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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주세요


1화
프롤로그. 당신을 처음 만났던 그날 밤


하늘은 편의점 의자에 앉아 술에 반쯤 잠식당해 발갛게 달아오른 눈을 연신 가물거렸다. 그리고 작은 입술로 우유를 쪼로록 빨아 당겼다.
빨대를 타고 오르기 시작하는 하얀 액체가 하늘의 목구멍 안으로 꿀꺽하며 들어갔다.
여린 목울대가 우유를 삼켜 내느라 힘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는 그런 하늘을 보며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나참, 누가 보아도 앳돼 보이는 허여멀건 얼굴로 흰 우유를 마시고 있는 모양새를 보자니 영락없이 어린아이를 상대하고 있는 기분이라 선우는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불을 붙이지도 못하는 담배를 물고 미간을 찌푸린 선우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도 한 모금 드릴까요? 아, 한 빨대로 같이 쓰기 불편하시죠?”
“됐으니까, 이것만 마시고 곧장 집으로 들어가.”
“네에…….”
말꼬리를 늘어뜨린 하늘은 대답을 하면서도 빨대에 입술을 대고 아직 많이 남았는지 출렁거리는 우유를 마저 빨아 당겨 삼켰다.
선우는 우유를 마시면서도 술기운에 벌겋게 열꽃이 핀 뺨이 뜨거운지 연신 제 뺨을 만지작거리는 하늘을 보며 담배필터를 잘근잘근 씹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호프집이며 다소 불건전한 술집이 늘어선 이 근방에서, 연하늘보다 이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없어 보일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울리지 않는 건 교복만 입혀 놓으면 딱일 것 같은 그녀와, 이 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세상 좋은 꼴 안 좋은 꼴은 죄다 보고 사는 제가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아저씨. 전 괜찮으니까 담배 태우셔도 돼요.”
“어서 마시고 술 깨기나 해. 그리고 제발 가라, 좀.”
너와 절대 어울리지 않는 이런 곳에 있지 말고.
혹시 좋지 않은 물이라도 들까 괜히 술에 취해 어슬렁거리는 주위의 움직임들이 신경 쓰였다.
선우는 결국 태우지 못한 담배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며 찌푸린 제 미간을 쓸었다.
입안에선 어느새 밴 담배 맛이 혀끝으로 강하게 느껴졌다. 선우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복숭아처럼 맨들맨들한 뺨을 움직이며 우유를 마시고 있는 하늘을 바라봤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선우는 그녀와 조우했던 지난 토요일을 떠올리며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역시 이번에도 불은 붙이지 못했다.


당 신 을 주 세 요


하늘은 적당한 온도로 식은 빵을 봉지 안으로 넣으며 동시에 빵 개수를 세었다.
스물둘, 스물셋…….
봉지 안으로 차례차례 들어간 빵들을 끌어안고 영차, 바닥에 놓인 우유갑들을 대충 발로 밀어낸 하늘은 막 주방에서 나오는 덕환을 보며 싱긋 웃었다.
“기사님. 저 이거 배달하고 바로 퇴근할게요. 그럼 마무리 부탁드릴게요.”
“그래요. 조심히 들어가요.”
빵을 한가득 품에 안고 꼭 세상 물정이라고는 하나도 모를 것 같은 얼굴로 인사를 하는 하늘을 바라보던 덕환은 배달을 나가는 그 모습이 영 걸리는지 걱정이 한가득 섞인 목소리를 냈다.
“주인 아가씨 뜻이긴 하지만, 난 걱정돼요. 아무리 그래도 그런 곳에 배달이라니.”
“놓칠 수 없는 단골인걸요. 저는 그냥 빵만 배달하는 건데요, 뭐.”
“아무리 그래도 술집은 좀…….”
“괜찮아요. 저 마담언니랑 친하잖아요.”
덕환은 웃으며 빵집 문을 열고 나가려는 하늘을 보며 걱정 가득한 목소리를 삼켜 냈다.
확실히 그녀는 요즘 아이들과 다르다. 아, 아이라고 해선 안 되나. 하긴 스물넷이나 먹었으면 확실히 나쁜 것에 물들까 걱정을 할 만한 나이는 아니지.
그렇지만 어려 보이는 저 얼굴이,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모를 것처럼 순수한 눈을 하고 있는 저 얼굴이 괜히 사람으로 하여금 걱정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더구나 하늘의 삼촌 연배쯤 되는 덕환에겐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부릅뜨면 잔뜩 겁을 먹을 것처럼 보이는 그녀는 겉모습과 달리 상당히 친화적이고, 놀랄 만큼 사교적이라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게 만들었다. 덕환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 제빵 기사 면접을 보러 구름 베이커리에 왔을 때, 앳돼 보이는 하늘을 보고 저도 모르게 실수를 범했었다. 그녀를 향해 ‘사장님 어디 가셨나요?’라고 말했을 때만 해도 누가 알았나. 그녀가 이 아기자기한 구름 베이커리의 사장일 거라고는 꿈에서조차 상상 못 할 일이었다.
처음엔 알바생도 아니고, 사장님 따님인 줄 알았다. 알바생이라고 하기에도 어려 보여서.
그런 그를 향해 하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 특유의 하얀 얼굴로 웃으며, 자신이 사장이라고 인사를 건넸다. 이 하나뿐인 작은 베이커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남겨 주신 유일한 유산이라고 설명까지 친절히 곁들여 주었다.
초면에 실수를 범한 덕환에게도 사근사근 어찌나 말을 잘 붙이던지, 붙임성이 상당히 좋은 그녀는 곧 삼촌 연배인 덕환과 친밀해졌고, 가까운 노사관계가 되었다.
“그럼, 내일 봬요!”
힘차게 문을 열고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덕환은 흐뭇하게 웃었다.

