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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기사. 네놈 이름이 뭐지?”

“큭. 무슨 상관이람. 이 상황에서.”

두 남자는 깎아지를 듯한 높이의 협곡 위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거의 40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어마어마한 높이에서 떨어져 내렸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젠은 성기사단 ‘빛의 유니콘’의 대장이었다. 이번 일정은 정말 간단한 축에 들었다. 셀더 협곡의 지형을 살려 셀티아의 진군을 막는 전술을 짜기 위한 것이었다. 간단히 부하들을 시켜도 되지만 그는 항상 직접 움직이길 좋아했다. 이번에도 야밤을 틈타 간단히 둘러보고 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일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 협곡은 벼랑이 칼날처럼 연결되어 있었고, 그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골짜기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피할 겨를도 없이 젠은 발목이 부러져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엔 검은 머리칼의 청년이 있었다.

청년은 젠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타박했다.

“굳이 안 도와줘도 됐는데 무리했군.”

“빌어먹을. 네놈이 떨어지는 줄 알고 몸을 날린 건데…….”

젠은 협곡 끝 절벽에 한 청년이 위태롭게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꼭 협곡으로 고꾸라질 듯 휘청거렸고, 젠은 그 모습을 보곤 급히 달려왔다.

협곡의 바람은 무서울 정도로 사람의 몸을 흔들어 댔다. 까닥하면 떨어질 것 같아 급하게 달려와 남자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는 곧바로 안전한 곳으로 몸을 날리려고 했다. 하지만 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더 빨랐다.

젠은 협곡으로 떨어져 내리는 순간 신성력을 최대한 끌어내어 두 사람을 둘러쌌다. 품 안의 남자를 최대한 가슴팍에 밀착시키며 신성력의 소모를 아끼려 했다.

떨어지는 와중에 품에 안긴 남자는 젠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젠이 198센티미터의 키로 워낙에 장신이다 보니, 자연스레 남자는 폭 안기게 되었다. 남자는 젠의 가슴팍에 머리를 묻고 그렇게 떨어져 내렸다.

두 사람은 바닥에 크레이터가 생길 정도로 강하게 내동댕이쳐졌다. 젠은 신성력을 바닥까지 끌어다 썼다. 그 결과, 두 사람은 목숨을 건졌고, 젠의 다리뼈는 박살 났다.

하늘은 이미 어둠에 휩싸여 달빛만이 은은하게 비치고 있었다. 검은 머리의 남자는 품에서 벗어나 주변을 살펴보곤, 적당히 몸을 기댈 수 있는 곳으로 젠을 끌어다 놓았다. 젠은 그의 힘에 한번 놀랐다. 거구인 자신을 가볍게 당겨 기대 놓다니.

거기다 남자는 순식간에 다리뼈를 맞춘 뒤, 셔츠의 팔소매를 찢어 주변에서 주워 온 나뭇가지 여러 개로 단단히 부목을 댔다. 솜씨가 매우 간결하고 깔끔했다.

젠은 남자를 유심히 살펴봤다. 그는 182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호리호리한 몸을 하고 있었다. 남자의 근육은 깎아 놓은 듯 잘 정리되어 있었다.

얼굴은 한번 보면 오래 기억에 남을 정도로 굉장히 강렬했다. 검은 머리칼이 가슴까지 굽이치며 흐르고 있고, 흔치 않은 붉은 눈동자를 가졌다.

그는 예리하게 벼려 놓은 듯 서늘한 인상의 미남자였다. 젠은 왜 자신이 그를 처음 봤을 때 위태롭다고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밤이 깊어지고 협곡엔 안개가 내렸다. 습해지고 기온이 떨어졌다. 젠은 다리뼈가 부서진 고통과 고열로 인해 땀을 흠뻑 흘리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흩어져 내리는 머리칼을 넘겨 한데 묶었다. 그러곤 젠에게 다가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순간 젠은 흠칫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남은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더니 눈살을 살풋 찌푸렸다.

“너 열나는데?”

“당연하지. 내 다리가 지금 박살 났다고. 열이 날 수밖에.”

“잠시 기다려라. 도움이 될 만한 약초를 좀 찾아보지.”

