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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가 정색했다. 예상대로인 긍정의 반응에 그녀는 즐거워졌다.

“난 알아, 내가 그랬으니까. 혹시나 기회가 온다면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 전에 당신이 떠났지만.”

“…….”

“무뎌졌다는 그 말을 인정하는 건 아니지만 사실 상관없어.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내가 못 믿는 사람에게 날 맡길 순 없잖아. 당신뿐이야, 나한테는.”

시선이 얽혀 들었다.

희수는 얼굴이 따가울 만큼 강한 눈빛 앞에 미소로 응수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표정을 지운 채 눈도 깜박하지 않고 물끄러미 이쪽을 응시하던 한경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 단순한 동작 하나로, 조금 전까지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던 심각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지워졌다.

“좋아.”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이렇게까지 몰아세운 놈들이 누군지 좀 봐야겠어. 당신에게 더 자세한 얘긴 듣기 힘들 것 같고, 같이 있다 보면 알 수 있겠지.”

“……이렇게까지라니, 실례잖아. 당신뿐이란 말이 아부로 들렸어?”

“설마.”

그가 씩 웃었다.

“진심인 거 알아. 나한테도 당신뿐이니까.”

이런.

잽jab을 날렸는데 훅hook을 얻어맞은 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라는 말을 먼저 뺀 건 희수 자신이기에, 그가 한 말의 의미 또한 알아서 해석해야 했다.

인정사정없는 것도 여전하네. 그녀는 저릿한 충격을 내색하는 대신 그에게 상기시켰다.

“혹시라고 했어. 구경도 못 할지도 몰라.”

“어쨌거나.”

경고를 시원스럽게 받아넘긴 그가 담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의 슈트 케이스 손잡이를 잡았다.

“여기 2층이 집인데 방 한 칸 빌려 쓰던 녀석이 마침 결혼해서 나갔어. 그 방 내줄게.”

“운이 좋네.”

한경의 가게에서 가까운 모텔 정도를 예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그것도 다 알아내서 온 줄 알았는데.”

농담을 던진 한경이 몸을 돌렸다. 그를 따라 가게 뒤편으로 돌아가니 2층으로 바로 이어지는 좁은 철제 계단이 나타났다. 앞장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는 한경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어서 희수가 괜히 뒤를 흘끔거렸다.

“가게 문을 저렇게 열어 놓고 놔둬도 돼?”

“어차피 헌책방이라 아무나 다 들락거려. ……누군가가 안전하게 머물기에 좋은 조건은 아니지.”

열쇠로 문을 열다 말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한경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웃음기 없는 진지한 눈이 그녀를 순간 멈칫하게 만들었다.

“당신이 택한 거니까 다른 충고는 하지 않겠어. 다만 이제부터 당신 혼자 두는 일은 없으니 그런 각오는 해야 될 거야.”

희수는 금방 대꾸하지 못했다. 업무 모드의 서한경은 참 오랜만에 본다는 자각이 든 탓이었다. 더구나 의뢰인의 입장에서 마주한 건 처음이라 신선하고 즐겁기까지 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꼭 그 이유 때문은 아니겠지만.

“당신 스토커들이 새삼 이해가 되네.”

“뭐?”

“일할 때마다 그렇게 말했으면 착각할 만했겠다고.”

낡은 청바지에 단출한 검은 니트를 입고도 변화되는 눈빛 한 번에 무게감이 다른데 정장 차림으로 진지하게 저런 말을 하면, 심지어 그에게서 보호받는 입장으로, 흔들리지 않을 여자가 과연 있었겠나 싶다. 누군가와 딱히 교제하고 있는 게 아니라서 단념하기엔 더욱 아까운 이 남자와 한 번이라도 얽힌 의뢰인들이 이후 스토커로 변했던 몇 번의 경우가 새삼 희수의 머릿속을 주르륵 스쳤다. 혼자 그 이유를 납득한 희수에게 한경이 웃지도 않고 대꾸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방금은 윤희수니까.”

누구에게나 그런 건 아니야.

그가 말하지도 않은 뒷말이 저절로 들린 기분에, 희수는 순간 덜컹거린 것이 문이었는지 전혀 다른 것이었는지 헷갈렸다. 어쨌든 그 소리가 자신에게만 들려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열린 문 사이로 한발 앞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그의 사적인 공간에 들어온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오랜만이라 그런지 묘하게 신선한 기분이었다. 집 안은 현관 옆에 욕실이 있고, 베란다와 주방이 마주 보는 꽤 넓은 거실을 사이에 두고 방 두 개가 배치된 구조였다. 거실 한편에는 성인 한 명이 그럭저럭 드나들 만한 좁은 계단참이 보였다. 죽 둘러본 희수가 자신의 가방과 함께 뒤따라 들어온 한경을 향해 물었다.

“저 계단은 가게랑 연결된 거 맞지?”

“응, 가게에 있는 방 안으로. 계단이라기보다는 사다리하고 비슷해.”