하늘은 허연 손목을 타고 줄줄 내려오는 니트를 걷어 올리며 어둡고 습한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구는 이곳을 단란주점이라고 불렀고, 누구는 이곳을 룸살롱이라고도 불렀다. 명칭이 어찌 되었건 하늘에겐 저와 덕환이 맛있게 구워 낸 빵을 선물처럼 전달하는 손님 집에 불과했다.
서른 개에 가까운 빵을 일주일에 한 번씩 배달받는 통에 사실 놓칠 수 없는 고객이기도 했지만, 또 저를 딸처럼 예뻐해 주는 마담 덕에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빵 배달이란 걸 하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언니. 오늘 빵 여기 있어요.”
작은 몸집이 휘청하며 빵을 담은 상자가 탁자 위로 올려졌다. 어느새 빵 무게에 쓸려 벌겋게 부은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화장을 하며 다리를 꼬고 앉아 깔깔대던 여자들이 익숙하게 그녀를 향해 다가와 빵 봉지를 하나씩 들고 갔다. 하늘 씨네 빵 진짜 맛있어요. 이 앙금은 뭐예요? 라고 한마디씩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건 이번에 저희 기사님이 새로 만드신 아몬드 빵인데, 한번 드셔 보세요. 엄청 고소해요. 이건 완두로 만든 거고, 이건…….”
이어지는 설명에 아가씨들은 저마다 기호대로 빵을 골라 갔다.
“맛있게 먹을게요.”
“네.”
아직 식지 않아 뜨뜻한 빵을 입안 가득 베어 무는 걸 보며, 하늘은 빵값을 받고 로비로 나왔다. ‘하늘 씨네 빵 진짜 맛있어요’. 환청처럼 자꾸만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하늘은 복숭아 같은 부드러운 뺨을 움직여 보조개를 만들었다.
아직 손끝에 묻어 있는 꿀에 절인 달달한 아몬드 냄새가 코끝을 찔러 왔다. 괜히 손끝을 쪽 빨아 내고 싶은 마음을 죽이고 로비를 걷기 시작한 하늘은 시끄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천히 걸음을 멈춰 섰다.
룸 밖으로 나온 여자 하나와 매서운 눈을 한 남자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폐쇄적인 공간이니만큼 으레 있을 실랑이겠거니 싶어 다시 걸음을 옮기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다시금 무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팔짱을 끼며 하이톤의 목소리로 남자를 쏘아붙였다. 통굽 구두를 신어 걷기도 불편해 보이는 여자는 저를 무섭게 내려다보는 남자를 보며 당장이라도 주먹질을 할 듯 으르렁거렸다.
“네가 뭔데 간섭질이야.”
“말 예쁘게 안 하지.”
“그냥 가. 내 일에 간섭 마. 알겠어, 도선우?”
“네가 뭐 때문에 어리광 부리는지는 알겠는데 이쯤 해라. 피곤하다.”
“그러니까 간섭 말라고.”
“윤아영.”
“나 오늘 여기서 새벽 넘게까지 놀다 갈 거니까 더 이상 신경 쓰지 마.”
팔짱을 낀 여자는 다시 룸 안으로 들어가려다 남자에 의해 팔목이 붙들렸다. 홱 뒤돌아 눈을 가늘게 떠 그를 노려보는 여자는 ‘뭐?’ 하고 시건방진 목소리를 냈다.
“하여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까져 가지고 안 좋은 건 다 하려고 하지. 대학 갔다고 풀어 주니까 네가 다 큰 거 같지? 용돈을 끊든가 해야지 원.”
“그래, 넌 늙어서 좋겠다. 용돈 끊어. 누가 달래?”
“들쳐 엎고 나가기 전에 네 발로 가자. 어? 진짜 피곤하다.”
여자에게 선우라고 불린 남자는 잔뜩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술에 취한 남자가 여자의 곁을 스쳐 지나가자 본능처럼 그녀를 끌어당겨 위험요소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그런데 여자를 스쳐 지나온 술 취한 남자가 하늘의 어깨에 툭 부딪쳤다. 그 충격에 손에 들고 있던 하늘의 가방이 아래로 떨어졌을 때였다.
짜증 섞인 눈으로 일관하던 선우의 시선이 하늘에게로 닿았다. 선우는 말똥말똥 저를 쳐다보고 있는 하늘의 눈동자에 혀를 찼다.
대체 이놈의 룸살롱은 고객관리를 어찌하기에 고딩이 다 드나드냐. 세상 말세다, 말세. 아무리 동네 양아치들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지만 저렇게 앳되고 어린 청소년을 고객 취급한다는 건 저질장사가 아닌가.
선우는 혀를 차고선 어린아이처럼 관심을 바라고 있는 윤아영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가 하늘에게서 시선을 거둬 냈을 때, 룸살롱 안으로 들어오는 경찰들을 포착했다. 선우는 또 한 번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무슨 날이다, 날이야.
불시 점검이었다. 경찰들 중 룸살롱이다, 성 접대다 난잡한 짓거리를 즐기는 놈들이 태반이었지만 버젓이 나 공무원이요, 하는 옷을 입고 나타났다는 건 필시 좋은 의도로 온 것이 아님을 뜻하는 바였다. 그리고 선우의 시선이 자연스레 하늘에게로 향했다.
저 고딩 붙들려 갈 텐데…….
하지만 곧 오지랖 넓은 걱정을 거둔 선우는 하늘에게서 고개를 돌려 단번에 아영의 손목을 끌고 룸살롱을 나갔다.
습한 지하에 잠깐 있었다고 그새 피부가 진득해지는 게 영 기분이 좋지 못했다. 괜히 입안이 껄끄러워져 선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가만히 제 시야에서 나가 버린 남자를 보고 있던 하늘은 떨어진 가방을 다시 주워 들고 먼지를 탁탁 털어 냈다. 오늘은 집으로 가서 교수님께 받은 일거리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가방을 어깨에 올려놓았다.
주위가 시끄러운 게 귀가 멍멍해져 눈앞까지 다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아직 빵 냄새가 붙어 있는 손을 탈탈 털어 낸 하늘은 갑자기 제 앞으로 다가온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인영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고딩, 나와.”
아까 그 남자였다. 분명 가게를 나갔던 남자가 다시 하늘의 눈앞에 서 있었다.
“네?”
두 번 말하기도 귀찮은 듯 하늘을 향해 나오라고 말한 남자는 그녀가 제 뒤를 따라오는 것을 확인한 후, 재빨리 발을 놀려 계단을 올랐다. 제법 가게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남자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청소년 졸업장에 도장 찍히기도 전에 경찰서 가고 싶어?”
선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담배를 입술에 끼웠지만 불은 붙이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했다. 담배를 물고 있어 발음이 조금 뭉개졌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웬만하면 다른 데 가서 놀아. 너 같은 애가 올 만한 곳이 아니다.”
그때 저 멀리서 남자를 부르는 여자의 새된 음성이 들려왔다.
“야! 도선우. 안 와? 추워 뒤지면 네가 책임질 거야?!”
그녀의 목소리에 남자는 혀를 차며 하늘에게서 등을 돌렸다.
“하여튼, 저놈의 성질머리.”
하늘은 그렇게 저에게서 등을 돌려 가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을 주세요
― 당신을 처음 만났던 그날 밤



