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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1. 철벽의 동지





또각또각, 날카로운 구두 소리가 살벌한 기세로 복도에 울려 퍼졌다.

지나는 사람들이 저마다 이쪽을 돌아보고 수군거렸지만 희수의 눈에 보이는 건 점점 가까워지는 5층의 흡연실뿐이었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안에서 막 담배를 눌러 끄고 있던 고승호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가 순간 움찔했다가 태연한 척 웃음 짓는 모습이 가소로웠다.

“좋은 아침이네, 윤 팀장.”

사람 좋은 양 상식적으로 굴면 이쪽에서도 맞춰 줄 거라 생각하는, 남 뒤통수쳐 놓고 자신은 뒤끝이 없다고 생각하는 인종들의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희수는 환하게 웃었다.

“닥쳐.”

“무……, 뭐?”

“직장 동료 엿 먹이고 좋은 아침 맞이하시는 댁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진 않거든.”

희수는 기세 좋게 닫히는 문을 뒤로하고 그와 마주 보고 섰다.

“강득선 의원 일, 당신이 나한테 넘겼다는 거 다 알고 왔어.”

“아, 난 또 뭐라고.”

승호가 피식 웃었다.

“의뢰가 들어오면 부장님이 판단해서 나누는 건데 왜 나한테 성질이야? 불만 있으면 위에 가서 따지라고.”

“그거야 당연히 하고 온 길이지.”

희수의 즉답에 승호는 주춤했다. 그때 입 안으로 터지는 웃음소리가 희수의 주의를 끌었다.

돌아본 희수는 구석진 창가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한경과 눈이 마주쳤다. 열이 뻗쳐서 고승호 외에 다른 누가 있다는 걸 전혀 의식하지 못한 터라 멈칫했지만, 희수는 딱히 가릴 이유도 없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승호를 향해 말을 이었다.

“설마 지금 내가 차마 위에는 말 못 하고 고팀한테만 달려와서 따질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왜? 말마따나 힘없는 거 다 아는데, 같은 팀장끼리.”

아니나 다를까 일부러 덧붙인 말 한마디에 그의 표정이 싹 굳어졌다. 입사 동기 중 한 명인 승호는 처음부터 윤희수를 유난히 탐탁잖게 여기고 있었는데 그녀가 사내 최초의 여자 팀장이 된 뒤부터는 더욱 그랬다. 본인의 출세는 실력이고, 남이 유리 천장을 두드리는 건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치부하는 그를 보며 희수는 생긋 웃었다.

“하지만 힘이 없으신 거에 비해 혀 하나는 참 잘 놀리시는 거 같아서, 앞으로는 애인 달래 줄 때나 써먹으시란 말은 꼭 해 주고 싶어서요, 고승호 팀장님.”

“……말이면 단 줄 알아?”

“아니. 그래서 앞으로 한 번 더 이런 일이 있으면 행동으로 보이려고.”

“하, 행동? 주제에 뭐 어쩌시게?”

“글쎄. 여자 밝힘증 하나로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변태 영감한테 꼴 보기 싫다는 이유로 특정 동료를 콕 찍어서 상납했다는 걸 알면, 회계과의 김민정 씨가 얼마나 재미있어할지 알아보는 것도 좋겠지.”

“그, 그걸 어떻게……!”

목하 비밀 연애 중이신 고승호 팀장이 기겁했다. 희수가 의기양양한 기분으로 그 변화를 감상하는데, 한경이 또 웃는 소리가 났다.

“아, 실례.”

두 번째인 걸 자각했는지 한경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민정 씨는 몰라도 난 재미있어서.”

“야, 서한경!”

승호가 공정한 동료에게 당장 항의했지만 한경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희수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당신이 나 싫어하는 건 상관없어. 나도 당신 싫고, 일에 지장 안 주면 그만이니까. 근데 이번 수작질은 너무 저열해서 모른 척할 수가 없겠더라. 작작 좀 합시다.”

“……하, 이렇게 발톱 세우는 거 보니까 꽤 좋은 시간 보낸 모양이지?”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안 그래? 강 의원이 너한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으면 펄쩍 뛸 일도 없잖아. 아, 그러고 보니 방금 상납이라고 했던가? 그거 혹시 진짜……,”

탕!

예리한 파열음이 허공을 찢었다. 이죽거리던 승호와, 승호의 멱살을 잡으려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던 희수는 거의 동시에 멈칫했다. 빈 의자 하나가 바닥을 아무렇게나 뒹구는 그 옆에서 한경이 쭉 뻗었던 한쪽 다리를 태연하게 접었다.

“미안. 발에 걸려서.”

사과만큼이나 산뜻하게 일어선 한경은 뒹군 의자를 바로 세웠다.

“그런데 두 사람 다 그쯤 하자. 고팀, 같이 일하는 처지에 말은 좀 가려서 해야 하지 않겠어? 서로 서포트하는 일도 많은데 동료 면전에서 칼 꽂는 걸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내가 뭘, 어쨌다고.”

양심은 있었는지 켕기는 얼굴로 주춤하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투덜대던 승호는 “특히 난 정말 질색이더라고, 그런 거.”라는 한경의 덧붙임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호출기의 신호음이 끼어들었다.

