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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의사임이 분명해 보이는 여자가 링거주사를 꽂은 아이를 업은 채 이리저리 걸으며 달래고 있었던 것이다. 파란색의 반소매 유니폼이 무척 희고 투명한 피부와 대조되어 선명해 보였고, 한 갈래로 높이 묶어 올린 머리칼은 삐죽삐죽 잔머리가 튀어나와 있다. 특이하게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민권의 시선은 한동안 여자에게 붙박였다.

의사가 틀림없어 보이는데 왜 한낮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거지?

짧은 순간 의아하게 여긴 민권은 이내 이곳 캄보디아의 날씨를 떠올리며 그럴 수도 있겠다고 수긍했다. 선글라스를 벗으면 어떤 얼굴일까, 묘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유난히 흰 여자의 얼굴이 계속 눈에 띄었다. 업힌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싱긋 지어보이는 선글라스 아래 미소도, 더운 날의 열기 속에서 알알이 시야에 박혀왔다.

“저어 DBS방송국에서 오셨죠?”

그렇게 이곳에 온 목적도 잠시 잊힐 정도로 여자에게 시선을 두고 있던 민권은, 옆으로 다가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사십대 초반 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햇빛을 피하기 위해 이마를 손으로 가린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민권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반갑습니다. 의사 팀장 산부인과 전문의 마진경이에요. 국경없는 의사회 한국지부 소속이죠.”

“아, 그러시군요. 안 그래도 잠시 뵈러 왔습니다. 방금 도착했는데 석 달 동안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민권은 다소 환하게 웃으며 진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며 무심결에 다시 쳐다본 병원 입구에는 아까의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오히려 저희 쪽에서 부탁드려야죠. 촬영이 쉽지가 않을 텐데. 그나저나 짐은 다 푸셨어요?”

“네. 대충.”

“그래도 거기 숙소는 깔끔하고 정돈도 잘 돼 있어서 지내시는데 힘든 건 없을 거예요. 이따 저녁 식사 같이 하면서 저희 팀 의사들과 만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데 바쁘지 않으시면 의사숙소 건물로 건너오세요.”

“알겠습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촬영은 언제부터인가요? 내일부터인가요?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진료실만 취재하는지, 아니면 일거수일투족 전부다 인지. 지부에서는 그냥 협조만 하면 된다고 하셨거든요.”

진경의 질문이 쏟아졌다. 민권은 미소 띤 표정으로 대답했다.

“취재에 대한 내용이나 과정 공유는 나중에 따로 하게 되겠지만 지금 당장 물어보신 것 중에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건 ‘일거수일투족’입니다.”

“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진경의 표정에서 어쩐지 난감함이 스치는 듯했다. 민권이 특유의 감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혹시 곤란한 상황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게 아니라 다른 분들은 상관없는데 외과 담당 선생님은 촬영에서 빼 주십사 부탁 좀 드리려구요.”

“외과 담당 선생님이요?”

의외의 상황에 오히려 저가 더 난감해져서 되묻고 있는데, 진경이 시선을 병원 입구 쪽으로 던지더니 이곳저곳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네. 아…… 저기 계시네요. 저 분이요.”

진경의 손가락 끝에는 아까 본 여자가 서 있었다. 한동안 사라졌던 여자는 여전히 아이를 등에 업은 채로 입구 언저리를 서성대고 있었다. 민권의 눈썹이 비틀렸다. 저 여자를 촬영에서 배제시켜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이유도 모른 채 못마땅해졌다.

“이유를 여쭈어도 됩니까.”

민권이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물으니 진경이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그냥…… 좀 저 선생님의 개인적인 이유예요. 계약서에 뭐 초상권 그런 게 있지 않나요? 지부에 연락해보면 확인시켜 주실 텐데. 촬영을 거절할 수 있다구요.”

“그렇긴 합니다만, 홍보 차원에서도 모든 선생님들이 촬영에 임해주시면 좋을 텐데요.”

“저희도 애석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개인적인 이유가 있는데 그걸 모른 척하고 강제로 합류하자고 할 수도 없어서요.”

진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얼마쯤 난처한 상황을 무마했다. 세연에게 완전하게 손을 들어줄 수도,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고 촬영 팀에만 모든 걸 맞출 수도 없었던 진경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이 동료를 염려하는 도의적인 생각을 먼저 했던 것이다.

도중에 세연이 마음을 바꾸어 촬영에 합류하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동료의 안정과 평안이지, 촬영이 아니니까. 하지만 이 남자는 아닌가 보다. 못마땅한 마음을 노골적으로 얼굴에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알겠습니다. 하지만 단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언제든 문을 열어두죠.”

“예. 뭐…….”

끝을 흐린 진경의 대답은 그래봐야 소용없을 거라고 말하는 듯했지만, 여자에게 둔 민권의 눈빛은 사뭇 진지해졌다. 성공적인 촬영이 되기 위한 첫발걸음부터 삐걱거리고 있는 지금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그도 아니었다. 방법이 있을 것이다. 저 여자를, 기어코 카메라에 담아 낼 방법이.



“선생님. 아론 이제 잠이 들었어요.”

