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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끝 2화

1. 초여름 (2)


교사는 지루한 수업을 이어 갔다. 수업에 집중하는 아이들은 고작 한두 명 정도였다. 공부를 잘하는, 최상위권 대학을 노리는 애들이었다. 자거나 딴짓을 하는 학생에게 관심을 가질 정도로 열정이 넘치는 교사는 많지 않았다. 그저 시간에 맞추어 수업을 하고, 종이 울리면 적당히 마무리를 하고 나갔다. 교사의 눈에 들어온 학생은 주로 눈을 맞추고 열심히 하거나 소란을 피워 무시할 수 없는 경우였다.

내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성적으로는 중상위권. 아니, 그것보다 약간 더 잘하는 정도랄까. 말은 별로 없어도 공부는 꽤 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딱 그 정도가 좋았다. 공부를 못하면 못하는 대로, 너무 잘하면 잘하는 대로 시빗거리가 되었다. 공부를 못해서 무시를 당하느니 적당한 성적을 유지하고 인정받는 편이 편했다. 이런 생활은 신물이 날 정도였고 나는 그 적당한 선을 잘 지킬 줄 알았다. 수업 내용을 반쯤 흘리면서 문제를 풀었다.

딱히 되고 싶은 건 없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내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건강하게만 자라라, 평범하게 자라라. 그 수준이다. 그마저도 내게는 너무 버거웠다. 이미 평범하지 않았다.

칠판 앞을 돌아다니며 수업을 하던 교사는 종이 울리자마자 수업을 마무리 짓고 나갔다. 냄새가 나니 환기를 잘 시키라는 상투적인 말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야, 저 새끼 잡아!”

방금 전까지 병든 닭처럼 골골거리던 놈들은 다시 팔팔해졌다. 교실을 날아다니며 추격전을 벌이는 걸 보고 있으면 다소 질리기도 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교실을 빠져나가던 놈 중 하나가 내 등을 퍽 소리가 나게 때렸다. 사과는 없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자리가 그랬다. 고의든 아니든 부딪치는 경우는 자주 있었다.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쓸 정도로 부지런하지 못했다. 비뚤어진 의자를 바로잡고 앉으려는데 갑자기 누가 뒤로 주욱 당겨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의자가 쓰러짐과 동시에 머리가 꽝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혔다. 뇌가 울렸다.

“아, 여기 뭐가 있었나 보네?”

이건 고의다.

세상이 거꾸로 보였다. 시야로 배를 잡고 낄낄거리는 두어 사람이 뒤집혀서 보였다. 몸을 옆으로 굴려 일어나 의자를 일으켜 세웠다. 등 뒤로 여전히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야, 미안하다.”

진정성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애초에 사과를 바라지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미안해서 한 사과는 아닐 것이다. 이런 시비는 우스웠다.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게 누가 거기 있으래?”

그저 놈은 힘을 과시하고 싶을 뿐이었고, 가장 만만한 대상이 나였다. 무슨 짓을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아웃사이더. 저런 도발에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오히려 더 우스운 짓거리였다. 자리에 일어나서 먼지를 털고, 의자를 일으켜 세워 다시 자리에 앉았다. 뒷머리로 무언가 닿았다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등 뒤에서 놈이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뻔했다. 지겹다. 그리고 시시했다.



***



그냥저냥 수업을 듣다 보면 집에 갈 시간이었다. 담임은 몇 마디 잔소리를 끝으로 종례를 했다. 하교 시간은 등교 때보다 더 소란스러웠다. 원래 전쟁터는 조용하지 않는 법이다. 가방을 챙겨 복도로 나왔다. 복도는 시끄러웠지만 평소와 다른 웅성거림이 있었다.

“야, 싸움 났대!”

의문은 금세 풀렸다. 누군가 신이 나서 외치고 다니자 다들 싸움이 벌어진 장소로 달려갔다. 남의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계단 바로 옆에서 싸우고 있었다. 싸움 소식으로 소란스러운 복도와 달리 정작 계단 끝은 조용했다.

“야, 잘한……!”

