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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밥을 한 숟가락 크게 떠서 먹은 진경이 세연에게 물어왔다. 세연은 고기 한 점을 숟가락 위에 얹으며 대답했다.

“스통 부모가 찾아와서 퇴원시켜달라고 해서요.”

“아, 그 폐렴이라던 아이?”

고개를 끄덕이며 숟가락을 입 안 가득 넣는데 하필 맞은편 남자와 다시 시선이 부딪쳤다. 크게 벌린 입을 자신도 모르게 작게 오므리면서, 세연은 선글라스 안에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왜 자꾸 쳐다보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불편한 것은 분명했다. 일부러 들으려던 게 아니었는데도 은선이 그에게 바짝 붙어 앉으며 건네는 말도 들려왔다.

“차 피디님. 정말 궁금한데요. 피디가 되려면 공부 엄청나게 해야 하죠?”

“그렇죠.”

“대단하시다. 전 우리 선생님들도 대단하시지만 피디님들도 대단한 것 같아요. 사실 제 어렸을 적 꿈이 피디였거든요. 호호호.”

세연은 은선의 간드러지는 말에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어릴 적 꿈은 슈퍼모델이라고 했던 게 바로 엊그제였는데. 저 대책 없는 친근감이 장점인지 단점인지 알 수가 없다.

“인세연 선생님.”

그를 향한 은선의 계속되는 호감의 표시를 흘려들으며 식사에만 매진하고 있던 그녀를, 그가 불렀다. 세연은 얼떨떨한 시선을 들고 대답했다.

“네.”

“반갑습니다. 저는 DBS방송국 시사교양본부 피디 차민권입니다.”

“아, 네.”

남자는 입가에 미소를 묻히고 있었다. 옆에 앉은 은선이 경계하듯 세연을 흘깃 쳐다봤다가 다시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잠시 말씀드릴 게 있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밖에서 뵈어도 됩니까?”

남자는 무척 낮은 저음을 소유하고 있었다. 매끈한 얼굴과 잘 어울리는 목소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무슨 말씀을 하실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하시면 안 되나요?”

“할 얘기도 있고, 들어야 할 얘기도 있어요.”

“그럼, 식사하고 나서 하시죠.”

얼마쯤 도전적인 투로 말하니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불고기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세연의 밥그릇에 불쑥 얹어준다. 당황한 세연에게, 민권이 실긋 웃어보였다.

“좋아하시는 것 같기에.”

옆자리에 앉은 진경도, 민권의 옆에 앉은 은선도 잠시 서로 눈치를 보며 이 의아한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는 듯했다. 그중 은선은 티 나게 질투하는 낯빛이었다. 곧 표정을 바꾸어 민권에게 매달린다.

“피디님. 저도 불고기 좀 집어 주시겠어요? 팔이 안 닿아요.”

은선이 생글생글 웃으며 혀까지 날름 내미는 애교를 부렸다. 그러자 민권이 불고기 접시를 은선의 앞으로 끌어다주었다.

“여기.”

주변 사람들이 키득거렸고 은선의 얼굴은 곧 시무룩해졌다.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여전히 텁텁한 공기가 금세 열기를 만들어냈고 밤인데도 땀은 식을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세연의 시야에 촬영팀 숙소 앞에 있는 민권이 들어왔다. 그는 기둥에 등을 기댄 채 까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괜히 고개를 돌렸나 보다. 하필 저 남자를 보게 되다니.

식사 후에 이야기 좀 하자고 그가 제안했으니 틀림없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 터였다. 그걸 알면서도 세연은 걸음을 주저했다. 무슨 말로 자신을 설득시킬지 저 남자의 패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인세연 선생님.”

어떤 말로 그의 설득을 받아쳐야 할지 골몰하고 있는데 그가 먼저 그녀를 불렀다. 세연은 심호흡을 한 후 민권에게 다가갔다. 흐린 가로등 불빛 아래 날벌레들이 모여들었다. 고즈넉하고 조용한 그곳에서, 민권은 다가온 여자를 빤히 쳐다봤다. 이런 어둠 속에서도 왜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지 잠시 의아했지만 독특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도 워낙 많으니까.

가까이에서 본 여자의 얼굴은 더욱 투명하고 뽀얗다. 이런 곳에, 이런 날씨 아래에서 몇 달을 지낸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얼굴이다. 포르말린 냄새를 은근히 풍기는 여자는 턱을 치켜 올린 채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시죠?”

“아…… 마 팀장님한테서 들은 얘기가 있어서.”

“촬영에서 빠지겠다고 한 거요?”

“네.”

“들으신 그대로예요. 저는 촬영을 하지 않겠습니다.”

“왜죠?”

남자의 눈빛은 지나치게 곧고 정직했다. 정말로 순수한 심정에서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몰려든 피곤함에 세연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키가 너무 커서 올려다보느라 뒷목이 아팠는데 그것까지도 피곤했다.

“이유까지 제가 말씀드려야 할 의무는 없지 않나요?”

“없어요. 싫으면 하지 말아야죠.”

“됐네요, 그럼.”

“그런데 제가 아쉬워서 말입니다. 인세연 선생님 같은 외모라면 엄청나게 이슈가 될 텐데. 스타 닥터가 되고 싶지 않아요?”

그의 입가에 묻은 미소가 세연에겐 조소로 보였다. 분명 나쁜 뜻은 없을 텐데도 그의 말에 울컥해진 것이다. 이슈라니. 그게 얼마나 인격을 말살시키는 건지 모르지 않았다. 파란 눈 때문에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매번 이슈였다. 사람들로부터 왕따와 경계를 당해야 했고, 사랑하는 이한테서 배신당했다. 뒷걸음질 치다가 겨우 도망친 캄보디아에서까지 이슈가 되라니.

