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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의 내용은 모두 픽션이며, 실재하는 인물, 단체, 사건 등과는 일절 관련이 없음을 알려 드립니다.


그 여름의 끝 1화

<1부>

1. 초여름 (1)


오늘은 비교적 선선한 편이었다. 봄이 된 지 두 달이 넘었음에도 날씨는 종잡을 수 없었다. 종종 겨울인 듯했고, 종종 여름인 것도 같았다. 이제야 춘추복을 입기에 딱 좋은 날씨가 되었다. 낮이 되면 조금 더 뜨거워질 것이 분명했지만 요 며칠간을 생각했을 때 오늘이 가작 쾌적한 날씨에는 틀림없었다. 학교를 가려고 집을 나서던 중에 도로 돌아가 작은 삼단 우산을 챙겨 나왔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에는 분명 햇볕이 뜨거워져 있으리라. 그마저도 좋았다. 학교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가 걸렸다. 버스를 타면 5분밖에 안 걸리는 거리였지만 아침 일찍 집을 나와 걸어가는 것도 좋았다. 아침은 햇볕이 그다지 강하지 않아 걷기에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음악을 들으며 슬슬 걸어가니 학교에 금세 도착했다. 아직 선도부가 채 나오지도 않은 시간이었고, 운동장에는 학교 소속의 축구부가 마무리 훈련을 하고 있었다. 아침 시간에 오면 굳이 명찰을 달고 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가장 좋았다. 학교에는 구관과 신관이 있었는데, 우리 반은 신관에 속해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새로 붙인 공고문이 눈에 들어왔다.



하복 혼용 기간

5월 00일 ~ 00일



이제야 날이 좀 좋아졌다 싶었는데 벌써 하복 혼용 기간이 됐나 보다. 다음 주부터 하복과 춘추복 혼용 기간이라는 것을 알리는 공고문을 눈으로 훑고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내에 여름 내내 하복을 입지 않는 학생은 나뿐이었다.



내 체질을 원망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태어나기를 이렇게 태어났고 이렇게 자랐다. 사랑만 받고 살아온 세월보다 호기심 어린 시선과 이유 없이 웃음거리가 돼야 했던 날들이 더 많았다. 누군가는 낭만이라고 했으나 말 그대로 꿈같은 이야기였고, 내 모습이 귀찮고 짜증 나기만 했다.

외모를 바꾸기 위해 살을 태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살은 타지 않고 익기만 했다. 고집밖에 없던 어리고 미운 나이에 무작정 얇은 옷을 입고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에 나가 있다가 온몸에 붉은 반점만 잔뜩 달고 피부과를 간 적도 여러 번이었다. 피부가 약해 암으로까지 발전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에 어린 마음에도 겁이 나서 더 이상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다.

내 증상을 뭐라고 하더라.



알비노였던가.



***



말은 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지 않은지는 좀 됐다. 막 걸음마를 뗄 무렵에는 아버지의 일 때문에 미국에서 잠시 살았는데 그때에는 백발과 벽안에 대해 지적을 받을 일이 없었다. 드물긴 했지만 종종 백금발을 가진 이들이 있었고 푸른 눈은 그저 특이하다 정도에 그쳤다. 워낙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문제가 됐던 건 한국에 돌아온 후였다. 몇만 분의 일의 확률로 나타난다는 질환을 본 사람이 많을 리 없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 또한 나를 낳아서 처음 보았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검은 머리 검은 눈이 보편적인 나라에서 지나치게 눈에 띄는 외모였고, 질풍노도의 시기의 다른 아이들에게서 놀림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입을 닫았다. 먹물에 튄 하얀 잉크 한 방울만으로도 존재감은 충분했으니까.



***



반 아이들이 하나둘씩 도착했다. 내 자리는 복도 쪽 창가 맨 뒷자리였다. 햇볕을 쬐면 안 되는 특이 체질을 담임이 배려해 준 것이었다. 작년에도, 중학생이던 재작년에도 내 자리는 항상 고정이었고 아무리 자리를 여러 번 바꾸어도 내 자리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눈이 좋지 않아 칠판 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수업에 집중하기보다 혼자 공부하는 편이었으므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나는 홀수 인원인 반에서 유일하게 짝이 없는 학생이었다. 내 옆자리는 비어 있었고 덕분에 나는 책상 두 개를 널찍하게 쓸 수 있었다.

