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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도망칠 수 없다. 그렇다고 전쟁을 위해 성수를 부리고 싶지도 않았다. 금은보화도 부귀영화도 바라지 않았다.

“제가 어째서 성수와 대화할 수 있는지 그 이유는 저도 몰라요. 그냥 어릴 때부터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인간이 아닌 조금 특이한 친구들이 생겼다는 정도였죠.”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아스트라는 답답한 마음에 고해를 시작했다.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지만 외롭지 않았어요. 전 보통 사람과 다르니까 소외감에 괴로울 일이 없었어요. 제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죽는 날까지 고향에서 그들과 함께 조용히 사는 것뿐.”

“…….”

“그리고 그 순간마다 저의 친구들이 곁에 있음에 감사했어요. 제 능력은 신이 내려 준 권능도 무엇도 아니에요. 저와 저의 친구들을 이어 주는 연결고리일 뿐입니다.”

아스트라의 말소리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을 대변하듯이.

“그런데 설마 이 능력이 그런 무서운 일에 쓰이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어요. 사람이 수도 없이 죽고 대지는 황폐해지고 비탄과 절망이 이 세상에 가득 차게 될 텐데, 저더러 그것들을 못 본 척하고서 행복하게 살라고요? 각하께서는 지금 저에게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괴물이 되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아스트라는 세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젖어 들기 시작하는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지 않으면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나의 소중한 그들과 만난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평범하게 태어났어야 했어요.”

“…….”

“그것도 아니라면 저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좋았을까요?”

시야가 번져 들어서 레녹스의 모습이 흐려졌다. 그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밤하늘을 걷는 바람 소리가 강렬해졌다. 벽에 매달린 창문이 부르르 몸을 떠는 소리가 들렸다.

울적해진 아스트라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곧 눈가를 비비더니 멋쩍게 웃으며 덧붙였다.

“죄송해요. 요즘 너무 갑갑해서 각하께 투정만 부렸네요.”

레녹스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아스트라는 숄을 정돈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 상대가 되어 주셔서 감사해요. 조금 홀가분해졌어요.”

아스트라는 애써 거짓말을 했다. 사실은 조금도 홀가분해지지 않았다. 도리어 저 때문에 전쟁이 다시금 발발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당장 눈앞이 샛노랗게 변하는 것 같았지만, 이 이상 투정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그래.”

“각하는 언제 주무시나요?”

“난 원래 잠이 없어.”

“피곤하지 않으세요?”

“그다지.”

레녹스의 말마따나 그는 전혀 피곤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수도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독이 쌓였을 텐데도, 그런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과연 보이는 대로 강직한 사람이다.

“젊은 분이시니까 한창 기운이 넘칠 때라서 좀처럼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걸지도 몰라요. 그래도 나중을 위해 종종 휴식을 챙기시는 게 좋아요.”

아스트라는 참견을 좋아하는 이웃처럼 말했다. 그때도 그는 짤막하게만 대답했다. 긍정하는 건지, 아니면 대충 흘려듣는 건지 표정이 옅어서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감기가 나으면 제대로 복식을 갖춰 입고 다시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그러면 안녕히 주무세요, 데본 공작 각하.”

그녀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며 인사하고는 방을 나섰다. 그녀가 떠나고 다시 레녹스만 홀로 남겨졌다.

그는 정적을 사랑했다. 인기척이 없는 공간. 체온이 없는 서늘한 공기. 그 한가운데에 남겨져서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작은 소음이 침입했다.

그리고 그 소음이 떠나간 자리에 남은 정적은 이전보다 유난히도 고요했다.



* * *



감기가 좀체 나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물며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질 기미가 보이기는커녕 점점 열이 오르고 있는 추세였다.

잘 먹고 푹 자면 금세 나을 거라 했던 휴버트도 얼굴빛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러한 증세가 보이는 이유는 달라진 환경과 심적 부담감이 생각보다 그녀에게 크게 작용해서인 것 같다고 소견을 내비쳤다.

“레이디가 불치병에라도 걸린 게 아닐까요?”

마티유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달복달하면서 불안한 표정으로 침상 위에 누운 아스트라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아스트라는 심한 고열을 앓고 있었다. 색색 가냘픈 숨소리가 실낱같이 이어졌다.

단아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 주며, 휴버트가 추켜세운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가 마티유에게 조용히 하라는 동작을 취했다.

“그저 고약한 열병을 앓고 계신 것뿐입니다.”

“하지만 점점 더 악화되고 있잖아요!”

“좀 조용해 해 주세요, 도련님. 이리 주변이 어수선해서는 낫던 병도 도로 도지겠습니다.”

휴버트의 일침을 듣고 마티유는 얼른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이불 속에서 곤히 잠든 아스트라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이 소란에도 깨지 않을 정도로 아득히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얼굴빛이 수차례 붉으락푸르락 변하지를 않나, 침의는 땀기에 젖어서 마를 새가 없었다.

“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겐지.”

“그러게요. 슬슬 좋아지던 게 아니었습니까?”

“혹여 성녀님께 부담이 될 만한 이야기를 했다거나, 무리한 일을 시킨 적은 없습니까?”