다해가 슬쩍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행여 아론이 깰까 염려하는 말투였다. 세연은 고개를 뒤쪽으로 약간 돌려 제 등에 이마를 깊게 묻은 아론의 정수리를 살폈다. 다해의 말대로 그제야 잠이 든 모양이다. 새벽에 독감 증세로 응급실로 실려 온 다섯 살의 아론은 항생제와 해열제로도 열이 쉽게 내리지 않아 아침나절까지 세연을 괴롭혔다.

프놈펜의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 독감이 유행이어서, 행여 이곳 난민캠프까지 전염이 되지나 않을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중이었다. 열이 높고 기침에 근육통까지 있어 어린 아론이 무척 힘들어 해 업어주기까지 했다. 다행히 잠이 든 걸 보니 증세가 한층 완화된 모양이다. 그래도 조금 더 업고 있기로 했다. 세연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오후에 바이러스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다해 씨. 독감이 확실하면 프놈펜 종합병원에 보내야 해.”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선생님.”

“응?”

세연은 제 팔을 툭툭 치는 다해를 쳐다봤다. 다해는 눈짓으로 마당 건너편을 가리켰다.

“한국에서 촬영 팀이 도착했대요. 조금 전에요. 마 쌤이랑 얘기 나누고 있는 저 사람이 피딘가 봐요. 와, 배우라고 해도 믿겠어요. 세상에. 너무 잘생겼다.”

다해가 평소답지 않게 들떠 있었다. 은선의 입에서나 나올 말들을 마구 쏟아내었다. 찬양해 마지않는 다해 때문에 세연도 덩달아 남자를 쳐다봤다. 다해의 말처럼 키며 외모며 어디에 서 있어도 한눈에 잡힐 것 같은 남자였다. 짧은 스포츠형으로 커트 된 머리는 지나치게 남성적이었고, 멀리서도 뚜렷하게 보이는 이목구비는 선명했다. 넓은 어깨는 반듯했고 반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의 근육은 적당하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흰색 반소매 티셔츠의 목 부분에 선글라스를 끼운 채, 허리에 손을 올리고 비스듬히 선 그는, 진경과 마주하고 있었다. 이따금 세연이 서 있는 병원 입구 쪽을 흘깃 보는 걸 보니 아마도 촬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등줄기가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녀의 선글라스 때문에 남자 쪽에선 시선이 마주쳤는지 알 리가 없겠지만, 세연의 입장에선 남자가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을 응시하는 듯했던 것이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신경 쓰이게.

분명히 자신의 촬영 거부에 대해서 진경이 운을 띄웠으리라. 그래서 저렇게 틈틈이 쳐다보는 거고. 남자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세연은 하는 수 없이 아론을 업은 채 병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해가 쪼르르 따라온다. 마침 로비를 지나던 동일이 세연에게 다가왔다.

“인 선생. 한국에서 촬영 팀 도착했다는 소식 들었어?”

“네. 선생님.”

“저녁에 우리 팀과 인사할 건가 봐. 6시까지 식당으로 모이래.”

촬영을 하지 않을 자신도 굳이 인사를 나누어야 할까. 세연은 짧게 갈등하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6시까지 식당으로 가야했지만 세연은 6시 10분이 지나도 식당으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엊그제 폐렴으로 입원했던 스통이라는 아이의 퇴원을 위해 여러 준비로 분주했던 것이다. 이 병원은 병원비의 대부분이 국경없는 의사회와 유니세프에서 지원되고 있어 환자 측에선 아주 저렴한 비용만 부담하면 되지만, 가끔 그마저도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었다.

스통이라는 아이의 부모도 마찬가지여서 더 이상 입원시킬 수 없다고 급하게 말해온 것이다. 다행히 스통의 증세가 호전되고 있어서 혈액검사와 바이탈 체크 후 퇴원을 시키기로 했다. 그렇게 모든 검사를 끝내고 상태가 안정적이라는 결론이 나서야 스통을 보냈고, 그때가 6시 30분이었다. 세연은 황급히 손을 씻은 후 병원 건물을 나섰다. 식당이 있는 쪽을 향해 부리나케 걷는 동안 톤레샵 호수 너머로 붉게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거의 뛰다시피 하여 식당에 도착한 세연이 문을 덜컥 열자 기다란 테이블에 각각 마주보며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머뭇거린 세연은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땀이 맺힌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엉거주춤 들어가 진경의 옆자리에 앉자, 이번엔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다른 구역의 봉사단들의 도움을 받았을 식단은 불고기와 된장찌개, 그리고 상추쌈까지 어우러진 한식으로 꾸며져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피고 들어오는 공복감에 내심 침을 삼키고 있는데 옆에 앉은 진경이 세연의 옆구리를 툭 쳤다.

“우린 이미 다 소개했어. 인 선생만 하면 돼.”

세연은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한국의 촬영팀을 스윽 둘러보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인세연입니다. 일반외과를 전공했고 이곳에선 내과나 소아과도 상관없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담담하게 인사말을 건넸지만 내심 곤혹스럽기도 했다. 하필이면 자신의 맞은편 자리에 아까 병원 입구에서 본 남자가 앉은 것이다. 집요하게 자신을 쳐다보던 그 남자는 지금도 얼마쯤 헤집는 듯한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분명히 의도적으로 남자의 옆에 앉았을 은선이 연신 남자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자, 그럼 소개도 끝났으니 식사를 마저 하죠.”

진경이 박수를 치며 식사를 계속 할 것을 종용했다. 식당 안은 다시금 식사 소리가 흘러갔다.

“왜 늦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