“야, 들었어? 한태경 지 친구들이랑 한판 떴다더라.”

“왜? 김재훤 때문에?”

“그렇겠지. 걔네 솔직히 김재훤 때문에 어울린 거지, 한태경 존나 싫어하잖아.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태경 말고 김재훤 친구들이지.”

“웃긴다니까, 걔네 하는 거 보고 있으면. 아, 맞다. 너 어제 그거 봤냐?”

조례를 시작하기 전의 교실은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왔다. 옆집 누나 이야기부터 연예인들 루머까지 못하는 말이 없었다. 여자 친구가 있는 아이들은 자랑을 하기도 했다. 그래 봤자 나와 하등 관계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랬다. 새 학년이 되면서 반 아이들의 관심이 잠깐 나에게 머물렀다. 순전히 외모를 향한 관심이었다. 그나마도 내가 말이 없다는 걸 알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식어 버려서 지금은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아, 한…… 두 놈 정도 빼고는.

“야, 임선우!”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 반은 그럭저럭 분위기가 좋은 편에 속했다. 담임도 종종 들어와서 옆 반 누가 어떤 사고를 쳤다더라, 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에게 그런 사고를 치지 않아서 고맙다고 여러 번이나 이야기를 했다. 그럼에도 꼭 분위기를 흐리는 버러지 같은 것들이 한둘씩 있기 마련이다.

놈이 그랬다.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책상 위로 엎드려 있는 내 뒤통수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고통이 찾아왔다. 그 자식은 꼭 아침에 학교를 오면 내 뒤통수를 때렸다. 이름이 뭐라더라……. 기억은 잘 나지 않았지만 놈은 내게 시비를 거는 것으로 존재를 알렸다.

어지간히 또라이 같은 구석이 있어서 반의 아이들도 썩 좋아하지 않았다. 똘마니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한 녀석을 제외하고는 놈과 주기적으로 말을 섞는 아이들이 없었다. 놈은 심심하면 내게 시비를 걸었다.

“이 새끼 아침부터 자네.”

“내버려 둬. 너 수학 숙제 했냐?”

놈을 졸졸 쫓아다니던 녀석은 놈보다는 인간성이 좋은 편이라 다른 아이들과 말을 섞기도 하고, 종종 그 자식과 반의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중재역을 맡기도 했다. 나로서는 도무지 그 애가 왜 저런 쓰레기와 함께 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둘의 사이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내게 시비를 걸려고 시동을 거는 놈에게 다른 화제를 꺼내자 놈이 숙제 같은 것도 있었냐며 투덜거리곤 걸음을 옮겼다. 수학은 주요 과목 담당 교사 중에 성질이 제일 뭐 같았고, 학기 초반 힘의 논리에서 처참하게 눌린 놈은 다른 과목은 몰라도 수학만큼은 열의를 다해 수업을 들었었다. 병신 같은 새끼. 그 새끼는 고작 그게 다였다.

특이 질환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신경 쓸 것이 많았다. 한여름에 맞춤 제작한 춘추복 와이셔츠를 입는 것 역시 어머니의 방문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올해 담임은 병원에서 뗀 증명서를 제출하자 이해하고 넘어갔지만 작년 담임은 영 못마땅하게 여겼다. 외고를 다닌다는 지금 담임의 딸은 기업에서 후원을 받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아버지가 다니는 기업이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아이들은 모두 더 이상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지면 수업을 하던 교사가 혀를 내두르며 수업용 교안을 정리했다.



급식은 먹지 않았다. 양이 적고 입이 짧아 그다지 먹고 싶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께 급식비를 받아 매점에 가거나 그마저도 입맛이 없으면 먹지 않았다. 딱히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무언가를 즐기지도 않는 나에게도 나름 즐기는 것이 있었다.

외삼촌은 취미로 출사를 나가곤 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는데, 점점 장비에 힘을 싣더니 렌즈 하나가 어지간한 중고차 값이 나가는 것도 있었다. 웬만한 전문가보다 좋은 렌즈를 사용했음에도 더 좋은 장비가 가지고 싶다며 외숙모의 눈치를 보았다.

