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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에라, 이 무정한 인간아.”

보다 못한 쉐인이 손바닥으로 레녹스의 등을 세게 갈겼다. 제가 저지른 죄를 모르는 레녹스는 그저 아프다고 항변하는 것처럼 쉐인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제가 각하께 뭘 기대하겠습니까? 원래부터 매정한 분이신걸요.”

“또 무슨 말로 아스트라 양의 근심을 더했는지 털어놓게.”

“별말 안 했어. 전쟁을 일으키느니 차라리 도망가고 싶다고 하길래, 그냥 호사를 누리며 편히 살라고 충고했다.”

“하아, 점점…….”

“어차피 대륙의 패권을 거머쥐기 위해, 분쟁은 가까운 시일 내에 일어난다. 굳이 아스트라가 아니더라도 불씨를 댕길 사유는 얼마든지 있어. 그럴 바에는 차라리 배곯지 않고 성녀로 남아 사는 것이 그녀 자신을 위해서는 더 나은 길이 아닌가?”

“이런 인정머리 없는 놈을 보게.”

“너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아스트라의 성력을 이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행위는 침략이라고.”

“그래도 그걸 본인 앞에 가서 술술 털어놓으면 어쩌나?”

“그럼, 털어놓지 않고 감춰서 무얼 한단 말이지?”

이번에는 쉐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레녹스를 흘겨보았다. 마티유도 둥근 눈을 모나게 뜨고서 똑같이 레녹스를 바라보았다. 따가운 눈총을 받고서도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것처럼 의문스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엎질러진 물은 어쩔 수가 없어. 다시 가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회유해도, 아스트라 양이 다섯 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믿을 리가 없지.”

“이제 어쩌죠? 이러다가 진짜 무슨 병이라도 크게 얻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성녀를 모셔 놓고 병마에 시달리게 했다는 오명을 썼다간, 회담이 불리하게 돌아갈지도 몰라.”

“레이디 아스트라는 성수와 대화하는 성녀니까, 성수의 힘을 빌릴 수 있지 않을까요? 성수는 온갖 이능을 다 가진 존재가 아닙니까?”

분명 성수 중에는 치유의 능력을 가진 개체도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본디 그들은 세상 만물이 이롭게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도록, 신의 뜻에 따라 이 세계의 각지에 내려온 영적인 생명체가 아닌가? 날갯짓이나 포효 한번으로 땅을 일어서게 하고, 하늘을 가르며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다친 것을 치료하는 종류가 있다고 해도, 성수 자체가 그리 흔한 존재가 아니다. 또한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그들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데 성수의 힘을 빌리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다른 누구도 아닌 아스트라다. 그러나 당사자가 저리 앓아누웠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휴버트 영감이 가진 약 중에 뭐 좋은 건 없더냐?”

“이미 쓸 수 있는 건 다 써 봤죠. 일단 더 지켜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동부에서 내로라하는 명의도 손을 들 정도라니, 보통 위중한 게 아닌 모양이군. 오늘밤을 넘길 때까지 상황이 좋아지지 않으면 수도에 궁의를 보내라 명해야겠어.”

쉐인이 사뭇 진지한 음조로 아스트라를 걱정했다. 부디 그녀가 한시라도 빨리 나을 수 있기를 마티유는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레녹스는 한편으로 작게 골몰했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현 대륙의 정세를 보았을 때 손바닥을 내려다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 계기는 아주 단순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이 그 계기가 된다는 말에 앓아누울 정도로 아스트라는 정녕 이다지도 연약한 존재란 말인가?



* * *



싱그러운 풀 냄새가 그립다. 아득한 시절을 건너온 것처럼 산골 어귀에 박힌 제 집이 눈가에서 어른거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그리운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병세가 위중해졌을 때는 이미 손쓸 시기가 한참 늦어 버린 뒤였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잦아지더니 급기야 토혈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아버지는 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입 속을 세게 깨물어서 피가 난 것이라고 둘러댔다.

왜 나는 그때 곧이곧대로 아버지의 말을 믿었을까? 조금 더 유심히 상태를 살펴보고 보살폈다면 늦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중에 가서야 뒤늦게 아버지의 병원(病原)이 폐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폐렴은 지독하고 또 무서운 병이다. 한번 도지면 손쓸 방도가 없었다. 제아무리 약학에 박식한 아스트라지만, 폐렴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있는 재산을 털어서 의사를 찾아가자며 설득해 봤지만 아버지는 완고했다. 그는 옛날부터 그랬다. 무엇이 그리도 두려운지 마을 사람들과도 필요 이상으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래, 맞아. 지금 와서 되짚어 보면 아버지는 참 비밀스러운 사람이었다. 왜 그리도 매사에 조심스러웠을까? 마치 집에 귀중한 보물이라도 숨겨 놓은 것처럼 굴었다.

비로소 지금에서야 그 보물이 무엇인지 얼추 알 것 같았다. 바로 자신이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성수와 대화할 수 있는 제가, 오늘날처럼 사람들의 무서운 욕망에 쫓기는 게 두려워 산중에 꼭꼭 숨어서 살았던 것이다.

“왜 아버지는 이 애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거죠? 어째서 제게만 들리나요?”

“그건 네가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왜요?”

“그야 네가 특별하게 태어나서 그렇지.”

산중의 성수들과 한참 뛰어놀 때도 아버지는 선을 그은 것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먼 그곳에서 흐뭇하게, 때로는 아득한 것을 그리워하는 눈길로 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종종 무언가를 그리워했다.