1. 나 어린애 아니에요, 아저씨(1)


뭐든 삼류가 있으면 일류가 있는 법이고, 아류가 있으면 주류가 있는 법이다. 싸구려가 있어야 고급은 빛이 나는 법이다.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보편적인 사실과도 같았지만, 선우는 더욱 그 법칙을 헌법처럼 믿는 사람이었다. 삼류는 오직 일류를 위해 존재한다. 그것이 그의 모토이자, 사업 철칙이었다. 급을 매기는 것은 대중이지, 소위 현대인들이 전문가라고 일컫는 지식인들의 혀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누군가는 그깟 유흥 사업에 무슨 급 운운하냐고 하지만, 사실 급이 가장 엄격하게 적용되는 곳이 유흥 바닥이다.
조금만 제 급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이 되면 유명인들이나 고위관리직에 앉아 있는 머리통들은 귀신같이 눈치채고 자리를 뜨는 게 이 바닥이고, 복잡다단하고 은밀한 소문과 비밀이 돈이 되는 시장이 이 바닥이기도 했다.
흔히 조폭들이 잡고 있는 클럽들이 즐비한 유흥업소들은 동네 양아치들, 끽해야 국회의원 나부랭이들의 은신처였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싸구려 유흥가에 위치한 업소들은 선우의 말에 따르면 ‘삼류’에 지나지 않았다.
돈 있는 놈들이나 ‘급’을 운운할 만큼 값비싼 비밀을 들고 오는 거물들은 흔히들 입방아에 올리는 ‘클럽D’ 계열로 몰려드는 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행 같은 진리였다.
클럽D 계열의 일대 클럽이나 바에는 감히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다. 출입이 엄격히 제한된 회원제 운영으로, 한 번 들어가려면 돈을 싸 들고 가야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었다. 그 급은 쉽게 말해 일류고, 주류고, 고급이라는 소리다.
그리고 클럽D 계열의 업소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어마어마하고 엄청난 업소들의 소유주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각 업소에 앉아 있는 월급사장들조차 업소 소유주 D의 하수인에 의해 지정될 뿐, 그 어느 누구도 소유주 D를 직접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