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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그의 천적





가끔 저 세 살짜리 아들 녀석이 자신의 천적이 아닐까, 생각될 때가 있었다. 더 나아가 이 집에서의 먹이 사슬에서 영모 자신은 가장 하위 계층이라는 걸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인정해야 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영모는 자신만의 소유였던 신희의 가슴을 온전히 차지하고 있는 지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내의 품에 안겨 뭔가를 먹고 있는 저 녀석은 그의 경쟁자나 다름없었다. 낮엔 저 녀석에게 양보한다 쳐도 밤엔 사정을 봐주지 않겠다는 뜻을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는 듯했다.

신희가 열 달 동안 저 녀석을 배 속에 품고 있을 때만 해도, 아니 갓 낳았을 때만 해도 영모는 이 집에서의 자신의 서열이 무려 3위로 밀려날 거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다. 신희의 시선은 온통 그에게만 꽂혀 있었고, 행동과 생각도 그에게 맞춰져 있었으니까.

그랬는데, 지혁을 낳고 불과 3년 만에 판도는 완전하게 달려져 버렸다.

“어머. 당신 왔어요?”

지혁에게 떡국을 먹이고 있던 신희가 현관에 들어선 그를 발견하곤 반갑게 웃어 주었다. 지혁 때문에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무음으로 해 두었기에, 신희는 영모가 들어오는 걸 못 볼 때가 있었다. 영모는 금방 했던 여러 가지 저급하고 속 좁은 생각들을 들키지 않으려 역시 미소로 응대했다.

“응. 지혁이 밥 먹는 거야?”

“네. 어머님이 떡국을 만들어서 갖다 놓으셨더라구요. 지혁이 먹일 건 떡을 아주 무르게 끓이셔서 부드러워요. 지혁이도 잘 먹구요.”

“그래? 요 녀석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네.”

영모는 소파 한편에 가방을 내려놓고 신희에게 다가갔다. 신희 역시 퇴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아침 출근길 의상 그대로였다. 영모는 그간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현재 선우자동차그룹 상무직을 맡고 있고, 신희는 예전처럼 마케팅 본부장의 비서로 계속 일하고 있었다.

영모는 저를 보곤 씩 웃는 지혁의 볼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그러자 지혁이 더 이상의 떡국을 거부하곤 영모에게 오려고 낑낑대며 상체를 움직였다. 이번엔 영모가 지혁을 안았다. 그의 천적이 분명하지만, 더 분명한 건 이 천적을 목숨처럼 사랑한다는 것이다.

지혁이 아빠의 품으로 옮겨 가자 잠시 여유가 생긴 신희는 영모의 재킷을 천천히 벗겨 주었다. 한쪽 팔을 빼는 것과 동시에 다른 쪽 팔로 지혁을 안았다. 신희는 지혁을 안고 있는 영모의 허리를 뒤에서 가만히 껴안았다.

“으음. 내 남편 냄새.”

가끔 신희는 이렇게 뒤에서 그의 허리를 안아 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하루 내내 지치고 피곤한 마음이 절로 누그러지곤 했다. 그의 지친 가슴을 가장 편하게, 가장 먼저, 가장 치열하게 어루만져 주는 아내의 품이 그는 언제나 사랑스러웠다.

“아주머니가 저녁 식탁 차려 놓고 가셨어요. 배고플 텐데 먹으러 가요.”

신희의 목소리가 등을 타고 울렸다. 영모는 고개를 살짝 틀고 대답했다.

“그럴까?”

“네. 지혁인 이제 내려놔도 돼요.”

“으음. 자, 우리 아들. 이제 혼자서 놀아 봐. 알았지?”

영모가 지혁을 소파에 앉히니 금세 바닥으로 내려와 졸졸 따라왔다. 나이는 세 살이지만 개월 수로는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 걷는 게 서툴렀다. 지혁은 그렇게 ‘아빠, 아빠’ 부르며 따라오다 발에 걸린 장난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혁이 장난감에 몰입한 건 두 부부에겐 무척 다행인 일이었다. 그사이에 얼른 식사를 해치울 수가 있었다. 두 사람은 재빨리 식탁에 앉았고 누가 말하지 않아도 매우 빠른 속도로 떡국을 먹기 시작했다.

“근데 웬 떡국이야? 설도 아닌데.”

“아버님이 드시고 싶으셨나 봐요. 손수 쌀을 불리셔서 방앗간에 가지고 가 가래떡을 만드셨대요. 대단하세요, 정말.”