남자는 몸을 날려 순식간에 사라졌다. 젠은 그의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젠장, 저 녀석 기사였군. 저 정도 속도면 최소 오러를 몸에 두를 줄 아는 놈이다.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멍청하긴……. 누가 누굴 구해 주겠다고 온몸을 날린 건지…….’

자신의 어리석음에 고개를 저었다.

젠은 다리에서 올라오는 고통과 식은땀, 추위에 몸을 떨었다. 점점 습해지는 안개 탓에 몸이 축축하게 젖어 갔다. 체온이 유지되질 않아 고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신성력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한 톨도 남아 있질 않았다. 하긴, 저 높은 곳에서 건장한 사내놈 둘이 엉켜서 떨어졌는데 목숨이 붙어 있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눈이 깜박거리며 흐릿해질 때쯤이었다.

“이봐……. 이봐……. 정신 차려.”

남자가 돌아왔다. 정신을 놓으려는 젠을 번쩍 들어 둘러업더니 순식간에 협곡을 가로질렀다.

달리던 남자가 멈춰 섰다. 약초를 구하러 나갔을 때, 적당한 동굴을 발견하고 마른풀을 깔아 자리를 만들어 둔 뒤 달려온 모양이었다.

남자는 젠을 조심히 그곳에 눕히고, 곁에 앉아 초록색 풀잎을 돌로 짓이기기 시작했다.

“이봐. 이거 삼킬 수 있겠어?”

남자가 적당히 짓이긴 약초를 동그랗게 말아 입에 넣어 주었다. 의식이 흐릿한 젠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수도, 알 수도 없었다. 그저 입 안에 들어온 뻑뻑하기 짝이 없는 풀 쪼가리가 거슬릴 뿐인지라 멍하니 물고만 있었다.

그런 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곧 젠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말캉한 입술이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남자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젠은 자신의 체온보다 낮아 시원한 것이 입가에 잠시 왔다 사라진 게 왠지 서운했다.

남자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런 건 키스가 아니다. 구호 활동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더니 곧바로 젠의 팔을 잡아당겼다. 남자는 눈을 살짝 내리깔아 젠의 입술만을 바라보았다. 열이 올라 단 숨을 몰아쉬는 젠의 모습에서 알게 모르게 색기가 흘렀다. 남자는 젠을 보며 자신이 묘하게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슴이 ‘쿵’ 하니 내려앉는 듯했다.

열기에 마른 젠의 입술과 살짝 벌어진 남자의 입술이 닿았다. 남자는 조심스레 입술을 마주하며 살살 비벼 댔다. 젠의 입술이 말라서 약간 까끌거렸지만, 그 안의 야들한 살갗은 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남자가 조심스레 혀를 내밀어 젠의 거칠어진 입술을 위아래로 보듬어 주었다. 어느 정도 입술이 촉촉하게 젖어 들자 그는 살짝 벌어진 젠의 입술 사이로 자신의 혀를 살살 밀어 넣었다.

씁쓸하고 뻑뻑한 약초가 혀에 닿았다. 남자는 약초에 자신의 타액을 섞어 입 속에서 이리저리 굴리다, 조금씩 젠의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길 반복했다.

젠은 뜨거운 열기에 목이 말랐다. 입 속에 들어찬 뻑뻑한 약초도 한몫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른 입술이 촉촉해지고, 시원한 무언가가 입 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그는 시원하고 청량한 느낌에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시간이 지나자 목을 메게 하던 약초는 사라지고 촉촉한 무언가가 입 안을 훑고 있었다. 젠은 그것에서 나오는 액체가 갈증을 해소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기다란 무언가를 쪽쪽 빨아들이고, 입 안에서 그것이 도망가면 아쉽다는 듯이 적극적으로 찾아 물고 빨기를 반복했다.

남자는 잠시 멈칫하다가, 자신을 미친 듯이 탐하는 젠에게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더욱더 깊이 혀를 밀어 넣어 서로의 입술을 삼켰다.

한참을 그렇게 촉촉한 그 무언가를 탐하는 동안 몸의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젠은 그제야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상황을 인지하는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젠장.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남자는 먼저 입술을 떨어트렸다. 젠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빨아 댔는지 입술 밖으로 타액이 길게 늘어져 방울이 졌다. 남자는 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젠의 입술을 지그시 누르고 쓸어내렸다. 청량함이 입술을 스쳤다.

