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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모든 쉽게 적응을 잘 하는 강준도 처음 해 보는 사회생활은 꽤 힘이 들었다. 특히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상사들에게 잔소리를 듣기 싫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고 싶은 욕심은 매일 야근이라는 지옥으로 등을 떠밀었다.

그 바람에 오래전부터 운동으로 키워 온 체력도 바닥이 나서 겨우 정신을 붙들며 업무를 이어 갔다. 그러다 보니 점점 자잘한 실수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입사한 지 1년이 넘어가면서 강준은 조 과장에게 큰소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잔소리를 듣는 횟수가 잦아졌다.

“정신 좀 차리고 해, 강준 씨. 어?”

“네, 죄송합니다.”

한숨을 후우, 하고 내쉬며 자리로 돌아와 죄책감에 마른세수를 하느라 거칠게 얼굴로 비비고 있을 때였다.

“이거 먹어.”

옆에 앉아 있던 대리, 애정이 쓰윽 초콜릿을 내밀었다.

“두 개 먹어.”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기도 전에 애정은 다시 초콜릿을 하나 내밀며 속삭였다.

“세 개 먹을래?”

또다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기 전에 초콜릿 하나가 더 내밀어졌다. 말할 때마다 들쑥날쑥한 웃긴 목소리 억양에 결국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애정은 강준에게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보고 있으면 이유도 없이 웃음이 나오고 싱거운 대화를 해도 자신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사람. 밝고 명쾌해서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그런 좋은 기운을 주었다.

입사 첫날, 사무실에 있던 냉랭한 상사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호탕한 미소를 지으며 반겨 주기도 했었다.

그녀의 옆자리에 앉은 건 큰 행운이었다.



“이제 앞으로 우리는 가족 같은 존재, 한배를 탄 아군처럼 지내야 한단 말이에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네, 말씀 놓으세요.”

“하하, 그럴게. 같이 일하게 돼서 너무 반가워.”



당당하면서도 유쾌한 그녀의 모습이 긴장을 풀어 주었고 힘들 때마다 위로가 되기도 했다.

“1차는 성공이네. 오늘 기분도 더러울 텐데, 소주 한잔할래? 연희 씨랑 공 대리랑 미연 씨랑 호원 씨랑 같이.”

남자 친구가 있어서 개인적인 술자리는 갖지 못하던 애정이었다. 애정이 없는 술자리에서는 종종 그녀의 이름이 언급됐었다. 특히 공 대리는 입만 열면 애정의 칭찬이었는데, ‘정 대리가 이 자리에 없는 게 섭섭하네!’라고 매번 말했기 때문에 강준은 언제나 궁금했다.

그녀가 있는 술자리는 대체, 얼마나 재미있기에 그런 것일까? 하고. 그래서 선뜻,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약속을 잡았다. 심지어 설레기까지 했다.

아니다 다를까, 그녀는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띄우는 일을 톡톡히 해 냈다.

“강준 씨, 정 대리 재밌지?”

애정의 농담에 배가 찢어질 것처럼 웃던 공 대리가 강준의 팔을 툭 치며 물었다. 강준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네. 너무 재밌으세요, 진짜.”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지 않아?”

“앞으로도 종종 계속 술자리 같이 하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강준은 공 대리와 다른 이유로 애정의 참석을 원했다.

“사실 제가 회사에 잘 적응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한없이 재미있는 것 같다가도 누군가가 진지하게 상담을 해 오면 그녀는 금세 덩달아 진지해졌다. 술에 살짝 취해 고민을 털어놓는 후배의 어깨로 애정은 다정하게 팔을 두르며 대답해 주었다.

“적응 시기를 판단하기에는 좀 이를 수도 있어. 하지만 정말 회사에 나가기 싫고 막 눈물이 날 정도로 미쳐 돌아버릴 것 같으면 차라리 그만둬. 스트레스만큼 세상에 나쁜 것도 없는데, 그러면서까지 버틸 만한 가치는 없지. 그렇다고 스트레스 받지 않는 직업도 없다? 하지만 최대한 덜 받는 직업, 그런 직업을 선택해. 넌 아직 어리니까 조금 더 부딪쳐 봐도 괜찮아.”