탄탄한 사업체를 운영하는 외삼촌은 1년의 반은 외국에서 보냈다. 출장을 다니느라 시간이 거의 없지만 그 와중에도 틈을 내서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말도 없고 숫기도 없는 조카와 추억을 쌓기는커녕 얼굴 한 번 제대로 못 볼 때가 많았으나 아주 운 좋게 집안 행사에서 만나면 그는 나를 퍽 반가워하며 내게 자신이 쓰지 않는 장비를 주곤 했다. 비싼 것이 아니라며 내 손에 쥐여 주는 것들은 중고로 팔아도 몇십만 원은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용돈을 꼬박 모아도 사기에 어려운 물건이었다.



급식실로 달려가는 소리가 멎어 들면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섰다. 아이들이 뛰어간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겨, 층계를 하나둘 올랐다. 교실은 3층에 있었고 우리 학교는 5층까지 있었다. 4층과 5층은 수험을 준비하는 고3의 교실이 모여 있었는데, 급식실의 공간 부족으로 1, 2학년과 급식 시간을 따로 쓰는 고3들은 이미 한 시간 전에 밥을 먹고 수업을 듣고 있었다.

고요한 가운데 선생들의 수업하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5층을 지나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은 금지 구역이었다. 자물쇠까지 철저하게 채워져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열려 있었지만, 누군가가 자살 소동을 벌인 이후로는 출입이 금지되었다. 내가 옥상에 드나들 수 있던 건 순전히 아무도 세심하게 옥상 출입문을 살피지 않은 탓이다. 우연찮게 창틀에 놓인 작은 열쇠를 발견한 날부터 옥상은 나만의 공간이 되었다.

그럭저럭 선선했던 아침과 달리 점심은 꽤 무더웠다. 햇볕이 강해 옥상 문을 열고 잠시 주춤거리다가 그늘진 곳을 발견해 문을 닫고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번거롭게도 눈과 피부가 남들보다 선천적으로 안 좋았는데 오늘같이 자외선 차단 크림을 바르지 않은 날은 평소보다 더 예민해졌다.

그래도 이 정도로 민감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하루 이틀, 몇 시간 정도 땡볕에 있는다고 갑자기 내가 죽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극성맞게 내 몸을 챙기는 어머니 때문인지 나스스로도 꽤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늘진 곳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겹겹이 쌓인 구름이 드넓은 시야의 한구석을 메우고 있었다.

좋다. 하늘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 장의 화보가 된다. 다만 매시간 달라질 뿐. 구름이 잠시 태양을 가려 그늘이 넓어져 조금 더 자리가 편안해졌다. 하늘을 화면에 담은 채로 여기저기를 살펴보다가 사진을 찍었다. 찰칵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바람을 따라 슬슬 이동한 구름이 태양을 완전히 가려 그늘진 공간이 넓어졌다. 대충 태양이 다시 나올 때 즈음의 그림자 위치를 가늠해 바닥에 주저앉았다. 방금 전에 찍은 몇 장의 사진들을 살펴보다가 그대로 몸을 뒤로 뉘었다.

여건이 된다면 사진을 찍으러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었다. 외삼촌처럼. 물론 이런 몸으론 제약이 많겠지만 그런 자유를 누리는 것도 썩 좋아 보였다.



끼이익-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옥상의 비밀을 아는 것은 나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굳이 나를 찾지 않는 이상 맞닥뜨릴 일은 없을 테다. 나는 기둥 뒤에 있었고, 옥상 문 쪽에서는 이곳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다만 선생에게 걸린다면 싫은 소리를 좀 들어야 할 테다. 괜히 긴장이 되어 마른침을 삼키고 신경을 곤두세우는데 작게 발소리가 들렸다. 선생인가? 아니면 학생? 학생이어도 나쁘지 않았다. 나를 가만두기만 한다면 이 공간을 조금 나누어 써도 큰 문제는 없으리라.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비스듬하게 누운 자세 그대로 카메라를 하늘을 향해 들었다. 옥상을 둘러싸고 있는 그물망이 화면 가장자리에 잡혔다.

“야.”

툭. 무언가가 발끝을 건드렸다. 놀라 몸을 일으키는데 찰칵 소리가 났다. 발끝에는 처음 보는 얼굴이 서 있었다. 까만 스니커즈를 신고 교복을 입은, 머리를 짧게 깎은…… 내 또래의 남자애가 있었다. 비교적 단정한 교복 바지와 달리 반쯤 풀어 헤친 셔츠, 그 안으로 보이는 까만색 티셔츠. 놈의 왼쪽 가슴팍에 나와 같은 색의 명찰이 달려 있었다. 나와 같은 학년이다. 흐릿하게 이름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진짜 하얗네.”