가슴이 칼날에 의해 설컹 베어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그 이슈라는 게, 정말로 싫어서요. 혐오스러울 정도로요. 죄송하지만 번복하지 않겠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들어가서 쉬세요.”

세연은 주름 접힌 미간을 펴지 않은 채 냉랭하게 말하며 자리를 떴다. 민권은 병원 쪽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눈썹을 비틀었다. 피디로 일하면서 가장 먼저 터득하게 된 건 ‘눈치’였다. 저 여자, 무슨 이유에선지 자학으로 똘똘 뭉쳐 있다. 그것도 모자라 온몸에 가시를 세우고 틈만 나면 찌르려 하는 공격성까지 내재되어 있었다. 사람한테서 상처를 받아본 사람만이 내뱉을 수 있는 말이었다.

예쁜 얼굴과는 달리 지나치게 차가운 말투.

“쉽지 않겠는데.”

허리에 손을 얹은 민권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머리 위에서 날벌레들이 윙윙거리며 맴돌았다. 깊어진 밤, 첫발자국부터 난관에 부딪친 그의 얼굴색은 썩 개운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외과 의사는 끝까지 촬영에 합류 안 하겠대?”

회의실로 마련한 숙소 내 조그만 테이블에 앉아 촬영 스케줄을 짜고 있던 민권에게 강식이 다가왔다. 밤 11시. 조연출 준혁과 카메라 기사 인호는 이미 잠들었고 숙소는 정적이 흐를 때였다. 민권은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응.”

“아깝네. 딱 내 스타일이었는데. 그 왜 황 간호사하고 외과 의사하고 둘이 아주 그냥 삼삼하지 않았어?”

“황 간호사?”

“은선 씨말이야.”

“첫날인데 벌써부터 호칭이 친근하군. 다시 말하는데 여기선 스캔들 내지 마. 6살 어린 동생한테 죽는 수가 있어.”

“어이쿠. 무셔라.”

강식이 일부러 어깨를 으쓱하며 두려움에 떠는 표정을 지었다. 그 익살에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은 민권이 다시 모니터를 주시하는데, 이번엔 강식이 의자를 바짝 당겨 앉는다.

“내 걱정은 그만 하시고 촬영 걱정이나 하셔, 차 피디. 그리고 내가 봤을 때 그 외과 의사 말이야. 방송만 타면 실검 1위는 문제없어 보이거든? 너나 나나 방송 밥 먹은 게 몇 년인데 촉이라는 게 있잖냐.”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설득해보자구. 요즘은 화제성 잡는 게 최고잖아. 그리고 화제성은 비주얼에서 나오지. 내 말 무시하지 마라. 너보다 방송짬밥 10년은 더 먹었어.”

“그래서 이력도 그만큼 화려하잖아. 매번 스캔들에, 뒷말에.”

“우이씨. 나 안 해!”

강식이 투덜거리며 확 일어나더니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민권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깊숙이 묻고 한숨을 쏘아 올렸다. 강식의 말을 비아냥거림으로 받아치긴 했지만 틀린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번 방송에 사활을 건 그로서는 인세연이라는 여자는 응당 탐이 나는 대상이었다.

요리를 잘하면 방송도 그녀도 서로 윈윈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기회를 왜 스스로 포기하는지 그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민권은 숙소를 나섰다. 피디를 시작하면서 끊은 담배가 간절했지만 심야산책으로 복잡한 심경을 달래기로 했다. 느릿한 걸음으로 촬영 팀 숙소를 지나 의사 숙소 건물 앞에 도착했다. 간간이 아직 불이 켜진 방이 보였지만 적막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걸음을 옮긴 그는 대낮처럼 환하게 불이 켜진 병원 쪽을 향했다.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거칠게 갈라진 땅을 저벅저벅 밟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에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으흑흑흑.”

민권은 고개를 돌렸다. 소리의 출처는 의사 숙소와 병원건물 사이에 있는 조그만 천막 안인 듯했다. 의사들의 휴게실로 알고 있는 그곳에서 난데없이 들려온 울음소리에, 민권의 미간이 접혀졌다. 좀 전과는 달리 소리를 죽인 발걸음으로 조심스럽게 천막으로 다가갔다. 거리가 좁혀지자 울음소리가 더욱 크게 들린다.

주먹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살짝 열린 입구 틈새로 민권은 눈을 갖다 댔다. 부지런히 내부를 훑던 그의 눈동자가 잠시 후 아연함을 안고 커져갔다. 선글라스를 벗은 세연의 옆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녀는 의자에 앉아 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태블릿 화면에선 한국에서 현재 방송 중인 막장드라마가 흘러가고 있었고, 그녀는 눈물까지 훔치며 화면에 집중했다.

“나쁜 놈. 나쁜 새끼. 저렇게 떠나갈 거면서 사랑한다는 말은 왜 한 거야. 아, 정말 나쁜 새끼. 엉엉엉. 으흑흑흑.”

뜨악해진 민권의 눈이 일그러졌다. 화면 속 남자주인공을 향해 비난을 퍼부으며 펑펑 우는 그녀의 모습이 의외라 어이없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게 후훗, 헛웃음이 터뜨린 민권은 순간적으로 실수했다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었다. 인기척을 느낀 세연이 이쪽으로 고개를 홱 돌린 것이다.

그녀의 얼굴과 마주한 짧은 순간, 민권은 잠시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

검은 눈동자와 파란 눈동자.

그녀는 색깔이 다른 두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