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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줘
2화
1. 네가 있었던 그 여름(2)


“한두 번 해 본 실력이 아니다.”
“석준식 존나 능숙해.”
“쟤 별명이 섹스준식이잖아. 줄여서 섹식이.”
다시 깔깔대는 아이들을 보며 석진이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유월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괜히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좁은 교실에서 눈을 굴려 봤자 도망갈 곳은 마땅치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쫓기고 쫓기다 막다른 골목에서 만난 것처럼 석진과 눈이 마주쳤다. 저도 모르게 뺨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어쩔 줄 몰라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는 그녀를 보던 석진이 웃는 것이 보였다.
하필이면 이럴 때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다니.
“한 사람 더 해 보려고 했는데 종이 쳤네. 그럼 다음 시간에 보자.”
“쌤. 성교육 만날 하면 안 돼요?”
“그냥 매일 해요. 아, 국영수는 무슨 국영수예요. 국영수 잘해봤자 지 여친 임신시켜 오면 존나 인생 게임 셋이지.”
책상에 앉은 머리통 중 하나가 흘려보낸 당돌한 발언에 반 아이들이 동시에 깔깔댔다. 영락없이 요즘 아이들의 말본새였다. 석진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나도 정식 수업으로 넣고 싶은데 학교 수업을 내 마음대로 넣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내가 그 정도 힘이 있었으면 성교육을 메인으로 시간표를 짰을 거야.”
“아 존나 아까워.”
“다음 시간 국어야. 문어대가리 또 봐야 해.”
‘얘들아, 잘 준비해라. 수면시간이다.’ 하고 외치는 목소리에 석진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젓고 책상 위에 놓아둔 바나나와 콘돔을 잡아 들었다. 그리고 교실을 나서려다 말고 아, 하고 잊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유월이는 잠깐 양호실 들렀다 가.”
석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제 이름에 유월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양호선생이 교실을 나선 후 그녀의 입가에 참지 못해 잔뜩 피어난 웃음꽃이 만개했다.
유월은 남자를 뒤쫓아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다 말고 제 발에 걸려 덜컹하고 안이 빈 철 소리를 내는 의자를 내려다봤다. 아직 주인이 오지 않아 비어 있는 제 옆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또 결석인 건가.
잠시간 빈 옆자리를 내려다봤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돌린 유월이 교실을 나서 양호실로 향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느라 한참이나 애를 썼다. 뺨을 괜히 두 손으로 부비고선 양호실 안으로 들어간 유월은 저를 보며 웃는 석진에게로 다가섰다.
“숨찬 건 좀 어때. 괜찮아?”
“네.”
석진은 유월을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유월은 남들보다 선천적으로 몸이 조금 약했다. 병원에선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했지만 약한 체질 탓에 운동장 조례시간에도 픽하면 쓰러지고, 체육시간에도 자주 휘청거렸다. 하루 걸러 한 번은 양호실 신세였다. 덕분에 양호실 출입이 교실 출입만큼이나 잦았다. 아이들 땀 냄새보다 소독약 냄새가 더 익숙한 학생이었다. 그런 저를 더 양호실에 붙들리게 하는 존재가 이곳에 있었다.
“감기 기운이 있네. 최대한 따뜻하게 입어. 유자차 많이 마시고. 이따 수업 끝나고 내려와. 선생님이 한 잔 타 줄게.”
“네.”
그리고 유월이 싱긋, 석진을 향해 웃었다. 그녀의 보기 힘든 웃음에, 석진은 한참을 그 모습을 보고 있다 이내 저도 입술을 올렸다.
하얗고 작은 아이, 또래 아이들보다 좀 더 커다란 눈으로 좀 더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 커다란 눈을 깜빡여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좀처럼 말이 없는 아이. 그렇지만 가끔 웃는 그 모습이 너무나 예쁜, 그런 아이.
그것이 석진이 보는 유월이었다. 석진은 다시 한 번 그녀의 웃음이 보고 싶어 생긋 웃어 주었다. 그의 웃음에 어쩔 줄 모르며 데굴데굴 굴리는 눈동자가 확연히 보였다. 그 모습에 다시 싱긋.
유월은 저를 향해 미소 짓는 다정한 입술에 서둘러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양호실을 나왔다. 가쁜 숨이 멈출 줄 모르고 질주 중이었다. 심장은 이미 마라톤 완주를 끝낸 사람처럼 팔딱이고 있었다.
임유월, 정신 차려. 고작 한 번 웃어 준 걸로 왜 이래. 그냥 친절한 것뿐이잖아. 아무리 사랑하는 선생님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그의 웃음 한 번에 이렇게 심장이 뛸 수가 있어. 진정해. 유월은 팔딱대고 있는 심장을 꾹 눌렀다.

