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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놀러 와? 그렇게 놀고 싶으면 사표를 내고 집에 가서 아예 놀아, 그냥.”

조 과장의 비꼬는 목소리가 오늘따라 매서운가 싶더니 강준의 신경마저 건드리고 있었다. 아니, 사실 조 과장의 목소리보다는 그가 혼내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서부터 더욱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죄송해요.”

더 이상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었는지 애정은 빠르게 사과하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아오!”

열불이 나는지 파티션에 몸을 숨기고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조 과장을 향해 엿을 날리는 애정을 강준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 시선이 느껴졌는지, 흠칫한 애정이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못 본 척해 줘.”

“네.”

강준은 사물함에 잔뜩 사 놓은 초콜릿과 사탕을 꺼내 애정에게 건넸다.

“하나 드실래요?”

“어? 마침, 나 초콜릿 다 떨어져서 지금 사러 갈까 말까 고민 중이었는데.”

사실 강준은 그다지 군것질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젠가 짜증이 날 때 달달한 것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애정의 말이 떠올라 사다 두고 감정이 격해질 때마다 하나씩 입에 넣었다.

“두 개 드세요.”

애정이 예전에 했던 것처럼 강준은 또 초콜릿을 들어 애정에게 건네고.

“세 개, 드실래요?”

또 건넸다. 애정은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거 내 거거든? 쓸 거면 저작권료 내고 써.”

“얼마면 돼요?”

“얼마나 줄 수 있는데요?”

시답지 않은 농담에도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다가 애정이 띠링, 하고 울리는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니 남자 친구인 모양이었다.

씁쓸한 마음과 함께 몸을 돌려 업무에 집중하려 했지만 강준의 마음은 여전히 애정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싱숭생숭했다.

이러한 증상은 애정을 볼 수 없는 주말에 더욱 강준을 괴롭혔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씻고, 점심을 먹고, 간단한 업무를 보고, 별 재미없는 TV 앞에 무료하게 앉아 있을 때까지도 애정이 떠올랐다.

“후우.”

목소리를 마음껏 들을 수 있다면, 보고 싶을 때 보러 갈 수 있다면,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면…….

남자 친구와 데이트 중일까? 그 말간 미소를 지으며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까?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집에서 멍하니 앉아서 견디기에는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강준은 오래도록 타지 않았던 자전거를 탔다. 한강에 가서 미친 듯이 페달을 밟으면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땀범벅이 된 몸으로 자전거를 세우고 어느새 오렌지 빛깔로 물든 하늘과 한강을 바라보며 강준은 또다시 애정을 떠올렸다. 점점 좋아지는 날씨의 도움을 받아 그녀와 함께 한강에서 자전거도 타고 맥주도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런 날이 언제쯤 제게 올까. 그런 날이 올 수는 있을까?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짝사랑이라는 것이 이렇게 아프고 애간장을 태우는 것일 줄은 몰랐다.

그럼에도 후회는 하지 않았다. 그녀를 짝사랑하면서도 아픈 것보단 좋은 것이 훨씬 많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보고 싶다.”

다시 페달을 밟았다. 강준의 짝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애달프고 깊어져 갔다.



* * *



멀쩡했던 하늘이 점점 회색빛으로 물들더니, 곧 천둥 번개와 함께 예상치 못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큰일이다. 차를 카센터에 맡기느라 우산도 가져오지 않았다. 업무가 끝날 때쯤엔 그치길 바랐지만 그런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파는 편의점이 근처에 있었지만 거기까지 뛰어가면 그사이 옷이 홀딱 젖어 소용없을 게 분명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강준이 결국 가방을 머리로 막 가져갔을 때였다.

“그러다 감기 걸린다.”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강준이 돌아섰다. 텅 빈 사무실에서 혼자 야근을 하고 나오는 길이었기에 회사 안에서 나오는 애정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주말에 업무 봐야 하는데, USB를 두고 갔잖아. 그래서 다시 왔어. 이 열정 대단하지? 박수라도 쳐 줄래?”

그러고 보니 그녀의 옷차림이 오늘 아침과는 달랐다. 편안한 운동복을 입어서인지 서른 살이라는 나이답지 않게 어려 보였다. 분홍색 우산을 차악, 하고 편 애정은 폭우가 쏟아지는 밖으로 힘차게 걸어 나갔다.

“가자.”

좁은 우산을 애정과 함께 쓰며 걸으려니 자꾸만 몸이 부딪혔다. 마치 심장이 부딪치는 것만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네가 들어.”

애정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에 정신이 팔려 다른 걸 신경 쓰지 못했던 강준은 그제야 알아 차렸다. 애정이 자신에게 우산을 씌워 주려고 까치발까지 들고 뒤뚱뒤뚱 걷다가 결국 어깨 한쪽이 홀딱 젖어 버린 것을.

“죄송해요.”

강준이 얼른 우산을 들어 애정에게 기울였다.

“야아, 너 비 다 맞잖아. 이러면 내가 우산을 씌워 주고도 생색을 낼 수가 없는데.”

“대리님도 다 젖으셨잖아요.”

애정은 젖은 제 어깨를 보며 아무렇지 않게 툭툭 털어 내 보였다. 그렇게 잠시 침묵 속에서 거리를 걸었지만 강준은 그것조차 좋아 자꾸만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겨우 참아 내며 걷고 있는데 눈앞에 주황색 포장마차가 보였다.

“우동이다.”

따뜻한 김이 폴폴 올라오는 우동을 발견한 애정이 낮게 중얼거렸다.

“우동 드실래요?”