진심으로 후배를 위로하는 그녀의 모습이 어쩐지 강준의 눈에는 섹시해 보이기까지 했다. 다른 상사들과는 달리, 후배들을 무시하거나 부려 먹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후배들이 어려워하는 게 있으면 늘 나서서 도와주었다. 그건 사적인 자리에서 유난히 드러났다.

“아, 물이 다 떨어졌네. 어, 셀프잖아?”

애정이 빈 통을 들고 중얼거리자 옆에 앉아 있던 팀원이 일어섰다.

“제가 가져올게요. 대리님.”

“앉아 있어. 사무실 안에서나 대리지, 밖에서는 그냥 나이 더 먹은 언니일 뿐이라고. 평소 운동도 안 하는데 이번 기회에 하지, 뭐. 더 필요한 거 없어?”

빈 통을 들고 일어선 애정이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물어보다가 강준과 시선이 부딪쳤다. 강준은 그런 애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뭐 필요한 거 있어?”

술을 마셔 살짝 달아올라 있는 뺨, 조금 지워진 것 같지만 여전히 붉은 입술, 아무렇게나 넘겨서 살짝 흐트러진 머릿결, 좋은 향기가 날 것만 같은 뽀얀 피부……, 그리고 상냥한 목소리와 자신을 바라보는 촉촉한 눈빛.

갖고 싶은 건, 그 어떤 것도 아닌 그녀였다.

“취했어? 내 말 들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 강준을 향해 애정이 두 손을 흔들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셀프 바로 향했다. 강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애정에게로 다가갔다.

다른 팀원들이 부탁한 튀긴 건빵을 열심히 담던 애정은 강준의 등장에 깜짝 놀란 듯싶었다. 큰일이다. 움찔하는 어깨마저 귀엽게 느껴져서.

“깜짝이야.”

“놀랐어요?”

“그럼. 갑자기 다가오는데, 놀라지.”

애정의 말에 강준은 살짝 웃어 보였다.

“물은 제가 가져갈게요.”

“너 잘하고 있어, 알지?”

갑작스러운 애정의 말에 강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애정은 따뜻한 눈으로 강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없이 하는 소리가 아닌 진심으로 느껴졌다.

“너무 잘하고 있어서, 놀랄 정도야.”

“정말이요?”

“응. 그러니까 오늘 일로 괜히 기죽거나 자책할 필요 없어. 사람은 누구나 다 실수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냐? 기계도 고장이 나는데.”

잔잔한 애정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강준은 그녀를 자신의 두 눈에 꼭 담아 넣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실수는 하게 되겠지. 그런데 그럴 때마다 좌절하게 된다면 자책하는 버릇이 생길 거야.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존감이 떨어지면 안 되니까.”

애정이 그릇에 담은 튀긴 건빵 하나를 입에 쏙 집어넣었다. 귀엽다. 강준은 애정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좌절은 적당히. 알았지? 좌절 대신 실수를 잊지 않는 버릇을 길러. 실수를 잊지 않으면 더 이상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거고, 그러면 자존감은 유지가 될 거야. 내가 살다 보니까 그러더라고.”

“네. 꼭 기억하고 기도 안 죽을게요.”

고맙다는 의미로 한 번 더 웃어 보였다. 아니, 애정이 해 준 말이 위로가 되고 기분이 좋아서 웃었다.

“너 지금 보니까.”

“네.”

“웃는 거 무지 예쁘다, 야.”

무심하게 마지막 말을 내뱉고서는 자리로 돌아가는 애정의 발걸음을 강준은 눈길로 따랐다. 웃는 게 예쁘다는 소리는 귀가 닳도록 숱하게 들어왔던 흔한 말이었다. 그래서 늘 감흥이 없었는데, 그것을 애정에게서 들으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심장이 폭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뛰었다.

다시 테이블에 앉아 아무렇지 않게 수다를 떠는 애정의 모습을 강준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았다.