신희가 떡국을 한 스푼 입으로 밀어 넣으며 진규를 칭찬하자 영모는 불현듯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진 충분히 그럴 분이시지. 나 중학교 다닐 때였나? 갑자기 채식을 해야겠다고 집 앞마당에 작은 텃밭을 만드셨어. 거기다 상추며 오이 같은 걸 심으셨지. 어머닌 매번 마트에서 사다 먹자고 애원하셨지만, 결국 아버진 텃밭에서 자란 상추와 오이를 식탁에 올리는 데 성공하셨어. 또 한 번은 어머니가 작업할 때 늘 앉던 의자가 조금 낮았지. 새로 사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아버진 그 자리에서 새 의자를 뚝딱 만드셨어.”

“대단해요. 나 같으면 대충 마트에서 사거나 가구점에서 사고 말았을 텐데.”

“지금 생각해 보면 대단한 거지만 그 당시엔 어머니나 나나 답답하기도 했지.”

“난 멋지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아버님은 참 멋진 분이세요.”

“그래? 당신 남편은?”

떡국을 한입 먹던 영모가 눈빛을 달리하며 그녀를 쳐다봤다. 그런 남편의 얼굴 표정은 신희를 웃게 만들었다. 요즘 들어 새롭게 알게 된 건 영모는 생각보다 질투심이나 승부욕이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지혁을 질투한다는 것도, 신희는 다 알고 있었다.

“물론 권영모 씨가 내 눈엔 최고지만요.”

신희는 영모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러자 영모가 숟가락을 쭉 빨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길게 한숨을 지었다.

“큰일이네.”

“뭐가요?”

“아직도 난 당신이 윙크만 해도 서.”

음흉한 미소가 그의 얼굴을 가득 차지했다. 그가 잠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말뜻이나 행동의 의미가 뭔지 모르지 않았다. 신희가 식탁 아래 발끝으로 그의 발을 툭 쳤다. 밉지 않게 흘겨보는 시선에 사뭇 부끄러움이 담겨 있었다.

“으잇!”



*



영모가 천적 녀석에게 가장 고마워하는 일은 밤 9시가 되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든다는 사실이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도 혹은 뭔가를 먹고 있다가도 9시만 되면 눈을 감아 버린다. 실로 부모의 밤 시간을 이해해 주는 놀라운 배려라고밖에 볼 수가 없었다.

영모는 지혁을 재운 신희가 안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녀를 끌어안았다. 와이셔츠를 막 벗으려던 참이었다. 느닷없는 상황이었지만 신희는 남편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들이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눈 게 닷새 전이니, 지금쯤 그의 몸은 충분히 갈증이 날 만한 시기였다.

남편의 심경을 헤아린 신희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발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그의 뺨에 입술을 대자 하루 동안 지친 몸이 노곤해졌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요. 권영모 상무님.”

“말로만?”

“설마요.”

“난 당신을 위해 오늘 밤 봉사할 준비가 다 돼 있어. 당신은?”

“부창부수죠.”

그녀의 대답에 영모가 빙긋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이 남자와 연애할 때가 떠올라 신희 역시 얼굴에 미소가 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척 서늘하게만 여겨졌던 그의 미소. 이렇게 무방비하고 평화로운 자세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에게 안길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었는데.

결혼은 신희의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왔던 그녀에게 자존감과 함께 온기 넘치는 일상이 제공됐다.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맞춰 가는 것, 그 균형의 미학 또한 배워 가고 있다. 뭣보다 사랑을 베풀 상대가 생겨 한층 바빠졌다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예전엔 위험한 것들은 미리 피해 가기 일쑤였지만, 지금은 마음껏 부딪쳐도 돌아갈 보금자리가 있다는 믿음에 두려울 것도 없어졌다.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나약해질 것도, 갈등할 것도 더는 없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혁이 녀석은 날 괴롭히려고 태어난 게 틀림없어.”

투정 섞인 영모의 말에 이번엔 신희가 피식 웃었다. 신희는 그런 남편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손길을 천천히 움직였다. 바지에 깊이 파묻힌 와이셔츠 자락을 조금씩 조금씩 끄집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해. 아들한테 그런 말은.”

와이셔츠 자락을 꺼내면서 신희가 밉지 않게 흘겨보자, 영모 역시 나름대로의 논리를 피력했다.

“아내를 아들한테 매번 양보해야 하는 내 심정이 어떤지 알아?”

“난요, 가끔 아들 두 명을 키우는 것 같아요.”

“흐음. 내가 큰아들인가?”

“네.”

“작은아들이 아니라서 다행이군.”