“나 오늘 저녁 안 먹으려고 그랬는데, 그럴까?”

“집에 가셔서 또 업무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맞아.”

“배고프셔서 집중 안 되실 거예요. 같이 먹고 가요.”

“그러자!”

애정이 금세 신이 나서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강준도 함께했다.

“제육볶음도 먹어야지. 이모님, 여기 우동 두 그릇에 제육볶음 주세요.”

주문하고도 애정은 계속 메뉴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무언가 더 먹고 싶다는 눈치였다.

“너 더 먹고 싶은 거 없어?”

“음.”

애정과 함께 메뉴판을 보던 강준의 시선이 다시 돌아갔다. 메뉴판을 전부 다 외워 버릴 기세로 뚫어져라 쳐다보던 애정이 무언가를 손으로 가리키고는 고개를 돌렸다. 강준도 다급하게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떡볶이 먹을래?”

“좋아요. 드시는 거에 비해서 살 진짜 안 찌는 체질이신 것 같아요.”

“나 그런 소리 많이 들어. 근데 요즘 좀 쪘어.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데 세상에는 맛있는 게 너무 많아.”

그때 먼저 시켰던 제육볶음과 우동이 나왔다. 애정은 제육볶음을 우동 국물에 넣어 면과 함께 돌돌 말아 먹었다.

“이렇게 먹으면 맛있어.”

강준도 애정을 따라 먹어 봤다. 매운 제육볶음과 담백한 우동이 만나니 입맛이 확 돌았다.

“진짜 맛있네요.”

“아, 국물 따뜻하다. 비도 오니까 분위기 있어. 그치?”

“네.”

두 사람은 가만히 비가 내리는 밖을 바라보았다. 아니, 강준은 이번에도 비를 바라보고 있는 애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애정의 입술 옆에 묻어 있는 소스를 발견했다.

강준은 휴지를 집어 들고서 애정의 입술을 닦아 주었다.

“어?”

“뭐가 묻어서요.”

“아, 내가 이렇게 묻히고 먹어요. 우동 면발 분다.”

“천천히 먹어요.”

애정이 다시 급하게 우동을 흡입하기 시작하자 강준은 단무지 하나를 집어 애정의 우동 안에 넣어 주었다.

“응. 그럴게.”

자꾸만 애정과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졌다. 그럼에도 애정이 남자 친구와 헤어지길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팀원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많아지고, 메신저 프로필에 남자 친구의 사진이 한 장씩 사라지고, 데이트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보며 오히려 마음이 불편했다.



“대리님 말이야, 남자 친구 분이랑 헤어진 거 같지?”

“어. 그런 것 같아.”



우연히 들어갔던 휴게실에서 듣게 된 이야기에 강준은 그녀가 감당해야 할 상처와 아픔이 걱정되었다.



“오늘 소주 한 잔 할 사람 여기 붙어라!”



하지만 그녀는 무척이나 밝았다. 어쩐지 그게 더 신경이 쓰였다. 누군가는 이 짝사랑을 끝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할 수도 있다. 강준 역시, 이젠 애정의 옆자리를 자신이 차지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백을 하진 않았다. 그녀를 위로해 줄 방법을 찾고 싶었고, 마음을 추스릴 시간을 주고 싶었다.



* * *



사촌 누나 결혼식에 참석한 강준은 신랑의 얼굴을 보고 기가 막혔다. 세상에 이런 빌어먹을 운명이 다 있나 싶었다. 하필이면 사촌 누나의 신랑이 애정의 전 남자 친구였다.

악수를 청하며 활짝 웃는 태형에 강준은 손아귀의 힘을 꽉 쥐었다.

“아아아.”

태형이 몸을 비틀며 아파 죽겠다는 듯 울상이 되었다. 강준은 더욱 힘을 주고 싶었지만 이모의 의아한 눈길에 그만두어야 했다.

시기가 참, 뭣 같았다. 애정과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결혼을 하다니. 이미 그전부터 바람을 피우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세상 그렇게 살지 마세요.”

자신도 모르게 내뱉어 버린 말에 태형은 어리둥절해했지만 강준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잘 사시라고요. 저희 사촌 누나랑.”

“아, 네.”

예식을 대충 보고 가족들과 식당으로 올라갔다. 그러다 그곳에서 애정을 봤다. 맹렬하게 새우를 까고 맥주를 들이켜고 있는 애정을.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녀의 등장이 아예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초대도 안 한 자리에 왔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이 자리를 태형이 초대를 한 것이라면 진짜 상종 못할 인간이라는 분노가 치밀었다.

강준은 식사를 하는 것도 잊은 채 애정의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애정은 꽤 잘 먹었다. 갈비를 뜯고 새우를 뜯고 맥주를 두 병이나 마셨다.

모르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도 절대 굴하지 않고 먹던 애정이 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고 강준은 가족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며 서둘러 그녀를 따라 나갔다. 얼핏, 일어설 때 애정의 눈물을 본 것 같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함께 있어 주고 싶었다.

몰리는 사람들 틈 사이를 정신없이 헤집고 가서 겨우 애정의 팔을 잡았다. 애정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으응? 박강준?”

붙잡은 사람이 자신임을 확인하는 애정의 눈빛이 묘했다. 투명한 눈물이 가득 차 있는 눈동자에선 어쩐지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것이 강준의 착각일지 몰라도, 그녀는 마치 그렇게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강준은 찰나에 마주한 그녀의 눈빛에 잡고 있던 팔을 더욱 애틋하게 붙잡았다.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픈 그녀를 안아 주고 싶었고 이제 그만, 짝사랑을 끝내고 싶었다.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