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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별鑑別




감별鑑別

名. 보고 식별함. 가치와 진위를 판단함

1화

序章. 필연必然



문이 열린다.

건헌은 단정히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기다렸다.

정복자…… 아니, 해방자가 가까이 오기를.

도성으로 향해 오는 깃대가 보인다는 보고를 듣고 결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매우 빠른 함락이었다. 백성은 물론이요 도성을 지키는 군사들까지 별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그 반증이 건헌의 입매에 희미한 조소를 그려 냈다.

그를 발견한 자들 사이에서 동요가 물결처럼 번졌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거침없이 다가오는 발걸음이 하나 나타났다. 그리고 다수의 규칙적인 걸음걸이가 그 뒤를 따랐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다가온 선두는 적당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그의 앞에 멈추었다. 바닥과 사선을 그리던 건헌의 시선 끝에 가죽신이 들어섰다. 피와 흙에 절어 있는 그것은 낯설게 느껴질 만큼 작아서 의외로웠다. 진중하고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건헌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그대는?”

“예주건헌譽周建獻. 백아伯雅 21대 의천제義闡帝의 삼남입니다.”

침착한 대답에 주위가 다시 웅성거렸다. 이토록 정중한 소개를 들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하였으리라. 더욱이 폐허 한가운데의 텅 빈 황궁에서, 침탈한 그 상대에게서. 건헌은 묵묵히 기다렸다.

곧 소란이 가라앉고 건헌의 정체를 물었던 상대가 들으란 듯이 고쳐 확인했다.

“예주모윤譽周模允의 셋째 아들이라. 그 아비에 대한 반역으로 목이 떨어지려다 우리 군의 침공 덕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던 자가 그대인가.”

건헌은 표정 변화 없이 그 노골적인 말을 묵인했다.

“아비처럼 도망치다 백성들 돌팔매에 찢겨 죽을 만큼 멍청하지 않은 건 분명하군. 그래, 모두가 버리고 도주한 빈 궁에 이리 홀로 남아 앉아 있는 연유는?”

대답하기에 앞서 건헌은 눈을 감았다. 부친의 최후를 이런 식으로 통고받을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 탓이었다.

지하 감옥에서 빠져나온 후 일가족이 산채의 별궁으로 피신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예상한 바였지만 그렇다고 아픔이 무뎌지는 것은 아니었다. 패륜의 낙인을 각오한 적도 있었으나 그가 자신에게 피와 살을 물려준 어버이라는 건 변치 않을 사실이다. 사납게 치받쳐 오르는 감정을 짧은 순간 가슴 깊이 묻어 다스린 건헌은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건헌은 앞에 놓아둔 상자를 조금 더 앞으로 밀었다.

“황궁 내탕고의 열쇠입니다.”

병사 하나가 앞으로 나와서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주군에게 바쳤다. 그가 말했다.

“모윤이 도주할 때 지니지 않았을 까닭이 없을 것인즉, 허튼 수작이 통할 줄 아느냐.”

“그것은 계획의 마지막 단계로 바꿔치기했던 복제품이며 이것이 진품입니다.”

“……과연. 허나, 이것으로 목숨을 구걸하려 하였다면 쓸데없는 짓이다. 애초 그대가 바치지 않았어도 궁 안 모든 것이 홍국洪國의 재산이니.”

“백아의 내탕고는 하나뿐인 열쇠 이외의 방법으로 개방할 시 유황이 흘러드는 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이를 넘겨 드리는 연유는 지금껏 충분히 고통받은 이 땅의 백성들에 대한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저버린 민심에의 책임을 다하고자.”

“…….”

“이제 그들은 홍국의 백성입니다. 그 점을 인지하시어 그들을 위하여 부디 유용하게 써 주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견부犬父 아래 호자虎子가 있을 수도 있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는 건헌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그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 그들이 어떤 연옥에 있었는지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건헌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대신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남은 불씨는 마저 제거하겠습니다.”

평온한 말투였기 때문에 말이 끝나자마자 품 안의 단검을 빼 드는 건헌을 누구도 막지 못했다.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주인의 목덜미로 향하던 날카로운 검날에 붉은 피가 내비친 것은 순간의 일이었다.

“폐하!”

건헌은 검날을 쥔 손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손끝으로 핏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그의 옷을 적시기 시작했지만 그는 깨닫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한곳에 못 박혔다. 험한 흉터가 많고 굳은살이 잡힌…… 자그마한 손.