“자, 그러지 말고 오늘 밤은 나한테 맡겨요. 나도 준비가 다 돼 있거든요.”

신희는 아까처럼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뜨고는 남편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최선을 다해 야릇한 얼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둘 테니까 조금 있다가 들어와요. 그럼 아주 야한 아내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신희는 그에게 장담하며 느린 걸음으로 안방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영모는 그녀가 욕실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응시하다 침대에 누웠다. 반쯤 열린 욕실 문틈 새로 신희가 민첩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모두 들려왔다.

무심코 천장을 바라보던 영모는 욕조에 물을 받는 신희가 콧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는 가만히 웃었다. 결혼식 날, 신부 대기실로 향하던 그가 우연찮게 엿듣게 된 신희의 콧노래가 떠올랐다.

그때와 달라진 게 없는 아내의 흥얼거림.

정확한 리듬과 박자가 갖추어지지 않았지만 잔잔하게 흘러드는 콧노래는 영모의 심신을 나른하게 달래 주었다.

“신희야.”

낮은 음성이었기에 신희가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욕실에서 금방 대답이 건너왔다.

“응? 잠깐만 기다려요.”

“우리 결혼식 날 생각나?”

“결혼식 날?”

“음. 너 신부 대기실에 있을 때 콧노래 부른 거.”

“내가요? 에이, 나 그런 적 없는데.”

“있어. 내가 기억하거든.”

“그랬나. 그랬다 치고, 근데 왜요?”

“네가 부르는 진짜 노래를 듣고 싶었어, 그때부터.”

영모의 말이 얼마쯤 의외였는지 신희가 욕실 문틈으로 빠끔 얼굴을 내밀었다. 이미 상의를 벗었는지 맨어깨가 보였다. 슬며시 뜨거운 덩어리가 단전을 감돌기 시작했지만 영모는 꽤 진지했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나 음치예요.”

“불러 봐. 아무거나. 노래 부르면서 내 앞에서 옷을 벗으면 더 좋고.”

“아, 그건 너무 위험할걸요?”

“왜?”

“노래가 중간도 가기 전에 당신이 나한테 달려들 것 같아서.”

“큭큭큭.”

영모의 웃음소리가 응원이 됐는지 신희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는 잔잔한 발라드. 건전한 가사였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영모를 들뜨게 만들었다. 욕조로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에 자칫 노래가 묻힐까, 영모는 최선을 다해 귀를 열어 두었다.

이런 평화로운 시간이 좋았다.

게다가 잠시 후면 아내와의 섹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아 있는 모든 기운을 신희에게 쏟아붓고 나면 달콤한 잠이 이어질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얼굴에 다시 한번 미소가 피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잠시 후 돌연 사라졌다. 물줄기 소리와 신희의 노랫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또 다른 소리가 그의 청력을 예민하게 갉아먹은 탓이다. 그것은 바로 지혁의 울음소리였다. 잠든 지혁이 깬 것이다.

영모는 서둘러 상체를 일으켰다. 신희가 모르게 지혁을 다시 재우고 올 생각이었다. 지혁이 깬 걸 안다면, 신희는 벗었던 옷을 황급히 주워 입고 지혁에게 달려갈 것이다. 오늘만큼은 절대 신희를 천적 녀석에게 양보할 수 없었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인 채 안방 문을 연 영모는, 문 앞에 지혁이 서 있는 걸 보곤 내심 놀랐다. 이 녀석이 언제 일어나 안방까지 돌진해 온 거지? 낭패감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영모는 훌쩍이고 있는 지혁을 번쩍 안아 올렸다.

그러곤 녀석을 달래려 등을 토닥이곤 연신 욕실 쪽 눈치를 봤다.

“여보오오오. 나 이제, 나가요. 조심해요. 나 전부 다 벗었으니까.”

그때, 신희의 비음 섞인 음성이 방 안을 가득 울렸다. 영모가 말릴 새도 없이 맨다리 하나가 이미 욕실 밖으로 삐죽 나와 있었다. 지혁의 말똥말똥 뜬 눈이 방 안을 향해 있었던 탓에 자칫 대형 사고가 날 순간이었다.

“여, 여보! 안 돼! 다시 들어가!”

영모가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신희의 맨다리가 다시 욕실 안으로 감춰졌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라고 묻는 신희의 목소리가 다급하다. 우선 한시름 놓은 영모는 제 품에 안긴 천적 녀석을 다분히 원망 섞인 시선으로 쳐다봤다.

이 녀석아!

이 천적 같은 녀석아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