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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나 어린애 아니에요, 아저씨(2)


‘얼마나 대단한 남자기에.’

라고 다들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소유주가 그저 남자라는 것밖에는 알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선우는 입구에서 저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지배인을 지나쳐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선우의 등 뒤를 따라오던 남자, 강석이 곧이어 카드를 내밀고 선우의 뒤를 따라 클럽 안으로 들어섰다.
일류 호텔을 연상시킬 만한 룸이 줄지어 있는 복도를 걸어 고급 샹들리에가 걸려 있는 통로를 지나친 선우는 클럽D임을 상징하는 까만 나비 문양이 그려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선우는 제 책상 앞에 앉아 보고 있었던 서류들을 손으로 쓸었다.
“말한 건.”
“바로 다음 페이지에 있습니다.”
“클럽 나인이 빠졌잖아.”
“아, 그렇습니까?”
“그렇습니까 같은 소리 할래?”
“시정하겠습니다.”
선우는 자료들을 휙휙 훑어보며 영 못 미더운 눈을 했다. 그리고 사인이 필요한 서류들을 보며 책상 위에 놓인 펜을 가져와 뚜껑을 열었다.
일단은 월급사장의 이름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긴 한데, 사인을 해 나가는 남자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선우는 사인을 하다 말고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찾아 포켓을 뒤졌다.

[도은석]

제 동생 이름이 적힌 발신인에 그는 핸드폰을 무성의하게 귀에 갖다 대었다.
“왜.”
― 형, 오늘 집에 오는 날 아냐? 안 오는 거야?
“곧 가.”
― 알았어.
“윤아영은.”
― 아영인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고 나갔어.
“이게 허구한 날 외박질이네. 알았으니까 일단 끊어.”
선우는 귀에서 떼어 낸 핸드폰을 대충 포켓 안으로 찔러 넣고 마저 사인을 했다. 값비싼 만년필로 휘갈겨진 사인은 검은 잉크의 광택을 뽐내며 종이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D. 그것이 그의 사인이었다.

*

하늘은 여기저기 놓인 빵 봉지들을 치우며 동시에 논문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학창시절 알고 지내던 교수님의 부탁으로 아르바이트생이 오는 요일엔 제 모교 교수님의 조교 일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사장님. 저 왔어요.”
아르바이트생이 베이커리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논문 자료들을 책상 끝에 놓고 톡톡 쳐서 각을 맞추던 하늘이 고개를 들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옆에 놓아둔 백팩을 메며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섰다.
딱 붙는 스키니 청바지에 흰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간단하게 멘 깔끔한 백팩은 베이직한 패션이었지만 그녀의 맑은 인상을 돋보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럼 전 가 볼게요. 수고하세요!”
희고 가느다란 팔목을 유연하게 들어 머리를 쓸어 넘긴 하늘은 따끈한 빵이 담긴 종이봉투를 들고 곧장 베이커리를 나왔다. 그리고 근방에 있는 학교로 향했다.