예쁜 여자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애정은 취했다.

“3촤앗! 3촤로 노래방 가좌아아!”

취해서 잔뜩 들뜬 모습은 더 귀여웠다. 노래방을 가자고 외치는 애정을 팀원들은 꼰대들의 진상처럼 보기 싫은 얼굴을 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했다.

“좋아! 노래방은 내가 산다!”

공 대리가 신난 목소리로 외쳤다. 평균 나이 32살의 어른들이 아이돌 공연이라도 보러 가는 소녀 팬들처럼 신이 나서는 노래방으로 달려갔다. 그중 애정이 가장 신나 보였다. 탬버린을 들고 춤을 추기도 했고 벽을 잡고 머리를 풀어 헤쳐 흔들기도 했다.

“강준아, 너도 나와서 좀 놀아!”

애정만큼이나 신이 난 공 대리가 앉아 있는 강준을 끌어당겼다. 예상치 못했던 강한 힘에 급하게 끌려 나오던 강준은 벽을 잡고 머리를 흔들던 애정을 툭, 건드리고 말았다.

순간 애정이 넘어질 줄 알고 자신도 모르게 팔로 허리를 감쌌다. 본능적인 행동에 스스로도 놀란 강준이 얼른 물러섰다.

애정은 수그리고 있던 머리를 거칠게 들어 올렸다. 풀어 헤쳐 공중에 휘날리는 애정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좋은 향이 강준의 코끝을 스쳤다. 살짝 풀어진 눈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보던 애정의 입술 옆으로 오징어가 삐죽 튀어 나와 있었다.

“춤추시면서 계속 드시던 거예요?”

“응. 맛있어.”

귀여워.

하마터면 그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더라도 절대 밖으로 티를 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에겐 이미 사랑하는 남자가 있으니 말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애정이 다시 테크노를 추기 시작했다. 앞에서 나부끼는 머리카락이 강준의 뺨을 후려쳤다. 살짝 아팠음에도 향기가 싫지 않아 계속 자리를 지켰다.

“잉? 내 오징어!”

신나게 흔들던 애정이 바닥에 떨어진 오징어를 향해 간절한 손을 펼쳤다. 저 오징어가 뭐라고…….

강준은 얼른 새 오징어를 가져와 애정의 입에 물려 주었다.

“고마워.”

싱긋 웃는 그녀의 모습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애정의 남자 친구가, 이런 여자를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그 남자가 부러웠다.



* * *



다음 날 아침, 누구보다 일찍 출근한 강준은 가방을 열어 안에서 숙취 해소 음료를 꺼냈다. 그냥 애정의 책상 위에 덩그러니 올려놓았는데, 뭔가 심심한 것 같아 메모지를 꺼내 끄적끄적 적어 보았다.



오늘도 힘내요, 저희!



가볍게 붙여 놓았지만 그거대로 닭살이 돋는 것 같아 다시 떼어 버렸다.

잠시 뒤 팀원들이 하나둘씩 출근하기 시작했다.

“정 대리, 얼굴 봐라! 저게 회사 나올 얼굴이냐! 회사가 아주 그냥 학원이지?”

아침부터 시비조인 조 과장의 외침에 강준은 미간을 구겼다. 흡사 좀비와 같은 포즈로 걷던 애정이 몸을 꼿꼿이 세우고서 자리로 와 앉았다. 강준이 가볍게 묵례를 하자 애정이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아침부터 저게 가뜩이나 속도 안 좋…… 엇, 이건 뭐지?”

책상 위에 있는 숙취 해소 음료를 보며 애정이 환하게 웃었다. 강준은 복사할 서류를 들고 일어나고 있었다.

“마침 이게 엄청 필요했는데, 누가 사다 놓은 거지?”

두 손으로 숙취 해소 음료를 쥐고 주변을 휙휙 살피며 눈짓으로 묻는 사이 벌써 복사기 앞까지 온 강준은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누구인지 몰라도 어쨌든 고맙소이다.”

그녀의 호탕한 목소리에 오늘도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