그래서 슈트 케이스를 들고 온 방문객을 집의 정문으로 안내한 모양이었다. 희수가 말했다.

“이렇게 쉽게 들여보내 주는 걸 보니 열쇠 나눠 가진 애인은 없겠네. 그럼 당분간 그 포지션, 내 걸로 할게. 이의 없지?”

이제 내내 같이 붙어 다녀야 할 입장이니 애인 행세가 제일 그럴듯하다는 걸 한경도 알 것이었다. 과연 그는 그녀의 제안에 전혀 놀라지 않았지만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나중에 일이 끝나면 그땐 어쩌고?”

“어쩌기는, 헤어졌다는 핑계로 친구한테 술 한잔 얻어 마시면 되지. 그새 이만한 요령도 없어졌어?”

자신의 말에 목 안쪽으로 웃는 그를 뒤로하고 그녀는 두 개의 방문을 번갈아 보았다.

“당신 방은 어딘데?”

“당신이 쓸 방은 이쪽.”

희수는 그가 가리킨 방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 보았다. 가구라고는 책걸상과 옷장밖에 없어서인지 생각보다 커 보이는 방은 깨끗했고 길 쪽으로 제법 큰 창문도 나 있어서 꽤나 만족스러웠다.

“어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한경이 바로 뒤에서 말을 거는 바람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그를 돌아보았다.

“잠만 잘 건데 이 정도면 감지덕지지.”

“뭐?”

“혼자 두지 않겠다며? 그럼 이 방에 있을 일이 달리 뭐가 있어.”

어깨를 으쓱거린 희수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자는 것도 안 하게 될까?”

“……그만 갖고 놀고 슬슬 제자리에 두시죠, 아가씨.”

그녀를 물끄러미 마주 보던 한경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받아쳤다. 그 담담한 얼굴에 오히려 그녀는 웃음이 터졌다.

“한동안 잘 부탁해.”

그에게로 완전히 돌아선 희수는 기운차게 한 손을 내밀었다. 한경은 선선히 악수를 받아들였다. 그녀의 손을 감싸 쥔 커다란 손바닥은 굳은살로 가득하면서도 놀라울 만큼 부드럽고 따뜻했다. 적당한 시간을 두고 손을 빼려던 순간, 그가 아프지 않은 정도의 악력으로 힘주어 잡았다.

시선을 든 그녀는 미소로 살짝 가늘어진 진지한 눈과 마주쳤다.

“어떤 사정으로든, 다시 보게 돼서 기뻐. 희수 씨.”

드물게도 희수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 그가 한 말은, 헌책방 앞 벤치에 앉아 나른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를 먼발치에서부터 확인한 순간 그녀를 가득 채운 마음과 다를 게 없었다. 여기까지 오게 된 정황과 그에 관련된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저 그를 만난 것이 좋았다. 긴장해서 심호흡마저 해 버린 스스로를 탓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자신을 문전 박대하거나 꺼려할 거란 걱정 같은 걸 한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그저 서로 같은 마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달게 느껴질 줄은 미처 몰랐기에, 희수는 마치 기습을 당해 무장 해제가 된 기분이 들었다.

“……나도.”

한 박자 늦게 흘러나온 대꾸는 무척 간단했다. 동시에 무척이나 솔직하기도 했다. 그 점을 알아차린 건지 아니면 나름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인지, 한경의 웃음이 조금 더 깊어졌다. 희수는 왠지 멋쩍어져서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가 창밖의 광경에 주의를 빼앗겼다.

“눈이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눈이 바람결에 실려 흩날리고 있었다.

창가로 다가간 희수는 오늘쯤 폭설 예보가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눈발이 제법 굵은 걸 보아선 일기 예보가 맞을 때도 생길 모양이었다. 등 뒤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며 낯선 창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오랜만에 무심코 펼쳐 본 책장 사이에서 불현듯 튀어나온 낙엽처럼,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가 입을 여는데 그의 목소리가 더 빨랐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도 눈이 내렸는데.”

“……K사 협박 사건.”

선수를 빼앗긴 그녀는 다른 말로 받았다.

“춥고, 배고프고, 제대로 풀리는 건 하나도 없는데 팀장이란 놈은 의뢰인 눈치 보느라 전전긍긍.”

“아, 엉망이었지.”

그는 절절하게 대꾸하더니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었다.

“제대로 된 건 윤희수 정도였달까.”

“뭐 서한경도 나쁘진 않았어.”

“너그럽네.”

“아까 말한 커피 지금 타 주면 더 너그러워질 용의도 있는데.”

“하하. 더는 됐어, 감당 못 해.”

두 손을 들고 엄살처럼 말하면서도 한경은 선선히 몸을 돌렸다. 이내 주방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희수는 창밖에서 점차 새하얗게 물들어 가는 세상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잠시 후 거실로 나가 받아 든 머그잔이 자신의 취향대로 블랙커피로 채워져 있는 것을 알고 나선 더욱 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