***

“유월아. 다음 시간 체육시간. 빨리 옷 갈아입고 나가자.”
유월은 저를 부르는 제 친구의 목소리에 자다 말고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고개를 올려 들었다.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얼굴로 눈치를 보는 제 친구를 보며 벽시계에 걸린 시계를 돌아보았다. 아, 잠깐 눈 좀 붙이려 했는데 벌써 점심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놓아두었던 주스를 가져왔을 때였다. 유월은 곁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깜짝 놀란 눈으로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자고 있는 저를 한참 동안 보고 있었던 듯해 보였다. 아, 괜히 부끄러워진 손이 턱과 입 언저리를 더듬었다. 혹시 침을 흘리고 잔 건 아니겠지. 쓸데없는 걱정으로 당혹스러운 눈을 하고 있던 유월은 흘러나오는 남자의 웃음에 얼굴이 확하고 타올랐다.
“괜찮아. 예뻐.”
남자의 목소리에 유월은 눈가가 빨개졌다. 부끄러움이 얼굴을 덮쳐 왔다. 동시에 유월의 곁에 있던 여학생의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제 옆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는 전학 온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남자는 대부분의 시간을 죽은 듯 잤고, 흔히들 말하는 땡땡이를 쳤으며, 그 둘이 아니라면 등교를 하지 않거나, 셋 중 하나였다.
복학해서 저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많은 남자. 이준우, 남자는 싸움박질을 한 것인지 핏물이 밴 입술을 올려 웃었다. 그러면서도 나이답지 않게 날카롭고 섬세한 눈으로 저를 훑었다. 괜히 다리가 오므라들었다.
지나가던 반 아이들이 남자를 힐끔거리며 노골적으로 곁에서 피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은 눈을 떼지 못하고 이준우에게 시선을 두었다. 적나라한 관심의 시선이었다. 느끼지 못할 리 없건만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유월을 향해 턱을 괴었다. 그리고 핏물이 든 입술을 희미하게 끌어 올렸다.
선생님들께 제법 주목을 받고 있다 하더니, 학생들에게도 제외 대상이 아닌 듯해 보였다.

쟤 이 일대에서 싸움 잘하기로 유명하대. 그래서 일대 애들 다 꿀렸다던대. 학교 꿇은 것도 여자 임신시켜서래. 유월이 너 들었어?

유월이라고 학교를 떠도는 그 무거운 소문을 듣지 못할 리 없었다.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눈덩이는 우박처럼 단단해졌고 소문은 진실이 되었다. 전학을 오자마자 남자는 이 학교 최대의 유명인이 되었고, 주위에서 그를 지켜보는 아이들은 알아서 몸을 사렸다.
제대로 눈 한 번 맞춰 본 적 없는 이 남자는 이미 이 일대 유명 인사다. 그런 남자가 저를 보고 있다. 두 눈으로 집어삼킬 듯 쳐다보고 있다. 이미 눈으로 몇 번이고 삼켜져 뼈째 씹혔다.
유월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저도 모르게 발을 뒤로 물렸다. 의자가 지이익 하는 기분 나쁜 쇳소리를 내며 뒤로 끌렸다. 또래 아이들답지 않은 날카로운 남자의 눈이 그런 움직임을 빈틈없이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이기지 못해 유월은 제가 쥐고 있는 주스 갑을 꽉 힘주어 잡았다. 그 바람에 빨대를 타고 올라온 사과 주스가 그대로 허벅지며 다리를 적셨다.
“아앗!”
유월은 놀란 눈으로 다급히 치마 속에 고인 주스를 털어 냈다. 흠칫거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맑은 눈망울이 저에게 내밀어진 푸른색 손수건을 보았다. 한참을 남자가 내민 손수건을 집지 못하고 있었다. 건네지지 못한 손수건이 갈 길을 잃은 채 공중에서 축 늘어졌다.
작은 한숨을 내쉰 이준우가 가벼이 손을 뻗어 유월의 다리에 흥건하게 묻은 주스를 닦아 냈다. 유월은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하며 다리를 움찔거렸다.
크게 요동치는 작은 몸짓에 이준우는 주스를 닦던 움직임을 멈추고 유월을 바라봤다. 두 눈이 마주쳤다. 일렁임을 고요히 잠재운 남자의 강한 눈동자. 유월은 그러면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은 눈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유월의 눈동자 안으로 파장이 일고 있었지만 그녀는 금세 이성을 찾았다.
“이거 놔 줘.”
“예쁜아. 놀라지 마. 안 닦을 테니까.”
살짝 말려 올라가는 남자의 입매에 유월은 붙잡힌 다리를 빼냈다.
“뺨은 닦아도 괜찮지?”
준우가 손수건을 들어 유월의 얼굴로 뻗어 왔다. 갑작스러운 남자의 행동에 맹수를 만난 사슴처럼 놀란 눈을 했다. 뺨으로 와 닿는 손수건의 촉감에 파르르 눈꺼풀이 떨렸다. 뺨으로 튄 주스를 닦아 낸 이준우가 다시 생긋 웃는 것이 보였다.
유월은 까만 눈을 깜빡이며 남자의 웃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뒤늦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와 이준우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는 수십 개의 눈이 창가에 달라붙어 있었다. 체육복을 갈아입으러 가자고 유월을 졸랐던 여학생이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굳은 채 서 있었다.
유월은 저를 향하고 있는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서둘러 체육복을 손에 쥔 채 이준우를 등지고 교실을 나왔다. 등 뒤로 달라붙는 관심 어린 수십 개의 시선들이 따가웠다.
대개의 남녀공학 체육시간이 그렇듯, 아이들은 서로를 의식하며 몸을 사리고 있었다. 유월은 제 친구들과 함께 물이 든 주전자를 들고 운동장 한가운데에 선을 그으며 아웃라인을 만들었다. 체육선생이 다가와 호루라기를 불어 아이들을 집합시키자, 한껏 더위에 숨이 죽은 아이들이 그늘 안에서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왔다. 푹푹 찌는 날씨에 절로 움직임이 느려졌다.
“오늘은 짝피구를 할 건데 음, 짝은 짝궁끼리 하는 걸로 하자. 그리고 남자애들 살살 던져라. 목숨 걸고 하지 말고.”
체육선생의 경고 아닌 경고에 아이들이 피식거렸다. 그러면서 제 짝을 찾아가 퉁명스레 땀이 밴 손을 내밀었다.