도은석 교수

반듯하게 이름이 새겨진 교수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간 하늘은 머리에 잔뜩 까치집을 달고서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은석에게로 다가갔다.
“교수님. 저 왔어요.”
“어어, 연하늘. 일찍 왔구나.”
은석은 저에게로 다가온 하늘의 얼굴에, 아슬아슬하게 엉덩이를 걸치고 있던 의자를 바로 당기고 코끝에 간신히 걸려 있던 안경을 콧등 위로 추켜올렸다.
세미나 준비에 한창인 그는 뭔가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새어 나오는 한숨을 지켜보던 하늘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제가 정리한 자료들을 그에게로 내밀었다.
“고맙다.”
자료를 내미는 하늘을 향해 선한 모양으로 입술을 올린 은석은 엉망이 된 머리를 듬성듬성 쓸어 넘겨 대충 정리했다.
서른넷, 교수 직함을 달고 있는 이들 사이에선 다소 젊은 나이에 속했지만 그는 똑똑하고 실력 좋기로 유명한 교수였다. 더불어 그를 보러 가끔 학교로 찾아온다는, 흡사 연예인 같은 그의 한 살 많은 형은 벌써 이 학교에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인이었다.
다소 소문에 관심이 없는 하늘에게는 학생들 입에 오르내리는 도은석 교수의 신상정보와 그의 형에 관한 이야기들이 그저 먼 나라 이야기였지만, 당장 연구실로 들어오는 제 또래 다른 조교들만 봐도 그랬다.
“도은석 교수님, 이건석 교수님께서 오늘 오후에 같이 저녁 하재요.”
하고 낭창하게 웃는 하늘 또래의 조교의 목소리에 은석은 사람 좋은 목소리로 ‘어, 그래, 그래. 알았다고 전해 드려.’ 하고 웃었다.
“오늘은 너도 같이 가면 되겠다. 갈비 사 준다고 했으니까 얻어먹자.”
“제가 가도 괜찮은 자리예요?”
“이건석 교수님이잖아. 널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싹싹하…… 어?”
은석은 하늘을 향해 그렇게 말하다가 하늘이 간이 책상 위에 올려놓은 종이봉투를 눈으로 발견하고는 손뼉을 딱 쳤다.
“빵 가져왔구나.”
“네에. 교수님 좋아하시는 크림빵 담아 왔어요.”
“난 갈비보다 하늘이 빵이 더 좋아.”
“에이.”
“진짜야. 참, 우리 형도 네 빵 맛있다더라. 원래 밀가루 질색하는 사람인데.”
“정말요?”
“교수는 진실만을 알려 주는 사람이야. 객관적 눈으로. 몰라?”
다소 장난스럽게 말하는 남자의 말에 하늘이 좋은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어요, 하는 뜻이었다.
“녀석.”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은 남자는 종이봉투째로 가져와 빵 봉지를 뜯었다. 그리고 아직 식지 않은 빵을 오물오물 씹으며 다시 의자 바퀴를 굴려 모니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시 뭐가 잘 안 풀리는 건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쉰 은석은 때마침 요란하게 울려 대는 진동 소리에 책상 위 아무렇게나 놓아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발신인도 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여전히 그의 눈은 모니터로 향해 있었다.
“어, 형. 아. 응. 우리도 거기서 회식이나 하려고. 그래. 그럼 거기서 보자. 그때 줄게. 어.”
하늘은 핸드폰을 다시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듯 책상 위에 두는 은석을 보며 조용히 자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교수연구실 안에는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만이 이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복사가 끝난 종이들이 어느덧 복사기 앞에 수북이 쌓여 있었지만 하늘은 제 품만 한 가방을 끌어안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요 며칠 신 메뉴 개발로 신경을 바짝 써서 그런가? 오는 잠을 제어하지 못해 눈동자가 뻑뻑하게 아려 왔다.
하늘은 눈을 감은 채 복사가 끝이 나길 기다리고 있다가 결국 살짝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하늘에게로 가까이 다가온 은석은 복사가 끝이 나 빽빽하게 글자가 새겨진 종이들을 손에 쥐고 입술을 올려 웃었다.
제게 주어진 일이라면 밤샘을 해서라도 완수할 정도로 책임감이 넘치는 아이였다. 사실 뭐든지 좀 과하다 싶을 만큼 한 가지 일에 열중하는 성향이 있긴 했지만, 그 모습도 하늘의 장점이라 여겼다.
은석은 복사가 끝이 난 줄도 모르고 눈을 감고 있는 하늘에게로 다가와 주먹을 가볍게 쥐고 책상 위를 톡톡 두들겼다. 그제야 까만 눈동자가 은석을 올려다본다.
“이러면 잡아 놓고 있는 거 같아서 내가 미안하잖아.”
“아, 교수님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고기 먹여서 내가 기운 충전시켜 줄 테니까 가자.”
“네.”
또 싱긋.
참 요즘 애들치곤 가식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웃음이다. 주위 남자들이 많이들 좋아하겠는데. 확실히 때 묻지 않은 저 얼굴이 사람으로 하여금 좀 더 가까이 가고 싶게 만들긴 했다. 남자로서든, 친구로서든. 은석 자신에겐 그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조교지만.