내 바로 뒤에서 소리를 지르던 놈 하나가 입을 다물었다. 누가 저걸 싸움이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것은 일방적인 구타였다. 한 녀석이 다른 한 놈을 계단에 반쯤 걸쳐 놓고 무자비하게 짓밟고 있었다. 억 소리도 못 내고 맞고 있는데도 때리는 놈은 그만둘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누구야? 누구랑 누가 싸우냐?”

“입 다물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앞에서 싸우고 있는 이 두 사람은, 아니 적어도 한 사람은 내 주변부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보다 서열이 높으리라. 그러니 함부로 말리지도, 부추기지도 못하고 그저 입을 다물고 지켜보고만 있겠지. 괜히 저한테 불똥이 튈까 봐 말조차 못 붙이고. 작신작신 그저 짐승처럼 짓밟아 버리는 그 행위는 신기할 정도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멈추어 서서 그 장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뭐 하는 짓이야, 너네!”

저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열심히 쌓아 놓은 일련의 계급을 손쉽게 부술 수 있는 자였다. 몰려들었던 인파는 순식간에 와해되었고 몇몇만이 남아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무섭기로 소문난 선생 하나가 아이들을 밀치고 순식간에 폭력의 현장으로 불쑥 들어왔다.

“너 이 새끼, 또!”

그는 아주 익숙한 듯이 들고 있던 하키 채를 휘둘렀다. 여태 일방적으로 구타를 하던 이가 뒤통수를 한 대 맞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한태경 너 이 새끼는 하루라도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어!”

선생은 짝 소리가 나게 놈의 뺨을 때렸다. 귀를 울릴 정도로 엄청난 파열음에 순간 한태경의 코가 나갔다고 생각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놈은 멀쩡했다. 그저 벌겋게 부어오르는 정도였다. 방금 전까지 사람을 죽어라 패던 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놈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따라와. 둘 다.”

선생은 씩씩거리며 따라오라고 말을 하고 먼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모여 있던 아이들에게 비키라며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도 잊지 않았다. 쓰러져서 신음을 하던 아이가 일어나서 비틀거리며 그 뒤를 따랐고, 한태경은 사라진 아이의 뒷모습을 노려보더니 천천히 걸어갔다. 방금 전과 달리 아이들이 한태경에게 길을 내주었다.

놈의 어깨가 나를 스쳤다. 꼭 내게 아는 체를 한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



복도는 금세 조용해졌다. 소란을 만든 주인공이 사라지자 모두 흥미를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한태경이 사라진 복도의 끝에 우두커니 서서 그가 지나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내가 옥상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너무 달라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멍청하게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한참을 서성거렸다. 지나가는 애들 눈에 이상해 보일까 괜히 화장실을 다녀오고, 괜히 한 층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느린 걸음으로 내려왔다. 대부분의 애들이 집에 가 버린 후라, 학교는 대체로 한산했다. 아직 퇴근하지 않은 선생 몇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지나갔다. 대충 고개만 숙여 인사를 하고 나는 계단에 앉아 카메라를 꺼냈다. 하릴없이 만지작거리는데 층계 구석에 피가 튀긴 것이 보였다.

“…….”

심하다 싶을 정도로 때리긴 했지만 이렇게 피가 나기도 하는구나. 한참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카메라를 들었다. 초점을 정확히 맞추고 셔터를 눌렀다. 다시 액정으로 방금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이걸 나는 왜 찍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답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어딘가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화면을 응시하는데 멀리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복도는 지나치게 조용해서, 문을 닫는 소리도 무척 크게 들렸다. 그 뒤로는 매우 급한 발소리도 들렸다. 고작 발소리일 뿐인데 나는 괜히 긴장해 버렸다. 렌즈를 닫아 마구잡이로 가방 속에 카메라를 쑤셔 넣었다. 발소리는 꽤 가까워지더니 어느 순간 멈추었다. 층계 아래로 아무렇게나 떨구어진 내 발끝에 그림자가 닿았다. 나는 괜히 무릎을 끌어 모으며, 시계를 확인했다.

“야.”

그리고 비교적 익숙한 목소리.

“벌써 내일인가?”



***



어딘가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옥상에서 한태경이 내일을 말했던 게 떠올랐다. 미련하게 계단에 앉아 시간을 때워 놓고 정작 한태경을 만나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초침이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째깍째깍 째깍째깍……. 놈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야.”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내 동작에 놈이 흠칫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놈을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다.

