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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우연히 떠올린 생각이었지만 따져 볼수록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황제가 먹는 음식에 독이 있는지의 여부를 우선 감별하는 자. 무기를 가까이 할 이유가 없으니 위협이 되지 않고, 언제 발생할지 모를 독살을 대비한 존재이니 불구대천 원수의 핏줄을 용서한다는 의미도 아니며, 별 탈 없이 오래 살다가 제 명대로 죽는다면 황제의 관대함 탓이 아니라 그저 천행일 따름이다. 그렇게, 세상의 눈을 진실로부터 완벽하게 가릴 수 있다는 것과 더불어 주변국들이 이쪽을 만만하게 평가하지 못하리란 장점이 따라온다는 점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진실. 류안은 그것을 당자인 건헌에게조차 알릴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그가 아비와 다르다 한들 핏줄은 끊을 수 없으며, 그로 인해 경멸과 반감의 대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감별사는 황제와의 식사 도중에 그 음식을 먹고 급사하는 외에 다른 방식으로 죽을 일은 없고, 죽어서도 안 된다. 그의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즉시 알 수 있으리라. 또한 적어도 하루 세 번은 그의 무사함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복수심, 혹은 눈먼 공명심에 의해 그녀가 모르는 사이 해코지라도 당하지 않는지.

그저 그가 무사히 자신의 곁에서 살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인 작은 소원을,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이란 말이 절로 나옵니다만 그가 폐하의 그 은혜로운 의중을 다 알아줄까요?”

……아무도 모르진 않겠군.

하긴 자신의 각관이 모를 일이라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들뿐이려나. 그녀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소군은 예주모윤의 삼남이 반역을 도모하다 실패했다는 소식에 거사를 앞당겼을 때도 적의 내부 분열을 이용하자는 그녀의 말에 속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번 역시 주군의 다른 마음을 단번에 간파한 그가 말을 이었다.

“차라리 깨끗하게 죽게 두지 왜 그런 모욕을 주느냐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폐하를 더욱 원망하겠지요. 저로서는 그런 건 사양하고 싶은데요. 적으로 돌리면 제법 귀찮을 사내이고 하니.”

“그대가 칭찬을 하다니 드문 일이군.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고작 감별사 하나가 그대의 손을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면 걱정해야 하나?”

놀리는 것처럼 덧붙인 그녀의 물음에 소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도발에 넘어가 드리지요. 하지만 방금 드린 말씀은 염두에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알아. 알고 있다. 어쨌건 그리 알고 그대가 처리해 줘. 단 예주씨氏는 금일로 모두 사망이 확인된 것으로 하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고개를 숙인 소군이 다소 짓궂은 목소리로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새로운 홍국의 첫 번째 인사人事로군요.”

류안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그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보고 있던 서류로 다시 주의를 기울인 그녀는 그러나 금방 집중하지 못했다. 소군이 했던 말이 새삼 그녀를 짓눌러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건헌을 감별사로 만드는 것은 실상 그녀만의 욕심인 건 사실이다. 더욱이 미련 없이 죽으려고 한 사람을 말리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마음 한편에서 그래도 소군의 우려가 현실이 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인지, 기대인지를 붙드는 자신을 비웃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예주건헌은, 선우류안을 증오할 수도 있다. 그 점에서는 각오를 해 두는 편이 좋으리라.

류안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이 몸에게 어떤 각오를 시키는 것도 그대뿐이려나.

언젠가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 것부터 시작해서 그에게 전부 받아 내고 말 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一章.


“폐하.”

류안은 상념에서 깨어나 시선을 들었다.

정갈하게 마련된 음식들이 자리를 채운 긴 식탁 맞은편에서 건헌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늘 반듯한 자세로 앉아 적의 없는 눈으로 차분하게 이쪽을 응시하는 그를 볼 때면, 그녀는 그가 왜 자신과 겸상을 하고 있는지를 잊곤 했다. 그저 단순히 식사를 함께할 뿐인 것처럼. 그 역시도 가끔은 무시무시한 처지를 잊어 주길 바라기도 하지만 그건 지나친 욕심일 터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그에게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자리를 만들어 주었으니까.

류안은 빙긋 웃었다.

“먼저 말을 걸다니 별일이군. 그래, 듣겠다.”

“……확인은 이미 끝냈습니다만.”

이것 보라지. 그녀의 웃음은 조금 더 짙어졌다.

“대체 왜 멍하니 앉아 있는지 이상했나? 잠시 그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예의를 지켜 빗겨 있던 시선이 당장 똑바로 향해 왔다.

“그대와 내가 처음 만난 날이 생각났거든.”

“…….”

“매일이 그렇듯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은 날일 뿐인데. 잊히지가 않는군.”

“저 또한 그렇습니다.”

그는 의외로 즉각 말을 받았다. 이유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말했던 그녀는 덕분에 그가 이 이유 모를 기분까지도 동감한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관 않기로 하고 기분 좋게 젓가락을 들었다. 잠시 시간을 둔 다음 그도 내려놓았던 수저를 다시 들었다. 이제부터야말로 두 사람의 ‘식사’였다.