세 사람은 동시에 자신의 것을 확인했다. 당첨된 승호는 혀를 차더니 뭔가 더 쏘아붙일 듯하다가 희수를 어깨로 밀치면서 밖으로 나갔다. 너무 유치한 짓이라 희수는 화도 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한경이 담뱃갑을 꺼냈다. 익숙한 동작으로 톡톡 두드려 고개를 내민 한 개비가 먼저 희수를 향했다. 한경은 담배를 선선히 받아 든 희수에게 불을 붙여 주고, 자신도 새 담배를 물었다. 첫 연기를 한숨과 함께 길게 뱉은 희수는 알 수 없는 충동에 떠밀려 중얼거렸다.

“아무 일도 없었어.”

“알아.”

한경의 대꾸는 희수로 하여금 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짧고 단호했다.

“……어떻게 알아?”

“아까 고팀한테 웃어 줬잖아. 정도를 넘었으면 그랬을 리가 없지.”

희수는 피식 웃었다. 진심으로 우스워서 웃은 것이 퍽 오랜만의 일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강 의원은 그녀에게 아무런 짓도 못 했지만, 눈까지 가만히 둔 건 아니었다. 바지 정장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일 때마다 가슴이며 허벅지, 엉덩이에 핥듯이 달라붙는 시선을 참는 건 아주 곤욕이었다. 차라리 손을 대었다면 적극적인 제지를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도 못한 희수는 밀착 경호를 하는 내내 속만 부글부글 끓였고 그건 그녀의 성격에 정말로 맞지 않는 일이었다. 엄연한 프로인 이상 고객의 성향이 어떻든 일을 가릴 수는 없기 때문에 참고 견뎠는데 알고 보니 원래 자신에게 떨어진 일이 아니었단다.

돌이킬수록 고승호를 너무 쉽게 놔준 기분이 들어 희수는 담배를 뻑뻑 피우면서 한경을 불만스레 쳐다보았다. 서한경이 끼어들지 않았으면 헛소리를 빌미로 고승호를 한 대쯤 쳐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한 번만 봐줘.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잖아.”

마음을 읽은 건지 희수가 불평하기도 전에 한경이 먼저 물러섰다.

“진짜 계속 듣기 싫어서 그랬어.”

“어차피 나한테 맞았으면 계속 말 못 했을 텐데.”

“그러니까. 말만 못 하게 됐으면 내가 말렸겠냐고.”

희수가 웃거나 말거나, 한경은 담담하게 “고작 그런 걸로 징계 먹는 거 아깝잖아.”라고 덧붙였다. 그의 말마따나 폭력 행위에 대한 사내 규정은 매우 엄격했지만 희수는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남녀 차별이나 성희롱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주제에 우습지도 않은 일이었다.

“내가 먼저 사표 던지면 징계 내리고 싶어도 못 하겠지.”

그녀의 중얼거림에 한경의 시선이 똑바로 날아왔다.

원래 헤프게 웃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어도 온화하고 선량한 성격으로 일명 ‘부처’라 통하는 남자가 웃음기를 싹 지우자 박력이 보통 아니었다. 반쯤은 아무 생각 없는 불평이었던 희수는 내심 당황한 것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씩 웃어 보였다. 그러나 한경이 입을 열었을 때는 더 웃지 못했다.

“미안해.”

“……뭐가?”

“당신이 사표 얘기 하는 거 처음 들어. 일을 때려치울 생각을 할 정도인데 같이 일하는 입장에서 몰랐다는 것 자체가 방조 같아서.”

그가 한숨처럼 뱉은 담배 연기가 퍽 짙었다.

“난 그저 당신 승진이 늦어져서 아깝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지. 참 순진했네.”

“아깝다고 생각했다면서 뭐가 미안해.”

희수는 태연하게 들어 넘겼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난데없이 당한 공격이라 설렘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했다. 하긴 언제는 안 그랬냐마는.

“그래도 이렇게 제대로 알아주는 서한경 씨 덕분에 플러스마이너스 제로가 되는 거 아니겠어? 안 그랬으면 진작 때려치웠겠지.”

“제로라.”

불쑥 중얼거린 한경이 짧아진 담배를 끄고 물었다.

“오늘 점심 비어? 멀리는 못 가고, 구내식당도 괜찮으면 내가 살게.”

“괜찮기야 하지만, 갑자기 왜?”

“내가 있는데 플러스가 못 된다는 얘길 들으니 도전 정신이 느껴져서. 왠지 불타올라.”

진지하게 농담을 하는 한경 대신 그녀가 웃었다.

“그런 거야 협조를 해 드려야지. 한번 힘내 봐.”

“구내식당이라 아쉽지만.”

“아니, 이럴 땐 너무 좋은 데로 가도 문제야. 당신이 나한테 청탁한다는 소문이 날 수도 있다고.”

“별로 틀린 말도 아닌데. 일 잘하는 사람한테 잘 보여서 붙들어 놓으려는 거니까.”

둘은 잡담을 주고받으며 흡연실을 나섰다. 한경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는 희수의 기분은 이미 왔을 때와는 정반대로 바뀌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