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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2. 새 구두를 사야 해





― 지혁이가 그랬다고?

“네. 밥투정에다 억지에다 장난 아니에요.”

신희는 귀와 턱 사이에 핸드폰을 끼운 채 지혁이 어질러 놓은 장난감들을 한곳에다 치우기 시작했다. 영모와 통화를 하면서 간간이 침울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는 지혁을 눈 끝으로 쳐다봤다.

저 녀석, 아무래도 아빠가 보고 싶은 게 틀림없었다.

― 안 그러던 애가 왜 그러지? 어디 아픈 거 아냐?

“그게 아니라 아빠가 보고 싶은 모양이에요.”

― 흐음. 이제 겨우 하룬데.

“그러게요. 아빠가 멀리 출장 간 걸 저도 느끼나 봐요. 지혁아!”

신희는 지혁을 불렀다. 커다란 눈으로 말똥말똥하게 엄마를 쳐다보던 지혁이 엉덩이를 쭉쭉 앞으로 밀며 소파에서 내려왔다. 아장아장 서툰 걸음으로 다가온 지혁에게 신희가 핸드폰을 내밀며 작게 속삭였다.

“아빠야.”

“으, 응?”

좀 전까지 그늘졌던 지혁의 얼굴에 생기가 감돌았다. 역시나 아침부터 지혁이 쀼루퉁해 있었던 이유는 아빠의 부재 탓이었다. 영모가 새벽 비행기를 타고 러시아로 날아간 탓에, 아침에 일어나 아빠를 보지 못한 지혁이 얼마나 상심했는지, 신희는 알고 있었다.

“아빠아!”

제법 어른처럼 신중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귀에 댄 지혁이 호소하듯 아빠를 불렀다. 전혀 하지 않던 아침밥 투정까지 한 지혁을 야단쳤으니, 그 억울함을 아빠한테 토로하고 싶었을 것이다. 핸드폰 너머에서 영모의 목소리가 신희의 귀에도 들려왔다.

― 지혁이 왜 밥도 안 먹은 거야?

“아빠아.”

― 엄마 말씀 잘 들어야지. 아빠가 돌아갈 때까지. 알았지?

“네에.”

― 아빤 두 밤 더 자고 지혁이한테 갈 거야.

“네에.”

― 아빠가 없을 땐 지혁이가 엄마를 지켜 줘야 해. 알지?

“네에.”

― 그래, 우리 지혁이 착하지? 이제 밥 먹을 거지?

“네에.”

신희는 고분고분해진 지혁을 보며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통화가 끝났는지 지혁이 신희에게 핸드폰을 건네며 와락 품 안으로 안겼다. 신희는 그런 지혁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누구보다 착한 아인데, 우리 지혁인. 그치?”

“네에.”

“밥 잘 먹고 엄마 말도 잘 들을 거지?”

“네에.”

“좋아. 그럼 다시 식탁으로 갈까? 도전!”

“네에.”

신희는 지혁의 얼굴을 마주 보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내처 지혁을 안은 채 식탁으로 다시 돌아간 그녀는 의자에 지혁을 앉혔다. 아까 지혁이 먹다 남긴 밥을 차곡차곡 다시 개켜 작은 입 속으로 밀어 넣는다.

지혁은 착실하게 그것을 받아먹었다.

“지혁아, 오늘 엄마랑 윤경 이모랑 수아 누나랑 백화점에 갈까? 오늘 토요일이라서 엄만 하루 종일 지혁이랑 같이 있을 거야.”

“네에.”

엄마와 외출한다는 말에 신이 났는지 지혁이 두 팔을 들어 올리며 환영했다.

“백화점에 가서 아이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자. 알았지?”

“네에.”

“그럼 밥을 빨리 먹어야겠지? 엄마도 씻고 지혁이도 씻고.”

“야호!”