“환자에게 그런 일을 할 리가요. 영감도 알잖습니까? 레이디는 줄곧 이 방에서 쉬고 계셨…….”

말을 이어 가던 마티유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머리맡에 이 방에서 못 보던 책 두어 권이 보였다. 지난밤, 문병을 왔을 때까지만 해도 없던 물건이었다. 마티유는 머리를 살짝 갸우뚱거리다가 눈을 반짝였다.

“아무래도 이 책을 가지러 중간에 도서관에 들르신 것 같은데요?”

“하지만 고작 도서관에 들른 것 가지고 증세가 나빠질 리 없지 않습니까?”

그의 말이 맞다. 아스트라가 쉬고 있는 방에서 도서관까지 제법 거리가 있기는 했으나, 그 거리를 오갔다고 해서 열이 펄펄 끓을 정도로 나빠지기는 어려웠다. 마티유는 다시 골몰했다.

그렇다면 도서관을 오가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스트라를 깨워서 자초지종을 듣는다면 금세 의문이 해결되겠으나, 곤히 잠든 환자에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만, 그러고 보니 공작 각하도 엊그제 느직할 무렵에 ‘도서관의 밀실’에 들르지 않으셨던가? 어쩌면 거기서 둘이 마주쳤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신경한 그 때문에 아스트라가 어떤 부담되는 일이라도 겪은 것은 아닐까?

원래 본성이 못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깊은 속까지 타인의 심경을 헤아려 줄 정도로 그는 섬세하지 못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마티유는 휴버트에게 간병을 맡기고 즉시 레녹스를 찾아 나섰다.



다행히 그는 어디 외출하지 않고 성에 머물러 있었다. 아니, 쉐인에게 붙잡혀 있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쉐인은 데몬 가문의 고성이 제 집인 양, 가장 넓은 응접실을 점거하고서 여유롭게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옆자리에는 레녹스가 늘 그랬던 것처럼 감흥 없는 표정으로 쉐인의 하잘것없는 수다를 듣고 있는 중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각하. 여쭤 볼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어서 오거라, 우리 강아지.”

쉐인은 마티유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이리 와서 함께 차를 마시지 않겠느냐? 아니면 이 주인님의 어깨라도 주물러 보거라.”

“그건 나중에 얼마든지 해 드릴게요, 전하. 지금 레이디 아스트라가 많이 아픕니다.”

“으응? 슬슬 호전되고 있다 하지 않았더냐?”

“예, 그런데 엊그제부터 다시 고열을 앓고 있습니다.”

그리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누가 뭐래도 아스트라는 지금 대륙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존귀한 몸이었다. 이 세상에 처음으로 현현한 성녀의 존재가 아닌가?

아스트라 이전에는 그 누구도 그녀처럼 성수의 말을 알아듣고 대화할 수 있는 신성한 인물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타국의 대신들이 굶주린 아귀처럼 달라붙어서 그녀를 내놓으라며 성화인 것이었다.

그런 그녀이니만큼 지금 데본 공작의 보호 아래서 잘 먹고 잘 지내기도 모자란 판국인데, 와병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이 건수를 물고서 또 무섭게 달려들 것이다.

쉐인은 텁텁한 표정으로 자신의 매끈하고 날렵한 턱을 쓰다듬었다.

“아스트라 양이 그렇게 위독한가?”

“휴버트 영감의 말로는 스트레스 때문에 증세가 나빠진 것 같다 합니다.”

“이 녀석, 그러기에 작작 얼굴을 비추라 했거늘. 한눈에 반했다고 금붕어 똥처럼 졸졸 쫓아다녔으니, 아스트라 양이 얼마나 곤혹을 치렀을지.”

“무,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레이디가 이곳에서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는……. 아니, 그리고 애초에 그녀에게 그런 사적인 흑심 따위!”

“그래, 알겠으니 진정해라. 물어볼 것은 무엇이냐?”

그제야 마티유는 평정심을 되찾고 심호흡했다. 쉐인의 농에 말려들면 끝이 없었다.

“각하, 혹시 그새 레이디와 마주친 적이 있지는 않으십니까?”

“엊그저께 새벽 즈음에 도서관에서 마주쳤다.”

“역시.”

마티유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그는 조금 더 캐 보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사실 그날을 기점으로 상태가 많이 악화된 것 같아서 원인을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레녹스의 눈썹이 짐작 가는 바가 없다는 것처럼 구부정하게 일그러졌다.

“사소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지금 레이디 아스트라는 아무렇지 않은 척할 뿐이지 크게 불안을 느끼고 있는 듯합니다.”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다. 단지, 현 상황에 대해서 조금 대화를 나눈 정도야.”

“얼마나?”

“각국이 아스트라를 쟁취하고자 하는 이유가 전쟁이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줬다.”

아이고, 두야. 마티유는 머릿속이 아뜩해졌다.

하필이면 하고 많은 것 중에서 저런 이야기를 들었으니, 심리적 압박감에 지쳐서 몸져눕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제국과의 다국적 전란이 겨우 진정된 시기에, 저 때문에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정신이 멀쩡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하지만 무딘 레녹스는 그런 속사정도 모른 채, 여느 때와 같은 안온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