느긋한 젓가락질 사이로 류안은 건헌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아무도 그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놓았던 때로부터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고작 한 해가 지났을 뿐이지만 독립군의 수장에서 제국 황제로 탈바꿈함에 따라 많은 것이 변한 류안으로서는 위치가 황자든 감별사든 변함이 없는 그가 신기할 정도였다. 아마 거사가 성공해 그가 백아국 22대 황제가 되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백성의 사랑을 받는 공명정대한 군주가 되었으리라. 어쩌면 류안 자신보다 더.

하지만 지금 그는 자신의 감별사였고 그 미래는 자신의 몫이 되었다. 이제 남은 건 일어나지 않은 일보다 일어난 일의 결과가 훨씬 더 나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뿐이었다.

류안이 운명의 깜찍한 짓에 대해 새삼 감탄하고 있을 때, 시종이 각관의 내방을 알렸다.

“들라 이르게.”

곧 소군이 들어와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간밤에 일어난 일들을 간략하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건헌이 동석한 첫날, 소군은 그가 있는 자리에서 국정을 논해야 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했는지 굉장히 탐탁잖아 했다. 지금도 소군은 건헌을 철저히 없는 자 취급하고는 있지만, 이제 더는 듣는 귀를 불편해하지도 않고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가 건헌을 조금은 인정했다는 증거이자 커다란 양보였다. 건헌 역시도 그저 장식된 정물처럼 존재감을 없앤 채 조용히 앉아 있음으로써 그에게 보답하고 있었다. 이 또한 두 사람이 나누는 신뢰라고 할 수 있어서, 류안은 그들과 함께 있는 이 순간을 몰래 즐기곤 했다.

그녀는 보고를 들으며 질문거리를 찾고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간략하게 받아 적고 마지막으로 금일의 일과를 보고한 소군은 두루마리를 갈무리한 다음에도 어쩐 영문인지 바로 나가지 않았다. 두부요리를 맛보던 류안이 틈을 내주었다.

“그대가 망설일 만큼 큰 문제라도 있나?”

“시각에 따라서는 그럴지도 모릅니다만.”

운을 뗀 소군이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화현華顯가에서 폐하께 좋은 말벗을 소개해 드리고 싶다는 청을 넣어 왔습니다.”

“말벗?”

무슨 일인가 싶더니. 류안은 기가 차 코웃음을 쳤다.

“일국의 군주로서 통탄하지 않을 수 없군. 소위 명가라는 것들이 나라 일에 전념치 못할망정 뚜쟁이 노릇이나 자처하고 있으니.”

건헌의 젓가락이 허공에서 멈칫, 정지했다. 그러나 그 찰나를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군이 엄숙하게 말했다.

“그리 매도하실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뭐, 설마 하니 쭉정이를 보낼 생각은 아닐 터이니 한번 만나는 보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각관, 그대는 뉘 편인가?”

“이 문제가 폐하를 편먹기 좋아하는 골목대장으로 돌려놓을 만큼 심각한 사안인 줄은 미처 몰랐군요.”

류안이 슥 노려보았지만 소군은 모른 척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다가 계속 말했다.

“사실 그들의 입장을 보면 주제넘은 것은 아닙니다. 폐하께서 성년이신 데다 나라의 기틀도 무리 없이 잡히고 있으니, 신하 된 자로서 그만한 충언은 해야 체면이 서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소신은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오지 않은 것이 신기합니다.”

“별것이 다 신기하군. 누차 말하지만 시침랑으로도 좋다면 말리지 않겠다. 그렇게 전하도록.”

“이번에는 정녕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슨 뜻이지?”

“말씀은 그리하셔도 늘 이래서 싫고 저래서 나쁘고, 온갖 트집을 잡으시니 말리지 않기는커녕 내치는 것과 진배없었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류안이 작게 신음했다.

“그대, 분명 역대 최강의 각관일 거야.”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당연한 거 아니겠느냐는 얼굴로 뻔뻔하게 겸양을 중얼대는 소군은 정말 강적이었다. 이대로는 이 줄다리기가 결판나지 않을 것이라, 결국 류안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지하게 고려해 보겠다고 한발 물러났다.

“그리고 정오에 떠나는 수렵은 직접 지휘하겠다.”

“……명 받들겠습니다.”

소군은 ‘골이 아파 옵니다.’를 잘못 말한 표정으로 인사하고 나갔다.

늘 위험하다느니 쓸데없다느니 말리는 말을 듣지 않은 덕분에 이미 수렵에 나가기도 전에 기분이 전환된 류안은 식사를 마저 끝냈다. 비슷한 속도를 유지하던 건헌 역시 젓가락을 놓았다. 첫날, 굶겨 죽일 생각은 없으니 굳이 맞추지 말고 알아서 충분히 먹으라고 지나가듯 말한 적 있었지만 그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소매를 펄럭이며 손짓했고 자리를 뜨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