꽁해진 마음이 모두 풀린 지혁이 신희로선 다행이었다. 영모의 부재가 이토록 힘에 겨울 줄 몰랐다. 외출에 신이 난 지혁은 밥그릇을 깨끗하게 비웠고, 거기에 고무된 신희는 재빨리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지혁을 먼저 씻긴 후 옷을 갈아입혔다. 그녀 자신도 제법 빠른 속도로 씻고 나와서 옷을 입고 메이크업을 하고 나니 윤경과 만나기로 한 점심시간이 다가와 있었다. 지혁을 데리고 현관으로 나와 신발을 신겼다.

그런 후 오늘은 스니커즈를 신기로 하고 신발장 문을 연 신희는 저가 신을 것을 꺼낸 뒤, 문득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모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인 방향이었다. 골프화와 등산화, 그리고 구두 두 켤레가 있었는데 뒤축이 한결같이 닳아 있는 게 보였다.

신희는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영모의 구두를 모두 꺼냈다. 반질반질 윤이 날 정도로 잘 닦여 있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부의 바닥이며 앞코가 얼마쯤 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소 옷이나 구두에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 필요할 때마다 그녀가 구입해 주곤 했다.

치수에 맞는 구두를 사 오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대부분 그의 발에 딱 들어맞았다. 하지만 이렇게 타이밍이 맞지 않을 땐, 해진 신발이나 티셔츠를 발견하게 되곤 했다.

오늘 백화점에서 영모의 구두를 사야겠다고 생각한 신희는, 닳은 구두들을 버리기 위해 한곳으로 밀어 두다 다시 그것들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의 수고로움이 모두 담긴 구두였다. 회사에, 그리고 가정에 언제나 충실하려는 노력이 느껴지는 물건들이었다.

차마 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남편의 노력도 무참히 버려지는 것 같아서.

결국 신희는 구두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그러곤 얼른 나가자고 재촉하는 지혁의 손을 잡고 현관을 나섰다.



*



“우리 수아 좀 봐. 나하곤 딴판이지 않니?”

훌쩍 다가온 여름에 자몽 에이드를 쪽쪽 빨아 먹고 있던 윤경이 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희와 영모가 결혼한 그해에 태어난 윤경의 딸이며, 윤경을 판박이처럼 닮아 붕어빵 모녀라고 불리기도 했다.

“언니하고 쌍둥이처럼 닮았는데 딴판이라뇨?”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있던 신희의 되물음에, 윤경이 검지를 흔들어 보이며 부인했다.

“에이. 생긴 것 말고 하는 모습을 좀 봐. 기껏 다섯 살짜리가 이렇게 조신하게 먹는 거 봤어?”

윤경의 말은 사실이었다. 수아는 태어날 때부터 얌전했다고 한다. 새벽에 깨는 일이 거의 드물었으며 보채고 투정하는 일도 없었다고 했다. 한때 윤경은 수아에게서 전혀 아기의 본능이 느껴지지 않아 소아과에 자주 데려가곤 했었다.

그러나 병원에선 별다른 이견 없이 그럴 수도 있다는 대답만 번번이 돌아왔다.

수아는 윤경이 허벅지에 깔아 준 손수건에 한 방울도 흘리지도 않고 수박 주스를 조심조심 마시고 있었다. 지혁과 비교하자면 도저히 어린아이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 게 확실했다.

“애가 이러니 키우는 재미가 없어. 울기를 하나 떼를 쓰길 하나. 주는 것 척척 먹고 때가 되면 책 읽지, 시간 되면 잠자리에 들지. 얜 대체 누굴 닮은 거지?”

“은근히 자랑하는 거죠?”

“자랑이라니. 너도 수아 한번 키워 봐. 무슨 재미인지 모를 테니까.”

“수아 듣겠어요. 말조심해요, 언니.”

“전 다 알아요.”

수아가 또렷한 발음으로 신희와 윤경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신희는 내심 놀라 수아를 쳐다봤다.

“뭘 알아? 수아야?”

“엄마가 저 키우는 거 재미없어하는 거요.”

수아는 아이답지 않은 말투로 덤덤하게 말한 뒤 주스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테이블 위로 신희와 윤경의 시선이 맞닿았다. 윤경의 눈빛은 ‘거봐. 얘 안엔 분명히 칠십 먹은 노인네가 들어앉아 있다니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에이. 그럴 리가. 엄마는 열 달 동안 널 배 속에 품고 힘들게 낳으신걸? 널 얼마나 예뻐하시는데.”