“어어?”

등 뒤로 혀를 차는 소리와, 바로 뒤이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괜히 마음이 조급해져서 속도를 높였다. 성큼성큼 계단을 두 개씩 내려가려다가 갑자기 발이 꼬였다. 제대로 딛지 못하고 몸이 우스꽝스럽게 꼬였다. 아차 하는 순간 갑자기 몸이 아래로 훅 추락하는 것이 느껴졌다.

“야!”

바닥에 닿기 전, 나도 모르게 절로 인상을 썼다. 안 하던 짓을 하려니 결국 이 사달이 났구나. 어떻게든 중심을 잡아 보려고 허둥거리며 난간을 잡으려고 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아, 이런.

“너 왜 이래?”

앞으로 넘어지려는 순간 놈이 내 몸을 낚아챘다. 헉, 하고 숨을 들이켠 순간 내 허리를 단단하게 옭아맨 놈의 팔이 느껴졌다. 한태경은 한 팔로 난간을 지탱한 채 나를 붙잡았다. 놈의 목소리가 꽤 먼 거리에서 들린다고 생각했는데 내 오산이었나 보다.

“어디 아파?”

놈의 목소리에선 놀란 기색이 묻어났다.

한태경은 내가 무슨 불치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보자마자 말을 못 하는 병이냐고 묻는 것부터 고작 발 한 번 헛디딘 것도 아프냐고 연결 짓는 반응이 그 증거였다. 너를 피하다가 발이 꼬였다는 변명을 하기는 민망스러웠다. 여전히 놈은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소매 안쪽으로 보이는 한태경의 피부는 하얀 교복 셔츠와 대비되어 꽤 까무잡잡했다. 언뜻 붉은 기가 도는 내 피부와 비교하면 더 검었다.

나는 겨우 제대로 중심을 잡고 일어서서 놈의 팔을 밀어 냈다. 한태경은 내가 하는 짓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기막혀하며 혀를 찼다.

“어쭈.”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이 눈앞에 선했지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금의 내 표정을 보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고 싶지 않았다. 겨우 층계 하나를 다 내려갈 즈음에 놈이 한 번에 계단 여러 개를 성큼성큼 걸어 내려와 곧장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야.”

놈은 키가 꽤 컸다. 그리고 나도 그리 작은 편은 아니었다. 귀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놈의 팔뚝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에 비해 두껍고 잘 그을린, 단단한 팔.

“고맙다고 인사도 안 하냐?”

그 말에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걸 겨우 참았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초조하게 발끝만 노려보았다. 꼭 놈의 얼굴을 쳐다보면 지는 것처럼 괜한 고집을 부렸다. 고집인 줄 알면서도 그랬다. 나는 괜히 인상을 찡그렸다. 놈의 시선이 자꾸 신경 쓰였다. 꼭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 같은데, 그걸 확인하면 눈이 마주칠 것 같았다.

놈을 지나쳐 가고 싶었지만 내가 방향을 바꾸어 걸음을 옮기려 할 때마다 귀찮게 내게 들러붙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처음에는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생각이었으나 놈의 행동이 반복되자 약이 올랐다. 지나쳐 뛰어가려고 해도 한태경의 행동이 만만치 않게 빨랐다. 결국 짜증이 나서 놈을 올려다보았다.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노려본 순간, 표정이 또 이상하게 변했다.

“이제야 쳐다보네.”

놈의 한쪽 눈썹이 삐죽 올라가더니 입매를 보기 좋게 끌어 올리며 웃었다. 시원스러운 웃음과 달리 왼쪽 뺨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놈을 말없이 노려본 후 무시할 생각이었는데, 누군가에게 맞은 듯한 그 모습을 보자마자 표정이 굳어졌다.

“그냥 가길래 진짜 안 들리는 줄 알았잖아.”

놈은 삐딱하게 서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제야 아까 선생이 놈의 뺨을 후려친 게 떠올랐다. 힘을 실어 때렸다는 건 알았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부은 뺨을 내가 너무 정신없이 쳐다봤는지 놈은 머쓱해하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만 봐, 민망하게.”

