳이 나를 오라는 건지 모르겠네.”

회사 물려받기 싫다고 뛰쳐나온 게 벌써 2년이었다. 아버지께 골프채로 죽이 되도록 맞아 가면서 얻은 자유인데, 어머니는 아직도 포기를 못하신 것 같다.

내 말을 듣던 태하는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잔뜩 이골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나도 그냥 회사 때려치울까? 나 백수 되면 여기 알바 써 줄 거야?”

“헛소리하지 마. 나 혼자 해도 충분한데 알바를 왜 써.”

“밴댕이. 소갈딱지.”

“야.”

카운터 책상에 엎드린 채 투정 부리는 꼴이, 어머니께 많이 시달리긴 했나 보다. 사고를 친 내 탓도 있으니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다.

“미안해. 그래도 이렇게 사는 게 좋은 걸 어쩌냐.”

“그래. 네가 좋으면 됐지. 내가 회장까지 다 해 먹어 버릴 거다.”

“그러든지.”

유치원생도 안 할 법한 협박에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 태하도 더 이상의 말을 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