“아버지는 왜 그렇게 외로운 표정을 지으세요? 저랑 단둘이 있는 게 쓸쓸해요?”

해가 산봉우리 근처를 기웃거리며 내일을 기약할 무렵에, 어린 아스트라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문득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아버지는 약간 당혹스러워하더니 금세 인자한 미소를 되찾았다.

“그렇지 않아, 아스. 그냥 보고 싶은 사람이 생각나서 그래.”

“그 사람이 누군가요?”

아버지는 끝내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조금 달랐다. 머뭇거리던 아버지는 회피하듯이 아스트라에게 어디에 들렀다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아버지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았던 아이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자주 오가지 않는 산중의 비탈길을 천천히 올라 도달한 그곳에서, 아스트라는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다.

해가 저물어 가고 어스름이 내려앉는 시각인데 마치 별 한 개가 지상에 뚝 떨어진 것처럼 하얗게 스스로 발광하는 나무가 거기에 있었다.

참으로 기묘한 나무였다. 이파리 한 장 입지 않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그 나무는, 뿌리까지 전부 밀가루를 뒤집어쓴 것처럼 새하얀 색을 입고 있었다. 성수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신비로운 감동이 몰려왔다.

아버지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 나무의 곁으로 다가가 우둘투둘한 표면을 어루만졌다.

“이건 뭐라고 하는 나무인가요, 아버지? 너무 신기해요!”

“사람들은 이 나무를 가리켜서 ‘하얀 거목’이라 부른단다.”

“이름처럼 정말 하얗고 예뻐요.”

“너도 만약 산을 오르다가 이 나무를 발견하거든, 경건한 마음으로 이 앞에 서서 경배하거라. 사실 이 나무는 보통 나무가 아니란다. 무려 아주 오래전에 동면에 들어간 최초의 인간들이 소생한 나무야.”

“소생?”

아버지는 아예 나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곁에 와서 앉으라며 바닥을 두들겼다. 아스트라가 쪼르르 다가가 자리에 앉자 그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곳 대륙에는 이 나무처럼 뿌리부터 이파리까지 전부 새하얀 거목이 여러 그루 존재한단다. 개체 수가 적기는 하지만 산속을 뒤지면 꼭 한 그루는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이곳저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사람들은 성수와 더불어 하얀 거목을 신성시하고 있지.”

아스트라는 옛날이야기를 듣듯 순식간에 아버지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아주 오랜 옛날, 최초의 인간들은 어쩌다 그만 금기를 깨는 바람에 신의 분노를 사게 되었어. 신은 끝나지 않는 겨울을 불러왔고 인간들은 겨울을 피하고자 인간의 껍질을 벗고 나무의 외피로 갈아입었단다. 그러나 신이 다시 분노를 거두었을 때도 그들은 사람으로 되돌아오지 않았어.”

“…….”

“언젠가 그들이 돌아올 날을 기약하며 겨울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거목을 자르지 않고 이렇게 남겨 두었다. 현세에도 최초의 인간들은 후손들을 지켜보며 그들을 보살펴 준다고 전승되어 오고 있기에, 이 나무 앞을 지나칠 때마다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린단다.”

“최초의 인간들은 대체 어떤 금기를 깨서 신이 노여워하신 건가요?”

“……성수를 사냥했기 때문이란다.”

단조로운 대답이지만, 아스트라를 겁먹게 하기엔 충분했다. 설마 그 옛날 인간들이 성수를 사냥했을 줄은 몰랐다. 성수는 그녀에게 친구이자, 가족이다. 그런 그들이 무참히 학살당하는 장면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같아 얼른 고개를 저어서 상상을 뿌리쳤다.

“대체 왜 그런 무서운 일을 벌인 거죠?”

“녀석, 궁금한 것도 많구나. 차근차근 설명해 주마. 원래 성수는 인간을 위해 태어난 존재란다. 최초의 인간들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 그들은 아주 무지했지. 그리고 연약했어. 신은 자신이 빚어낸 생명 중에 저와 꼭 빼닮은 인간들이 굶거나 다른 피조물에게 사냥당해 죽는 것이 안타까웠지. 그래서 성수를 만들어, 인간들이 세상에 녹아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단다. 그렇기에 그 시절에는 성수들이 인간을 아주 잘 따랐어.”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아버지의 입을 통해 술술 흘러나왔다. 아스트라는 어느새 잔뜩 몰입해서 그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어리석은 최초의 인간들은 과욕을 부리고 말았단다. 성수를 제 맘대로 부린다면 신조차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마구 사냥하고 굴복시켰지. 신은 그 모습을 보고 노여워한 거란다.”

“그럼, 이제 성수들은 인간을 따르지 않는 건가요?”

“하지만 너에게만은 유일하게 너그럽지. 너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지 않니?”

다시 궁금증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왜 나만 특별한 것일까? 아스트라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서 끙, 소리를 냈다.

이것만큼은 아버지가 분명히 대답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해답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왜 저만 이리 특별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우스꽝스러운 아스트라의 표정을 보고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쩜 그렇게 잘 아는 거예요? 누가 가르쳐 줬나요?”

제 존재의 의의에 대해 물어도 어차피 아버지는 대답해 주지 않으리라 판단한 아스트라는 대신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어쩜 그는 이렇게 모르는 게 하나도 없을까? 아버지는 아까처럼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뜸을 들였다.

“그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