경악한 외침은 내내 그에게 말을 걸어온 목소리와 같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과 대화하던 사람은, 황제가 아니었고, 작은 가죽신의 주인도 아니었다. 그제야 고개를 든 건헌은 까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얼굴을 간신히 감쌀 만큼 짧은 머리칼은 사내의 것과 같았지만 결코 잘못 볼 리 없었다. 갸름하고 가느다란 선과 단정한 이목구비. 지저분한 흙먼지로도 감추지 못할 고운 얼굴이 그를 냉정하게 내려다보았다.

모양 좋은 입술이 훗 날카롭게 웃는가 싶더니 그녀가 손에 힘을 주었고, 허를 찔린 건헌은 검을 쉽사리 내주었다. 챙강하는 소리와 함께 단검이 바닥에 내팽개쳐지자마자 젊은 장군이 망토의 안감을 찢어 주군의 다친 손을 감아 주기 시작했다.

“듣지 못하였나?”

그녀는 손을 내맡긴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고서 건헌에게 말했다.

“이 궁 안의 모든 것은 이제 홍국의 재산이다. 즉 짐의 소유지. 예외는 없어.”

그대도 마찬가지야. 단언하는 그녀에게서 건헌은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말에서 다른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장군이 물었다.

“설마, 폐하. 이자를 곁에 두실 생각이십니까?”

“안 될 이유라도 있나?”

“폐하! 모윤의 자식입니다.”

장군이 힘주어 대답했다. 그 한마디가 모든 백 가지 이유를 내포하고 있다는 듯이. 그녀는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래서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건헌까지도.

“편히 죽게 할 수 없지. 그리 쉽게 던질 목숨이라면 짐을 위해 써먹게끔 해. 자식이 그 명줄을 어찌 부지해서 살아가는지, 그자가 알면 무간지옥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만 해도 재미있거든.”

그녀는 입술 한끝으로 웃었지만 건헌을 훑는 눈빛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가볍게 턱짓하자 장군이 체념한 듯 짧게 지시를 내렸고, 이내 건장한 군사 두 명이 건헌을 일으켜 세우며 결박했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차마 가로막힐 줄 몰랐기에 단검을 하나 더 감췄어야 했다는 후회조차 빠르게 사라졌다. 건헌은 이미 등을 돌려 멀어지는 홍국의 여제女帝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야에서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그날, 백아국 마지막 황자는 홍국 황제의 감별사鑑別師가 되었다.



* * *




“옥체를 보전하시란 고리타분한 진언을 꼭 올려야 하겠습니까?”

류안瀏安은 꼼꼼하게 치료된 손을 흘끔 보고 어깻짓을 했다.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잔소리부터 시작한 각관(覺官, 황제의 보좌관) 소군素群은 한심해하는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서로를 알고 지낸 시간이 군신으로 보낸 시간보다 훨씬 더 길었으나 설령 그렇지 않았더라도 변치 않을 그 솔직한 태도는 소군의 장점 중 하나였다. 물론 그의 솔직함이 무엄함과 종이 한 장 차이일 때가 많다는 것이 단점 중 하나였지만 어쨌든 본인이 한 짓을 자각하고 있는 류안은 반론하지 않았다.

“야전 때도 멀쩡히 잘만 다니시더니 정작 궁에 들자마자 뭡니까, 대체. 더구나 대업을 짊어지신 분이 자진해서 피를 보시다뇨.”

“잘못했다.”

“…….”

“앞으로는 주의하지.”

그녀의 순순한 반성에 소군은 남은 말을 삼키는 게 명백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말을 꺼냈을 땐 화제가 바뀌어 있었다.

“살려 두겠다고 하셨다지요.”

주어는 없어도 무방했다. 류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반대할 의사는 없습니다만 애매하게 처리하면 죽이느니만 못합니다.”

“알고 있어. 어중간하게 놔두면 귀찮게 될 테니 확실한 자리를 주어야겠지. 방패막이로 삼는다 하면 뒷말은 없을 거다.”

“설마 검을 쥐게 하겠다는 건 아니시겠지요.”

“나를 정녕 그리 멍청하게 보았다면 용서 안 할 테다.”

그녀는 그에게 비스듬한 시선을 던졌다.

“이래저래 세상도 험하고 이제 시작인 만큼 ‘옥체를 보전’하려면 호위 정도로는 약하겠지. 감별사가 필요하게 생겼는데 마침 신체 건강한 남은 목숨이 하나 있으니 잘된 일이야.”

“……감별사, 라고 하셨습니까?”

류안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