그러더니 살짝 인상을 쓰고는 또 씩 웃는다.

“내가 잘생기긴 했지.”

나름 분위기를 바꾸려고 던진 농담이겠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웃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렇게 엉망이 된 얼굴로 저런 말을 하면 누구라도 말을 못하는 게 당연했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는 놈보다 내가 더 당황스러워하자 놈은 가볍게 인상을 썼다.

“그렇게 보지 말라니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놈은 그렇게 말을 하곤 입을 다물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니, 한태경은 학교에서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일 듯이 패고, 폭력 사건에 연루된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조차 한태경이 누군가를 구타하는 것을 괘념치 않아 했다. 누가 봐도 맞은 것이 뻔한 얼굴임에도 본인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내가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놈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가방을 낚아챘다.

“난 집에 간다.”

그러곤 방금처럼 성큼거리며 계단을 두어 개씩 훌쩍 내려간다. 나는 넋을 놓고 한태경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놈의 한쪽 어깨에 메여 있는 내 가방을 보고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다급하게 놈을 쫓아 내려갔지만 놈은 내가 뒤따라오는 걸 확인하고는 히죽 웃으며 보란 듯이 멀찍이 뛰어갔다. 약이 바싹 올라 얼굴이 뜨거워졌다.

놈을 뒤따라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해 질 녘 하늘은 붉은 노을이 졌다. 점심에 비해 열기는 가라앉았지만 야외를 돌아다닐 때 햇빛을 확인하는 건 일종의 습관이었다. 이 시간에는 햇빛이 뜨거워서 아침에 우산을 챙겼는데…… 우산은 가방 속에 있었다. 잠시 고민을 하는 사이에 저 멀리서 소리가 들렸다.

“야.”

놈이었다. 놈은 한쪽 어깨에는 제 가방을, 다른 쪽 어깨에는 내 가방을 멘 채로 골대에 기대어 서 있었다.

“안 가냐?”

놈의 목소리에 뒤이어 공을 차는 소리가 들렸다. 축구부의 연습 경기였다. 발등에 공이 제대로 맞았는지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공이 높게 포물선을 그리며 골대로 날아왔지만 안타깝게도 빗나갔다. 내 시선을 따라 구경하던 한태경이 공이 날아가는 방향으로 뛰어가 가볍게 어깨로 공을 밀어 치고는 다시 멀리 차 주었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 시원한 소리가 들렸다. 공은 꽤 멀리멀리 뻗어 나가 반대쪽 골대에 들어갔다. 골인이다.



***



“넌 어디로 가?”

한태경은 내가 골대까지 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걷는 동안 대화는 없었다. 나는 늘 그렇듯 입을 다물었고, 놈은 혼자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가방을 받지 못해 우산을 꺼낼 수 없었다. 정문을 나서자마자 놈에게 가방을 달라며 손을 내밀었지만 가방을 주기는커녕 저런 질문만 던졌다.

“버스? 아님 걸어서? 걸어가면 어느 쪽?”

내가 딱히 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아차린 건지 놈은 알아서 선택지를 던져 주었다. 여기? 저기? 아님 어디로? 손가락으로 정류장과 인도를 여기저기 가리키며 어느 쪽에 맞느냐고 묻는 말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도보를 가리켰다. 버스를 타면 5분이지만, 그냥 걸어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 잘됐네. 같은 방향이라.”

놈은 다시 망설임 없이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가방은 주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노래인지 뭔지 모를 것을 흥얼거리며 앞서 나가는 놈의 뒤통수를 황당한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안 가?”

꼭 마치, 항상 같이 하교를 했던 것처럼 묻는 모습에 나는 잠시 당황스러웠다가 그냥 놈의 뒤를 따라갔다. 가방끈을 잡아당겼지만 놈은 아무렇지 않게 팔에 힘을 주었다.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얼마나 걸려? 아파트 사나?”

아파트촌은 학교에서 10분 거리였다. 우리 집은 거기서 한 블록을 더 가야 나오는 주택 단지에 있었다.

“아아. 혹시 큰길 두 개 건너면 나오는 주택가? 좋은 데 사네.”