보다 못한 신희가 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자 수아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상관없어요. 전 엄마가 저 때문에 고생 안 하는 게 더 좋으니까요. 그렇죠, 엄마?”

“그, 그래.”

윤경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신희는 수아의 나이답지 않은 어른스러움에 연신 감탄하고 있었다.

“나 있지? 얘 있는 데선 말도 함부로 못 해.”

윤경이 신희 쪽으로 상체를 기울여 속삭였다. 윤경의 남모를 고충이 한편으론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전혀 아이답지 않은 아이. 내뱉는 말과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운 아이. 차라리 지혁이처럼 떼를 쓰고 투정을 부리는 게 더 나은 걸까.

“오늘만이라도 스트레스 좀 풀어야겠어. 세상에 내가 딸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줄 꿈에나 생각했겠니?”

“그래요, 언니. 먹고 싶은 거 먹고 하고 싶은 거 해요.”

“넌 좋겠다. 내가 요즘 제일 부러운 사람이 너야, 신희야.”

“그게 무슨 말?”

“남편 잘나가지, 너도 직장 가지고 있지, 시부모님 장난 아니게 좋으시지. 거기다 애 엄마 같지 않게 여전히 늘씬하지. 대체 부족한 게 뭐야?”

윤경이 시선을 아래위로 움직이며 신희의 몸매에 감탄했다. 윤경은 확실히 수아를 낳은 직후부터 살이 오르긴 했다. 그러나 비교에 잔뜩 우울해진 윤경에게 솔직함은 오히려 독일 것이다.

“언니도 마찬가지예요.”

“말했잖아. 난 수아 하나로도 스트레스가 철철 넘쳐흐른다고.”

“그러지 말고 우리 쇼핑해요.”

“너 뭐 살 거 있어?”

“우리 그이 구두.”

“구두? 상무님이면 구두를 몇 켤레씩 가지고 있을 텐데? 너 설마설마, 쇼핑 중독 아니지? 아니면 명품 중독이거나.”

“그런 말 하려면 여기서 헤어지구요.”

“헤헤. 아냐 아냐. 구두를 사려면 내 안목이 필요하긴 하지. 넌 명품 볼 줄은 모르잖아.”

“맞는 말이긴 해요.”

“그럼 허니브레드 딱 하나만 먹고 일어나자. 이제 오후라 사람들이 점점 밀려들어 와.”

“좋아요.”

신희의 대답에 윤경은 허니브레드를 추가로 주문했다. 확실히 백화점 안은 좀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신희는 모처럼 여유를 가진 듯한 윤경이 느린 속도로 빵을 먹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린 나이에 시작된 인연이 아이를 낳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감사했다. 이런 날, 이런 시간에 언제든 부르면 달려 나올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남편의 단단하고 곧은 시선과는 분명히 다른, 이해와 여유가 담긴 시선이 윤경에게서 느껴지곤 했다.

윤경이 허니브레드를 반쯤 해치울 무렵, 수아가 조용히 의자에서 내려왔다. 딸이 자리를 이탈하는 걸 보면서도 묵묵히 빵을 먹고 있기에 하는 수 없이 신희가 나섰다.

“수아야. 어딜 가는 거야?”

사람들 사이로 섞여 버리는 수아를 어쩌지 못하고 신희가 안절부절못하니, 옆에서 윤경이 태연하게 말했다.

“잡지 마. 화장실 가는 거야. 난 길치에 방향친데, 쟨 아빠 닮아서 길 찾아가는 게 장난 아니야. 분명히 여기에 앉기 전에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했을 거야.”

“세상에. 그 정도예요?”

“그러니 내가 재미가 없다는 거 아니니. 애한테 뭘 가르쳐 주고 세상을 보여 주는 것에 대한 흥미가 하나도 없어.”

“대단하네요.”

“그렇지. 어떤 의미로는.”