차에 올라 고깃집으로 향하는 내내 하늘은 창밖에 시선을 두며 꼭 세상 구경 처음 하는 아이처럼 이것저것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호기심도 많은 편이었다.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꼭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은석에게 물어 왔고, 납득이 가지 않으면 홀로 도서관에 가서 몇 십 권이나 되는 책을 찾아서라도 해답을 알아내 은석에게 칭찬을 듣기도 했다.
또 뭐가 궁금한 건지 창밖에 시선을 두며 한참을 말이 없는 하늘을 보며 은석은 그녀 몰래 조용히 웃었다. 참, 재미있는 아이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는.
고깃집에 둘러앉은 은석과 하늘 그리고 이건석 교수는 다시 한 번 술잔을 높이 들었다. 잔을 짠 하고 부딪히며 동시에 술을 목구멍 안으로 털어 넣었다.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은석은 곁에 앉아 술을 마시는 하늘의 모습에 괜히 알 수 없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 어려 보이는 이 얼굴에게 술을 권해도 되는 것인지 진심으로 잠깐의 시간 동안 고민을 했다. 역시, 권하지 말았어야 했나.
“그나저나 하늘이 너는 학교 다닐 때 공부도 꽤 잘했잖아. 취업은 안 해?”
이건석 교수의 서글서글한 질문에 하늘이 배시시 웃으며 들고 있던 젓가락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교수님. 기억 안 나세요? 저 이래 봬도 사장이잖아요. 구름 베이커리.”
“아, 아! 맞다, 맞아. 그랬었지. 빵 엄청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
“한번 가게에 오시면 제가 맛있는 빵 구워 드릴게요.”
“이야. 영광인데?”
은석은 제 아빠뻘인 교수와의 대화에도 곧잘 유들유들 대답하는 하늘을 흐뭇하게 보고 있다 이내 진동이 오는 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잊고 있었는데 생각이 났다는 듯 아차차 하는 소리를 냈다.
“어, 형. 미안. 내가 깜빡하고 있었다. 어디야? 이 근방이야? 아, 거기 편의점. 어. 알았어. 갖다 줄게.”
은석은 전화를 끊고 곧장 곁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뒤적였다. 그리고 형네 집에 잠깐 들렀던 날 자신의 착오로 잘못 들고 나왔던 서류가 담긴 노란 봉투를 꺼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설 요량으로 손바닥으로 무릎을 짚으니 하늘이 맥주를 마시다 말고 어어, 했다.
“교수님. 이거 전해 드리려는 거예요?”
“금방 다녀올게.”
“계세요. 제가 전해 드리고 올게요.”
“아. 괜찮은데. 그럼 그럴래? 여기 큰길 따라 쭉 올라가다 보면 편의점 있어. 아, 양 갈래 길 나오면 오른쪽이다. 아마 이거 들고 있으면 그쪽에서 알아보고 너한테 올 거야. 내가 전화 넣어 놓을게.”
“네.”
하늘은 그길로 일어서 고깃집을 나와 큰길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편의점 앞에 다다랐을 때, 모두의 시선을 힐끔힐끔 받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큰 키에 완벽하게 만져진 머리, 한눈에 보아도 탄력 있는 남자의 상체를 감싸고 있는 버건디 셔츠, 구김 하나 가지 않고 길게 떨어진 검은 슬랙스까지, 고급스러운 느낌으로 휘감겨 있었다.
남녀노소 누구도 웬만큼 옷발이 받지 않고서야 소화가 불가하다는 버건디 셔츠를 완벽하게 소화해 낸 남자는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이 근처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었다. 심지어 빛을 번쩍이고 있는 촌스러운 간판들보다도 더 눈길이 갔다.
셔츠에 단추 하나 풀지 않고 완벽하게 목 끝, 소매 끝까지 단정하게 핏을 세운 남자는 제 손목에 채워진, 엄청나게 비싸 보이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팔짱을 꼬고 서 있었다. 주위를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힐끔힐끔 그를 향했다.
노란 봉투를 품에 안은 채 그가 있는 편의점 앞으로 다가간 하늘은 어느덧 선명한 시야 안으로 들어온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선우는 노란 봉투를 안은 채 저를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는 하늘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조교를 보낸다더니, 웬 애를 보냈어.
“줄 거야. 말 거야.”
“네?”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턱짓으로 가리키는 것을 눈으로 따라가자 곧 제 품에 안고 있는 노란 봉투에 닿았다.
“아…….”
그제야 제가 봉투를 전달해야 할 사람이 그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까만 눈을 들어 올리는 아이의 모양새에 선우는 혀를 찼다.
보아하니 술이라도 한 사발 잡순 것 같다. 뺨이 불그스름한 게 딱 봐도 눈가에 취기가 스며 있었다. 윤아영이고, 이 고딩이고 요새 젊은 것들은 단체로 까지는 게 유행인 건지 원.
선우는 봉투를 건네줄 생각도 않고 말없이 저를 올려다보고만 있는 하늘을 보며 긴 손을 뻗었다. 그리고 품에 안겨 있던 노란 봉투를 낚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