“이거 명백히 키슨데? 남자끼리 키스한 소감이 어때?”

남자는 짓궂게 웃었다. 그러곤 젠의 귓가에 입술을 슬며시 가져다 대며 기분 좋은 듯 말했다.

“난 흥분됐는데.”

젠은 저도 모르게 부러진 다리를 끌며 뒤로 물러났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저지른 행동도 당황스러웠지만, 그보다 저를 더 당황시켰던 것은 젠 역시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는 사실이다.



***



날이 밝았다.

남자는 젠을 가볍게 둘러업었다. 젠은 남자의 괴력에 다시 한번 당황했다. 198센티미터에 달하는 자신을 이렇게 쉽게 들어 업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가볍게 온몸에 오러를 두르며 협곡을 뛰어올랐다.

젠은 그저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의 목을 꽉 끌어안고 있어야 했다. 남자는 그의 탄력있는 엉덩이를 두 손으로 가볍게 받쳐 들고 위로 휙휙 뛰어올랐다. 정상에 다다르자 남자는 젠을 바라보더니 한쪽을 가볍게 턱짓하며 물었다.

“저쪽이 네가 온 곳인가?”

젠은 그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텔딘의 성기사와 기사들이 상주하는 막사가 있는 쪽이다.

남자의 정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려 줄 수 없었다. 젠이 말을 아끼자 남자는 가볍게 뛰어 내려가더니 사람들이 오갈 만한 길목에 젠을 내려 주었다.

“여기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니 곧 널 발견할 거다. 위험하진 않겠지.”

남자는 한동안 젠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가볍게 키스하곤 휙 하니 사라져 버렸다. 젠은 벌게진 얼굴로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만 보았다.



젠은 막사로 돌아왔다. 밀리안이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젠의 오랜 친구이자 부관인 그는, 밤새 젠이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던 참이었다.

“젠, 대체 밤새 뭐 하다 나타난……. 아아, 이 꼴은 또 뭐야? 사람 걱정 좀 시키지 마.”

밀리안은 젠의 부러진 두 다리를 보곤 서둘러 사제들을 불러왔다. 젠은 곧 사제들에게 둘러싸여 신성력을 마구 받았고, 다음 날은 언제 부러졌었냐는 듯이 멀쩡한 두 다리로 돌아다니게 되었다.



젠은 막사에 돌아온 이후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입술을 짓눌러 오던 붉은 눈의 남자가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 뒤돌아서면 생각이 나고, 그가 생각이 나면 날수록 온몸에 열기가 후끈거리며 심장이 뛰어 댔다. 게다가 부끄럽게도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하반신이 무섭게 발기되곤 했다.

젠은 더운 한숨을 몰아쉬었다. 죄책감이 밀려들어 왔다. 그는 아넬린 여신에게 몸을 바친 성기사다. 그런데 누군지도 모를, 잠시 스치듯 만났던 남자에게 성욕을 태우다니!

“대장님, 이번 계획은…….”

설명하던 밀리안은 정신을 놓고 있는 젠을 보고 서류를 탁 하니 접어 버렸다.

“대장님? 대장……. 하아, 젠! 정신을 어디로 빼고 있는 거야? 너 요 며칠 좀 이상해.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거냐? 들어 줄 테니 나한테 털어놓아 봐.”

“어? 아……. 아니, 별거 아니야. 미안, 다시 설명해 봐.”

젠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최후의 전투를 앞두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해도 밀리안의 말이 귀에 하나도 안 들어오다니……. 머릿속엔 오로지 그 남자에 대한 생각뿐이니,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다.

날이 갈수록 상태는 점점 더 심해져 갔다. 무관들과 신관들의 설전에 머리가 울릴 때도, 그 남자의 서늘했던 입술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신기하게도 같은 공간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그 남자의 존재가 강하게 느껴졌다. 첫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사람처럼 기분이 둥실 하니 떠올랐다.

젠은 자신이 이런 기묘한 감정에 혼란스러워 한다는 걸 들킬까 봐,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차가운 냉수를 벌컥이며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