윤경이 마지막 빵 한 점을 입에 털어 넣으며 느긋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신희는 대답을 그렇게 했으면서도 어쩐지 불안감을 버리지 못해 수아가 돌아오는지 계속 고개를 돌려 확인을 하곤 했다.

화장실은 자신들이 앉아 있는 카페에서 한 블록만 지나면 되는 거리. 하지만 수아는 윤경이 빵을 모두 먹고 물을 반쯤 마시고 난 뒤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쭉 빼면 화장실이 있는 복도가 보였지만 지금은 북적대는 인파로 인해 시야가 막혀 버렸다.

“언니.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신희의 다그침이 아니라 해도 윤경의 얼굴은 이미 창백해져 있었다. 윤경이 먼저 벌떡 일어났고 신희 역시 테이블을 정리한 뒤 지혁을 유모차에 태워 뒤를 따랐다. 화장실이 있는 복도가 가까워질수록 아이의 울음소리가 선명해졌다. 신희의 얼굴이 불안감으로 뒤덮였다.

그 불안감은, 화장실 앞에 도착해서야 사라졌다. 울고 있는 수아, 그런 수아를 안은 채 등을 토닥이고 있는 윤경.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지나가도 아랑곳하지 않고 윤경은 수아를 지나치게 세게 끌어안고 있었다.

“언니. 어떻게 된 거예요?”

다가간 신희가 묻자 윤경이 한숨을 쉬었다.

“수아가 볼일 다 보고 나왔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순간적으로 겁을 먹었나 봐.”

“어머, 수아야. 괜찮아? 엄마랑 이모가 잘못했어. 미안해.”

윤경의 설명을 들은 신희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수아의 등을 따뜻하게 만져 주었다. 그 와중에도 윤경은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을 당하기라도 한 듯 얼마쯤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 이런 적 처음이라 얼떨떨해, 신희야. 수아도 어린애라는 게 실감이 나서. 난 당연히 수아가 화장실에 잘 다녀올 줄 알았거든.”

“수아는 어린애죠, 언닌.”

야속한 신희의 말을 모두 인정한다는 듯 윤경이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이제 뭐 할까? 너 뭐 살 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

“새 구두를 사야 해요. 우리 남편이 신을 것.”

“아, 맞다. 어서 가자.”

뭉근하고 잔잔하게 차오르는 가슴 한편을 누른 채 윤경이 발길을 옮기자, 신희도 그녀를 뒤따랐다. 어느새 윤경의 뒷모습에는 ‘엄마’의 느낌이 전해지고 있었다.



*



새벽 3시.

영모는 러시아 출장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와 아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라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발걸음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가 들어서자 현관에 센서 등이 환하게 켜졌다.

구두를 벗는데 문득 시선이 옮겨졌다.

현관 바닥 한편에 얌전히 놓인 새 구두.

조명 등을 받아 윤이 나는 검은색의 구두가 영모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내의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스타일이었다.

“짠! 잘 다녀왔어요?”

“아빠아!”

잠시 구두를 내려다보며 흐뭇하게 웃던 영모는 거실 쪽에서 시작돼 곧장 가까워진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신희와 지혁이 손을 잡고 나란히 서서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잽싸게 달려오는 지혁을 번쩍 안아 올린 영모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응. 지혁이, 잘 지냈어?”

“네에.”

다가온 신희에게도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안 자고 있었던 거야?”

“그럼요. 오늘이 어떤 날인데!”

“황송하기 이를 데 없군.”

“피곤해보여요.”

“피곤해도 당신 안아줄 힘은 있어.”

영모가 한쪽 눈을 찡긋 껌뻑거리는 바람에 신희는 무안하게 웃었다. 긴 비행에 지치지도 않았는지 한쪽 팔로 지혁을 안은 채 다른 쪽 팔로 그녀의 허리를 둘렀다. 출장이 잦은 편이지만 외롭거나 허전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돌아온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이런 반가움 때문이리라.

“어서 들어가자.”

가족은 동시에 거실로 들어갔다. 센서 등이 여전히 비추고 있는 현관에는 새 구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자고 나면 새로운 하루가 또다시 시작될 것이었다.



―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