“…….”

놈은 내 얼굴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굳이 그 시선을 피할 이유가 없어 나도 놈을 올려 보았다. 뭐든 흐릿한 나와 다르게 놈은 선명했다. 새까만 머리, 새까만 눈썹, 새까만 눈. 비스듬하게 올라간 입꼬리와 각진 턱선까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너 병 있다며.”

놈은 누굴까. 나와 다르게 놈은 나를 아는 눈치였다. 다리를 굽히고 쭈그리고 앉아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놈은 내 눈을 오랫동안 들여다봤다. 나는 놈의 말에 별다른 대답 없이 놈을 쳐다봤다. 너는 누구기에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데.

“말을 못 하는 병인가?”

“…….”

선천적으로 타고난 병이 있는 건 맞았다. 놈은 내 특이 질환을 내가 말을 하지 않는 것과 연결 지어 생각했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채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놈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멋쩍은 듯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재미없기는.”

놈은 혼자 씨익 웃고는 털푸덕 앉았다. 그늘도 없는 곳에 앉은 게 괜히 신경 쓰여 다리를 끌어 모았더니 엉덩이로 바닥을 쓸며 그늘 안으로 들어온다.

“땡큐.”

민망할 텐데 놈은 혼자서 잘도 중얼거렸다. 보통 내게 관심을 보이던 애들은 내가 그들을 무시하면 기분 나빠하면서 나에게 화를 냈다. 애초에 관심을 바란 적도 없는데 자신에게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며 화를 내는 걸 볼 때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화를 내며 악을 쓰는 이들이 무서웠던 적은 없었다. 다만 귀찮았을 뿐이다. 그런 것치곤 내 앞의 녀석은 꽤 온건한 반응을 보였다.

명찰의 이름이 보였다. 한태경. 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다. 녀석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혼자 말하기 민망한데.”

“…….”

녀석이 미간을 좁혔다. 나는 망설이는 중이었다.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리며 내 반응을 살피는 놈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면 안 들리나?”

“……그건 아니고.”

“들리긴 하나 보네.”

그 말에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홧김에 대답을 하자 그가 뜻밖이라는 듯 반응을 보였다. 놈은 내 반응을 보고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고 아차 싶었다. 오랜만에 듣는 내 목소리가 낯설었다. 너무 작아서 내게도 겨우 들리는데 용케 알아들은 한태경이 신기했다. 녀석은 허공을 바라보는 내가 느껴질 정도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뭘 봐.”

“눈이 예뻐서.”

“…….”

“렌즈 낀 거야?”

녀석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작금의 상황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가족 외의 사람과 소통을 한 것은 지나치게 오랜만이었다. 심지어 그 대상은 얼굴도 이름도 방금 전까지 모르던 동급생이다.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은 나와 달리 한태경은 퍽 친근하게 굴었다.

놈의 행동은 친근함과 무례함을 오갔다. 나는 동물원 원숭이를 대하는 듯한 사람들의 시선을 싫어했는데 놈의 행동은 아슬아슬하게 선을 지키고 있었다.

“아, 바람 시원하다.”

보지 말라고 말을 할까 고민하는데 놈이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여름이 가까워진 걸 생각하면 드물게 시원한 날이었다. 선선한 바람을 타고 탁한 냄새가 느껴졌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구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하지 말라는 짓을 굳이 하려고 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냄새의 주인은 뻔했다.

“밥 먹었어?”

놈은 퍽 친근하게 다시 물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물끄러미 쳐다보자 턱을 치켜들며 씨익 웃었다. 눈이 휘며 한쪽 눈에만 속쌍꺼풀이 졌다. 선이 굵고 남자다운 것에 비해 웃는 얼굴은 꽤 개구지게 보였다.

“안 먹었어?”

“귀찮아.”

“뭐가? 밥 먹는 게?”

그것도 귀찮고 너도 귀찮고.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힘들고 귀찮았다.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 모아 얼굴을 묻자 놈이 쩝 소리를 냈다. 그 상태로 한참 가만히 있었다. 놈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기둥에 기댄 채로 두 다리를 쭉 폈다. 어지간히 키가 큰 만큼 대충 늘어진 다리도 상당히 길었다.