그쯤 되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햇볕에 노출된 피부가 조금씩 따가워지는 기분이었다. 선크림을 바른 게 무색하게도 피부가 아파져서 얼른 우산을 쓰고 싶은데 우산은커녕 가방을 건네줄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가방.”

“가방 왜?”

“달라고.”

“왜?”

“내 가방이니까.”

당연한 요구를 했는데도 놈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이상한 말을 한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것 때문에 잠시 멈추어 서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하나하나 더듬어 보아야 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스스로 깨닫자마자 더 약이 올랐다. 내 표정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놈이 입을 벌리며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메고 갈 건데?”

“우산 꺼낼 거야.”

놈은 하늘을 쳐다보고 다시 내 얼굴을 보았다. 하늘은 아주 멀쩡했다. 비가 올 것 같은 기색은 전혀 없고 햇볕만 쨍쨍했다. 우산이 왜 필요하냐는 표정에 나는 마지막으로 화를 꾹 누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피부 따끔거려.”

한태경은 그제야 내 신체적 특징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뒤늦게 납득을 하고선 가방 안을 뒤적여 우산을 꺼낸다. 우산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자 놈이 또 어어, 하고 중얼거리고는 팔을 높게 들어 올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무례하지 않은 행동이 없었다.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금 전 놈이 학교에서 사람 하나를 죽일 듯이 패던 것은 이미 잊은 후였다. 놈은 머리 위로 우산을 펼치더니 내게 기울여 주었다.

“…….”

“이런 날에도 쓸 줄은 몰랐지.”

놈은 멍청한 얼굴로 웃었다. 놈의 손에서 우산을 뺏어 들까 했지만 쉽게 내줄 것 같지 않아 그냥 포기했다. 놈은 한쪽 어깨로 가방 두 개를 한 번에 짊어 멨다. 우산은 하늘색에 군데군데 물방울무늬가 들어간 다소 귀여운 디자인이었다. 밖을 돌아다니다 급히 필요해서 근처 드럭 스토어에서 산 것이었는데 디자인이 이것뿐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우산 말고 양산 쓰지 왜.”

“…….”

놈의 말에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나 싶었다.

“양산은 예쁜 것 많잖아. 레이스도 달려 있고, 어? 아, 미안.”

내 표정이 어땠는지 안 봐도 뻔했다. 나는 좀, 이런 놀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 줄 정도로 여유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내 반응을 파악한 놈이 이번에는 진짜 미안하다고 웃으며 내게 사과를 했다.

“이것도 귀여운데 그런 것도 어울릴 것 같아서 그랬지.”

머리가 아팠다. 집에 가는 길이 이다지도 멀었나 싶다. 원래대로라면 대충 우산을 쓰고 아파트촌을 지날 시간이었다. 놈과 답지 않은 실랑이를 벌이느라 아파트촌은커녕 그 근처 상가도 겨우 지났다.

놈은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계속 시답잖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지금 쓰고 있는 우산도 잘 어울린다는 둥, 하늘색을 잘 받는다는 둥 마음에도 없는 소리인 게 뻔했다. 우산에서 드리워진 그늘은 딱 나를 가릴 만큼의 크기였다.

한태경은 한참 이것저것을 떠들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내게 우산을 기울여 주며 혼자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우뚝 멈추어 선다.

“너네 집 어디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아파트촌이었다. 더 가야 하는데……. 우리 집은 여기에서 걸어서 10분은 더 가야 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한태경과 눈이 마주쳤다. 난감해하는 기색을 읽었는지 어깨를 으쓱거리곤 걸음을 옮겼다.

“가자.”

한태경은 어디에 사는 걸까. 내심 궁금해졌다.

“나랑 같은 동네 사네.”

“…….”

놈은 한마디를 툭 내뱉을 뿐이었다. 한태경과 우리 집이 그렇게 가까웠다니. 그런데 왜 여태까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걸까. 머릿속으로 주변 이웃들을 헤아렸다. 이웃집들은 당연히 아니었고, 또 그 건너편 집에는 내 또래의 학생이 전혀 없었고……. 동네는 나를 비롯해 오래 살았던 사람들뿐이라 친하지 않더라도 얼굴은 대부분 다 알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속에 한태경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