야. 이하나, 너 잘해라? 너 때문에 저번처럼 제일 먼저 죽으면 더 팔릴 쪽도 없어.
너나 잘해, 장성택. 네가 날 지켜 주면 죽을 일도 없잖아.

제각기 짝을 찾아가는 아이들 틈에서 지루한 기색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유월은 더 찾아볼 생각도 않고 일찌감치 체육선생에게로 다가섰다.
“선생님. 저는 그럼 심판 하겠습니다.”
“아. 이준우 또 안 왔지? 이 자식 이거. 알았다. 유월이는 심판 해. 어? 이준우 저기 오네.”
체육선생의 말에 유월의 시선이 그가 턱짓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덩달아 여기저기 엉켜 있던 아이들의 시선도 그를 향해 몰려들었다.
대충 체육복을 걸쳐 입은 준우가 걸어오고 있었다. 또래 아이들보다 월등히 큰 키, 월등히 너른 등과 품. 대충 걸쳐 입었는데도 탄탄한 상체에 핏 된 회색 체육복.
또래 아이들이 이준우를 힐끔거렸다. 여자아이들이 눈을 떼지 못하고 시선을 두는 것이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가 무서워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주위를 서성였다. 평범한 본인들과는 다른 남자에 대한 호감과 그러면서도 엮이기 싫은 두려움이 섞인 관심이었다. 선뜻 다가설 수 없는 두려움에 남자아이들이 슬금슬금 그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유월은 저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는 준우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이준우의 반경 안에 있는 것은 유월뿐이었다.
“선생님, 그럼 제 짝 데려가겠습니다.”
설핏 잡았는데도 남자의 힘에 끌리다시피 들어오는 유월의 손목은 유난히 가녀렸다. 힘 한 번에 우그러질 듯한 손목을 붙잡은 준우는 제 주위를 피하는 아이들을 보고도 개의치 않고 그어진 선 안으로 어슬렁어슬렁 들어갔다.
경기를 시작한다는 호각소리가 들렸고, 공이 던져졌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유월은 그가 대체 왜 갑자기 나타난 것인지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손이 잡히며 이끌렸다. 어정쩡히 그의 허리춤을 붙잡은 유월을 향해 준우가 고개를 돌렸다.
“허리 꽉 안아. 떨어지면 위험해.”
그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날아오는 공을 보며 유월이 놀라 준우의 등으로 고개를 파묻듯 숙였다. 가볍게 공을 낚아챈 준우가 유월에게는 커다래 보이기만 하는 공을 성의 없이 붙잡고는 휙휙 던졌다. 어이없게도 공은 몇 번의 방황도 하지 않고 곧장 아이들을 맞춰 나갔다. 그리고 다시 준우가 날아오는 공을 힘들이지 않고 잡았을 때였다.
“네가 던져 볼래?”
“어?”
준우는 입술을 말아 올려 웃으며 공을 유월에게로 건넸다. 머뭇거리며 공을 잡은 유월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준우를 올려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준우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안으며 공을 쥐어 주었다. 그리고 공을 붙잡은 유월의 손등에 제 손을 겹쳐 잡았다. 준우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상대팀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러면서 남자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가락을 더욱 꽉 붙잡았다. 당혹한 유월이 손을 빼내며 저도 모르게 공을 휙 던졌다.
공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볼품없이 운동장 한가운데를 헤맸지만, 준우는 상관 않고 웃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연신 웃고 있었다. 남자의 웃음에 아이들은 굴러가는 공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임은 지루했다. 당연했다. 이준우가 게임을 독점하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우승자라고 할 것도 없이 준우가 마지막 아이를 탈락시키고 손을 털었다. 그럼에도 불평하는 사람 없이 자연스레 게임은 끝이 났다.
마치 처음부터 이 승부의 승자가 정해진 것처럼 아이들은 몸을 사리다 주춤주춤 수돗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이들의 관심은 저희들과는 무언가가 달라 보이는 준우에게로 가 있었다. 준우와 한 팀이 되었던 유월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아이들이 이내 수도꼭지를 돌려 흘러내리는 물을 맞으며 깔깔대기 시작했다.