“야.”

놈의 말을 무시했다. 또 시답잖은 말이나 하려고 부르는 것이 분명했다.

“나 또 와도 되냐?”

그걸 왜 묻는 건지. 오지 말라고 하면 안 올 건가? 물론 이렇게 귀찮게 군다면 안 오는 편이 좋았다. 옥상은 내가 학교에서 편하게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교실에는 늘 내게 시비를 걸지 못해 안달이 난 멍청이들이 있었고 다른 장소에는 늘 나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무례한 놈들이 널렸다. 결국 답을 내리지 못해 놈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했다. 다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 안 하면 허락하는 걸로 안다.”

뒤이어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게 아니었는데. 빈정 상한 눈으로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쳐다볼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는지 놈이 또 씨익 웃었다.

“내일 봐, 임선우.”

놈은 아무렇지 않게 내게 내일을 말하고 갔다. 머리가 복잡했다.



***



놈은 내가 부르기도 전에 옥상 문으로 걸어갔다. 오지 마, 싫어, 내일 내가 널 왜 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그만 타이밍을 놓쳤다. 놈은 내 시선을 눈치챘지만 그저 장난기 어린 얼굴로 한쪽 눈을 찡긋거리고는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나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숨을 깊게 들이켰을 뿐이다.

“…….”

한태경이 조금이라도 오래 머물렀다면 이름을 부를 수 있었을까?



그 녀석이 가고도 한참 동안 옥상에서 시간을 때웠다.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다. 어머니는 한창 클 때이니 잘 챙겨 먹으라며 아침저녁으로 보양식이나 영양제를 챙겨 주었지만 그중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은 극히 일부였다.

입도 짧은 편이었고 어머니의 바람과 달리 대충 살다 일찍 가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누구나 죽는다면 좀 더 편한 길을 선택하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물론 의욕적으로 먼저 목을 매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노력을 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생에 대한 의욕이 없는 만큼 죽음에 대한 의욕도 없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며 한쪽 뺨을 간지럽혔다. 나는 그저 지켜보고 어우러지고 싶었을 뿐이다.



***



예비종이 치기 전, 교실로 돌아왔다. 다음 수업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교실은 한산했다. 뇌까지 근육으로 들어찬 열여덟의 사내놈들은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제 혈기를 내뿜고 있을 터였다. 종이 울릴 때까지 그 의미 없는 짓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수업이 무르익을 무렵 들어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일부는 그런 아이들을 입술로 타박했고 일부는 욕지거리와 매질로 어린 짐승들을 다스렸다. 우리들은 대체로 학교라는 먹이 사슬의 가장 최하위에 위치하였으므로 자신보다 난폭한 교사 앞에서는 머리를 숙이고 뜻을 굽힐 줄 알았지만 때때로 더 심약한 포식자를 보면 폭력성을 드러내곤 했다. 아주 미개해 보였지만 이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체계이기도 했다.

“자, 지난번에 나눠 준 프린트물 다 가지고 있지?”

나는 최하위층에서도 서열을 따질 수 없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으레 있는 서열 다툼이나 기 싸움에 한 번도 껴 본 적이 없었다. 기민하게 서로를 살피며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설치거나, 그들에게 잘 보여서 좀 더 편한 생활을 하려는 얌체 같은 족속들이 되고자 노력한 적이 없었다.

나로서는 그런 힘겨루기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 무시하는 것이었지만 모름지기 생태계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는 동물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마치 나처럼. 나는 한 번도 그 무리에 끼고자 노력했던 적도, 노력해야 하는 이유를 찾던 적도 없었으므로 아쉽지는 않았다.

다만 아무렇지 않게 옥상에 찾아와 친근한 척 굴었던 한태경의 얼굴을 떠올렸다. 미련하고 미개한 이 질서에서 그 녀석은 어떤 위치에 있을까. 아주 높을 수도 있고, 의외로 아주 낮을 수도 있다. 뭐가 됐든 그놈이 내 시간과 공간을 침범하는 것이 싫었다. 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신경 쓰였다. 애초에 대화라는 걸 제대로 해 본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는데 왜 자꾸 귀찮게 하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